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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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15

제목: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쌰오이에 (少爷)’ 란 말은 중국어에서 ‘도련님’ 이라는 뜻으로 지체 높은 집안의  주인 집 아들을 부를 때 쓰인다.

중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쌰오이에는 집안에서 철없는 골치 덩어리들이다.

조상 대대로 모아 놓은 재산을 쌰오이에가 사고치면서 전부 말아 먹는 내용들이 많다.  

위화의 대표적 소설 <인생(중국어 책 제목: 活着: 살아간다는 )>에서 주인공 푸꾸이(富贵) ‘쌰오이에’ 이다. 나는 위화의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먼저 접했었다. 영화에서 ‘쌰오이에’ 푸꾸이는 밤새 노름을 끝낸 후 뚱뚱한 기녀를 부른다. 푸꾸이가 축 처진 몸을 침대처럼 푹신한 기녀의 등에 업혀서 집으로 가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이 철없는 도련님은 도박으로 집안의 재산을 날려 먹는다.

 

 

위화의 대표 소설 <인생> 은 '쌰오이에 푸꾸이'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스쳐가는 죽음들을 통해서 중국의 근현대사를 말했다.

이번에 읽은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는 위화 자신의 인생을 말하고 있다. 위화는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위상을 지녔다. 그의 친구들이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엔(莫言),멘부커상 최종 후보자 엔렌커(阎连科), <나와 지단(我与地坛)>  작가 사철생(史铁生) 모두 쟁쟁한 작가들이다. 그들 모두 문화 대혁명이라는 폭풍을 직접 맞아본 세대로서 모두 위화와 개인적으로 무척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들을 중국 현대 문학의 사천왕(四天王)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들이 함께 공유했던 문화 대혁명은 각기 다른 성향의 명의 작가를 유머스런 동지애로 뭉치게 배경이 되었다.

이들에게 유머는 그들이 힘든 시기에 성장해야 했던 필수 영양분에 해당되는 셈이다.

 

위화가 성장했던 중국은 지금의 G2 되리라 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극심한 가난과 폭력적인 사상의 실험을 강행했던 대혁명의 나라였다.

책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는 대만에서 2011년에 출판된 책의 번역본이다.

한국어 부제가 <사람의 목소리는 빛 보다 멀리 간다> 인데 이는 책에서 작가의 생과 관련된 키워드 열 개의 단어 중 첫 번째, 인민 대한 회고에서 나오는 말이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 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 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있었다.> P.39 -인민 중에서.

 

위화에게 인민은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기 전,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몸으로 체득한 단어였다.

5월 35일, 즉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 6월 4일은 중국의 인터넷에서 쓸 수 없는 금기어로 사람들은 5월 35일이라 쓴다고 했다.

천안문 앞에 모인 전국의 대학생들의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함성과 목소리는 빛 보다 멀리 갔지만 결국 폭력적 탱크의 억압 앞에서 막히고야 말았다.

빛보다 멀리 갈 수 있었던 변화를 갈망 했던 에너지는 결국 어디로 갔을까?

 

위화는 천안문 사건 이후 응집되었던 에너지가 뿔뿔이 흩어져 결국 각자 벌기에 집착하는 행위로 변질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오늘날의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며 'MADE IN CHINA' 제품으로 성장한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생산했던 싸구려, 저질, 짝퉁 제품은 이제는 자동차, 조선, 우주 항공, 군사 부분을 넘어서 인공 지능 분야까지 첨단 산업으로 진화 중에 있다.

이런 진화의 배경에는 바로 인민들의 내적 변화를 바라는 힘이 밑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수가 서거했다는 소식에 우리는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았다. 천 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울음소리 속에서 나도 울고 있었다..중략....몇몇 사람들이 소리내어 울고 있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은 틀림없는 슬픔이었다.하지만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에서 한꺼번에 울부짖을 때,내가 느낀 것은 유머였다.> P. 69  -영수 중에서

  

영수(领袖) 뜻은 지도자, 즉 중국에서는 '마오쩌뚱' 을 일컫는 말이다.

