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야샤 와이드판 26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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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나락의 몸과 테세우스의 배

 

이누야샤 일행은 사혼의 구슬을 찾고 나락을 쫓는 여정을 펼친다.

역시 이누야사 일행처럼 사유의 본체를 쫓고있다

나락과 셋쇼마루를 만나고 급기야는 오이디푸스를 만났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의 수수께기는 풀지 못한 비극적 인물이었다.

과연 인간은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에 매여 있는 비극적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자연스레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전의 나는 지금의 나인가

이십 년 후의 나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사람일까?

생물학에 의하면 세포는 계속 교체되고, 과거의 몸의 세포는 이미 남아 있지 않다.

또한 과거 기억도 지워지거나 왜곡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  

태어났을 때의 몸과 지금의 몸은 이미 다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그 모든 시간을 하나로 묶어  라고 인식한다.

“과거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

그렇다면 이때 말하는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 위에 세워져 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전해진 오래된 사유 실험 하나가 있다.

바로 테세우스의 배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남겨 놓았다

영웅 테세우스가 타던 배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썩은 판자를 하나둘씩 판자로 바꾸다 보니, 어느 날 배의 모든 부품이 전부 새것이 되었다.

이때 철학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저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누군가는 “물질이 다 바뀌었으니 이미 다른 배”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래도 계속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려 왔고, 테세우스의 항해 이야기를 싣고 있는 한 여전히 테세우스 배”라고 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질료)이 바뀌어도 형상과 목적이 유지되면 같은 것이라 보았다.

결국 질문은 이렇게 요약된다.

“정체성은 물질과 형상에서 오는가, 아니면 이야기의 연속성에서 오는가?”

그렇다면  라는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몸의 동일성인가, 기억의 연속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내 이야기”인가?

 

이제 관점을 들고 다시 <이누야샤>로 돌아가 보자.

오니구모라는 남자가 있었다.

불에 망가진 , 움직일 수 없는 육체를 지녔지만 질투와 집착, 결핍은 그대로 살아 있던 인간이었다. 그는 요괴들을 불러들이고, “힘을 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몸을 내준다.

순간 오니구모의 몸은 해체되고 수많은 요괴들의 살점이 붙으며 새로운 존재, 나락이 탄생한다.

완전히 다른 , 전혀 다른 힘, 수많은 요괴의 능력을 조합한 합성괴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락은 여전히 오니구모인가, 완전히 다른 존재인가?

 

테세우스의 배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은 이미 전부 갈려 나갔지만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남아 있다. 금강을 향한 소유욕, 사랑받지 못한 결핍, 인정받지 못한 분노는 그대로다. 

물질이 바뀌어도 욕망이라는 서사가 남아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나락의 중심에 오니구모를 보게 된다.

만일 반요인 이누야샤가 사혼의 구슬을 모두 모아 완전한 요괴가 된다면, 그는 여전히 “이누야샤”인가?

초기의 셋쇼마루는 냉혈한 패도의 상징이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도 없고, 동생 이누야샤조차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링을 만나고, 생명의 유한함과 책임을 알아가며,결국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존재로 변해 간다.

냉혈의 셋쇼마루에서 조용하지만 단단한 보호자로 변한 셋쇼마루.

그를 우리는 여전히 셋쇼마루 라고 부른다.

 

결국 몸도, 태도도, 관계도 바뀌었는데 우리가 계속 같은 이름을 쓰는 이유는 그들의 서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판자는 전부 바뀌어도 그 배 위에 쌓인 항해의 기억과 전쟁의 흔적,테세우스라는 이름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른다.

 

오니구모와 나락은 분명 다른 인물이다

하지만 나락의 근원은 결핍과 열등감의 화신 오니구모에서 나왔다.  

오니구모의 육체는 나락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오니구모이다.

그러나 나락은 그런 오니구모의 정체성을 떼어버리려 한다

스스로의 존재로 남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흡수하는 존재가 되고, 자신의 몸을 수 없이 바꾸고 분신을 만들며 증식한다.

그렇게 <이누야샤> 에서 나락은 처절할 정도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발버둥 친다.

하지만 오니구모의 서사가 이어지는 , 나락은 오니구모를 결국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나로 돌아와,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결국 같은 나다.

한국에서의 , 중국에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 현재 글 쓰는 나. 모양은 계속 변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몸도, 환경도, 이름도 바뀔 수 있지만 내가 “이게 내 인생이다”라고 부르는 이 서사의 흐름을 타고서,  라는 테세우스의 배는 오늘도 힘겨운 순항중이다.

나의 테세우스 배에서 나는 여전히 선장이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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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30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읽었던 이누야사의 이야기가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만화책이 오래 기억되는 것도 스스로의 스토리를 간직하기 때문이겠죠.

마힐 2025-11-30 11:34   좋아요 0 | URL
카라(카라쿠)라는 아주 이쁘지만 악당 나락의 분신이었던 인물 기억나세요? ㅎㅎ
이누야샤 작가 루미코 여사가 그랬데요. 원래는 일회성으로 금방 퇴장 시켜버릴려고 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캐릭터가 자기 손을 벗어나서 움직이 더래요. 작가의 손에 창조된 인물들이 서사를 같게 되면 스스로 살아난다고 표현했어요. 아마 만화든 소설이든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인물들의 서사가 살아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살아있었던 서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