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 (겨울 에디션)
조유미 지음, 화가율 그림 / 허밍버드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남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남자들 대부분이 자신을 보통 이상의 외모와 재력을 갖췄다고 평가하는 반면, 내가 아는 여자들 대부분이 자신을 보통 이하의 외모와 재력을 갖췄다고 평가하는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남녀 모두 겉으로만 그렇게 말할 뿐 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여자는 왜 자신을 과소평가할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할까. 예쁜 모습을 예쁘다고 말하지 못할까. 열심히 살면서 열심히 산다고 칭찬하지 못할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조유미 작가의 에세이집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이다. 


조유미 작가는 2014년 페이스북에 '사연을 읽어주는 여자'라는 채널을 개설해 아름답고 감성적인 글을 남기고 있다. 조유미 작가가 마음을 사로잡은 구독자 수는 무려 120만 명. 2016년 첫 책 <사연을 읽어주는 여자>를 출간했고, 올해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를 출간하며 인기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저자는 SNS 때문에 상처받았던 경험으로 운을 뗀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데다가 외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던 언젠가의 날. 저자는 일상적인 글을 올렸을 때 댓글만 수십여 개가 달리는 지인들과 달리 자신의 글에는 고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댓글이 달려 속상했다. 자신의 좁은 인간관계와 낮은 사회성이 SNS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인간관계가 넓어지고 사회 활동이 늘어나면서 SNS에 글을 올렸을 때 달리는 댓글 수도 늘어나고 반응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지치고 피곤했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친구들과 놀다가 포즈를 취하는 것도,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려 잘 차려 입고 화장을 하는 것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건 내가 아니니까. 진짜 내가 아니니까. 


그토록 부러워하던 삶인데, 왜 즐겁지 않을까. 부럽다고 생각했던 삶을 좇았는데, 왜 내 마음은 행복하지 않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마음 때문에 억지로 꾸며 낸 모습.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니, 자연스러울 리가 없었다. (16쪽) 


저자의 솔직한 고백은 사랑에 관한 글에서도 이어진다. 3년을 사귄 사람과 헤어졌다. 그 사람은 나에게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내가 하면 안 되는 거라면 당신도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고치지 않았다.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인데 일주일에 두세 번은 기본으로 싸웠다. 결국 헤어졌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3년을 참았으니 더 참을 수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말한다. 3년을 참았으니 더 참을 수 없었다고. 다른 게 다 싫어도 이것 하나 때문에 좋아지는 게 사랑의 시작이라면, 다른 게 다 좋아도 이것 하나 때문에 싫어지는 게 사랑의 끝이다. 


내가 너를 잃은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잃은 것이다. 내가 감당해야 했던 건 그와 함께한 과거였는데, 그가 감당해야 하는 건 나와 함께하지 못한 미래라는 것. 지켜야 할 것을 지켰다면 내가 그에게 더 큰 행복을 안겨주었을 텐데, 그 사람은 행복한 미래를 안겨줄 나를 놓친 것이다. (115쪽) 


20대를 통과하며 깨달은 것들도 고백한다. 저자는 대학 시절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채워 넣으려고 다양한 분야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디자인, 프로그래밍, 마케팅, 스피치 등 여러 분야를 연마했고 어느 분야든 평균은 했지만 뛰어나지는 않았기에 공모전에서 상을 받지도 못했고 취업할 때 서류에 쓸 수도 없었다. 


당시에는 그 시간들이 다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돈과 시간과 노력을 날린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때 배웠던 지식들을 쓸 일이 생겼다. 배울 당시에는 상이나 취업이라는 결과물로 연결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다른 결과물로 나타났고 저자의 현재를 만들었다. 그러니 뭐라도 열심히 부지런히 해두라는 저자의 말에 나 또한 용기를 얻었다. 


