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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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박솔뫼 작가의 독서 에세이집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좋은 일이 일어남>을 읽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이주란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엄청 잘 먹는데, 특히 <수면 아래>에서는 "사람이 나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일단 먹기부터" 할 정도다. 그런데 실제로도 사람이 만나면 일단 먹기부터 한다는 점에서 이런 전개는 "자연스럽고 표준적인 것"이고, 오히려 다른 소설에서 등장 인물들을 먹이는 장면을 너무 안 보여주는 것 같다는 설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음식을 주제로 소설을 분석해 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참에 아직 안 읽은 <수면 아래>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꺼내 펼쳤다.


해인은 일주일에 여섯 번, 집에서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는 '해동중고'라는 이름의 중고물품점으로 출근한다. 해인이 하는 일은 손님들이 가져온 중고물품을 매입하고 세척하고 진열하고 판매하거나 인터넷 게시판을 관리하는 일 정도로 크게 힘들지는 않다. 일이 끝나면 집에서 쉬거나 지인들을 만나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한다. 잔잔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극적인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일상을 그저 묘사할 뿐이지만, 해인과 우경이 한때는 부부였고, 두 사람이 함께 베트남에 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고, 해인이 지금처럼 평범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된 건 최근의 일이라는 걸 넌지시 암시한다.


해인의 과거를 암시하는 문장들을 읽고 현재의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해인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준 일이 과거에 있었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아프고 힘든 나날을 보냈으며,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해인의 주변 사람들이 사실은 해인을 고통 밖으로 끌어내 준 은인들임을, 작가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해인이 음식을 먹는 장면들도 사실은 그가 이렇게 식욕을 느끼고 스스로 잘 챙겨 먹고 다른 사람까지 먹일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큰 노력을 했는지를 헤아리게 하는 장면들로 읽힌다. 


이주란 작가의 소설에는 먹는 장면도 많이 나오지만 남을 먹이는 장면도 많이 나온다. 이 소설에서도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이모에게 해인이 미역국을 끓여 먹이는 장면이 나오고, 내가 좋아하는 이주란 작가의 소설집 <별일은 없고요?>에 실린 단편 <위해>에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화자가 과거의 자신처럼 불우한 환경에 놓인 이웃집 아이에게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고 그 음식을 사먹이는 장면이 나온다. 먹는 행위가 살기 위해 하는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행위라면, 먹이는 행위는 삶의 기회를 남에게 주는, 어떻게 보면 부자연스럽고 본능을 거스르는, 그래서 더 숭고하고 위대한 행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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