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유구사-군자로서 항상 생각해야 하는 아홉가지
볼 때에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에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태도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을 할 때는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일을 할 때는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이날 때는 질문할 것을 생각하며, 화가 날 때는 어려움을 생각하고, 이득이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의로운지를 생각한다(p. 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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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 문학으로 읽는 신약성서 비아 교양
카일 키퍼 지음, 김학철.이승호 옮김 / 비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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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어를 전공한 자로서 성서에 대한 지식을 갖추지 못함은 매우 불편했다. 1학년 때 Bible과 Mythology를 간단히 배우긴 했고, 일요일에 교회를 다니긴 했으나 제대로 성경을 깊이 있게 읽어 보지 못했기에 많은 서양 작품 이해도 쉬운 일이 아니고 워낙 성경적 비유가 많아서 작품에 담긴 심오한 내용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문학적으로 접근함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올해 성경공부를 조금 하고 있었고 지난 번 ‘The Case for Christ(예수는 역사다)’를 읽어서 이 책이 조금 더 쉽게 이해된듯 하다. 4복음서, 바울의 서신 13개 중 10개, 요한계시록에 대한 문학적 비평을 시도했다.

문학의 기능을 심미적 기능과 실용적 기능으로 나눌 때 상황에 대한 판단을 돕고 상응하는 태도를 갖추도록 돕는 실용적 접근면에서 볼 때, 신약은 종교성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충분히 삶을 위한 도구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테의 신곡이나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도 성서의 많은 부분을 인용하면서 신학적 진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문과 대화하려는 창조적 활동을 하고 있다고 시작하고 있다.

4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전하는 예수의 내용에 이질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마가는 예수의 고난을,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을, 누가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 그러나 요한은 이전 복음서와 달리 독자들에게 이야기 자체보다 ‘말의 의미’에 초점 맞추기를 요구하며 독자들에게 문학적 도전을 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왔다. 그 행간의 뜻을 읽어내지 못하는 한 예수와 적대자들간에 소통의 부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13개의 서한을 전한 바울은 복음이라는 메세지의 본질만 왜곡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유연한 태도를 취하고 바울의 persona는 독자와 주제에 따라 바뀌고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알고 읽으니 바울의 다양하고 유연한 이념가적 성질이 보인다. 사도바울의 호전적 메세지에 대한 니체의 비판도 날카로왔다.

요한이 에게해 밧모섬에 있을 때 받은 환상에 기반을 둔 요한계시록은 알레고리와 신화 중간 정도에 있는 묵시록이라고 했다. 사실 선과 악의 구도 대결을 담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내게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이고 영화, 책, 시, 연극 등 다른 문학 장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각기 다른 내용을 하나로 묶은 신약인듯 보이나, 결국 신약에 속한 다양한 책들은 직선적이거나 시간 순서대로 묶여있지 않으며 마치 사진 모자이크를 보듯, 하나의 조각들은 예수에 대한 해석과 묘사를 서로 다른 독특한 필체로 그리고 있으나,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보면 조각들 특성은 사라지고 예수에 대한 더 넓은 해석에 이바지하는 전체적인 모습만 남는다고 한다. 결국, 그것은 다양성을 통해 단일성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했다.

무늬만 기독교인인 내가 큰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더 많은 공부를 통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할듯하다. 영어를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더 잘 고찰해 볼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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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은 어떻게 삶을 성장시키는가 - 행동하는 철학자 사르트르에게 배우는 인생 수업
쓰쓰미 구미코 지음, 전경아 옮김 / 더블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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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늘 내게 ‘백마탄 왕자’님 같은 존재이다. 늘 기다려왔고 가까이하고 싶으나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러나 그가 오면 나의 고민이 해결될 것 같은 아련한 존재. 그래서 도전한 ‘심야의 철학도서관’은 그야말로 철학서적이었으나 이번 책은 삶속으로 내려온 지혜같은 내용이라 심리서적 처럼 쉽게 다가왔다.

