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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가공범>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눈에 들어온 소설이 <숙명>이다. 크레마클럽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검색했을 때 <가공범> 다음으로 나오는 소설이라서 골랐는데 무려 1990년 작이라고. 1990년에 나온 소설이 그 후에 나온 소설들보다 인기가 있다니. 대체 얼마나 재미있기에 그럴까. 읽어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데렐라 결혼,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등 90년대에 유행한 드라마에서 본 듯한 설정이 이어져 요즘 독자들의 눈높이에는 안 맞을 수도 있지만, 결말을 보기 전까지 책장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은 부정하기 어렵다.
소설은 유사쿠라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유사쿠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외관이 인상적이었던 집 근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나에라는 여성과 가깝게 지냈다. 어느 날 사나에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유사쿠는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내내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현재. 대기업 UR전산의 사장 우류 나오아키가 지병으로 사망한다. 나오아키의 장남 아키히코의 아내인 미사코는 아버지의 후계 자리를 거부하고 의사가 된 남편의 선택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지만, 결혼 전에도 왠지 모르게 멀게 느껴졌던 남편이 결혼 후에도 여전히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것에 불만이 많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키히코를 대신해 UR전산의 후계자로 낙점 되어 있던 스가이 마사키요가 살해당한다. 검시 결과 살해 도구는 우류 가에 보관되어 있던 석궁으로 밝혀진다. 경찰은 우류 가의 일원 중 한 사람이 범인이거나 범인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탐문을 시작한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경찰이 된 유사쿠는 우류 가의 사람들을 탐문하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한 명은 학창 시절 내내 유사쿠와 악연이었던 아키히코이고, 다른 한 명은 유사쿠의 첫사랑 미사코다. 유사쿠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니 운명이 참 얄궂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의 얄궂은 운명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야기 자체는 앞에도 썼듯이 90년대에 유행한 드라마에서 본 듯한 클리셰 범벅인데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애초에 재밌으니까 클리셰가 된 거니까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점은 뇌의학이라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의학 분야를 이때 벌써 소설에 등장시킨 점과, '전뇌(電腦)'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 또는 기업이 개인의 신체와 정신을 사유화, 자본화하는 문제를 지적한 점이다. 이 소설에서는 '전뇌'를 컴퓨터와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지만 내 생각에는 인공지능, AI와 더욱 비슷한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 선생은 요즘의 AI 발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