위화는 모택동 서거일 , 광분에 찬 대중의 울음 속에서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 기괴한 울음 속에서 혼자 만 웃음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한번 터져 버린 웃음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야 말았다. 웃음을 들키는 순간 바로 거기서 인생은 끝이다.

결국 이런 광경을 본 친구가 있었지만, 후에 친구의 평가는 위화가 가장 슬프게 울더군. 너무 격하게 울어서 어깨까지 심하게 떨리더라니까

울음의 아이러니다. 아니 웃음의 아이러니 인가?

 

1960년 생, 위화는 마오쩌뚱 시대의 문화 대혁명을 겪었다.오늘날 문화 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으로 뒷방 신세에 지나지 않았던 모택동을 다시 부활 시킨 사건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시기 마오쩌뚱은 자신을 추종하는 홍위병들에 의해 인간의 위치에서 살아있는 신처럼 추앙 받게 된다. 지금도 중국의 시골 민가에 가보면 모택동 초상이 걸려 있는 집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그가 성장했던 그 시절은 혁명이란 이름 속에 폭력이 난무했고, 가장 가깝게 죽음을 목격할 수 있는 세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은 개인에게는 고통에 가깝다. 작가는 그 고통을 어쩌면 유머로 승화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쓴 작품 속에 늘 유머가 피처럼 흐른다. 하지만 그의 유머는 슬픔과 고통의 종착지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위화의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다. 그 시절 중국은 국가가 개인의 직업을 지정해 줬고 의사는 병원의 사택에서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위화는 어릴 때 부터 병원 수술실과 영안실을 놀이터로 삼아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수술중에 흘린 피나 영안실에 남겨진 죽음 그리고 홍위병들과 조반파(造反派)들이 인민들에게 행한 폭력과 살인들을 목격하며 자란 것이다.

책에는 고통과 흔들을 위화식의 유머로 자신의 성장과 중국의 성장 이야기를 말하고 있.

 

<나는 여성의 음부 그림을 보는 순간 내가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지나 않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지 못했다.내가 기억하는 것은은 그 뒤로 우리 중학교 친구들이 끊임없이 위층에 있는 우리 부모님 방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형 친구들과 똑 같은 괴성을 질렀다는 사실 뿐이었다.> p.97 -독서 중에서

 

<내가 베이징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로 하이옌 전체가 들썩거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베이징에 가서 원고를 수정하고 온 하이옌 사람이 되었다. 우리 현 간부들은 나를 천재라고 생각했고 내가 이 뽑는 일 대신 문화관 일을 해야 된다고 보았다.> P.147  -글쓰기 중에서

 

<내 친구는 또다시 고개를 떨어드리고 풀이 죽어 자리를 떴다. 그는 어째서 루쉬 선생이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말만 하는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 나는 깜짝 놀라서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갑자기 아주 거대한 논리의 허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P.173 -루쉰 중에서

 

<1949년,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 정권을 수립한 뒤로 혁명을 철저히 진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더 이상 무장투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략.. 그 뒤로 중국은 개혁 개방을 알리며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은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루어진 경제 기적에서도 혁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환골탈태하여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중국의 경제 기적안에는 대약진식 혁명운동도 있고 문화 대혁명식 혁명 폭력도 있다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P.222 -혁명 중에서

 

중국의 지폐는 1위안부터 시작해서 5위안, 10위안, 20위안, 50위안, 그리고 100위안 단위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지폐들의 초상화는 그냥 마오쩌뚱 얼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기타 다른 나라들이 자신 고국의 위대한 위인을 새겨 넣는 것과 달리 중국은 마오쩌뚱이 중국의 모든 위인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배출한 위대하고 여기는 위인들 공자나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징키스칸 같은 인물은 아예 끼지도 못한다. 만약 마오쩌뚱 초상화가 화폐에서 사라지고 다른 초상화가 오는 날이 있다면 그건 어떤 새로운 시대를 맞이 한 것 일까?