제목부터 뭔가 심쿵하긴했다. 사실 난 ‘책임’이란 단어가 싫다. 책임감이 너무 강해 나 스스로 힘들게 살고 있기에 내려 놓고 싶은 것이 책임이란 단어였고, 이것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표현은 일을 시키기 위한 합리화가 아닐까라는 피해의식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사르트르가 책 저변에 흐르고 있어 그의 책에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사물에게 적용되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내용이 사람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가 된다. ‘실존’, 즉, 실재하느냐, 존재하느냐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인간 자체의 존재/실존도 중요하지만 추상적인 개념인 기대감, 불안, 약점 등도 숨기려 하지 말고, 말로 꺼내어 존재시키고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힘의 원천이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기대’도 마음 속으로만 하지말고 입 밖으로 표현하고, 숨기고 싶은 약점도 밝힘으로써 무의식에 있는 어둠을 의식화하면 웬만한 일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나처럼 감정적으로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의식적으로 관찰하는 연습을 통해 냉정해 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우리 어른도 이 책에 등장하는 ‘인생학교’에 주기적으로 들러 상담을 받고 조언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해결책을 구한다고 의지박약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 책에 아주 여러번 등장하는 ‘선택’, ‘자유’ 이것은 매우 무서운 말이다. 왜냐하면 그에 따른 책임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보편적 상식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는 용기를 통해 수많은 선택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본질이 결정된다.

인간의 실존에 자신의 유의미한 본질을 만들어 가야 할 의무와 책임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있다. 과거를 보내고 항상 ‘지금’에 집중하라는 사르트르의 경종을 따라가며, 새로운 나다움을 만들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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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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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필독서라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누군가의 하루가 이렇게 길게 펼쳐질 수 있다니 놀랍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재가 그 어떤 허구보다 큰 감동을 주기에 감정이입을 안할 수가 없다. ‘Man’s Search for Meaning(죽음의 수용소에서)’이 매우 큰 감동을 주었듯이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내가 마치 그 강제수용소에서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순수 문학이나 예술을 목적으로 아름답게 승화된 작품도 가치가 있지만 이렇게 사회 고발의 기능을 하는 작품도 많이 나와 오래 오래 진가를 인정받기를 희망한다.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는 직접적인 역할로, 사회제도, 법률, 규범 자체의 혁신이 우선이고 유능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학이 끼치는 영향도 엄청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문이 무보다 강하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2차 대전 중 독일군에게 이틀 동안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했음에도 스파이 혐의로 10년형을 선도받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생활을 하게 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어나 결국 힘겨운 하루를 잘 견디어 내고 행복하게 마무리가 된다.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고 더 혹독한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 않고 점심에 죽도 두 그릇 먹고 벽돌쌓기도 잘하고 잎 담배까지 샀으니 거의 운좋은 하루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든다.

사람의 품격이라는 것도 당연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 무엇인지 모를 공허감에 시달리는 내게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치열한 필살기로 하루를 견뎌야 하는 슈호프는 8년의 수감 생활을 통해 눈치도 빨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지만 나름의 품격을 유지하며 비굴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 자리가 어디든 전심전력을 다해 하루를 살아냄이 눈물겹다.

