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미날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최봉림 구 역본으로 읽은 지 8년 만.

이번 독서에서 새로 발견한 점을 몇 개만 적어본다.


1. 선동가들에 휘둘린 노동운동에 대한 경고

처음 읽었을 때에는 마지막 문장에 매료되어 노동운동이 싹트고 있음을 알리는 혁명소설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것은 한 단면일 뿐이다, 외지에서 온 어설픈 혁명가의 심리도 함께 비판함으로써 선동의 위험성도 함께 다루고 있다. 랑티에는 막장을 단 한 번 경험하고는 그 비참한 생활에 증오를 품는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에 대해 탐독하면서 혁명을 꿈꾸고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다. 공제조합을 설립을 주도해 돈 좀 만지고, 멋도 부리고, 인기에 취해 국회의원을 꿈꾸기까지 그의 변화하는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르주아를 증오하지만 부르주아를 닮아가고, 그럼에도 그 현실을 부정한다. 조지 오웰에 앞서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끄집어낸 것이다.


2. 탐욕적 자본가가 아닌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고발

작품은 노사 간 대립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작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본가들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광부들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CEO(엔보 씨),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진취적 기업가이되, 역시 아버지의 입장에서 광부들을 감싸는 탄광주(드뇔랭), 조상이 물려준 돈을 투기하지 않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도 베푸는 연금생활자(그레구아르 부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탐욕적 자본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실제로는 탄광 현장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광부들에게 전가하고 그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혁명을 일으킨 광부들도 그리 과격분자는 아니다. 파업이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자본가의 집에 일하는 하녀는 말한다. "하지만 참 이상하네요, 저 사람들은 절대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순종하던 사람들이 선동에 휘둘려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선동가들도 그들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3. 국가, 그리고 자애롭기만 한 나라의 존엄

작품에서 국가의 역할은 중재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자본가의 편에서 폭력적인 민중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장랭은 폐쇄된 탄광을 지키던 소년병을 이유없이 살해한다. 한편, 마외네 집에서 팔고팔아 더 이상 팔 게 없게 되었을 때(『목로주점』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황제와 황후의 초상만이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자애로운 미소로 가족을 내려다본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 부분이 특히 오늘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게 느껴졌다. 소탈하고 자애로운 모습만 보여주는 지도자는 그림에 불과할 뿐 국민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에너지

작품에서 석유는 작품에서 '등유'로 기능하는, 아주 초기의 모습을 보여준 점이 눈에 띄었다. 이후 1차 대전을 전후로 석유가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된다. 그럼에도 석탄은 여전히 화력발전 등 국가 에너지의 주요 원천이다.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는 광산노동자 파업에 단호히 맞서 이른바 '영국병'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공부가 필요하다).


'제르미날'은 혁명력에서 '싹트는 달', '파종월' '牙月' 등으로 번역되며, 3~4월을 가리킨다. 30대 초반에 읽었을 때에는 노동운동과 혁명만을 다룬 것 같았던 이 작품은 이렇게 다층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물론 작품의 결론은, 광부들은 얻은 것 없이 탄광으로 돌아갔지만,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싹이 트고 있음을 자본가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들의 삶은 점차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을 노동현실을 보면,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러나, 두번째 독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를 묘사하는 데 절묘한 균형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었다. 그 동력은 작가가 장기를 발휘하여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언어와 행동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데 있다. 역시 Zola 위대한 작가이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 한 사내가 짙은 어둠 속을 뚫고 허허벌판에 난 도로 위를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마르시엔과 몽수를 잇는 포장도로가 사탕무밭을 가로지르며 10킬로미터에 걸쳐 곧게 뻗어 있었다. - P9

르 보뢰는 깊은 땅 속에 납작 웅크린 음험한 짐승처럼 한껏 몸을 움츠리면서 거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치 인간의 육체를 집어삼켜 속이 더부룩한 것처럼. - P26

갱도는 그런 식으로 채탄부들이 내리는 적치장의 깊에 따라 왕성한 식욕으로 인간 가축들을 집어삼켰다. 결코 달래지지 않는 허기를 드러내며, 세상 사람들 모두를 소화하고도 남을 것 같은 거대한 창자를 끊임없이 꿈틀대면서, 갱도는 인간 가축들로 채워지고 또 채워졌다. - P48

그는 갱 속으로 다시 내려가 고통받고 싸우기를 원했다. 그리고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본모르 영감이 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와, 땅속에 웅크린 채 인간을 포식하고 있는 신을 떠올렸다. 만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정체도 모르는 그 신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 P117

광부는 목에 낀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맥주를 마셔야만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 때까지 술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누구를 탓하려는 말은 아니지만, 광부들이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152

아! 젊음이란! 아무리 먹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탐욕스러운 시절이 아닌가! - P193

그들은 지금 드디어 정의를 실현하게 될 멋진 계획을 세우고, 그를 위한 선전을 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이제 국경 따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다 함께 들고일어나 한데 모여 노동자들이 마음놓고 빵을 먹을 수 있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었다. - P223

땅속 깊은 곳에서 광부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곡식의 낟알처럼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은 어느 날 아침, 들판 한가운데서 그 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게 될 터였다. 그렇다, 인간들이 자라나는 것이다. 정의를 바로잡을 한 무리의 인간들이. 대혁명 이후로 모든 민중이 평등한 존재가 된 게 아니었던가? - P262

그때부터 에티엔도 점점 달라졌다. 빈곤함에 묻혀 잠들어 있던, 멋과 안락함을 향한 본능이 깨어난 그는 나사 모직 옷들을 사들이고, 고급 부츠도 한 켤레 샀다. 그리고 단번에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탄광촌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자존심의 달콤한 충족을 경험한 그는 처음으로 맛보는 대중적인 인기의 쾌감에 흠뻑 빠져들었다. - P268

이제 한 단계 높은 세상으로 올라선 그는 지적인 만족감과 안락한 삶을 맛봄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부르주아지의 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 P353

파리는 멀이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지만, 혹시 또 아는가? 언젠가는 국회의원이 되어, 화려하게 장식된 회의장 연단에 서서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한 노동자 출신으로서 당당히 연설해 의기양양한 부르주아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 P354

"일부러 혼란을 가중시켜 그 틈에 자기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뿐일세." - P376

그렇게 머리를 억지로 쥐어짜다보니 더이상의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면서 그는 광신도처럼 자기 자신을 맹신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감성과 양식에서 비롯된 신중함마저 점차 사라지면서 새로운 세상의 실현보다 더 쉬운 일이 없는 것처럼 떠벌렸다. - P446

작업반장들은 하나같이 그런 문제점을 지적한 것을 짜증스러워하면서 똑같은 말로 대꾸했다. 저들이 원하는 건 석탄이니까 지주 보강 작업은 나중에 하면 된다는 거였다. <2권> - P257

땅속에 파묻힌 광부들을 구조하는 일은 그들을 더욱더 열광시켰다. 네그렐은 마지막으로 구조를 시도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를 돕겠다는 지원자는 넘쳐났다. 광부들은 피 끓는 형제애를 내세우며 한달음에 달려와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들은 파업을 했던 사실도 잊은 채 임금 문제에도 더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동료들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 순간부터 아무 대가 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자 했다. 모두가 그곳에 와 있었다. <2권> - P298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밝고 선명한 초록색 벽에 붙어 있는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 뿐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인 자비로움을 과시하듯 발그레한 입술로 미소짓고 있었다. <2권> - P313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2권>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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