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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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 사람들이 하이쿠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의구심이 든다. 일본어를 할 줄 알면 모를 모를까,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과연 하이쿠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메리 올리버의 시집 <천 개의 아침>을 구입할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영시를 척척 이해할 만큼 잘하지는 못하는 내가 과연 이 책을 온전히,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우리말로 번역된 소설도 잘 읽고 산문도 잘 읽는다. 원어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던 적도 있고 실제로 원서를 구입해 읽어본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말 번역본을 아무런 의문이나 의심 없이 읽는다. 그러니 시도 그렇게 읽으면 되지 않을까. 번역 과정에서 더해지거나 덜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익숙지 않은 언어로 쓰여 있어서 영영 읽지 못할 뻔한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기쁘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만난 이 시집은, 기대한 대로 여유롭고 편안했다. 1935년생인 시인은 1963년 첫 시집을 발표한 이후 평생 서른 권이 넘는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북동부에 있는 프로빈스타운에서 날마다 숲과 바닷가를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시를 썼다. 그의 시에는 바다, 파도, 나무, 해바라기, 장미 같은 자연물이 자주 등장한다. 고양이, 개, 주머니쥐, 굴뚝새, 백로 같은 동물도 단골로 나온다. 


나무의 그늘이나 황야의 빈 공간처럼 무엇이 '없는' 자리를 보고도 시인은 무엇이 '있음'을 느낀다. 공터를 가만두지 못하고 공항 활주로 같은 인공물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일침하는 시도 있다(<공항 활주로 확장>). 종국에는 작은 구름이 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지구 표면의 물과 들을 내려다 보고 싶다고도 말한다. 과연 그는 소원대로 작은 구름이 되었을까. 지금쯤 어느 땅 위를 날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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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봉과 분홍 제복 - 세일러 문부터 헬렌 켈러까지, 여주인공의 왜곡된 성역할
사이토 미나코 지음, 권서경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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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아이돌론>, <취미는 독서> 등을 쓴 일본의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의 책. 아이들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과 위인전이 각각 어떤 식으로 남성과 여성을 그리고 있으며 이것이 아이들의 성 고정관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분석,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 나머지 절반은 남자이지만, 현실에는 '다수의 남성과 소수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나 단체가 훨씬 많다. 기업, 정당, 의회, 학회는 물론이고 뉴스,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도 구성원의 대다수가 남성이고 여자는 홍일점으로 끼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런 식의 사회구조가 양산되고 고정된 이유 중 하나로 아이들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과 위인전을 든다. 


남자아이들이 즐겨보는 전대물이나 스포츠물 애니메이션을 보면 남자가 압도적 다수이고 여자는 홍일점으로 한두 명 끼어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매체를 보고 자란 남자아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지는 짐작 가능하다. 여자아이들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의 경우 여자가 압도적 다수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연애나 결혼 같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매체를 보고 자란 여자아이들이 어떤 장래 희망을 가지게 될지도 뻔하다. 


물론 무엇을 봤다고 해서 그대로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다. 실제로 다수의 여성들이 어릴 때는 여아용 애니메이션을 봐도 성인이 되면 여아용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는다(여아용 애니메이션을 '졸업'한 여자들은 소년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인물들을 차용한 BL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다수의 남성들은 어릴 때 본 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장르와 내용의 애니메이션을 본다. 저자는 이에 대해 '여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야기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증거'라고 분석한다. 


<짱구는 못 말려>, <도라에몽> 등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성희롱 장면이 빈번히 등장하는 문제는 어떤가. 미취학 아동인 짱구가 여자 선생님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장면이나 진구가 욕실에서 목욕하는 이슬이를 훔쳐보는 장면 등을 보면서, 어떤 아이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현실 사회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 성범죄가 많은 원인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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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록 산책 -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
도대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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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의 작가 도대체 님의 신간이다. 매체에 연재된 만화를 엮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웹이나 모바일을 통해 보는 것보다 단행본으로 보는 걸 선호해서 일부러 매체를 보지 않고 단행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책의 만듦새도 좋고, (아마도) 매체에는 실리지 않은 작가님의 에세이도 여러 편 함께 묶여 있어서 기다린 보람을 느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산책을 좋아하고 즐겨 하는 사람으로서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산책 시작할 때 호떡 장사를 발견하고 '산책 다 하면 호떡 사 먹어야지'라고 다짐했는데 산책 끝나고 그 자리에 가보니 호떡 장사가 없어졌더라... 이런 경험은 나만 해본 게 아니었구나! 호떡 말고도 붕어빵, 만두, 떡볶이, 아이스크림, 주스 등등 산책하면서 이것저것 사 먹는 재미. 이 재미를 작가님도 알고 계신다니 반가웠다. 