살면서 내가 놓친 건 순간순간의 행복이었다. 잘되든 잘 안되든 매 순간을 즐겨야 했는데 부정의 늪에서 헤매느라 그러지 못했다... 부정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고 안 좋은 것도 아니고, 그저 아까웠다. 유한한 인생을 무한한 것처럼 살아왔던 장면들이 참 아까웠다. (228쪽) 


저자의 솔직한 고백이 담긴 글을 읽고 있노라니 저자의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처럼 볼거리, 읽을거리가 넘치는 시대에 저자의 글을 읽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다. SNS 상에서는 모두가 멋지고 잘나 보이지만, 실은 다들 나처럼 불안해하고 힘들어한다는 것. 사는 게 팍팍하고 사람 만나는 게 버거워서 고민하고 때로는 싸우고 화내고 울기도 한다는 것.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로가 되고 자기 자신이 덜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 이 책을 읽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독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0-03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블리아 Biblia 2017.9
(주)위즈덤샐러(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위즈덤샐러(잡지)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다 보면 '책을 둘러싼 이야기'에도 자연히 관심이 간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도 있듯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책을 만들고 파는지 알면 지금보다 책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나처럼 책만큼이나 책을 둘러싼 이야기에도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잡지를 만났다. 책과 도서관, 그리고 이와 관련된 문화콘텐츠를 소개하는 월간지 <비블리아 BIBLIA>다. 이번 호의 테마는 '독서의 기술'. 여기서 말하는 독서의 기술은 책을 그저 잘 읽는 기술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독자와 저자가 만나는 결합의 기술이다. 독자와 독자, 독자와 저자가 만나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동네서점, 독립출판서점, 서점협동조합, 출판사 등이 벌이는 노력을 이번 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처음 내 눈길을 끈 기사는 전북 완주군 삼례문화예술촌에서 책공방북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김진섭 님의 인터뷰다. 김진섭 님은 오랫동안 직장에서 잡지를 만들다가 유럽 여행을 계기로 '제책(製冊)'의 매력에 빠져 현재는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나만의 책을 만드는 책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평범한 일기도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으로 만들 수 있는 제책의 세계. 언젠가 나도 한 번 경험해보고 싶다. 


전국 최초의 서점협동조합, 부산서점협동조합에 관한 기사가 뒤를 잇는다. 부산서점협동조합의 설립 목적은 첫째도, 둘째도 '동네서점 살리기'였는데, 이제는 한해 매출 목표가 30억 원일 정도로 수익성이 좋아지고 규모도 커졌다. 동네서점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소식은 언제 들어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반갑다. 이 밖에 2010년 경영난으로 폐업한 후 이듬해 재개업한 문우당서점, 김해시 첫 독립출판서점 페브레로, 부산의 첫 독립출판서점 샵 메이커즈 등 부산 지역 서점에 관한 기사도 실렸다. 부산에 가면 전부 들러서 책 한 권씩(한 권만?) 사 오고 싶다.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과 청주시립도서관에 관한 기사도 실렸다.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은 11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도서관이다. 1901년 당시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조직한 홍도회라는 단체의 도서실로 시작해 일제 강점기 내내 일제의 도서관으로 쓰이다가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도서관이 되었다. 청주시립도서관은 '책 읽는 청주' 운동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매년 9월을 '독서의 달'로 지정해 어린이극, 북토크, 포이트리 콘서트 등 여러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참가자들의 반응도 좋다. 내가 사는 지역의 도서관에서는 어떤 행사를 벌이는지 알아봐야겠다. 


세계 최고의 친환경 도시로 알려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 위치한 서점 '춤 베츠슈타인'에 관한 기사도 실렸다. 유명한 베스트셀러나 실용 도서는 취급하지 않고, 오로지 주인과 독자의 취향을 반영해 깐깐하게 고른 책만 구비하고 있다니 프라이부르크를 대표하는 서점답다. 


민음사에서 만들어 동네서점에서만 판매하는 책, 이른바 '동네서점 에디션'에 관한 기사도 실렸다. 첫 대상 도서로 <무진기행>과 <인간실격>이 선정되었는데, 초판으로 2천 권 찍고 출고 후 바로 완판될 만큼 반응이 좋다고 한다. 쏜살문고의 옷을 입은 <무진기행>과 <인간실격>은 어떤 느낌일까. 동네서점에 들르면 눈여겨봐야겠다. 


지난 5월 31일 개장한 스타필드 코엑스몰의 새로운 명물 별마당도서관에 관한 기사도 실렸다. 강남 노른자 땅에 대형 도서관이 생긴 것도 놀라운데, 진열 도서 5만여 권 중 4만 권 이상이 기부 도서라니 더욱 놀랍다. 별마당도서관에 들어가 본 적은 없고 지나가면서 본 적만 있는데, 조만간 작심하고 가서 찬찬히 둘러보고 와야겠다. 