 

 신중국 설립 이후 많은 혁명을 진행해 오던 중국이 오늘날은 미국과 힘겨루기를 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한때 우리가 무시했던 가난한 중국이 어느덧 미국의 견제를 받고 전세계적인 우려를 받는 국가로 변한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반중을 넘어 혐중이 되는 날이 오리라고 상상조차 없는 시기를 겪고 있다. 중국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되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중국에서 25년을 살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중국이 혐오 국가가 된 것에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중국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도광양회(韬光养晦:빛을(재능) 감추고 어둠속에서 (실력을) 기른다)의 본색을 너무 일찍 드러낸 것일까?

위화가 책을 출판 때는 아직 2011년이다. 이제 15년이 지난 작금의 중국에 대해 작가는 어떤 키워드를 고를지 궁금하다.

중국이여, 세계의 쌰오이에(少爷) 되지 않길 바란다.

 

 

 

by Dharma & Maheal

 

스물두 살 무렵, 나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이를 뽑으면서 한편으로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를 뽑는 것은 생계를 위해서였고, 글쓰기는 나중에 더이상 이를 뽑지 않기 위해서였다. - P137

어떤 꿈 하나가 어떤 기억하나를 되돌리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마는 것이다. - P157

혁명은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거나 자수를 놓는 것도 아니다. ...중략...
혁명은 폭동이다. 한 계급이 한 계급을 전복하는 폭력행동이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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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0-14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가 오히려 현재 중국을 더 잘 설명해주는 말이 아닐까 싶네요. 시비가 하나의 사물 안에 존재하고 그저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저 말이 지금의 중국을 이끌었다면 앞으로 그들의 미래를 담을 새로운 가치관이 나오지 않을까요. 전 중국도 그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요.

마힐 2025-10-15 18:48   좋아요 1 | URL
과연 잉크냄새님께서는 중국에서 계셨던 분 답게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를 잘 아시는군요. 맞아요. 중국은 늘 변화하고 있지요. 중국 뿐만 아니라 만물이 다 고정되지 않는 거구요. 중국의 지폐에 마오쩌둥이 아닌 다른 인물이 나타나길 기대해 봅니다. 사실 저는 요즘 들어 한국 메스컴에서 중국인민을 너무 악마화 하는 것에 불편했어요. 그러나 또 중국이 도광양회를 버리고 중국굴기, 즉 패권주의로 치닫는 것은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우리나라나 대만은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위화의 글을 빌려 중국이 철없는 쌰오이에가 아닌 진정한 도련님 노릇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것이 꼭 ‘푸꾸이‘ 같다고나 할 까요?
균형적인 시각을 갖고자 하는데 쉽지는 않네요... ㅅㅅ˝
 

관노트

2025109 /

제목:  위버맨쉬와 불성

 

 

몇일째 지속되는 무료한 연휴 끝에 어제 알라딘 이웃 블로그 이신 Cyrus님의 니체에 관한 글을 보면서 갑자기 흥미로운 활력소가 살아났다.

보통 니체하면 떠오르는 말은 바로 신은 죽었다 라는 충격적인 선언이다.

철학에 대해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신은 죽었다는 말은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신이 도대체 죽은 것일까? 무엇 때문에 신은 죽었다는 거지? 같은 연속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질문이 생기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 어째서? 무엇 때문에? 라는 의심과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탐구에 몰두하게 된다. 답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질문의 동굴에 들어서는 순간 무조건 밝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안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란 이름에 밝은 (哲)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현대 철학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망치 철학자라는 별명처럼 니체의 강력한 질문은 니체 이전의 서양 전통 철학과 기독교적인 사상을 망치로 두들겨 팼다. 그 망치 한방에 어쩌면 신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을 때려 눕힌 망치에서 위버맨쉬라는 , 즉 초인 이라는 강력한 생명이 탄생했다.

니체는 과정을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사자에서 어린 아이로 변화하는 모습으로 비유를 했었다.

사실 비유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 스럽다.

