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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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3년 경 김연경본으로 읽었으니, 거의 8년 만이다. 도스또예프스끼 탄생 200주년이라 하는데, 비싼 열린책들 기념본 뇌동매매는 자제하고(인테리어로만 기능할 확률 99.9%), 책장에 덩그러니 홀로 놓여 있던 김희숙본 1권을 시작으로 한 권씩 구매하면서 차근차근 읽어 나가기로.


앞뒤로 뒤적이고, 밑줄 긋고, 인상적인 부분은 통째로 타자를 쳐가며 꼼꼼히 읽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의 장광설에 막혀, 전체적인 내용은 알겠지만, 디테일에서는 놓친 게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대심문관의 말이나 스메르쟈코프의 궤변스런 논증,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 등은 너무 길기 때문에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무진 애를 먹었다.


반면,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은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데, 부분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지점이 많다. 섬망증에 걸린 이반 표도로비치의가 자신의 내면과 대화할 때에는 프로이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언젠가 더 옛날에 한번은 "어째서 당신은 그 아무개를 그토록 증오하는 거요?"라는 질문을 받았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그는 어릿광대 같은 파렴치한 감정이 폭발해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왜냐하면 이렇소. 그 사람은 사실 나한테 아무 짓도 안했지만, 대신 나는 그 사람한테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나 했소. 그런데 그 짓을 하자마자 바로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증오하게 되더란 말이오."


너도 그녀를 본 적이 있지? 정말 미인이잖냐. 그런데 그때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런 게 아니었어. 그 순간 그녀가 아름다웠던 건, 그녀는 고결하고 나는 야비한 놈이라는 것, 그녀가 관대하고도 숭고하게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나선 데 반해, 나는 빈대에 불과하다는 것 때문이었어


그렇게 자기 가슴 속을 모두 털어놓자마자, 나한테 그렇게 자기 가슴속을 다 보여줬다는 게 갑자기 부끄러워진 겁니다. 그래서 나를 이제 증오하게 된 거죠. 그는 끔찍이도 부끄러움을 잘 타는 가난한 사람에 속합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나를 너무 빨리 자기 친구로 받아들이고 너무 빨리 자신을 내줬다는 데 스스로 모욕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 일화는 너무 독특한 것이어서, 내가 그걸 어디서 따왔을 리는 없어. 그걸 까맣게 잊다시피 했는데…… 지금 무의식중에 머리에 떠올랐어 ― 바로 내 머리에 저절로 떠오른 거지, 네가 얘기한 게 아니야! 인간은 이따금 수천 가지 일을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떠올리거든, 심지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말이야…… 그 일화는 내 꿈속에서 떠올랐어. 그러니까 너도 이 꿈인 거야! 너는 꿈일 뿐, 실재하지 않아!


오, 우리는 사람들에 에워싸며 살면서 무엇이든, 심지어 가장 악마 같고 위험한 생각조차 그들에게 즉시 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기 좋아하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당장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곧바로 전적인 동감을 표해주고,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함께하며 우리에게 맞장구 쳐주고 우리의 성정을 거스르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8년 전『죄와 벌』(홍대화 역)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김연경 역)을 처음 읽었을 때, (살해도구가 도끼라서 그런지) 강렬하고 메시지가 뚜렷한 『죄와 벌』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도, 많은 도끼 팬들이 『까라마조프 형제들』를 최고로 여기는 게 이상했고, 내 이해력이 문제라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두번째 읽은 지금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두 최고의 심리소설이긴 하지만, 『까라마조프』에는 민중의 구원과 기독교적 인간애가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초반 조시마 장로의 설교, 조시마 장로의 회고, 에필로그에서 일류사를 떠나내는 알료샤와 소년들의 맹세는, '친부 살해'라는 잔인한 소재와 대비되어 깊은 감동을 준다. 거기에 거장의 미완성 유작(2부작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아쉬움까지 더해진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게 아닐런지. 나에게는 아직까지 6대 4 정도 『죄와 벌』이 판정승이지만, 나이가 더 들어 ― 아마도 저자의 나이가 되어 ― 읽으면 『까라마조프 형제들』이 인생 최고의 문학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식 이름에 익숙해 진 점은 이번 독서의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부칭과 수많은 애칭에 굴하지 않았다. 또 역자는 집요하게 러시아식 표현들을 살리려 애쓴 것 같은데, 그게 우리말로는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네들의 정서를 담아내는 것 같아, 되도록 저항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 '존대법'이 그런 경우인데, 알료샤와 열네살 소년들이 맞존대 한다든가, 약간 정신이 이상한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에게 굽실대며 존대를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역자는 일일이 주석을 달아 읽는 이들의 심리적 불편함을 최소화 시키려 했다.


