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에너지전쟁 - 과거에서 미래까지, 에너지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대니얼 예긴 지음, 이경남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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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e Quest. 새로운 에너지들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뜻하는 것일 게다. 전작인 『The Prize』가 '드레이크 대령'부터 걸프전까지, 현대사회 최대의 에너지원인 석유의 역사를 담았다면, 이 후속작은 그 이후의 2010년 초반까지 석유의 이야기, 그리고 지정학적 약점과 기후변화를 극복하고자 고안된 비재래적(untraditional) 에너지들의 2030년 경까지 전망을 분석하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원들은 다음과 같다.


천연가스. 천연가스는 저렴하면서도 탄소배출이 적어 어느 정도 석탄과 석유를 대체할 만한 에너지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주된 생산지가 러시아와 중동으로, 다소 서방과 불편한 나라이기 때문에 석유와 마찬가지로 지정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노르트스트림2 승인 문제를 두고, EU, 러시아, 미국 간 갈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원자력. 지정학적 문제를 극복하고 한 국가의 에너지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에너지원이다. 문제는 체르노빌, 후쿠시마 같은 사례들 떄문에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다는 것. 그럼에도 프랑스나 중국은 원자력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전기. 토머스 에디슨을 시작하여 새뮤얼 인설로 이어지는 전기의 역사는 그레첸 바크의 『The Grid』와 상당 부분 내용이 겹친다. 아마도 바크가 이 책을 많이 참조하지 않았을까?


태양력과 풍력. 두말할 것 없이 지금 우리 세기에 가장 각광받는 에너지원이다. 태양력은 오일쇼크를 겪은 카터 시대부터 주목 받았으나, 낮은 효율 때문에 그의 재선 실패와 함께 잊혀지는 듯 했으나, 기후위기를 겪으면서 되살아났다. 신재생에너지는 특히 석유기업이 다음 사업으로 투자를 많이 하기도 한다. 마이클 셸런버거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서 '석유회사들이 태양력과 풍력 업체를 지원하면서 원자력을 몰아내려 한다'고 기술했는데, 이걸 말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태양력과 풍력이 문제가 많다고 보지만, '에너지의 분권화'를 이루려면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에너지 효율화, 에너지 효율화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제3의 에너지원이다. 언제나 석유가 풍부한 미국과 달리, 석유가 한 방울도 생산되지 않는 일본에서는 에너지 문제 극복을 위해 하이브리드 차량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프리우스' 같은 명품이 탄생했다. 프리우스는 피터 자이한의 애차이기도 하다.


바이오에너지. 브라질은 사탕수수를 가공함으로써 바이오에너지 강국이 되었다. 석유와 바이오에너지 두 가지 에너지원으로 구동되는 차량이 존재하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전기차. 토머스 에디슨이 고안했으나 포드의 내연기관 차량에 밀려 역사속으로 사라진 전기차는 최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 기술인데, 한국의 LG화학과 중국이 배터리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 책을 그때 읽었더라면 LG화학에 투자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올해 에너지 관련 책을 7권 가량 읽은 것 같은데, 이 책이 모두 정리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대니얼 예긴의 글쓰기는 담담하면서도 굉장히 흡입력 있다는게 최대 강점이다. 담담하다는 것은 내가 직전까지 즐겨 읽었던 작가들, 제러미 리프킨의 지나친 좌파적 이상주의도, 피터 자이한의 극단적인 미국 중심 성향을 모두 배제하고 에너지 전문가의 관점에서 팩트만을 기술하고 있다. 당연히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제 그의 다음 책은 10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를 대신할 만한 에너지 책들에 대한 나의 Quest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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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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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봉림 구 역본으로 읽은 지 8년 만.

이번 독서에서 새로 발견한 점을 몇 개만 적어본다.


1. 선동가들에 휘둘린 노동운동에 대한 경고

처음 읽었을 때에는 마지막 문장에 매료되어 노동운동이 싹트고 있음을 알리는 혁명소설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것은 한 단면일 뿐이다, 외지에서 온 어설픈 혁명가의 심리도 함께 비판함으로써 선동의 위험성도 함께 다루고 있다. 랑티에는 막장을 단 한 번 경험하고는 그 비참한 생활에 증오를 품는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에 대해 탐독하면서 혁명을 꿈꾸고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다. 공제조합을 설립을 주도해 돈 좀 만지고, 멋도 부리고, 인기에 취해 국회의원을 꿈꾸기까지 그의 변화하는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르주아를 증오하지만 부르주아를 닮아가고, 그럼에도 그 현실을 부정한다. 조지 오웰에 앞서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끄집어낸 것이다.


