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초한전 - 새로운 전쟁의 도래
이지용 지음 / 에포크미디어코리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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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절 연휴 기간은 여러 책들을 읽었다.

경제 분야와 철학 그리고 소설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나가졌다.

그러다 초한전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초한전을 읽는 동안, 얼마전 썼던100만 요우커에 대한 씁슬한 우려가 현실적인 걱정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2011년에 발생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2011 3, 당시 이명박 정부 시절, 중국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스캔들이란 이름으로 치정(痴情)에 얽힌 공직자 기강 문제가 교민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영사들과 중국인 여성 덩신밍邓新明)이란 사람과 얽힌 스캔들이었다.

덩신밍은 비자 브로커 역할을 하며 총영사관의 영사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사적으로 금전적 이익을 취했으며 또한 당시 정부 및 야당 고위 인사 200여명의 개인 정보를 빼어갔다. 이 스캔들은 영사 H 그리고 그외 영사들 과의 복잡한 치정 관계로 인해 덩신밍의 남편이었던 K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 지게 된 것이다.


덩신밍은 아마도 2011년 전 보다 훨씬 전에 당시 영사 H와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덩신밍이 H의 차량에 접촉 사고를 내면서 그들의 치정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덩신밍에게 H는 호감을 느꼈고 이후 덩신밍과의 자주 만남을 하면서 자연스레 덩신밍은 상해 총영사관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덩신밍은 이후 비자 브로커로 변신했고, 중국인들의 한국 비자는 덩신밍을 통해야먄 비자 발급이 가능하도록 영사관과 모종의 거래를 맺은 것이다. 이후 이런 행위를 못 마땅한 다른 영사들의 반발에도 덩신밍은 오히려 이의를 제기한 한국인 영사에게 "중국에서 죽고 싶냐? 아이들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 같냐?" 는 협박성 말들을 서슴없이 뱉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H외에도 다른 영사와도 관계를 맺었고 어떤 영사는 "자신의 사랑이 변한다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는 각서를 썼다는 발언도 이어졌다.

이것은 모두 스캔들이 터지고 정부 인사가 영사들을 상대로 얻어낸 조사에 불과하다.

실제 스캔들을 조사하러 온 감찰조는 정작 사건의 핵심인 덩신밍을 만나지조차 못했다. 중국에서 중국인을 취조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감한 사안은 외교문제로 비화가 되기 때문에 중국쪽 공안은 협조를 안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후 덩신밍에 대해 전해지는 소식은 없다. 공식석상에서 그녀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측 조사는 덩신밍은 단순한 브로커로 밝혔고 공직자 기강 문제로 결론을 냈다.

과연 단순한 치정에 얽힌 브로커일까? 아니면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 였을까?


2011년 이명박 정부 시절 김영기 총영사를 파견했다. 당시 자료를 보면 그의 총영사라는 직함은 외교적 실무가 없는 낙하산 인사였다고 평가했다.

당시 고위 공무원들의 해외 파견은 국내에서 고생했던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가 강했다고 한다. 즉 놀러 온 것이다.

그는 파견 이후 전노무현 정부시절에 파견되었던 H영사와는 서로 사이가 맞지 않는 사이였다고 한다. 즉 현정부 인사와 전정부 인사간의 알력 다툼이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권력의 다툼 끝에 상하이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스캔들이 터졌지만, H영사와 덩신밍의 관계는 이미 그 정권 교체기 전부터 이어져 온 셈이다.


이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비자 없이 국내에 온 중국인들이 전부 관광객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겠지만 그중 만에 하나라도 범죄와 국가 보안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러 온 자들이라면?

단순한 음모론으로 여기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조짐이 안 좋다.


중국어로 공작工作 이라고 하면 업무, 일 로 번역한다.

여기다 비밀(秘密)을 붙히면 비밀공작, 즉 스파이 업무가 된다.

덩신밍의 브로커는 어쩌면 비밀 공작을 위장하기 위한 업무가 아니였을까?