갑자기 불교가 나오니 글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 무척 황당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교를 조금 접한 사람이라면 니체가 무슨 말을 하는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불교는 깨달음을 얻는 종교이다.  깨달음은 기독교의 구원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타의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닌 오직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에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많은 수행법이 존재한다. 어느 수행만이 깨달음에 이른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근기가 달라 각자의 인연에 따른 수행을 통해 시간이 걸릴지 언정 언젠가는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불교이다.

그런 수행법 중에 (戒).(定). (慧) 삼학을 닦는 과정이 있다.

 

 

계는 계율이다. 정은 고요함(선정)이다. 그리고 혜는 지혜를 말한다.

여기서 니체가 말한 낙타, 사자, 어린아이는 바로 불교의 삼학과 놀랍도록 일치 한다.

낙타는 짐을 싣는 동물이다.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고통은  계율을 지키는 수행과 같다.  사자는 용맹하며 기존의 모순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상징이다. 이것은 불교의 선정과 같다. 고요함은 반드시 휘몰아치는 폭풍을 거친 후 드러난다. 그것은 내 안의 다스리지 못한 의식, 즉 번뇌가 가라 앉은 지혜의 전 단계이다.  

이런 모든 것을 겪은 후에 비로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 까지 설명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대략 감이 것이다.

그렇다.  니체는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위버맨쉬를 탄생시켰다. 초인은 바로 불교의 보살과 같은 의미로 보여진다. 보살은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며 자신과 같은 경지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깨달은 사람들이다. 즉 위버맨쉬는 보살이다.

 

 

니체의 철학이 니힐리즘( 허무주의) 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니체의 말년이 정신병이란 업식에 걸려 그런 오해를 낳았다고 본다. 사실 니체의 철학만을 봤을 때는 니체는 오히려 신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신은 죽었을 지언정 니체의 다른 신인 위버맨쉬로 다시 창조 것이다.

니체 철학은 종말론이 아닌 창조론에 가깝다.

영원회귀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바로 불교의 윤회와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

다만 분명히 니체와 불교는 전혀 상관 관계가 없다. 또한 영원회귀 사상 또한 윤회 사상과 완전히 일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 철학이 불교와 유사한 점은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불교를 접한 사람이라면 니체에서 불교를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어쩌면 니체가 만든 철학이 바로 진리 일지도 모르겠다.

 

 

서양 철학이 현대에 수록 불교와 접점을 보이는 것은 우연히가 아니라고 본다.

니체가 청년 시절 매혹 시켰던 쇼펜하우어가 불교와 인도철학에 매료 되었던 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보다 전부터 유럽에서 불교와 비슷한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고 본다.   사실 스피노자 때 부터 이미 서양 철학은 이단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단이 탄생된 배경에는 데카르트가 있었다.  즉 데카르트 이원론에 대한 반론이 스피노자의 일원론인 것 처럼, 이미 16세기 부터 서양과 동양은 사상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유사해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바라본다.  데카르트가 씨앗을 심었고, 스피노자가 그 씨앗을 발화 시켰으며, 니체는 그 꽃을 피운 셈이다.

 

결국 철학의 시작은 질문에서 시작했다.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각자에게 있다. 내가 나의 길을 걸을 수 있을 때 타인에게 자신의 길로 가라고 할 수 있다. 내 길은 타인에게 맞지 않는 길이지만 나 한테 맞다면 그 길은 나의 길이 되는 것이다.

니코스카잔차 키스가 존경했다던 니체 그리고 베르그 송은 사실 같은 철학을 했다.

베르그 송의 엘랑비탈(생의 철학) 과 니체의 위버맨쉬(초인)는 아무런 접점도 없지만 놀라울 정도로 둘은 같은 경지를 말했다. 바로 불성(佛性)이다.

결국 위버맨쉬는 보살이자 불성이란 말이 된다.

물론 나의 이런 생각은 전혀 학술적인 근거나 가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러한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정답이 없는 철학에서 내가 찾은 나만의 정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만 한다.

