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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범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7월
평점 :

최근에 쓴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세요......>라는 글에도 썼지만, 오랫동안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최근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가공범>을 읽고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소설을 읽은 건 크레마클럽 인기 순위 1위인 걸 보고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키메라의 땅>, <먼저 온 미래> 등 요즘 인기 있는 책들을 제치고 오랫동안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읽어보니 과연 그럴 만하다. 일단 도입부부터 흥미진진하다.
일본 도쿄의 고급 주택가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불이 난 집은 전소되고 그 집에서 시체 두 구가 나온다. 시체의 주인은 그 집에 살던 부부인데, 남편은 현역 정치인 도도 야스유키이고 아내는 은퇴한 배우인 도도 에리코이다. 경찰은 부부가 화재로 인해 질식사한 것으로 예상했지만, 검시 결과 부부의 몸에서 타살의 흔적이 발견된다. 부부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방화만 해도 충분한데 왜 범인은 살인을 한 후에 방화를 하는 수고를 들인 걸까. 애초에 살인범과 방화범이 한 사람이기는 한 걸까. 사건을 맡은 형사 고다이 쓰토무는 새로운 파트너인 야마오와 함께 피해자인 부부의 주변인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에서 좋았던 점 하나는 고다이 형사의 캐릭터이다. 이제까지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유카와 마나부 교수 같은 이른바 천재 타입의 인간이 보통의 지능을 가진 형사보다 우월한 능력을 뽐내며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에 반해 고다이 형사는 천재의 능력에 기대지 않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점이 좋았다. (고다이 형사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서 고다이 형사가 처음 나온 <백조와 박쥐>도 뒤늦게 읽었는데 이 소설도 좋았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했다. 처음에 고다이 형사는 피해자 부부의 지인 중에 범인이 있을 것으로 보고 피해자 부부의 주변인들을 탐문한다. 그러나 남편이 현역 정치인이고 아내가 오래 전에 은퇴한 배우인 만큼 두 사람 모두 주변 정리를 잘 하고 살아서 원한 관계로 짐작되는 사람이 전혀 안 보인다. 그러다 고다이 형사는 수사 중에 느낀 사소한 불편함, 꺼림칙함 등을 단서로 부부의 과거를 캐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수사가 급물살을 탄다.
소설의 결말은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사건의 진상을 알았을 때 내 머릿속에는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남성 작가의 한계가 드러나는 대목이 몇 군데 있었던 점은 아쉽지만(이 또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밝힐 수 없다), 이 소설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는 점에서 수작(秀作)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