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힘들 때면 가족 모두 건강하고 삼시 세 끼 먹을 수 있으니 감사히 여기자고 생각한다. 사는 게 괴로울 때면 이제껏 살면서 큰 사고나 자연재해 한 번 겪은 적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사는 게 비참하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면 적어도 지금이 전쟁 중이거나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지 않느냐고 마음을 다잡는다. 


코노 후미요 원작,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의 주인공 '스즈'도 매번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히로시마의 어촌에서 태어난 스즈는 부모님이 하는 김 양식을 거드느라 손이 마를 새가 없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고, 그러다 보니 연필심이 늘 빨리 닳는다. 그래서 연필을 사달라고 부모님을 조르면 오빠에게 머리를 쥐어 박히기 일쑤다. 


열여덟 살이 된 스즈는 이웃 마을 쿠레에 사는 호조 슌사쿠와 혼인을 치른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한 스즈는 이튿날부터 다리가 불편한 시어머니를 대신해 시댁 살림을 도맡게 된다. 새벽부터 동네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오고 식구들의 밥을 지어야 하는 생활. 시누이와 그 딸까지 집에 들어오면서 스즈의 부담은 커지지만 그래도 스즈는 불평하지 않고 사람 좋게 웃으며 넘긴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은 점점 심화되고, 해군 기지가 위치한 쿠레에도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스즈의 생활도 전쟁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안 그래도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은데 배급받는 식재료의 양은 갈수록 줄어들고, 암시장 물가는 천정부지로 높아져 설탕 같은 필수 조미료를 구하려면 온 식구의 생활비를 전부 갖다 바쳐야 하는 상황이 된다.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뿐인데 헌병한테 간첩으로 몰려서 곤욕을 치르고, 해군이 되어 돌아온 첫사랑이 사지로 끌려가고, 걸핏하면 머리를 쥐어박아서 무서워만 했던 오빠가 유골이 되어 돌아와도 스즈는 참는다. 그래도 아직은 가족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고, 이따금 끼니를 거르기는 해도 먹을 게 전혀 없지는 않으니 다행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전세가 점점 일본에 불리한 쪽으로 기울고 연합군의 공격이 스즈가 살고 있는 쿠레에 집중되면서 스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고 여겼던 죽음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것을 느낀다. 머리 위로 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마을이 하룻밤 사이에 불바다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스즈는 점점 불안해진다. 


급기야 스즈의 가까운 식구가 스즈의 곁에서 목숨을 잃고 스즈 또한 예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치면서 스즈는 버틸 힘을 잃는다. 친정이 있는 히로시마 상공 위로 생전 처음 보는 희고 큰 구름이 떠오르자 스즈는 그저 큰 소나기가 내릴 징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조만간 친정 식구들의 목숨을 앗아갈 원자폭탄인지도 모르고.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자 사람들은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스즈는 억울하다. 화가 치민다. 집 밖으로 뛰쳐나간 스즈는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고 생각한다. "나는 바다 건너 넘어온 쌀과 콩으로 이루어졌지. 폭력으로 복종시켜서 결국 폭력에 굴복하는거구나. 이게 이 나라의 정체인가. 이걸 모른 채 죽었으면 좋았을걸." 


스즈는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며 대체 이제껏 무엇을 위해 참고 견뎌야 했느냐고 울부짖는다. 이 장면이 원작 만화에만 있고 영화에는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직접 영화를 보니 스즈의 대사도 태극기도 분명히 나온다(한국에서만일지도).


이 영화를 가리켜 피해자 코스프레라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스즈 개인의 삶만 놓고 보면 누가 봐도 연민을 느낄 것이다. 영화는 전쟁으로 인해 서민들의 일상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며, 원자 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 사람의 뼈가 녹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이 돈다는 이야기도 한다. 폭력을 휘두른 일본이 폭력 앞에 망하는 건 당연하다는 대사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일본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비해 나아진 의식을 보인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 원작 만화에는 작가의 문제의식과 강조하고 싶은 점이 보다 분명하게 나온다. 만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히로시마 출신인 작가가 쿠레로 시집 간 외할머니를 모델로 그린 작품으로, 외할머니가 실제로 체험했음직한 당시 사정을 치밀하게 조사해 작품에 반영했다. 전쟁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에 대한 고증이 영화보다 자세하게 나온다. 


영화에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도 나온다. 영화에서 길을 잃고 자기도 모르게 유곽에 들어간 스즈가 린이라는 아가씨를 만나는데, 만화에는 스즈와 린의 관계, 스즈의 남편과 린의 관계도 자세히 나온다. 전쟁 당시 여성들이 겪은 고통과 전쟁의 풍파 속에서도 식지 않은 여성들 간의 연대와 우정도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스즈 넨도로이드가 있을 줄이야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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