2. 탐욕적 자본가가 아닌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고발

작품은 노사 간 대립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작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본가들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광부들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CEO(엔보 씨),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진취적 기업가이되, 역시 아버지의 입장에서 광부들을 감싸는 탄광주(드뇔랭), 조상이 물려준 돈을 투기하지 않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도 베푸는 연금생활자(그레구아르 부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탐욕적 자본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실제로는 탄광 현장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광부들에게 전가하고 그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혁명을 일으킨 광부들도 그리 과격분자는 아니다. 파업이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자본가의 집에 일하는 하녀는 말한다. "하지만 참 이상하네요, 저 사람들은 절대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순종하던 사람들이 선동에 휘둘려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선동가들도 그들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3. 국가, 그리고 자애롭기만 한 나라의 존엄

작품에서 국가의 역할은 중재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자본가의 편에서 폭력적인 민중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장랭은 폐쇄된 탄광을 지키던 소년병을 이유없이 살해한다. 한편, 마외네 집에서 팔고팔아 더 이상 팔 게 없게 되었을 때(『목로주점』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황제와 황후의 초상만이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자애로운 미소로 가족을 내려다본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 부분이 특히 오늘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게 느껴졌다. 소탈하고 자애로운 모습만 보여주는 지도자는 그림에 불과할 뿐 국민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에너지

작품에서 석유는 작품에서 '등유'로 기능하는, 아주 초기의 모습을 보여준 점이 눈에 띄었다. 이후 1차 대전을 전후로 석유가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된다. 그럼에도 석탄은 여전히 화력발전 등 국가 에너지의 주요 원천이다.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는 광산노동자 파업에 단호히 맞서 이른바 '영국병'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공부가 필요하다).


'제르미날'은 혁명력에서 '싹트는 달', '파종월' '牙月' 등으로 번역되며, 3~4월을 가리킨다. 30대 초반에 읽었을 때에는 노동운동과 혁명만을 다룬 것 같았던 이 작품은 이렇게 다층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물론 작품의 결론은, 광부들은 얻은 것 없이 탄광으로 돌아갔지만,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싹이 트고 있음을 자본가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들의 삶은 점차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을 노동현실을 보면,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러나, 두번째 독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를 묘사하는 데 절묘한 균형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었다. 그 동력은 작가가 장기를 발휘하여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언어와 행동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데 있다. 역시 Zola 위대한 작가이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 한 사내가 짙은 어둠 속을 뚫고 허허벌판에 난 도로 위를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마르시엔과 몽수를 잇는 포장도로가 사탕무밭을 가로지르며 10킬로미터에 걸쳐 곧게 뻗어 있었다. - P9

르 보뢰는 깊은 땅 속에 납작 웅크린 음험한 짐승처럼 한껏 몸을 움츠리면서 거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치 인간의 육체를 집어삼켜 속이 더부룩한 것처럼. - P26

갱도는 그런 식으로 채탄부들이 내리는 적치장의 깊에 따라 왕성한 식욕으로 인간 가축들을 집어삼켰다. 결코 달래지지 않는 허기를 드러내며, 세상 사람들 모두를 소화하고도 남을 것 같은 거대한 창자를 끊임없이 꿈틀대면서, 갱도는 인간 가축들로 채워지고 또 채워졌다. - P48

그는 갱 속으로 다시 내려가 고통받고 싸우기를 원했다. 그리고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본모르 영감이 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와, 땅속에 웅크린 채 인간을 포식하고 있는 신을 떠올렸다. 만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정체도 모르는 그 신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 P117

광부는 목에 낀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맥주를 마셔야만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 때까지 술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누구를 탓하려는 말은 아니지만, 광부들이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152

아! 젊음이란! 아무리 먹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탐욕스러운 시절이 아닌가! - P193