그에 대한 판단은 이제 우리 각자가 해야 한다.

아무도 공식적으로 판단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초한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현재 우리는 또다른 덩신밍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한전(超限战)은 조용히 작동중인 전쟁이다. 총도 미사일도 탱크가 필요가 없는 전쟁이기도 하다. 덩신밍의 출현은 스캔들이 아닌 패턴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무관심과 안일함 속에 파고드는 비밀공작에 대해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하인리히 법칙에 지배당한 후가 될 것이다.

초한전, 이미 시작되었다.

전장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다.

누가 먼저 깨어날 것인가?

그 답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

잠든 마음을 깨우는 것, 그것이야 말로 가장 조용한 전쟁에서 첫 승리가 될 것이다.

🖋 Dharma & Maheal


결론은 아무런 규칙도 없고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초한전의 핵심이다. - P68

한 사회 상위 5% 집단을 제거하면 목표의 절반 이상을 달성한 것과 마찬가지다.5% 엘리트 계층이 정권과 안보의 핵심이므로 이들을 제거하면서 정부 권력과 무력(정권, 군대, 경찰, 사법, 언론 등)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4

강고한 보루를 공략하는 가장 쉬운 길은 내부에서부터의 붕괴다.
레닌Lenin - P120

중국과 함께 가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중략....
우리가 잊은, 또는 애써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다. 바로 중국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이고, 중화민족주의로 무장되었으며, 패권을 장악해 국제 정치 질서를 자기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팽창 정책을 공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국가라는 사실이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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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요우커 100만명 시대의 씁쓸함에 대하여


오늘부터 중국은 8일까지 국경절 장기 휴일에 들어 갔다.

우리 정부는 9 29일부터 중국인 요우커(游客:관광객)에 대한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였다.

작년에 중국이 이미 우리에게 일방적인 한 달짜리 무비자 입국을 허용해 준 후 우리 정부도 상호 주의에 근거하여 같이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셈이다.

이번10월 국경절 휴가를 맞이하여 정부 추산으로 약 100만명이나 달하는 요우커의 무비자 입국이 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 숫자만큼 우려가 깊다. 요우커 유치로 단기적 경제 활성화라는 장미빛 희망이, 장기적 국익과 안전을 위협하는 자충수가 되지는 않을 런지 걱정이 앞선다.


원래 우리나라의 경제의 근간은 동남아 지역의 국가와는 다르게 관광 산업이 아닌 제조업과 최첨단 기술이다. 혹여 나중에 요우커들이 등을 돌릴 경우에는 어떻게 할 지 대비하지 않고, 시스템 취약성을 개선하지 않으며 단기적 특수에 매달리는 것은 국가적 전략적 방향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한 가지 큰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 전조 현상으로 아주 사소한 경미한 사건 300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보다는 엄중한 사건 29건이 발생한다. 그때 그러한 전조를 무시하면 마침내 크나큰 재앙과도 같은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는 것이다.


최근 정부의 국가적 전산망 화재로 인해 행정, 보안 시스템의 허술함이 드러났다.

이러한 때에 요우커 100만명이 무비자로 입국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지 정말 걱정이 된다. 이러한 우려를 가짜 뉴스라고 치부하는 언론도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가짜 뉴스는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인지

미국이나 유럽 같은 사법 체계가 엄격한 나라 조차도 해마다 1% 정도의 불법 체류자를 놓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과연 더 철저하게 걸러낼 수 있을까?

정부가 내세운 사전 서류 심사 진행은 서류 조작 가능성, 여행사 통제 문제등이 발생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말 실효성이 있을지

과연 요우커의 국내 체류 동선을 얼마나 잘 관리하게 될지 가늠이 안된다.

100만명의 1% 1만명이다.

1만명이 불법 체류를 하게 된다면 누가 관리할 것인가?

요유커로 인해 활성화되는 경제적 이익보다 불법 체류자, 범죄자 관리에 들어가는 치안, 행정, 통역 인원 및 수용 시설까지 모두 우리의 세금으로 부담해야 한다.