? 어째서? 무엇 때문에?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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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5-10-10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정답이 없는 학문 맞아요. 애초에 정답이 있었으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철학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철학이라는 학문의 정체를 의심해야 합니다. 정답이 없어서 철학자들은 늘 질문하지요. 오랜 질문 끝에 발견한 정답이 또 새로운 질문을 만나면 생각을 계속해야 해요. 학술적인 근거를 아는 것도 좋지만, 그것에만 따라가듯이 철학 공부하면 재미없다고 생각해요. ^^

마힐 2025-10-10 13:20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저는 철학이 선종에서 스님들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지더라구요. 길 없는 길을 걸어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그 여정이 바로 철학이 아닌가 싶어요. cyrus님의 소중한 답변 감사 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중국의 초한전 - 새로운 전쟁의 도래
이지용 지음 / 에포크미디어코리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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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절 연휴 기간은 여러 책들을 읽었다.

경제 분야와 철학 그리고 소설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나가졌다.

그러다 초한전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초한전을 읽는 동안, 얼마전 썼던100만 요우커에 대한 씁슬한 우려가 현실적인 걱정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2011년에 발생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2011 3, 당시 이명박 정부 시절, 중국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스캔들이란 이름으로 치정(痴情)에 얽힌 공직자 기강 문제가 교민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영사들과 중국인 여성 덩신밍邓新明)이란 사람과 얽힌 스캔들이었다.

덩신밍은 비자 브로커 역할을 하며 총영사관의 영사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사적으로 금전적 이익을 취했으며 또한 당시 정부 및 야당 고위 인사 200여명의 개인 정보를 빼어갔다. 이 스캔들은 영사 H 그리고 그외 영사들 과의 복잡한 치정 관계로 인해 덩신밍의 남편이었던 K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 지게 된 것이다.


덩신밍은 아마도 2011년 전 보다 훨씬 전에 당시 영사 H와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덩신밍이 H의 차량에 접촉 사고를 내면서 그들의 치정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덩신밍에게 H는 호감을 느꼈고 이후 덩신밍과의 자주 만남을 하면서 자연스레 덩신밍은 상해 총영사관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덩신밍은 이후 비자 브로커로 변신했고, 중국인들의 한국 비자는 덩신밍을 통해야먄 비자 발급이 가능하도록 영사관과 모종의 거래를 맺은 것이다. 이후 이런 행위를 못 마땅한 다른 영사들의 반발에도 덩신밍은 오히려 이의를 제기한 한국인 영사에게 "중국에서 죽고 싶냐? 아이들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 같냐?" 는 협박성 말들을 서슴없이 뱉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H외에도 다른 영사와도 관계를 맺었고 어떤 영사는 "자신의 사랑이 변한다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는 각서를 썼다는 발언도 이어졌다.

이것은 모두 스캔들이 터지고 정부 인사가 영사들을 상대로 얻어낸 조사에 불과하다.

실제 스캔들을 조사하러 온 감찰조는 정작 사건의 핵심인 덩신밍을 만나지조차 못했다. 중국에서 중국인을 취조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감한 사안은 외교문제로 비화가 되기 때문에 중국쪽 공안은 협조를 안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후 덩신밍에 대해 전해지는 소식은 없다. 공식석상에서 그녀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측 조사는 덩신밍은 단순한 브로커로 밝혔고 공직자 기강 문제로 결론을 냈다.

과연 단순한 치정에 얽힌 브로커일까? 아니면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 였을까?


2011년 이명박 정부 시절 김영기 총영사를 파견했다. 당시 자료를 보면 그의 총영사라는 직함은 외교적 실무가 없는 낙하산 인사였다고 평가했다.

당시 고위 공무원들의 해외 파견은 국내에서 고생했던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가 강했다고 한다. 즉 놀러 온 것이다.

그는 파견 이후 전노무현 정부시절에 파견되었던 H영사와는 서로 사이가 맞지 않는 사이였다고 한다. 즉 현정부 인사와 전정부 인사간의 알력 다툼이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권력의 다툼 끝에 상하이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스캔들이 터졌지만, H영사와 덩신밍의 관계는 이미 그 정권 교체기 전부터 이어져 온 셈이다.