그들은 지금 드디어 정의를 실현하게 될 멋진 계획을 세우고, 그를 위한 선전을 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이제 국경 따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다 함께 들고일어나 한데 모여 노동자들이 마음놓고 빵을 먹을 수 있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었다. - P223

땅속 깊은 곳에서 광부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곡식의 낟알처럼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은 어느 날 아침, 들판 한가운데서 그 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게 될 터였다. 그렇다, 인간들이 자라나는 것이다. 정의를 바로잡을 한 무리의 인간들이. 대혁명 이후로 모든 민중이 평등한 존재가 된 게 아니었던가? - P262

그때부터 에티엔도 점점 달라졌다. 빈곤함에 묻혀 잠들어 있던, 멋과 안락함을 향한 본능이 깨어난 그는 나사 모직 옷들을 사들이고, 고급 부츠도 한 켤레 샀다. 그리고 단번에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탄광촌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자존심의 달콤한 충족을 경험한 그는 처음으로 맛보는 대중적인 인기의 쾌감에 흠뻑 빠져들었다. - P268

이제 한 단계 높은 세상으로 올라선 그는 지적인 만족감과 안락한 삶을 맛봄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부르주아지의 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 P353

파리는 멀이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지만, 혹시 또 아는가? 언젠가는 국회의원이 되어, 화려하게 장식된 회의장 연단에 서서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한 노동자 출신으로서 당당히 연설해 의기양양한 부르주아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 P354

"일부러 혼란을 가중시켜 그 틈에 자기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뿐일세." - P376

그렇게 머리를 억지로 쥐어짜다보니 더이상의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면서 그는 광신도처럼 자기 자신을 맹신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감성과 양식에서 비롯된 신중함마저 점차 사라지면서 새로운 세상의 실현보다 더 쉬운 일이 없는 것처럼 떠벌렸다. - P446

작업반장들은 하나같이 그런 문제점을 지적한 것을 짜증스러워하면서 똑같은 말로 대꾸했다. 저들이 원하는 건 석탄이니까 지주 보강 작업은 나중에 하면 된다는 거였다. <2권> - P257

땅속에 파묻힌 광부들을 구조하는 일은 그들을 더욱더 열광시켰다. 네그렐은 마지막으로 구조를 시도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를 돕겠다는 지원자는 넘쳐났다. 광부들은 피 끓는 형제애를 내세우며 한달음에 달려와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들은 파업을 했던 사실도 잊은 채 임금 문제에도 더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동료들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 순간부터 아무 대가 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자 했다. 모두가 그곳에 와 있었다. <2권> - P298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밝고 선명한 초록색 벽에 붙어 있는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 뿐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인 자비로움을 과시하듯 발그레한 입술로 미소짓고 있었다. <2권> - P313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2권>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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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3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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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마개


어릴 적 뤼팽 작품 중 처음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물론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처음 읽는 걸로 봐야 할 것이다. 


『813』과 유사하게, 뤼팽이 神이 아닌 乙의 입장에서 적을 잡기 위해 숨가쁜 추격전을 펼친다. 적이 손에 잡힐 듯 한데 만만치 않은 통찰력과 힘을 가지는 바람에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 극의 템포를 더욱 빠르게 한다. 보통 몇 달에 걸쳐 사건이 전개되던 전작들과 달리, 이것은 (부하의) 체포부터 처형까지 시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적과 독자를 속이는, 심리소설로서의 트릭은. 단언컨대 이 작품이 지금까지 읽은 3권의 '결정판' 중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아르센 뤼팽의 고백(단편집)


다시 신의 지위로 돌아온 아르센 뤼팽. 일곱 편의 단편이 고르지는 않지만, '붉은 스카프'와 '아르센 뤼팽의 결혼'은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제는 그의 작품에서 잊혀진 인물인 줄로만 알았던 가니마르가 다시 등장하는 점도 반갑고, 이전의 작품들의 등장했던 주변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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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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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3년 경 김연경본으로 읽었으니, 거의 8년 만이다. 도스또예프스끼 탄생 200주년이라 하는데, 비싼 열린책들 기념본 뇌동매매는 자제하고(인테리어로만 기능할 확률 99.9%), 책장에 덩그러니 홀로 놓여 있던 김희숙본 1권을 시작으로 한 권씩 구매하면서 차근차근 읽어 나가기로.