아동 도서, 청소년 도서 서평도 실렸다. 아침이면 출근하는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 울부짖는 아이를 위한 책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왕따와 청소년 자살 문제를 다룬 일본 소설 <미안해, 스이카>는 어른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워킹맘 문제, 학교 폭력 문제는 이제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밖에도 비블리아 9월 호에는 출판계 이슈, 신간 소식, 독자 서평, 문화계 뉴스 등이 다채롭게 실려 있다. 잡지 자체가 두툼하기도 한 데다가 기사 수도 많고 길이도 길어서 틈날 때마다 찬찬히 읽다 보면 한 달이 훌쩍 갈 것 같다. 여기 소개된 책만 골라 읽어도 "이제 뭐 읽지?" 같은 고민은 하지 않을 듯. 책을 둘러싼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책 중독자로서 좋은 길잡이를 만나게 되어 뿌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 그으며 책을 읽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책이 더럽혀지는 게 싫어서, 평소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노트에 따로 적는데, 이 책도 처음엔 그렇게 읽다가 도중에 관두고 바로 밑줄을 그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죄다 받아 적다가는 펜과 노트가(내 손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밑줄 그은 문장들은 앞으로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며 씹어먹고 삼켜먹으리라.


이 책을 쓴 리베카 솔닛은 1980년대부터 환경, 반핵, 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이자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다. 한국에선 '맨스플레인'이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킨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로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한국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과 페미니즘에 대한 높은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 저자가 직접 한국을 방문해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후속편 격이다. 사회 전반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침묵을 비롯해 신세대 페미니스트, 남성 페미니스트, 강간 문화, 젠더 이분법, 여성 혐오 범죄, 페미니즘과 소셜미디어의 관계, 문화예술 분야의 남성 중심주의 등 세계 전역에서 불거지는 페미니즘 이슈에 관한 저자의 견해와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나를 인터뷰하던 영국 남자는 내 정신의 산물을 논하는 대신 내 육체의 산물을, 혹은 그 결핍을 논하자고 고집부렸다. 그는 무대에서 내게 아이를 갖지 않은 이유를 캐물었다. 내가 어떤 답을 내놓아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입장은 내가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하고 그러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내가 실제로 낳은 책들을 논하는 대신 내가 아이를 낳지 않은 이유를 논해야만 한다는 것인 듯했다. 


내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내 책을 낸 출판사의 홍보 담당자는 - 가냘픈 이십 대 여성으로 분홍 발레 슈즈를 신고 예쁜 약혼반지를 낀 사람이었는데 - 열받아서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다. "저 사람은 남자한테는 절대로 그런 걸 안 물을걸요." 옳은 말이었다. (나는 요즘 저 말을 질문으로 바꾸어 질문자들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사용하곤 한다. "남자한테도 그런 걸 물으시나요?") (15~16쪽)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침묵'이다. "남편은 아내를 때려서 침묵시키고, 강간을 저지르는 데이트 상대나 지인은 피해자의 "싫다"는 말이 자기 몸에 대한 권한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뜻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의 강간 문화는 여자의 증언에는 가치도 신뢰성도 없다고 선언하며,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마저 침묵시키려고 하며, 살인자들은 여자를 영원히 침묵시킨다." 


극단적인 예만 들었다고? 이건 어떤가. "어떤 여자들은 온라인에서 끈덕진 괴롭힘을 겪다가 입을 닫아버리고, 대화 중에 상대가 끼어들거나 말을 가로채는 일을 겪으며, 얕보이거나 깔보이거나 무시당한다." 여성은 침묵을 강요당하는 동시에 침묵하지 않을 것을 강요당한다. 이를테면 진심이 아니어도 상대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굴 것.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고 센스 있게 처신할 것. 특히 연상의 남성이 관심이나 아양을 요구할 때 기꺼이 응할 것. "어떤 남자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그러듯이 낯선 사람이 우리의 관심과 아양을 요구하며 그것을 내놓지 않으면 혼내주겠다는 태도로 다가올 때 우리가 그의 바람을 충족시키지 않을 권리도 그런 권리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발견은 집 밖에서는 사실상 내게 삶,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가 없다는 것. 세상에는 그저 내 젠더 때문에 나를 미워하고 해치고 싶어하는 낯선 이가 많다는 것. 섹스가 너무 쉽게 폭력이 된다는 것. 이것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여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123쪽, <걷기의 인문학>에서 인용) 


어떤 남자들은 말한다. '여자만' 그런 일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시끄럽게 구느냐고. 남자도 사는 게 힘든 건 마찬가지인데 왜 그렇게 민감하게 구느냐고. 저자가 벨 훅스를 인용한 대목을 보자. "가부장제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폭력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 그 대신 가부장제는 모든 남자에게 정신적 자기절단을 행할 것을, 자신의 감정적 부분을 도려낼 것을 요구한다. 만일 자신을 감정적으로 불구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남자가 있다면, 가부장제의 다른 남자들이 그의 자존감을 공격하는 힘의 의식을 틀림없이 거행해준다." 