주석 뿐 아니라 번역도 매우 훌륭하다고 평하고 싶다. 매우 긴 문장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으며, 다른 도끼 선생의 번역서들에 비해 힘을 많이 뺀 느낌이었다. 여성적인 도스또예프스끼라고나 할까. 게다가 주석도 간략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렵지만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다만, '縣'이나 'O등 대위' 같은, 일제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역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 아쉬운데, 이는 우리나라 러시아 문학계가 함께 고민하기를 바란다(러시아 문학 출판의 대장주인 열린책들이 나서야 하는 건 아닌지).


마지막으로, 나는 성경은 단 한 번 정독했을 뿐이지만, 이 작품의 題辭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 본문에서도 두어번 정도 언급되는 이 말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두번째 읽은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요한복음」12장 24절


나의 주인공인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전기를 시작하며 나는 어떤 당혹감에 빠져 있다.
- P13

무엇보다 거짓을, 모든 종류의 거짓을, 특히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하십시오. 자신의 거짓을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그것을 들여다보십시오.
- P118

그들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머무르는 한, 어떤 학문도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할 것이고,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우리의 발아래 갖다 바치면서, ‘차라리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제발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 P512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사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설령 주위가 온통 빵으로 넘친다 해도 인간은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머무르느니 서둘러 자신을 없애버릴 것이다. - P515

인간은 기적을 부정하는 그 순간 곧바로 신까지 부정하게 되고 마니, 이는 인간이 신보다는 오히려 기적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P517

끈적이는 어린 새잎들을 내가 정말 사랑할 수 있다면, 오직 너를 떠올림으로써만 그것들을 사랑하게 될 거다. 네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고, 삶에 싫증을 내지 않을 거야. - P534

영리한 사람과는 잠깐 얘기해도 흥미롭다더니, 그럼 그 말이 맞군요. - P565

내가 너를 그에게 보낸 건, 알렉세이, 같은 형제인 너의 얼굴이 그를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에게 달렸고, 우리의 모든 운명도 마찬가지란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명심하거라. - P13

"몇 달, 몇 년을 더 살 겁니다." "아니, 몇 달, 몇 년이 왜 필요합니까!" 형이 소리치지요. "뭣하러 날수를 셉니까, 인간이 모든 행복을 알게되는 데는 단 하루로 충분해요." - P22

작은 씨앗, 아주 작은 씨앗 한 알만 있으면 됩니다. 순박한 평민의 영혼 속에 그것을 떨어뜨리면, 그것은 죽지 않고 그의 영혼 속에서 한평생 살게 될 것이며, 밝게 빛나는 점과도 같이, 위대한 암시와도 같이, 암흑 속에서도, 그의 죄악의 악취 속에서도 몸을 숨긴 채 살아 있을 것입니다. - P31

민중을 소중히 아끼고 민중의 마음을 잘 지켜주십시오. 정적 속에서 민중을 교육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여러분 수도사들이 수행해야 할 위대한 일이니, 이 민중이야말로 ― 하느님의 체득자이기 때문입니다. - P74

그대는 그 누구의 심판자도 될 수 없음을 특별히 기억해두라. 그것은 이 심판자가 자신이 자기도 그의 앞에 서 있는 자와 똑같은 죄인이며,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의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책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는, 이 지상에 범죄자의 심판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 P88

그대는 그 누구의 심판자도 될 수 없음을 특별히 기억해두라. 그것은 이 심판자가 자신이 자기도 그의 앞에 서 있는 자와 똑같은 죄인이며,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의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책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는, 이 지상에 범죄자의 심판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 P90