이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비자 없이 국내에 온 중국인들이 전부 관광객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겠지만 그중 만에 하나라도 범죄와 국가 보안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러 온 자들이라면?

단순한 음모론으로 여기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조짐이 안 좋다.


중국어로 공작工作 이라고 하면 업무, 일 로 번역한다.

여기다 비밀(秘密)을 붙히면 비밀공작, 즉 스파이 업무가 된다.

덩신밍의 브로커는 어쩌면 비밀 공작을 위장하기 위한 업무가 아니였을까?

그에 대한 판단은 이제 우리 각자가 해야 한다.

아무도 공식적으로 판단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초한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현재 우리는 또다른 덩신밍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한전(超限战)은 조용히 작동중인 전쟁이다. 총도 미사일도 탱크가 필요가 없는 전쟁이기도 하다. 덩신밍의 출현은 스캔들이 아닌 패턴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무관심과 안일함 속에 파고드는 비밀공작에 대해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하인리히 법칙에 지배당한 후가 될 것이다.

초한전, 이미 시작되었다.

전장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다.

누가 먼저 깨어날 것인가?

그 답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

잠든 마음을 깨우는 것, 그것이야 말로 가장 조용한 전쟁에서 첫 승리가 될 것이다.

🖋 Dharma & Maheal


결론은 아무런 규칙도 없고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초한전의 핵심이다. - P68

한 사회 상위 5% 집단을 제거하면 목표의 절반 이상을 달성한 것과 마찬가지다.5% 엘리트 계층이 정권과 안보의 핵심이므로 이들을 제거하면서 정부 권력과 무력(정권, 군대, 경찰, 사법, 언론 등)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4

강고한 보루를 공략하는 가장 쉬운 길은 내부에서부터의 붕괴다.
레닌Lenin - P120

중국과 함께 가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중략....
우리가 잊은, 또는 애써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다. 바로 중국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이고, 중화민족주의로 무장되었으며, 패권을 장악해 국제 정치 질서를 자기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팽창 정책을 공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국가라는 사실이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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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요우커 100만명 시대의 씁쓸함에 대하여


오늘부터 중국은 8일까지 국경절 장기 휴일에 들어 갔다.

우리 정부는 9 29일부터 중국인 요우커(游客:관광객)에 대한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였다.

작년에 중국이 이미 우리에게 일방적인 한 달짜리 무비자 입국을 허용해 준 후 우리 정부도 상호 주의에 근거하여 같이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셈이다.

이번10월 국경절 휴가를 맞이하여 정부 추산으로 약 100만명이나 달하는 요우커의 무비자 입국이 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 숫자만큼 우려가 깊다. 요우커 유치로 단기적 경제 활성화라는 장미빛 희망이, 장기적 국익과 안전을 위협하는 자충수가 되지는 않을 런지 걱정이 앞선다.


원래 우리나라의 경제의 근간은 동남아 지역의 국가와는 다르게 관광 산업이 아닌 제조업과 최첨단 기술이다. 혹여 나중에 요우커들이 등을 돌릴 경우에는 어떻게 할 지 대비하지 않고, 시스템 취약성을 개선하지 않으며 단기적 특수에 매달리는 것은 국가적 전략적 방향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한 가지 큰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 전조 현상으로 아주 사소한 경미한 사건 300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보다는 엄중한 사건 29건이 발생한다. 그때 그러한 전조를 무시하면 마침내 크나큰 재앙과도 같은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는 것이다.


최근 정부의 국가적 전산망 화재로 인해 행정, 보안 시스템의 허술함이 드러났다.

이러한 때에 요우커 100만명이 무비자로 입국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지 정말 걱정이 된다. 이러한 우려를 가짜 뉴스라고 치부하는 언론도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가짜 뉴스는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인지

미국이나 유럽 같은 사법 체계가 엄격한 나라 조차도 해마다 1% 정도의 불법 체류자를 놓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과연 더 철저하게 걸러낼 수 있을까?