앞뒤로 뒤적이고, 밑줄 긋고, 인상적인 부분은 통째로 타자를 쳐가며 꼼꼼히 읽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의 장광설에 막혀, 전체적인 내용은 알겠지만, 디테일에서는 놓친 게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대심문관의 말이나 스메르쟈코프의 궤변스런 논증,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 등은 너무 길기 때문에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무진 애를 먹었다.


반면,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은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데, 부분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지점이 많다. 섬망증에 걸린 이반 표도로비치의가 자신의 내면과 대화할 때에는 프로이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언젠가 더 옛날에 한번은 "어째서 당신은 그 아무개를 그토록 증오하는 거요?"라는 질문을 받았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그는 어릿광대 같은 파렴치한 감정이 폭발해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왜냐하면 이렇소. 그 사람은 사실 나한테 아무 짓도 안했지만, 대신 나는 그 사람한테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나 했소. 그런데 그 짓을 하자마자 바로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증오하게 되더란 말이오."


너도 그녀를 본 적이 있지? 정말 미인이잖냐. 그런데 그때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런 게 아니었어. 그 순간 그녀가 아름다웠던 건, 그녀는 고결하고 나는 야비한 놈이라는 것, 그녀가 관대하고도 숭고하게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나선 데 반해, 나는 빈대에 불과하다는 것 때문이었어


그렇게 자기 가슴 속을 모두 털어놓자마자, 나한테 그렇게 자기 가슴속을 다 보여줬다는 게 갑자기 부끄러워진 겁니다. 그래서 나를 이제 증오하게 된 거죠. 그는 끔찍이도 부끄러움을 잘 타는 가난한 사람에 속합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나를 너무 빨리 자기 친구로 받아들이고 너무 빨리 자신을 내줬다는 데 스스로 모욕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 일화는 너무 독특한 것이어서, 내가 그걸 어디서 따왔을 리는 없어. 그걸 까맣게 잊다시피 했는데…… 지금 무의식중에 머리에 떠올랐어 ― 바로 내 머리에 저절로 떠오른 거지, 네가 얘기한 게 아니야! 인간은 이따금 수천 가지 일을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떠올리거든, 심지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말이야…… 그 일화는 내 꿈속에서 떠올랐어. 그러니까 너도 이 꿈인 거야! 너는 꿈일 뿐, 실재하지 않아!


오, 우리는 사람들에 에워싸며 살면서 무엇이든, 심지어 가장 악마 같고 위험한 생각조차 그들에게 즉시 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기 좋아하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당장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곧바로 전적인 동감을 표해주고,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함께하며 우리에게 맞장구 쳐주고 우리의 성정을 거스르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8년 전『죄와 벌』(홍대화 역)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김연경 역)을 처음 읽었을 때, (살해도구가 도끼라서 그런지) 강렬하고 메시지가 뚜렷한 『죄와 벌』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도, 많은 도끼 팬들이 『까라마조프 형제들』를 최고로 여기는 게 이상했고, 내 이해력이 문제라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두번째 읽은 지금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두 최고의 심리소설이긴 하지만, 『까라마조프』에는 민중의 구원과 기독교적 인간애가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초반 조시마 장로의 설교, 조시마 장로의 회고, 에필로그에서 일류사를 떠나내는 알료샤와 소년들의 맹세는, '친부 살해'라는 잔인한 소재와 대비되어 깊은 감동을 준다. 거기에 거장의 미완성 유작(2부작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아쉬움까지 더해진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게 아닐런지. 나에게는 아직까지 6대 4 정도 『죄와 벌』이 판정승이지만, 나이가 더 들어 ― 아마도 저자의 나이가 되어 ― 읽으면 『까라마조프 형제들』이 인생 최고의 문학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식 이름에 익숙해 진 점은 이번 독서의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부칭과 수많은 애칭에 굴하지 않았다. 또 역자는 집요하게 러시아식 표현들을 살리려 애쓴 것 같은데, 그게 우리말로는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네들의 정서를 담아내는 것 같아, 되도록 저항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 '존대법'이 그런 경우인데, 알료샤와 열네살 소년들이 맞존대 한다든가, 약간 정신이 이상한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에게 굽실대며 존대를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역자는 일일이 주석을 달아 읽는 이들의 심리적 불편함을 최소화 시키려 했다.