과연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이익 대비 낭비하는 혈세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최근 몇 년 전부터 캄보디아에서 중국인 범죄 집단 중심으로 한국인 유괴 납치가 이루어 졌다. 납치된 한국인 들은 보이스 피싱, 금융 사기, 장기 매매 같은 끔찍한 범죄에 연루되고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 있지만 이러한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해마다 오히려 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법 제도와 중국의 사법 제도를 비교하면 처벌 수준은 솜방망이에 불과 하다. 그들이 그 점을 악용하여 극히 작은 일부라도 범죄 집단이 국내에 거점을 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라고 이러한 범죄 집단과 연결이 안된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요우커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또한 모든 중국인을 악마화 하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 그건 불의이다. 하지만 1% 악의를 가진 자에 대한 대책과 검증에 대한 시스템이 정말 잘 작동되고 있는지 불안은 정당하다.

제발 하인리히 법칙에 지배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차지하는 나 같은 50, 기성세대는 단기적 경제 논리에 함몰되어 젊은 세대가 살아갈 미래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책을 묵과해선 안된다.

여당의 안일한 자신감이나 야당의 공포심 유발 발언 모두 실질적 대안 없는 각자도생 같은 무책임한 말로 들린다.

이 문제의 원인은 정치권에 있지만 특히 기성세대가 미래 세대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감시하고 강력한 대안을 촉구해야 할 책임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인리히 법칙이 지배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적어도 당장은 국가의 최소의 의무를 요구해야 한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투명한 수치와 시스템의 작동을 보여 줘야 하며, 시민은 일상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다시 돌아와 믿어야 할 것은 내 자신 뿐이라는 냉소만 짓게 된다.

믿어야 할 것은 깨어 있는 내 근본 뿐이다.

나의 젊은 시절, 25년 간을 살아왔던 중국이 어쩌다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참으로 씁쓸해진다.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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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그런 나는 없다
홍창성 지음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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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얇다. 디자인도 깔끔하다.

불교의 핵심 진리인 '무아'에 대한 책이다.

제목도 '무아' 라는 뜻에 걸맞게 하얀 바탕에 드러나지 않는 음각으로 인쇄가 되어있다.

이책의 흥미로운점은 불교라고 해서 어려운 한문풀이나 구구절절 고리타분한 교리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요즘 세대들도 쉽게 읽을수 있는 문체로 되어있어 편하게 볼수 있다. 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볼만한 책이다.

 

이책에서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궁극적인 철학적인 질문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이 질문이 과연 타당한것인가? 라는 작가의 견해가 흥미를 끈다.

이후 기독교의 '영혼'과 소위 '나' 라고 일컫는 실체에 대해 파헤쳐본다.

파헤치는 도구는 언어철학, 불교의 연기론, 근대 데카르트의 서양 철학등을 동원한다.

그리고는 비교와 분석을 통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무아를 역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작가의 철학적인 분석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볼만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난  몇가지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작가가 강조하는 '무아' 는 글자 그대로 '내가 없다'는 무기공(無記空)에 치우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작가는 '참나'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참나' 라는것은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것으로 간주했고, 작가의 시각으로 보는 일부 불교계에서 주장하는 '참나' 라는것은 부처님께서 설한 '무아' 와는 위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게 아쉽냐면은 작가는 무아에 대한 단순히 평면적인 해석(내가 없다)을 한것이 아닌가 싶었다.

 

대행 큰스님께서는 무아에 대한 개념에 대해 '나를 무엇이다' 라고 딱 '나' 라고 고정할수 없어서 '무아'라고 설하셨다. 즉 '고정됨이 없는데 어찌 나 라고 세울수 있는가?' 하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무아' 라는것은 단순히 내가 없다는 개념이 아니라 '에고로서의 나' 를 없애면 자연히 참성품이 드러난다는 것 까지 포함된것 일것이다.