결국 여성의 문제는 남성의 문제다.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남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 가부장제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 많은 특권을 안겨주는 동시에 많은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남성으로 하여금 생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을 절단 또는 배제하게 한다. 남성이 이른바 '여성의 전유물' - 이를테면 분홍색, 치마, 눈물, 아름다움, 감정 표현 - 을 '대상화' 이외의 방식으로는 즐길 수 없게 한다. 


남성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억누르고, 태어나 세 번 울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 한 번 말 못하는 멍청이로 사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만든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탓이다. "감정이 죽여야만 하는 것이라면, 살해의 표적은 여성이 되기 쉽다." 자신의 감정을 죽이면서 사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자를 볼 때 살인 충동을 느끼기 쉽고 폭력적인 발언 또는 행위로 분출할 가능성이 높다. 


여성의 문제는 또한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성애 혐오는 여성 혐오와 함께 가부장제가 낳은 폐단이다. "여자애 같다거나 계집애 같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남자아이나 성인 남자에게 모욕으로 쓰였고, 게이 같다거나 호모 같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문제에 눈뜨면 성 소수자 문제에 눈 뜨게 되고, 인종 문제, 이민자 문제, 아동 문제, 노인 문제, 장애인 문제 등에 관심 가지게 된다. 결국 이렇게 각자가 스스로 소수자임을 인식하고 소수자끼리 연대하다 보면 지금의 다수자가 소수자가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인식하는 때가 올 것이다. 


얼마 전 나는 무지권(privelobiliviousness)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보았다(특권을 뜻하는 'privilege'와 무지 혹은 무심함을 뜻하는 'obliviousness'를 합한 것이다-옮긴이). 특권 있는 사람, 재현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의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 실제로 자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이 나름대로 일종의 상실이다. (241~2쪽)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라는 글에서 저자는 <에스콰이어>지에 실린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이라는 글을 소개한다.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중에 여성 작가의 책은 딱 한 권(플래너리 오코너의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나마도 "그녀는 좋은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 일분마다 한 번씩 평생 그녀를 총으로 쏴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이라는 대목을 인용해 저자를 실망시켰다. 나머지 79권의 책도 다르지 않다. 존 스타인벡, 잭 런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잭 케루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들의 책을 읽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이들의 책'만' 읽는 건 문제가 될 만하다. 


저자는 남성에게 나 아닌 존재가 되어보는 경험을 선사하고, 보다 넓은 세상을 체험할 수 있는 책의 목록을 소개한다. 도리스 레싱, 루이즈 어드리크, 엘레나 페란떼, 필립 러빈, 라이너 마리아 릴케, 버지니아 울프, 스즈끼 슌류우, 에이드리언 리치, 빠블로 네루다, 마르꼬스 부사령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제임스 볼드윈 등. 사람들이 이런 작가들의 책을 읽는다면, 여자들이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 사람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고 그나마도 여자 작가의 책은 여자만 읽으니 답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 혹은 여행처럼 - 인생이 여행에게 배워야 할 것들
정혜윤 지음 / 난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오래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좋아서 여러 권 구입해 한 권은 내가 소장하고 나머지는 지인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제목만 보면 흔하디흔한 여행 에세이집 같고 실제로 여행 에세이가 실려 있기는 한데, 저자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저자가 인터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다. 저자의 후속작 <사생활의 천재들>, <마술 라디오> 등과 구성이 비슷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이유, 다양한 방식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충북 음성에 사는 한충자, 정반헌, 이명재 할머니는 평생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지만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며 밤마다 시의 세계를 여행한다. 사진작가 임종진은 해마다 캄보디아 쪽방촌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앙코르와트로 떠난다. 미얀마에서 온 청년 소모뚜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국에 와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외국인 노동자 인권을 위해 일한다. 