아픈 사람을 하나 거기다 두고 와서. 그 사람이 낫는다면, 나을 거라는 걸 안다면 당장 내 인생에서 십 년이라도 내놓을 텐데! - P312

내가 화나는 건, 그이가 나 같은 여자를 두고 질투했대서가 아냐, 전혀 질투를 안 한다면 오히려 화가 났겠지. 나는 그런 여자야. 질투를 한대서 화를 내지는 않아, 나 자신도 성미가 사나워서 질투를 잘 하니까. 다만 내가 화나는 건, 그이가 나를 전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지금 일부러 질투하는 척했다는 거야, 바로 그거야. - P113

거기엔 그런 사람들이 많아, 수백 명은 되겠지, 땅 밑에서 손에 망치를 들고 사는 사람들이. 오, 그래, 우리는 쇠사슬에 묶이고 자유를 잃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 우리의 위대한 고난 속에서 우리는 새로이 기쁨으로 부활할 거야, 기쁨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도 없고, 하느님도 존재할 수 없어, 왜냐하면 하느님은 기쁨을 주는 존재니까, 그건 하느님의 특권이야, 위대한 특권……주여, 기도 속에 인간이 녹아 스러질지어다! 거기 땅 밑에서 하느님 없이 내가 어찌 살겠어? - P163

어떤 사람은 치구가 되느니 차라리 적으로 있는 게 더 유리하지. 이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 P167

"꿈을 꿀 때, 특히 뭐 저기 위장장애나 다른 무슨 이유로 악몽을 꿀 때, 이따금 인간은 지극히 예술적인 꿈을, 지극히 복잡하고도 실제적인 현실을, 그런 사건들을, 또는 그런 사건들이 아주 교묘한 구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세계 전체를, 그것도 자네들 세계의 가장 숭고한 현상들로부터 셔츠 가슴판에 달린 마지막 단추 하나에 이르기까지, 예쌍도 못할 만큼 아주 세세하게 보게 되지, 맹세코 레프 톨스토이라도 이런 것은 절대로 지어내지 못할 테지만, 때로는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ㅇ이 절대 무슨 작가들이 아니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관리들, 잡글쟁이들, 평신도 사제들이란 말일세……" - P258

물론 고통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대신 살고 있잖은가,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누리고 있지, 왜냐하면 고통은 곧 삶이니까. 고통이 없다면 삶에 무슨 낙이 있겠나 ― 모든 것이 그저 끝없는 기도로 변하고 말 텐데. - P264

그 일화는 너무 독특한 것이어서, 내가 그걸 어디서 따왔을 리는 없어. 그걸 까맣게 잊다시피 했는데…… 지금 무의식중에 머리에 떠올랐어 ― 바로 내 머리에 저절로 떠오른 거지, 네가 얘기한 게 아니야! 인간은 이따금 수천 가지 일을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떠올리거든, 심지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말이야…… 그 일화는 내 꿈속에서 떠올랐어. 그러니까 너도 이 꿈인 거야! 너는 꿈일 뿐, 실재하지 않아! - P269

"이토록 암울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거의 더이상 공포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는 데 우리의 공포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공포를 느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 같은 습성이지, 이런저런 개인의 개별적이 악행이 아닙니다." - P363

"오, 우리는 사람들에 에워싸며 살면서 무엇이든, 심지어 가장 악마 같고 위험한 생각조차 그들에게 즉시 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기 좋아하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당장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곧바로 전적인 동감을 표해주고,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함께하며 우리에게 맞장구 쳐주고 우리의 성정을 거스르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 P383

자신의 제한된 존재 속에 갇힌 채 세상 전체를 비난하는 그런 영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혼을 자비로써 압도해주십시오, 이 영혼에 사랑을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면 이 영혼은 자신이 한 일을 저주하게 될 터인즉, 이 영혼 속에는 선량한 싹들이 너무도 많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 P472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많은 얘길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이처럼 아름답고 신성한 어떤 추억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좋은 교육일 겁니다. 그런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이랍니다. - P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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