한 약자의 운명에 대한 인간애적 동정을 통해 스탈린 공포시대와 정치적 억압의 수단이었던 혹독한 강제수용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그린 이 책은, 내게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인간을 견디게 하는 끈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여러종류의 인간의 군상이 등장한다. 침례교도인인 알료쉬카에게는 종교가 그를 지켜주는 끈이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슈호프에게는 반드시 가족이라고 언급되어 있지 않다. 가족을 그리워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만큼 혹독한 감옥생활이었기에 고향을 그리는 생각도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슈호프는(결국 작가는) 10년 생활을 잘 견디어 내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냥 하루를 살아냄이 기적같은 수용소에서 죽 한 그릇을 더 먹기위해, 양배추 건더기가 있는 죽을 내 앞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 담배 한 잎 사기위해, 줄칼을 잘 숨겨 들어와 잔일 도우며 돈벌기위해, 친구에게 온 소포 찾아다 주고 맡아주고 조금 얻어먹기위해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던 그 삶 자체가 그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작업이 늦게 끝난 것도 불만인데 인원점검에서 한 명이 없음을 알고 지체되어 결국 작업하다가 졸았던 몰다비아인때문인걸 알고 온갖 욕을 다하던 제 104반원들이 이제 소중한 저녁 시간이 다 날라갔음을 알고 터벅터벅 걷다가, 다른 기계공장 작업반원들도 작업이 늦게 끝나서 오는걸 발견하고 그들보다 빨리 도착하려고 경호원들까지 가세하여 행군을 빨리하던 그들의 모습은 진짜 눈물겹다. 그들 보다 빨리 가서 신체검사도 먼저 받고, 저녁 배식도 받고 등등. 백 오십여 미터 먼저 도착한 그들은 풀 죽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엄동설한의 작업도 잊고, 의기양양하는 토끼의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과연 이런 생물학적 욕구만이 우선인 극한 곳에서 그들을 견디게 하는 끈이 삶에 대한 긴장이 아니고 그 무엇일까? 현재 나의 정신적 나약함은 물리적 환경의 풍요에서 오는 교만함 때문은 아닐까? 품격있는 내 삶을 논할 때, 기본적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을 논외로 하며 당연하게 여김이 교만한 태도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이만큼 살아 숨쉬는 것에 대하여, 자유와 평등의 꽃이 이만큼 피어남에 대하여,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나태와 나약함의 원인은 아닌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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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철학도서관 - 인간의 의식, 영혼도 뇌도 아닌 세계를 찾아서
토린 얼터.로버트 J. 하월 지음, 한재호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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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도전적인 책이었다. 철학도 포넨스와 법학도 톨렌스가 6일간 도서관에서 의식에 관한 담론을 나눈 얘기로 진입장벽은 대화체라서 쉽다 생각했으나 갈수록 어려웠다. 이렇게 책을 대하는 것은 날마다 나의 무지와 맞부딪치는 힘겨운 시간이다. 내 지식의 깊이가 얼마나 얇은지 매일 확인시켜주고 내 실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정확한 잣대가 되어 신년 초부터 나의 게으름이 화들짝 놀랐다. 역시, 올해도 내가 좋아하는 책에서 자유로워짐을 얻기위해 책과 함께 연애를 해야겠다.

내가 무지하다는 ‘의식’이 분명한데 난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이 ‘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즉, 우리의 의식을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답은 Yes/No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논증과 반증을 거듭하며 연구와 담론이 이어지고 있을거라 추측한다.

물리적인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물리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도 설명할 수 있고, 몸과 마음을 모두 물리학으로 밝힐 수 있다는 물리주의. 물리주의가 대세이고 물리를 비롯한 과학이 인류에 까친 영향은 엄청나지만 직관적으로 마음과 몸이 달라 보이는데 어떻게 동일한지에 대하여, 일원론인 물리주의가 설명하지 못한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현상적 의식, 즉 경험에 의해 느끼는 의식에 기반하는 반물리주의자들의 반론이 있다. 경험이 그러하듯 현상적 경험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데, 객관적인 물리학의 용어로 기술할 수 없다. 이런 현상적 의식의 문제로 반물리주의는 물리주의를 공격한다. 반물리주의의 단점은, 물리적인 것외에 정신적인 것이 따로 있다는 이원론인데 과연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따로 있다면 인과법칙을 따르는 물리적인 것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이다.

의식에 관한 갑론을박의 이야기를 데카르트, 흄, 영화 수퍼맨 등 다양한 예시를 들어 설명하였지만 철학에 문외한인 내게는 소귀에 경읽기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반물리주의에 입장에 서고 싶지만 반론을 읽으면 귀 얇아 다시 흔들리게 되었다.

아는만큼 보이고 느낀다 했는데 귀한 책에 발만 담그고 떠난다. 궁극적으로 철학에서 위안을 얻고 답을 찾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다시 도전하리라 마음 먹는다. 즐거운 도전을 주는 2020년도!!! 책과 더불어 행복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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