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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9

오늘의정진: 諸行無常一 (제행무상일체공)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였으니


- 100일 정진, 1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네 번째 구절은

<放四大莫把捉(방사대막파착) /사대에 놓아 붙잡으려 하지 말고

寂滅性中隨飮啄(적멸성중수음탁) /적멸한 성품중에 먹고 마실 뿐이다>  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지,,,(地水火風) 사대(四大) 로 형성된 유위(有爲)의 세계와 적멸한 성품(寂滅性品)을 지닌 무위(無爲)의 세계가 함께 공존한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지금 이순간 함께 돌아가고 있다.


오늘은 열다섯 번째 구절

諸行無常一 (모두 제, 행할 행, 없을 무, 항상 상, 한 일, 온통 체, 빌 공)

제행무상일체공 /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였으니

卽是如來大圓覺 (곧 즉, 바로 시, 같을 여, 올 래, 큰 대, 둥글 원, 깨달을 각)

즉시여래대원각/ 곧 바로 여래의 크게 둥근 깨달음이어라.


제행무상(諸行無常) 은 불교의 가장 기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이다.

() 은 도장이다. 법인(法印)은 법의 도장이다.

이것은 바로 붓다의 가르침() 이라는  도장() 을 찍어 보증한다는 뜻이 된다.

먼저 제행무상, 모든 행(諸行)하는 것은 무상(無常) 하다는 뜻을 살펴 본다.


무상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성경의 전도서 구절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처럼 인생무상(人生無常) , 덧 없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첫번째.

두번째 해석은 '없을 무()''항상 상()' 의 의미를  한자의 뜻 글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 로 보는 것이다.

즉 우주의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

따라서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덧 없음에 안타까워 하는 감정보다는 진리가 본래 고정됨이 없다는 관조적(觀照的)인 입장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일체공(), 즉 일체가 공하였다는 구절과 뜻이 맞으려면 역시 진리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가 부합되는 것 같다.


<반야심경>에서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苦厄)' 이라고 했다.

오온(五蘊) ,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 감각, 형상, 행위, 지각 등이 모두 공() 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체 고의 바다(苦厄)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주 만물 모든 것은 본래 고정 됨이 없이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이는 곧 바로 공()하다' 는 뜻이다.


모든 인간은 생노병사(病死)를 피할 수 없다.

사는게 고()

아니 인간 뿐만 아니라 개나 소, 돼지 같은 동물들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에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서 인간과 동물의 의식 차원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일체개고(皆苦), 세상은 고통이라고 한 것이다.

고통의 세계,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통을 견디며 사는 곳이다.

육도(六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를 끊임없이 윤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고통이 되는 원인을 바로 보고 그 집착(執着)을 놓으라고 했다.

놓는 수행을 통해 결국엔 삼법인이란 깨달음을 얻으셨다.


세상엔 '' 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없음 (諸法無我 제법무아)을 알게 되었고, 모든 행하는 것엔 고정됨이 없음(諸行無常 제행무상)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고통이 멸하게 되면 반드시 고요해진 열반에 이르게 됨 (涅槃寂靜)을 깨우쳤던 것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 고통은 집착에서 생기고, 그것을 멸하니 도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여래(如來)의 대원각(大圓覺) , 크게 둥근 깨달음 이란 것이다.


깨달음은 글로 어떻게 표현 할 수 없다.

그러니 깨치신 선지식(善知識)들께서는 깨달음을 일원상(一圓相)으로 표현 하신다.

모나지 않고 둥근, 진리가 돌아가는 형상과 의미를 함축한 뜻이라는 것이다.

그걸 이름하여 대원각이라 부른다.


諸行無常一, 卽是如來大圓覺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모든 행은 고정 됨이 없이 변하여 일체가 전부 공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여래(부처)의 크고 둥근 깨달음이어라.

<일일 소견>

생노병사는 피할 수 없지만, 고에는 잠식(蠶食)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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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09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행무상이 여기서 나오는 구절이군요.
항상 상(常)은 불교든 도교든 영원한 화두군요.

마힐 2025-01-10 11:59   좋아요 0 | URL
사는게 화두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벌이고 행하는 게 다 화두죠.
그게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꿈속을 헤메는게 우리 현실이란 거죠.
그래서 먹고 사는 걸 뛰어 넘는 마음을 먹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을 먹고 마음으로 사는....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위해서 충만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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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8

오늘의정진 放四大莫把捉  (방사대막파착) 사대에 놓아 붙잡으려 하지 말고


- 100일 정진, 1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세 번째 구절은

<喚取機關木人問 (환취기관목인문) / 기관목인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

求佛施功早晩成 (구불시공조만성) / 부처를 구하고 공덕 베푸는 일을 조만간 이루리다>  였다

생명이 없는 기관목인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는 선문답(禪問答)이었다.

그대는 기관목인이 답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는가?

군불청(君不聽)? 그대 들리지 않는가? 기관목인이 답하는 것을...


오늘은 열네 번째 구절

放四大莫把捉  (놓을 방, 넉 사, 큰 대, 없을 막, 잡을 파, 잡을 착 )

방사대막파착

사대에 놓아 붙잡으려 하지 말고

寂滅性中隨飮啄 (고요할 적, 멸할 멸, 성품 성, 가운데 중, 따를 수, 마실 음, 쪼을 탁)

적멸성중수음탁

적멸한 성품중에 먹고 마실 뿐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의 구절은 도()의 작용을 말한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가 원자(原子)라고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질계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사대(四大)라고 보았다.

사대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뜻한다.  

즉 땅, , , 바람의 4가지가 우리의 물질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색깔은 삼원색(빨강, 파랑, 노랑)으로 다채롭게 나타낼 수 있듯이 우주 만물도 4가지 요소, 즉 사대로 형성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무상계(常戒)>  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대로 각각 흩어진다고 했다.

