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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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정유정 작가는 좋아해도 정유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악의 3부작'이라고 불리는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을 모두 읽었고 작품 하나하나의 몰입도와 완성도는 높았지만, 대체 작가가 이 작품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작가 자신이 안고 있는 어떤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이토록 긴 서사를 늘어놓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신작 <진이, 지니>는 달랐다. <진이, 지니>는 작품의 결 자체도 악의 3부작과 다르지만, 작가가 그동안 어떤 문제를 고민해 왔는지, 오랜 고민 끝에 어떤 결론에 다다랐는지를 전과 달리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제까지는 몸풀기였고 지금부터 승부를 건 싸움을 시작한다는 느낌이랄까.


이야기는 진이와 민주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진이는 서른다섯 살의 유인원 책임 사육사이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유난히 좋아했고, 대학 시절 동물원에서 사육사를 보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적성에 맞는다는 걸 깨닫고 쭉 동물 관련 일을 해왔다. 진이는 평생 이렇게 좋아하는 동물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민주는 서른 살이 되도록 취직도 독립도 못 하고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백수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민주를 쫓아냈고, 친구 집과 고시원을 전전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민주는 오래전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할 때 알게 된 장의사 할아버지가 살다가 힘들면 무곡에 있는 '산꼭대기 원숭이 동물원'에 가보라는 말이 떠올라 무곡으로 향한다.


무곡에 있는 한국과학대학교 영장류연구센터에 재직 중인 진이는 국내에 밀반입된 침팬지가 도망쳤다는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간다. 힘들게 확보에 성공한 진이는 구급 대원들이 침팬지인 줄 알았던 동물이 사실은 보노보임을 알게 된다. 한편 민주는 '원숭이 동물원' 구경이 끝난 후 딱히 갈 곳이 없어서 출입 금지 표시가 되어 있는 산속 정자에 들어가 노숙을 하기로 한다. 돌아갈 차비를 빼면 밥값도 남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잠을 청하는데 문득 멀리서 교통사고가 난 듯한 소리가 들린다. 사고 현장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민주는 웬 보노보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 보노보가 하는 행동이 어쩐지 동물 같지 않고 인간 같다. 설마 이 보노보, 인간인 걸까?


보노보가 인간이라니. 황당한 생각 같지만 이 소설에선 '리얼'이다. 진이와 보노보 '지니'가 타고 가던 밴이 고라니를 피하려다 전복되는 사고가 나면서 진이와 지니의 영혼이 바뀌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동안 의식을 잃었던 진이는 자신의 영혼은 그대로인데 몸은 지니의 몸과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보노보의 몸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그러다 우연히 민주를 만나고 간청한다. 제발 진이의 몸을 찾아달라고. 사고 직후 병원으로 실려간 진이의 몸을 되찾으면 모든 것이 원상복구될 테니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여기까지의 줄거리를 보면 동물과 몸이 바뀐 인간이 원래의 몸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전개는 그렇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으로 간 진이는 자신의 몸이 죽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이 상태에서 원래의 몸을 되찾으면 진이의 영혼은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보노보의 몸으로 '살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작가는 진이가 동물로 살 것인지 인간으로 죽을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결국 진이는 '어떤 선택'을 한다. 나는 이 선택을 보면서 작가가 그동안 삶과 죽음에 관해 고민해 왔음을, 구체적으로는 나 자신 또는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산다는 것에 관해 고민해 왔음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악의 3부작도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그동안 정유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할 수 없었던 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에 정유정 작가의 전작들을 전부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분명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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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자나 2019-10-2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보고 싶네요.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또 나는 어떻게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