정부가 내세운 사전 서류 심사 진행은 서류 조작 가능성, 여행사 통제 문제등이 발생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말 실효성이 있을지

과연 요우커의 국내 체류 동선을 얼마나 잘 관리하게 될지 가늠이 안된다.

100만명의 1% 1만명이다.

1만명이 불법 체류를 하게 된다면 누가 관리할 것인가?

요유커로 인해 활성화되는 경제적 이익보다 불법 체류자, 범죄자 관리에 들어가는 치안, 행정, 통역 인원 및 수용 시설까지 모두 우리의 세금으로 부담해야 한다.

과연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이익 대비 낭비하는 혈세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최근 몇 년 전부터 캄보디아에서 중국인 범죄 집단 중심으로 한국인 유괴 납치가 이루어 졌다. 납치된 한국인 들은 보이스 피싱, 금융 사기, 장기 매매 같은 끔찍한 범죄에 연루되고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 있지만 이러한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해마다 오히려 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법 제도와 중국의 사법 제도를 비교하면 처벌 수준은 솜방망이에 불과 하다. 그들이 그 점을 악용하여 극히 작은 일부라도 범죄 집단이 국내에 거점을 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라고 이러한 범죄 집단과 연결이 안된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요우커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또한 모든 중국인을 악마화 하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 그건 불의이다. 하지만 1% 악의를 가진 자에 대한 대책과 검증에 대한 시스템이 정말 잘 작동되고 있는지 불안은 정당하다.

제발 하인리히 법칙에 지배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차지하는 나 같은 50, 기성세대는 단기적 경제 논리에 함몰되어 젊은 세대가 살아갈 미래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책을 묵과해선 안된다.

여당의 안일한 자신감이나 야당의 공포심 유발 발언 모두 실질적 대안 없는 각자도생 같은 무책임한 말로 들린다.

이 문제의 원인은 정치권에 있지만 특히 기성세대가 미래 세대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감시하고 강력한 대안을 촉구해야 할 책임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인리히 법칙이 지배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적어도 당장은 국가의 최소의 의무를 요구해야 한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투명한 수치와 시스템의 작동을 보여 줘야 하며, 시민은 일상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다시 돌아와 믿어야 할 것은 내 자신 뿐이라는 냉소만 짓게 된다.

믿어야 할 것은 깨어 있는 내 근본 뿐이다.

나의 젊은 시절, 25년 간을 살아왔던 중국이 어쩌다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참으로 씁쓸해진다.



🖋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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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그런 나는 없다
홍창성 지음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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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얇다. 디자인도 깔끔하다.

불교의 핵심 진리인 '무아'에 대한 책이다.

제목도 '무아' 라는 뜻에 걸맞게 하얀 바탕에 드러나지 않는 음각으로 인쇄가 되어있다.

이책의 흥미로운점은 불교라고 해서 어려운 한문풀이나 구구절절 고리타분한 교리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요즘 세대들도 쉽게 읽을수 있는 문체로 되어있어 편하게 볼수 있다. 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볼만한 책이다.

 

이책에서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궁극적인 철학적인 질문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이 질문이 과연 타당한것인가? 라는 작가의 견해가 흥미를 끈다.

이후 기독교의 '영혼'과 소위 '나' 라고 일컫는 실체에 대해 파헤쳐본다.

파헤치는 도구는 언어철학, 불교의 연기론, 근대 데카르트의 서양 철학등을 동원한다.

그리고는 비교와 분석을 통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무아를 역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작가의 철학적인 분석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볼만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난  몇가지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작가가 강조하는 '무아' 는 글자 그대로 '내가 없다'는 무기공(無記空)에 치우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작가는 '참나'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참나' 라는것은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것으로 간주했고, 작가의 시각으로 보는 일부 불교계에서 주장하는 '참나' 라는것은 부처님께서 설한 '무아' 와는 위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게 아쉽냐면은 작가는 무아에 대한 단순히 평면적인 해석(내가 없다)을 한것이 아닌가 싶었다.

