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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 제왕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정치학 교과서
왕굉빈 해설, 황효순 편역 / 베이직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부끄럽게도 나는 이제까지 한비자의 성이 '한'이고 이름이 '비자'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성이 한 씨인 건 맞는데 이름은 '비자'가 아닌 '비'. 중국에서 '자'는 공자, 맹자처럼 학문에 공을 세운 성현을 높이는 의미로 붙이는 글자라고 한다. 그 말인즉슨 한비자가 공자, 맹자와 마찬가지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뜻인데, 웬일인지 그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끽해야 법가 사상을 대표하고, 진시황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정도.
그래서 왕굉빈 교수가 쓴 책 <한비자>와의 만남이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이 책은 한비자라는 인물과 그가 남긴 저작,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진 왕조의 흥망사, 뒤를 이은 한 왕조, 법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 제왕술의 역사, 한비 사상의 의의 등이 총망라된 한비자 평전이다.
"한비의 법치이론이 갖는 기본 원칙은 사사로운 인정에 구애받지 않는 '엄격함'에 있다. 법가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크게 강조하거나 신임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은 공정한 법률에 의하여 다스리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비의 법치 이론은 실질적으로 공평한 상벌제도를 통해 더욱더 법의 엄격함을 강조함으로써 관료들의 업무상의 질서와 그 효과를 향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p.291)
한비자의 사상은 알려진대로 '법가 사상'이다. 한비자가 살던 당시는 유가 사상이 대세였고, 그 역시 유가 사상을 따르는 스승 밑에서 수학했다. 군주가 마음이 어질고 도리를 지키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보는 유가 사상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신뢰하고 인위적인 제도를 거부하는 점이 장점이지만, 인간에게는 악한 부분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고, 인의에 치우치면 자칫 엽관주의 같은 폐해가 생길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한비자는 이러한 유가의 약점을 간파했고, 이를 보완하는 사상으로서 법가를 주장했다. 그는 사회적 제도인 법이 있으면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에서 오는 부작용을 막을 수 있으며, 불공평하게 대우 받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학교에서 배우기로는 유가 사상은 좋고, 법가 사상은 나쁘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물론 진시황제가 그의 법가 사상을 채택하여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그것은 사상을 악용한 진시황의 탓이지 사상을 낳은 한비자의 탓이 아니다. 오히려 법가 사상에는 유가 사상이 놓친 장점이 많이 있고,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국가의 실정과 더욱 잘 맞는다.
이처럼 한비자의 사상을 보면 시대를 앞서간 부분이 많이 보인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모든 사회적 관계가 이해득실에 근거한다고 본 점은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의 사상과 연결된다. 제왕의 정치 기술을 중시한 점은 메디치 가의 책사이자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비슷하다. 다만 마키아벨리는 정치 기술만 강조한 반면, 한비자는 '술'은 제왕과 신하 사이에 필요한 것이고, 제왕과 민중 사이에는 '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보다 한 단계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거울은 맑음을 지키는 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아야 아름다움과 추함을 있는 그대로 비교할 수 있고, 저울은 균형을 지키는 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아야 가벼움과 무거움을 있는 그대로 달 수 있다. 만약 거울이 움직인다면 대상을 밝게 비출 수 없고, 저울이 움직인다면 대상을 바르게 달 수 없는 것이다. 바로 법이 이런 것이다."
살다 보면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다. 재능이나 노력에 의한 차별이라면 그래도 억울함이 덜한데, 재산이나 배경, 인맥 등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차별을 받을 때 사회의 벽을 새삼 느낀다. 한비자는 어쩌면 바로 이런 민중들의 애환을 알고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진 사람들끼리, 아는 사람, 친한 사람들끼리 '다 해먹는' 세상에서 그나마 법이라는 제도가 있다면 소외감을, 억울함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는 당대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사상은 후대에 전해져 많은 민중들을 보호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