참성품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법화경에서의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성' 인것이다.

작가가 '참나'를 인정 하지 않겠다면 '불성'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그점이 모호하다.

만약 '불성'도 없는것이고 다 '무아' 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누구나 다 불성이 있고 부처가 될수 있다' 는 법화경의 설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조주선사의 선문답,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에 대한 대답 '무(無)' 라고 한것 처럼, 우리의 불성도 '무' 라고 받아 들여야 하는건지?

책에서는 정작 중요한 불성과 마음에 대한 언급은 전혀없다.

또한 부처님 열반시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 하라는 부촉(咐囑)을 남기신것은 불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등명 즉 '자신을 등불 삼아 밝히는것' 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인지?

'무아' 이므로 '밝혀야할 나' 는 없게 되는것인가?

이처럼 작가의 무아론을 확대하면 단순하고 피상적인 철학적 논리로는 부족해서 좀더 해설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었다.

더구나 책에서 마지막 해설중에 진제(참된 진리)라는 면에서는 무아가 맞지만 속제(세속적인 진리)라는 면에선 '실용적인 나' 의 일면도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이것으로 작가 나름의 결론인지 제안인지 모호한 설명을 내놓은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나' 라는 존재에 대해서 작가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무아' 와 함께 어설픈 절충안을 내놓은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자 실천의 종교이다.

분명 불교가 철학적인 면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목적은 마음의 불성을 깨닫고 부처가 되고 자유인이 되는데 있다.

또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 이라 하지 않던가?

불교는 분명히 서양 철학식의 분석과 비교로 배우고 깨닫는 종교가 아니라고 본다.

게다가 불교 또한 종교이기 때문에 믿음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된다.

더구나 믿음이 절대자를 향하는게 아니라 자신 자신에 대한 믿음, 즉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자기불성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무아'가 이치에 맞는다 하더라도 마음으로서 믿음과 수행이 깔려있지 않는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 이 되는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작가' 홍창성' 은 현재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의 철학과 교수님이시다.

작가가 주장하는 진리는 신비한 무언가가 아니고 오히려 단순하다는 명쾌함은 동의를 하지만 <무아가 곧 깨달음이고 행복이요 자유>라는 불성을 배제한 '무아만능론' 에 가까운 주장에 대해서는 납득이 잘 안간다.

철학과 교수님답게 서양철학으로 불교 철학을 해석하신점은 탄복하지만 마음을 떠난 믿음과 수행이 바탕이 되지않은 문자 논박에 치우친점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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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2023.9.19일), 오늘 블로그에 올렸던 무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시 올려 본다.

그때 무아와 불성에 대한 고민을 했던 흔적을 다시 읽어 보니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무아와 불성은 둘이 아니다.

그리고 그 바탕은 믿음의 길 위에서 서는 것이며

그 길의 여정 끝이 바로 참나요, 자유인이다!" 라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실천에서는 아직도 머뭇 거려진다.

아마도 이 생이 다 할때 까지 여전히 방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운명이라면, 여전히 이번 생을 사랑할 것이다.

 

by Dharma & Maheal

만약 독자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오묘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이름을 묻는 ‘나는 누구인가?‘와 인생관이나 진로를 찾는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답이 분명하지 않은 이유는 질문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 P17

이제 우리는 붓다의 논증을 감상할 준비가 되었다... 중략...
붓다의 논증이 짧은 문장들로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에 그 숨어 있는 논증의 구조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지만, 역시 붓다다운 탁월한 가르침이다. - P66

나를 찾는 과정은 실은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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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GPU 적 사고와 공() 사유

세상은 직렬(直列)에서 병렬(竝列)로 이동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GPU를 세상에 내놓고 보니, 그것은 단순한 기술의 혁신이 아니었다. 기존의CPU는 직렬적 선형이었다. 

