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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ㅣ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한동안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삼매경에 빠져 있다가 최근에는 <크라임씬 제로>에 푹 빠져 있었다. 원래부터 챙겨봤던 프로그램은 아니고 유튜브 알고리즘에 자꾸 떠서 조각 영상을 몇 개 봤을 뿐인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넷플릭스를 결제해 공개된 <크라임씬 제로> 에피소드를 보고 또 보고, 지난 시즌도 보려고 티빙을 결제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크라임씬> 삼매경 상태에서 빠져 나오려고 다시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는, 뭐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
<악의>는 가가 형사 시리즈 전작 읽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이제는 노련한 형사 그 자체인 가가 형사가 원래는 교사였고 '어떤 사건'을 계기로 교사를 그만두고 형사로 전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 '어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는 <악의>를 꼭 읽어보고 싶었다. 막상 읽어보니 궁금했던 가가 형사의 교사 시절 이야기는 생각보다 분량이 적었는데, 메인 이야기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가가 형사 시리즈의 전작인 <졸업 : 설월화 살인 게임>이나 <잠자는 숲>에서는 작가가 아직 인간의 선의를 믿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악의>에서는 그런 선의를 이용하는 악인이 있다는 걸 보여줘서 더욱 서늘하고 섬뜩했다.
이야기는 베스트셀러 소설가 히다카 구니히코가 자신의 자택 작업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최초 발견자인 히다카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노노구치 오사무는 공교롭게도 사건을 맡은 가가 형사가 아는 인물이다. 가가 교이치로가 형사가 되기 전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을 때 노노구치가 같은 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던 것이다. 노노구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가가 형사는 노노구치가 사건 당일의 체험을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읽고 싶다는 의사를 전한다. 노노구치는 절친을 살해한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다며 흔쾌히 기록을 넘기는데...
이 소설은 상당히 이른 단계에서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가 밝혀진다. 진범이 밝혀졌으니 당연히 경찰은 수사를 접으려고 하는데 뭔가 개운하지 않다고 느낀 가가 형사는 독단으로 수사를 재개한다. 그는 노노구치가 넘긴 수기와 노노구치의 자택에 남아 있는 물건들, 히다카가 이제까지 발표한 소설 및 미완성 원고, 두 사람의 과거를 아는 지인들의 증언 등을 근거로 두 사람의 진짜 관계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 결과 자신이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사건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러한 선입견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범인의 '진짜 목적'이었다는 사실이 이 소설의 대단한 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가 상당히 이른 단계에서 밝혀지고 남은 분량은 범인의 진짜 동기를 찾는 데 쓰인다는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근작 중 하나인 <백조와 박쥐>의 전개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인기 작가의 창작물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이 연상되기도 했다. 학교 폭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악연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어져 살인 사건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는 최근에 읽은 찬호께이의 소설 <고독한 용의자>가 떠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