산책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동물들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나는 산책하다가 길고양이들한테 먹이 주는 분들을 만나면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 없다. 이 삭막한 동네에도 타자의 안부를 걱정하는 착한 사람들이 있구나 싶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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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1-06-24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님이 내시는 건 일단 나오는 족족 다 사고 보는 중입니다. 너무 귀엽잖아요 ㅠㅠㅠ 인스타도 물론 팔로우하지만 그걸로는 제 팬심이 만족을 못해요 ㅎㅎㅎ

키치 2021-06-24 17:36   좋아요 1 | URL
도대체 작가님 좋아하신다니 반갑습니다 ^^ 이번 책도 너무 좋아요 ㅎㅎㅎ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책 - 나도 모르게 나를 힘들게 하는 10가지 생각 버리기 연습
오언 오케인 지음, 정지현 옮김 / 갤리온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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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기대가 크고, 매사 완벽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행복해지기 어렵다. 반대로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나 자신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기 쉽다. 영국의 심리치료사 오언 오케인의 책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책>에 나오는 말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나는 완벽해야만 해.". "절대로 실패하면 안 돼", "누구도 절대로 실망시켜선 안 돼.", "나는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해"처럼 '~해야만 한다' 또는 '~해서는 안 된다' 같은 단정적인 말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강박적인 믿음 또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기 마련이고 타인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 쉽다. 이는 부메랑이 되어 또다시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결과를 낳는다. 


저자가 만난 어떤 내담자는 '좋은 사람 콤플렉스'가 아주 강했다.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매주 봉사 활동을 하고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내담자에게 저자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생각을 '항상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라는 생각으로 전환해 보라고 조언했다. 가끔은 나 자신을 위해 평소에 안 사는 꽃도 사보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봉사 활동에 가는 대신 기분 좋게 산책을 하는 식이다. 


내가 남들과 달라서 고민이라면, 남들에게 나를 맞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저자는 어릴 때 학교에서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여러 면에서 또래 남자아이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깊은 우울증과 불안, 공포에 시달렸던 저자는 이후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난 이대로 충분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을 내려놓으면,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힘들다면, 삶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남의 떡만 보고 있으면 내 앞에 있는 떡이, 식탁 위에 있는 더 많은 음식들이 안 보인다. 마찬가지로 남이 가진 것만 부러워하면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어렵고, 살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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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분노는 유쾌하게 글은 치밀하게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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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 <긍정의 배신> 등을 쓴 미국의 체험형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신간이다. 저자가 그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엮어서 만든 책인데, 최근에 발표한 글은 물론이고 90년대, 80년대에 쓴 글도 다수 실려 있다. 저자의 글이 그만큼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서-라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거나 오히려 악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이 책에 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발표 연도와 무관하게 여전히 '시의적절'하고 심각하고 중요하다. 


책에는 저자의 관심 분야인 노동, 복지, 빈곤, 불평등, 여성 문제에 관한 글들이 주로 실려 있다. 대표작 <노동의 배신>을 통해 저자는 '열심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비숙련 저임금 노동자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이번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열심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문제가 비숙련 저임금 노동자 계층을 넘어 고숙련 노동자 계층으로 왔음을 지적한다. 저자가 속한 언론 산업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프리랜서 언론인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언론 지형이 바뀌고 언론 매체가 직원 수를 줄이고 프리랜서 예산을 삭감하면서 고학력, 고숙련 프리랜서 언론인들이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처지에 놓였다. 저자는 오늘날의 저널리즘 수준이 형편없이 낮고 편파적인 것은 해고될 염려가 없는 - 그래서 빈곤층이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 언론 재벌들과 이들이 고용한 임직원들이 언론 매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젠더 문제에 관한 지적도 흥미롭다. 저자는 여성성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려고 한 '구남성'과 구분되는 '신남성'이 도래했다고 쓰면서, 이들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가정 살림에 능하며 외모 관리에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인다는 점에서 구남성과 구분되지만, 여성의 권리 향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는 구남성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신남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남성성을 의심받는 것이 아니라 계층이 하락하는 것, 정확히는 실제보다 낮은 계층으로 보이는 것이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신남성들은 달리기를 하고("달리기는 앉아서 일해야 하는 직장을 가졌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운동"), 몸매 관리를 하고, 그루밍을 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하고 파티를 연다. 이러한 변화가 여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할 일인데, 놀랍게도 이 글은 최근이 아니라 1984년 <뉴욕타임스>에 발표되었고, 적어도 내 생각에는 신남성의 출현으로 인해 여성의 삶이 더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바쁨이 곧 능력이라는 믿음>이라는 제목의 글도 좋았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잘 나간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바쁘다는 말을 버릇처럼 사용한다. 그런데 과연 바쁘다는 말이 잘 나간다는 의미를 내포한 휘장이 될 수 있을까. 저자가 보기에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전혀 바쁘지 않다. 성공한 기업가, 학자, 창작자들은 반드시 자신이 해야 하는 일만 스스로 하고 반드시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아웃소싱)한다. 그러니 정말 바빠서가 아니라, 단지 잘나가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바쁜 척을 하고 있다면 그만두는 편이 낫다. 사실은 한가한데 그 사실을 들키면 누가 나한테 뭘 시킬까 봐 바쁜 척하는 거라면 상관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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