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2025년10월9일 /
제목: 위버맨쉬와 불성
몇일째 지속되는 무료한 연휴 끝에 어제 알라딘 이웃 블로그 이신 Cyrus님의 니체에 관한 글을 보면서 갑자기 흥미로운 활력소가 살아났다.
보통 니체하면 떠오르는 말은 바로 “신은 죽었다” 라는 충격적인 선언이다.
철학에 대해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신은 죽었다는 말은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신이 도대체 왜 죽은 것일까? 무엇 때문에 신은 죽었다는 거지? 같은 연속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질문이 생기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왜 ? 어째서? 무엇 때문에? 라는 의심과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탐구에 몰두하게 된다. 답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질문의 동굴에 들어서는 순간 무조건 밝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안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란 이름에 ‘밝은 철(哲)’ 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현대 철학의 모든 것을 뒤 바꿔 놓았다. 망치 철학자라는 별명처럼 니체의 강력한 질문은 니체 이전의 서양 전통 철학과 기독교적인 사상을 망치로 두들겨 팼다. 그 망치 한방에 어쩌면 신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을 때려 눕힌 그 망치에서 위버맨쉬라는 , 즉 초인 이라는 강력한 생명이 탄생했다.
니체는 이 과정을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사자에서 어린 아이로 변화하는 모습으로 비유를 했었다.
사실 이 비유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 스럽다.
갑자기 불교가 나오니 이 글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 무척 황당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교를 조금 접한 사람이라면 니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불교는 깨달음을 얻는 종교이다. 깨달음은 기독교의 구원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타의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닌 오직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에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 많은 수행법이 존재한다. 어느 수행만이 깨달음에 이른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근기가 달라 각자의 인연에 따른 수행을 통해 시간이 걸릴지 언정 언젠가는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불교이다.
그런 수행법 중에 계(戒).정(定). 혜(慧) 삼학을 닦는 과정이 있다.
계는 곧 계율이다. 정은 고요함(선정)이다. 그리고 혜는 지혜를 말한다.
여기서 니체가 말한 낙타, 사자, 어린아이는 바로 불교의 삼학과 놀랍도록 일치 한다.
낙타는 짐을 싣는 동물이다.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고통은 계율을 지키는 수행과 같다. 사자는 용맹하며 기존의 모순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상징이다. 이것은 불교의 선정과 같다. 고요함은 반드시 휘몰아치는 폭풍을 거친 후 드러난다. 그것은 내 안의 다스리지 못한 의식, 즉 번뇌가 가라 앉은 지혜의 전 단계이다.
이런 모든 것을 겪은 후에 비로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 까지 설명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대략 감이 올 것이다.
그렇다. 니체는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위버맨쉬를 탄생시켰다. 초인은 바로 불교의 보살과 같은 의미로 보여진다. 보살은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며 자신과 같은 경지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깨달은 사람들이다. 즉 위버맨쉬는 보살이다.
니체의 철학이 니힐리즘( 허무주의) 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니체의 말년이 정신병이란 업식에 걸려 그런 오해를 낳았다고 본다. 사실 니체의 철학만을 봤을 때는 니체는 오히려 신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신은 죽었을 지언정 니체의 또 다른 신인 위버맨쉬로 다시 창조 된 것이다.
즉 니체 철학은 종말론이 아닌 창조론에 가깝다.
영원회귀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바로 불교의 윤회와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
다만 분명히 니체와 불교는 전혀 상관 관계가 없다. 또한 영원회귀 사상 또한 윤회 사상과 완전히 일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 철학이 불교와 유사한 점은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불교를 접한 사람이라면 니체에서 불교를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어쩌면 니체가 만든 철학이 바로 진리 일지도 모르겠다.
서양 철학이 현대에 갈 수록 불교와 접점을 보이는 것은 우연히가 아니라고 본다.
니체가 청년 시절 매혹 시켰던 쇼펜하우어가 불교와 인도철학에 매료 되었던 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난 그보다 더 전부터 유럽에서 불교와 비슷한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고 본다. 사실 스피노자 때 부터 이미 서양 철학은 이단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단이 탄생된 배경에는 데카르트가 있었다. 즉 데카르트 이원론에 대한 반론이 스피노자의 일원론인 것 처럼, 이미 16세기 부터 서양과 동양은 사상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유사해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바라본다. 데카르트가 씨앗을 심었고, 스피노자가 그 씨앗을 발화 시켰으며, 니체는 그 꽃을 피운 셈이다.
결국 철학의 시작은 질문에서 시작했다.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각자에게 있다. 내가 나의 길을 걸을 수 있을 때 타인에게 자신의 길로 가라고 할 수 있다. 내 길은 타인에게 맞지 않는 길이지만 나 한테 맞다면 그 길은 나의 길이 되는 것이다.
니코스카잔차 키스가 존경했다던 니체 그리고 베르그 송은 사실 같은 철학을 했다.
베르그 송의 엘랑비탈(생의 철학) 과 니체의 위버맨쉬(초인)는 아무런 접점도 없지만 놀라울 정도로 둘은 같은 경지를 말했다. 바로 불성(佛性)이다.
결국 위버맨쉬는 보살이자 불성이란 말이 된다.
물론 나의 이런 생각은 전혀 학술적인 근거나 가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러한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정답이 없는 철학에서 내가 찾은 나만의 정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만 한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