안정적이지만 단순했다. 즉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GPU는 코어를 직렬이 아닌 병렬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보다 빠르고 확장성이 넓어졌다

즉 새로운 세계를 열어 젖힌 것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GPU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수천 개의 연산 코어가 동시에 병렬로 움직이며 수많은 경우의 수를 열어두고 탐색한다

원래 GPU는 게임의 그래픽을 빠르게 그리기 위한 칩 이였지만, 지금은 인공지능과 가상세계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엔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사유(思惟)의 혁명이었다.

이 병렬적 방식은 단순히 컴퓨터 기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인류의 학문·스포츠·문화·종교까지 흐름은 GPU적으로 흐르고 있다.

UFC가 종합 격투기로 장르를 융합하고, 현대 축구가 공격과 수비의 경계를 허무는 멀티 전술로 나아가듯, 학문도 철학과 과학, 종교도 명상과 기도를 서로 차용하며 융합의 길을 걷고 있다.

인류는 이미 병렬적 사고를 통해새로운 진화의 길을 밟고 있다.


사실 병렬적 사유는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과 수학, 자연학을 한데 묶어 탐구했을 때, 이미 그들은 GPU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또한 회화와 해부학, 공학을 동시에 넘나들며 병렬적 사유의 거인이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 중국의 북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영역을 허물고, 동시에 사유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학문은 쪼개지고 전문화되며 CPU적 직렬 사고로 흘렀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창의성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다시 GPU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다.

2500
년 전, 붓다는 이미 GPU적 사고를 완성시켰다.

바로 불교의 공() 사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본래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고, 오직 관계와 조건 속에서만 존재한다.

GPU 연산 역시 그렇다

GPU적 사고는 한 가지 고정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데이터라는 인연 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확률적 갱신으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

독립된 코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연기의 망 속에서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GPU적 사고란 확실성 대신 가능성, 단일 해답 대신 확률적 갱신, 고정된 실체 대신 공적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인공지능이 가르치는 사유 방식이며, 불교가 오래 전부터 일깨워온 깨달음이다.


이것은 니콜라 테슬라가 교류(AC)를 선택해 현대 문명의 불을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에디슨의 직류(DC)는 안전했지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교류는 흔들리고 떨리지만 오히려 멀리까지 빛을 전했다.

병렬적, 진동적, ()적인 방식이 직렬적 확정성을 넘어선 것이다.

경제 또한 병렬적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주가가 오르는 것만으로는 풍요를 보장하지 않는다. 코스피 지수의 화려한 그래프 이면에 가계부채, 관세 협상의 실패, 부동산 시장의 불안이 얽혀 있다. 단선적인 수치만 보면 현실을 오도한다. 병렬적 시야로, 수많은 지표와 연동된 흐름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정치든 경제든 학문이든, CPU적 직렬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GPU적 병렬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이 사유의 전환을 인식하는 자가, 새로운 시대의 다빈치요, 새로운 부처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가능성 위에 있다.


공은 허무가 아니다가능성의 장이다.

GPU가 보여주듯, 공은 무수한 연산과 길을 품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직렬의 우물 안에 머무를 것인가, 병렬의 바다로 나아갈 것인가?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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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31

제목: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세상에서(서유기에서 귀멸의 칼날까지)



근래 들어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일본의 애니 〈귀멸의 칼날〉이 인기를 끌고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오니 즉 도깨비와 요괴가 사람들을 해치고, 그들이 속한 집단이 그것들을 멋지게 무찌른다. 걸그룹 헌터 귀살대(鬼殺隊), 이름은 달라도 핵심은 멤버들의 소속감이다.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또한 저들과 함께 도깨비를 무찌르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원형은 서유기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과 다르지 않다. 서천을 향하는 위에서 그들은 요괴와 맞서 싸웠다. 손오공은 여의봉을 휘두르고, 72가지 변신술로 저팔계는 삼지창으로 사오정은 반월 창으로 요괴를 제압했다. 오늘날 귀살대의 기둥()들이 호흡에 의한 검술이나, 걸그룹 헌터 춤과 노래로 펼치는 굿판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도깨비가 정말 있는가?