주석 뿐 아니라 번역도 매우 훌륭하다고 평하고 싶다. 매우 긴 문장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으며, 다른 도끼 선생의 번역서들에 비해 힘을 많이 뺀 느낌이었다. 여성적인 도스또예프스끼라고나 할까. 게다가 주석도 간략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렵지만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다만, '縣'이나 'O등 대위' 같은, 일제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역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 아쉬운데, 이는 우리나라 러시아 문학계가 함께 고민하기를 바란다(러시아 문학 출판의 대장주인 열린책들이 나서야 하는 건 아닌지).


마지막으로, 나는 성경은 단 한 번 정독했을 뿐이지만, 이 작품의 題辭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 본문에서도 두어번 정도 언급되는 이 말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두번째 읽은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요한복음」12장 24절


나의 주인공인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전기를 시작하며 나는 어떤 당혹감에 빠져 있다.
- P13

무엇보다 거짓을, 모든 종류의 거짓을, 특히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하십시오. 자신의 거짓을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그것을 들여다보십시오.
- P118

그들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머무르는 한, 어떤 학문도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할 것이고,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우리의 발아래 갖다 바치면서, ‘차라리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제발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 P512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사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설령 주위가 온통 빵으로 넘친다 해도 인간은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머무르느니 서둘러 자신을 없애버릴 것이다. - P515

인간은 기적을 부정하는 그 순간 곧바로 신까지 부정하게 되고 마니, 이는 인간이 신보다는 오히려 기적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P517

끈적이는 어린 새잎들을 내가 정말 사랑할 수 있다면, 오직 너를 떠올림으로써만 그것들을 사랑하게 될 거다. 네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고, 삶에 싫증을 내지 않을 거야. - P534

영리한 사람과는 잠깐 얘기해도 흥미롭다더니, 그럼 그 말이 맞군요. - P565

내가 너를 그에게 보낸 건, 알렉세이, 같은 형제인 너의 얼굴이 그를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에게 달렸고, 우리의 모든 운명도 마찬가지란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명심하거라. - P13

"몇 달, 몇 년을 더 살 겁니다." "아니, 몇 달, 몇 년이 왜 필요합니까!" 형이 소리치지요. "뭣하러 날수를 셉니까, 인간이 모든 행복을 알게되는 데는 단 하루로 충분해요." - P22

작은 씨앗, 아주 작은 씨앗 한 알만 있으면 됩니다. 순박한 평민의 영혼 속에 그것을 떨어뜨리면, 그것은 죽지 않고 그의 영혼 속에서 한평생 살게 될 것이며, 밝게 빛나는 점과도 같이, 위대한 암시와도 같이, 암흑 속에서도, 그의 죄악의 악취 속에서도 몸을 숨긴 채 살아 있을 것입니다. - P31

민중을 소중히 아끼고 민중의 마음을 잘 지켜주십시오. 정적 속에서 민중을 교육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여러분 수도사들이 수행해야 할 위대한 일이니, 이 민중이야말로 ― 하느님의 체득자이기 때문입니다. - P74

그대는 그 누구의 심판자도 될 수 없음을 특별히 기억해두라. 그것은 이 심판자가 자신이 자기도 그의 앞에 서 있는 자와 똑같은 죄인이며,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의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책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는, 이 지상에 범죄자의 심판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 P88

그대는 그 누구의 심판자도 될 수 없음을 특별히 기억해두라. 그것은 이 심판자가 자신이 자기도 그의 앞에 서 있는 자와 똑같은 죄인이며,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의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책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는, 이 지상에 범죄자의 심판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 P90

아픈 사람을 하나 거기다 두고 와서. 그 사람이 낫는다면, 나을 거라는 걸 안다면 당장 내 인생에서 십 년이라도 내놓을 텐데! - P312

내가 화나는 건, 그이가 나 같은 여자를 두고 질투했대서가 아냐, 전혀 질투를 안 한다면 오히려 화가 났겠지. 나는 그런 여자야. 질투를 한대서 화를 내지는 않아, 나 자신도 성미가 사나워서 질투를 잘 하니까. 다만 내가 화나는 건, 그이가 나를 전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지금 일부러 질투하는 척했다는 거야, 바로 그거야. - P113