나무 박사 강판권은 세상의 모든 나무의 수를 세고, 진딧물 박사 김효중은 사람들이 질색하는 진딧물을 보러 세계를 누빈다. 시인 송경동은 지하철 역사를 짓는 막노동을 하며 시를 썼고, 송규봉 박사는 운동권 학생에서 지도 전문가로 변신했다. 안재원 교수는 라틴어를 연구하며 과거를 여행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하나 일반적인 여행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원래 있던 곳을 떠나 낯선 곳에 도착해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을 하고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넓은 범주의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약 '무엇'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앙코르와트를 신기한 돌무더기로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앙코르와트에 와서 소원을 비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궁금해하며 본다면 앙코르와트의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인생이 여행에게 만약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를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덜 과시적이고 덜 속물적이고 덜 불행할 것이다. (114쪽) 


여러 번 읽은 책인데도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내용이 새로웠다. 책에 등장하는 분들 모두 요즘은 뭐 하시나, 잘 살고 계시려나 이런 생각도 들고. 요즘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을 참 많이 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럽다. 가까운 곳에서도, 바로 여기 내 자리에서도 여행자의 눈과 마음가짐만 있으면 얼마든지 여행을 할 수 있거늘.


밤마다 시의 세계를 여행하는 할머니들, 라틴어라는 배를 타고 과거를 유영하는 학자,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그어진 경계를 넘어선 청년처럼, 나도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여행법'을 떠올려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어릴 때는 이런 소설을 좋아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소설. 선악 구분이 뚜렷한 소설. 주인공이 착하고 정의로운 소설.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이겨내는 소설. 어디서든 사랑을 만나고 언젠가는 이뤄지는 소설. 마지막은 해피엔딩인 소설. 


지금은 좀 다르다.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은 소설. 선악 구분이 모호한 소설. 주인공 성격이 복합적인 소설. 역경 앞에 무너지고 좌절하고 실패하고 포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 사랑 따위 나오지 않기도 하고 사랑이 꼭 이루어지지는 않는 소설. 마지막을 굳이 결정짓지 않는 소설. 이제 이런 소설이 좋다. 이런 소설이 공감된다. 


밀란 쿤데라의 <커튼>을 읽다가 십여 쪽을 읽기도 전에 내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문장을 만났다. 쿤데라는 말한다. 소설을 쓰는 이유는 인간의 위대함을 기술하거나 성공과 승리의 영광을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허섭하고 지질한 존재인지, 성공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승리는 얼마나 멀고 패배는 얼마나 가까운지를 보여주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주인공이 어떻게든 잘 되고 어찌 됐든 승리하는 이야기는 재미있긴 하겠지만 위대하진 않다. 그것은 삶의 의미와 진실을 가리는 '커튼'에 불과하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21쪽) 

소설가의 야심은 이전 선배들보다 나아지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지 않았던 것을 보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데에 있다. 북극 발견이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무효화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플로베르의 시학은 발자크의 시학을 폄훼하지 않는다. (29~30쪽) 


이어지는 글도 흥미롭다. 저자는 체코 출신이면서 망명 이후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덕분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만약 자신이 모국어인 체코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일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카프카는 독일어로만 글을 썼으며,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독일 작가로 간주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체코어로 자신의 책들을 썼다고 잠시 상상해 보자. 오늘날 누가 그를 인정하겠는가?" 


나아가 저자는 문학이 언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속성을 가진 탓에 역사와 국적이라는 콘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오를란도 디 라수스(벨기에의 음악가)와 바흐의 모국어가 무엇인지 의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은 음악가이고, 음악은 언어와 연결되어 있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언어는 벽이기도 하지만 문이기도 하다. 자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작품이 외국에서 번역, 소개되어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해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저자가 대표적인 예다. 


소설가는 역사의 하인이 아니다.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인간 실존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 (97쪽)


밀란 쿤데라의 책이 대개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읽기가 쉽지 않다. 인용하는 작품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유럽 문학인 데다가 체코 문학인 점도 아쉽다. 하지만 책 내용이 어렵다고, 모르는 작품이 자주 인용된다고 놓치기엔 아쉬운 귀한 문장이 많다. 소설을 대하는 태도나 소설가로서 창작에 임하는 자세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역사에 관심을 가지되 역사에 함몰되지는 말라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소설가의 본분은 역사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미처 들춰보지 못했거나 일부러 들추지 않은 장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이를 통해 역사라는 '커튼'이 가린 인간 실존의 정체를 드러내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