있다.

서로를 요괴라 부르며 끝없이 다투는 정치판 말이다. 다만 모습은 바뀌었을 뿐이다.

끊이지 않는 당파싸움, 허깨비를 만들어내던 조선의 사화와 쇄국정책이 모두 예다. 구한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로 태우고 병인, 신미양요 같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 자만과 동시에 세상의 흐름은 쳐 버렸다. 그에 반해 일본은 흑선의 충격을 받아 보신전쟁(1868)으로 봉건을 청산하고 근대를 열었다. 같은 시기, 우리는 내부의 허깨비와 싸우느라 정작 진짜 도깨비와는 맞서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뒤에도 라스트 사무라이들과 신정부의 서남전쟁(1877)이라는 내전을 치렀고 우리 조선은 동학혁명(1894)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양국에서 흘린 내전의 피는 서로 다른 열매를 맺었다. 일본은 근대화로 이어졌고, 조선은 식민지라는 비극으로 떨어졌다

역사는 도깨비와 허깨비가 얽힌 싸움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정의이고 상대당은 도깨비 같은 요괴 무리로 취급한다. 사실은 우린 여전히 허깨비와 싸우는 중이다.

진짜 도깨비는 여전히 곁에 놔두고 말이다. 관세, 환율, · 패권, 가짜 뉴스, 양극화 모든 것이 현대판 요괴들이.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의 여의봉 하나로는 모든 요괴를 이길 . 삼장 일행이 함께 힘을 모아야 했다. 귀멸의 칼날도, 케이팝 헌터스도 마찬 가지다. 귀살대가 호흡을 맞추, 걸그룹 헌터가 춤과 노래를 합주하듯이, 이제 우리도 함께 리듬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서유기와 귀멸, 케데헌에 이끌리는 까닭은, 함께 맞서야 요괴들을 무찌르며 길을 나섰던 기억이 집단 무의식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동양 삼국은 기억을 누구보다 깊이 간직해온 명일지 모른다.

도깨비는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도깨비와 허깨비의 구분뿐만 아니라, 어떻게 함께 도깨비를 무찌르느냐다.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도깨비 세상에서, 우리가 얻어야 것은 허깨비와의 다툼이 아니라 진짜 도깨비와의 싸움 끝에 손에 쥐는 보배다.
보배는 다름 아닌, 각자 가슴속에 품어야 행복이라는 여의주가 아닐까?


이상하고 아름다운 허깨비 같은 세상, 그대 도깨비가 보이는가?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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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3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깨비 세상의 허깨비는 도깨비가 만들어 내지만 현실 세상의 허깨비는 우리가 만들어 낸다는 것이 묘하죠. 우리가 만든 허깨비는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데 우리는 자는 게 아니라 자는 척 하기 때문에 절대 허깨비를 이길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싶어요. 차라리 깊이 잠들라!!!

마힐 2025-09-03 08:32   좋아요 1 | URL
귀멸의 칼날에서 혈귀들은 인간 보다 강하고 죽지도 않아요. 하지만 햇빛을 쬐면 바로 타서 죽어버려요. 그래서 그들의 최종 보스는 완전한 존재가 되려고 태양을 극복할 수 있는 청색 거미 꽃을 찾으려 했답니다. 하지만 거미 꽃은 일 년에 딱 이틀만 낮에 개화하기 때문에 밤에만 활동하는 그들은 절대로 얻을 수 없어요. 결국 불로장생인 그들 또한 거미 꽃이라는 허깨비를 쫓은 셈이죠. 결국 허깨비는 우리의 그릇 된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아무리 강한 존재 조차도 욕망과 집착이 있다면 허깨비 속에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잉크냄새님 말처럼 마음 편하게 차라리 깊이 잠이나 자면서 영생을 꿈꾸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ㅎㅎ

잉크냄새 2025-09-03 19:50   좋아요 1 | URL
차라리 깊이 잠들라는 잠으로 영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不知为不知의 의미라 생각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