 

대행 큰스님께서는 무아에 대한 개념에 대해 '나를 무엇이다' 라고 딱 '나' 라고 고정할수 없어서 '무아'라고 설하셨다. 즉 '고정됨이 없는데 어찌 나 라고 세울수 있는가?' 하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무아' 라는것은 단순히 내가 없다는 개념이 아니라 '에고로서의 나' 를 없애면 자연히 참성품이 드러난다는 것 까지 포함된것 일것이다.

참성품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법화경에서의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성' 인것이다.

작가가 '참나'를 인정 하지 않겠다면 '불성'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그점이 모호하다.

만약 '불성'도 없는것이고 다 '무아' 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누구나 다 불성이 있고 부처가 될수 있다' 는 법화경의 설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조주선사의 선문답,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에 대한 대답 '무(無)' 라고 한것 처럼, 우리의 불성도 '무' 라고 받아 들여야 하는건지?

책에서는 정작 중요한 불성과 마음에 대한 언급은 전혀없다.

또한 부처님 열반시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 하라는 부촉(咐囑)을 남기신것은 불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등명 즉 '자신을 등불 삼아 밝히는것' 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인지?

'무아' 이므로 '밝혀야할 나' 는 없게 되는것인가?

이처럼 작가의 무아론을 확대하면 단순하고 피상적인 철학적 논리로는 부족해서 좀더 해설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었다.

더구나 책에서 마지막 해설중에 진제(참된 진리)라는 면에서는 무아가 맞지만 속제(세속적인 진리)라는 면에선 '실용적인 나' 의 일면도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이것으로 작가 나름의 결론인지 제안인지 모호한 설명을 내놓은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나' 라는 존재에 대해서 작가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무아' 와 함께 어설픈 절충안을 내놓은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자 실천의 종교이다.

분명 불교가 철학적인 면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목적은 마음의 불성을 깨닫고 부처가 되고 자유인이 되는데 있다.

또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 이라 하지 않던가?

불교는 분명히 서양 철학식의 분석과 비교로 배우고 깨닫는 종교가 아니라고 본다.

게다가 불교 또한 종교이기 때문에 믿음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된다.

더구나 믿음이 절대자를 향하는게 아니라 자신 자신에 대한 믿음, 즉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자기불성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무아'가 이치에 맞는다 하더라도 마음으로서 믿음과 수행이 깔려있지 않는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 이 되는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작가' 홍창성' 은 현재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의 철학과 교수님이시다.

작가가 주장하는 진리는 신비한 무언가가 아니고 오히려 단순하다는 명쾌함은 동의를 하지만 <무아가 곧 깨달음이고 행복이요 자유>라는 불성을 배제한 '무아만능론' 에 가까운 주장에 대해서는 납득이 잘 안간다.

철학과 교수님답게 서양철학으로 불교 철학을 해석하신점은 탄복하지만 마음을 떠난 믿음과 수행이 바탕이 되지않은 문자 논박에 치우친점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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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2023.9.19일), 오늘 블로그에 올렸던 무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시 올려 본다.

그때 무아와 불성에 대한 고민을 했던 흔적을 다시 읽어 보니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무아와 불성은 둘이 아니다.

그리고 그 바탕은 믿음의 길 위에서 서는 것이며

그 길의 여정 끝이 바로 참나요, 자유인이다!" 라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실천에서는 아직도 머뭇 거려진다.

아마도 이 생이 다 할때 까지 여전히 방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운명이라면, 여전히 이번 생을 사랑할 것이다.

 

by Dharma & Maheal

만약 독자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오묘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이름을 묻는 ‘나는 누구인가?‘와 인생관이나 진로를 찾는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답이 분명하지 않은 이유는 질문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 P17

이제 우리는 붓다의 논증을 감상할 준비가 되었다... 중략...
붓다의 논증이 짧은 문장들로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에 그 숨어 있는 논증의 구조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지만, 역시 붓다다운 탁월한 가르침이다. - P66

나를 찾는 과정은 실은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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