거기엔 그런 사람들이 많아, 수백 명은 되겠지, 땅 밑에서 손에 망치를 들고 사는 사람들이. 오, 그래, 우리는 쇠사슬에 묶이고 자유를 잃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 우리의 위대한 고난 속에서 우리는 새로이 기쁨으로 부활할 거야, 기쁨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도 없고, 하느님도 존재할 수 없어, 왜냐하면 하느님은 기쁨을 주는 존재니까, 그건 하느님의 특권이야, 위대한 특권……주여, 기도 속에 인간이 녹아 스러질지어다! 거기 땅 밑에서 하느님 없이 내가 어찌 살겠어? - P163

어떤 사람은 치구가 되느니 차라리 적으로 있는 게 더 유리하지. 이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 P167

"꿈을 꿀 때, 특히 뭐 저기 위장장애나 다른 무슨 이유로 악몽을 꿀 때, 이따금 인간은 지극히 예술적인 꿈을, 지극히 복잡하고도 실제적인 현실을, 그런 사건들을, 또는 그런 사건들이 아주 교묘한 구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세계 전체를, 그것도 자네들 세계의 가장 숭고한 현상들로부터 셔츠 가슴판에 달린 마지막 단추 하나에 이르기까지, 예쌍도 못할 만큼 아주 세세하게 보게 되지, 맹세코 레프 톨스토이라도 이런 것은 절대로 지어내지 못할 테지만, 때로는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ㅇ이 절대 무슨 작가들이 아니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관리들, 잡글쟁이들, 평신도 사제들이란 말일세……" - P258

물론 고통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대신 살고 있잖은가,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누리고 있지, 왜냐하면 고통은 곧 삶이니까. 고통이 없다면 삶에 무슨 낙이 있겠나 ― 모든 것이 그저 끝없는 기도로 변하고 말 텐데. - P264

그 일화는 너무 독특한 것이어서, 내가 그걸 어디서 따왔을 리는 없어. 그걸 까맣게 잊다시피 했는데…… 지금 무의식중에 머리에 떠올랐어 ― 바로 내 머리에 저절로 떠오른 거지, 네가 얘기한 게 아니야! 인간은 이따금 수천 가지 일을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떠올리거든, 심지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말이야…… 그 일화는 내 꿈속에서 떠올랐어. 그러니까 너도 이 꿈인 거야! 너는 꿈일 뿐, 실재하지 않아! - P269

"이토록 암울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거의 더이상 공포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는 데 우리의 공포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공포를 느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 같은 습성이지, 이런저런 개인의 개별적이 악행이 아닙니다." - P363

"오, 우리는 사람들에 에워싸며 살면서 무엇이든, 심지어 가장 악마 같고 위험한 생각조차 그들에게 즉시 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기 좋아하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당장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곧바로 전적인 동감을 표해주고,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함께하며 우리에게 맞장구 쳐주고 우리의 성정을 거스르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 P383

자신의 제한된 존재 속에 갇힌 채 세상 전체를 비난하는 그런 영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혼을 자비로써 압도해주십시오, 이 영혼에 사랑을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면 이 영혼은 자신이 한 일을 저주하게 될 터인즉, 이 영혼 속에는 선량한 싹들이 너무도 많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 P472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많은 얘길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이처럼 아름답고 신성한 어떤 추억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좋은 교육일 겁니다. 그런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이랍니다. - P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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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지리학인가 - 수퍼바이러스의 확산, 거대 유럽의 위기, IS의 출현까지 혼돈의 세계정세를 꿰뚫는 공간적 사유의 힘
하름 데 블레이 지음, 유나영 옮김 / 사회평론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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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엔가 처음 읽었으니, 5년만이다. 올해에는 지정학과 에너지 관련 책을 여러 권 읽어 관련 지식이 더 풍부해져 이해도가 더해질 수 있었다. 관련 서적 중 가장 교과서적이라 할 만하다. 각 나라의 지리적 기초는 물론, 테러리즘, 기후변화, 인구론의 기원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과학서적이지만 인류애에 대한 따뜻함도 놓치지 않는다. 이슬람에 대한 저자의 약간의 편견이 아쉽긴 한데, 책이 갖는 가치를 훼손할 만큼은 아니다. 지리학과 지정학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읽을 것을 권한다. 정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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