살과 뼈같은 육신은 땅으로, 피나 고름같은 것은 물로, 몸의 더운 기운은 불로, 활동하는 기운은 바람으로 각각 흩어진다는 것이다.


사대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일 뿐만 아니라 물질의 성질(性質) 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대는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이합집산(離合集散) 에 따라 물질계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것, 없는 것 구분 할 것 없이 아주 작은 물질 단위에서 부터 광활한 우주의 별들 까지도 말이다.

따라서 사대의 조화에 따라 물질계 즉 유위법(有爲法)의 세계가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  사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가?

그래서 마음은 유위법에서는 붙잡을 수 없다.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을 그저 사대에 방하착(放下着), 내려 놓을 뿐이다.


우리는 마음이 분명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분명히 있지만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세계을 두고 우리는 무위법(無爲法)의 세계라고 한다.

우리의 본성인 적멸한 성품(寂滅性品)은 무위법(無爲法)에서 작용한다.

좀 전에도 언급 했듯이 무위의 세계는 물질적인 실체(實體) 있어 보고 듣고 만지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런데 적멸한 성품 가운데 먹고 마실 뿐이란다. 

아니, 먹고 마시는 것은 유위의 세계에서 작용인데 어찌 무위의 세계에서 가능 할까?

사대와 적멸한 성품, 놓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의 대비.

유위법은 사대와 먹고 마시는 것, 무위법은 적멸한 성품과 놓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서로 대칭이 되게 표현했다.

<사대에 놓아 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먹고 마실 뿐>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를 사는데 가장 필수적인 행() 이다.

놓는 것(), 즉 방하착(放下着)은 무위 세계를 공부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행이다.

먹고 마시는 유위법과 놓아야 하는 무위법이 둘 아니게 함께 돌아간다.


<일일 소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여 ,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다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중에서

무거운 짐을 놓고 쉬듯이, 내 근본 마음에 놓고 쉼을 얻는다. 방하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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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7

오늘의정진:  喚取機關木人問 (환취기관목인문) 기관목인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


- 100일 정진, 1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두 번째 구절은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수무념수무생, 약실무생무불생

누가 생각이 없으며 , 태어남이 없는가?  만약 진실로 태어남이 없다면 태어나지 않음도 없다.> 였다.


無念(무념) '생각이 없다' 는 뜻보다는 생각이 끊어진 상태가 더 적합한 것 같다.

무념은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또 일부러 생각을 안하는 상태도 아니다.

생각이 저절로 끊어져야 한다.

() 의 최종 경지인   空寂靈智(공적영지)眞空妙有(진공묘유) 의 상태는 무념에서 시작 되기 때문이다.

공적영지는 텅 비어 고요하나 신령하게도 아는 자리 이고, 진공묘유는 참으로 비었으나 묘하게도 있는 자리를 말한다.

이것이 불성(佛性) 이며 바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상태이다.


오늘은 열세 번째 구절

喚取機關木人問 (부를 환, 취할 취, 베틀 기, 빗장 관, 나무 목, 사람인, 물을 문 ) 환취기관목인문 

기관목인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

求佛施功早晩成 (구할 구, 부처 불,베풀 시, 공덕 공, 일찍 조, 저물 만, 이룰 성) 구불시공조만성 

부처를 구하고 공덕 베푸는 일을 조만간 이루리다.


기관목인은 나무로 만든 사람 모양의 로봇을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 전쟁을 할 때 일반 병사를 대신하여 적을 속이는 용도로 쓰였었고,또 현대의 로봇처럼 단순한 작업을 하는데 이용할 목적으로 만든 나무 인형인 것이다.

기관목인은 사람의 형상이지만 생명이 없다.

말도 못 하는 기관목인에게 물어 보라고 한다.

"누가 생각이 끊어지고 태어남이 없는가?" 라는 심오한 깨달음에 대한 질문을 기관 목인에게 물어 본다고 기관목인이 답을 해 줄까?

선문답(禪問答)이다.


달마서래의 (達磨西來意),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정전백수자 (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 이다.

조주(趙州 778~897) 선사(禪師)의 답이다.

기관목인에게 물으라는 것과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는 선문답이다.

나무는 말을 할 수 없다.  기관목인이든 뜰 앞의 잣나무든.

나무가 무념을 알고, 무생을 알며, 또 불무생을 알겠는가?

또한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를 알고 있겠는가?

그런데 영가스님은 기관목인에게 물어 보라고 한다.

물으면 곧 부처를 구하게 될 것이고 공덕을 베푸는 일을 이룰  것이란다.

깨닫지 못한 나를 놀리시는 것인가?

아니다. 그러실리가 없다.


공덕(功德) 은 복()과 비슷 하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가 있다.

일반적으로 복은 '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덕은 '쌓는다'고 표현한다.

복이 온다는 것은 내 의지로 오게 하는 게 아니다. 복이 스스로 와야 한다.

복은 행운과 비슷하다. 복이 나를 찾아 오는 것이다.

하지만 공덕은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요행을 바랄 수가 없다.

내가 만들어야 한다. 남들에게 좋은 말을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나만을 위해서 사는게 아니라 남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 즉 선업(善業)을 쌓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덕이다. 덕을 베풀어야 한다. 즉 이기심보다 이타심,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공덕을 쌓게 된다.

그렇게 쌓인 공덕을 이제는 베풀어야 한다. 공덕을 쌓고 쌓인 공덕을 마지막에 가서는 또 베풀어야 한다

쌓는 것과 베푸는 것이 사실 다르지 않다.


공덕을 쌓는 것이 바로 베품이요, 공덕을 베푸는 것이 바로 쌓는 것이다.

이제 곧 부처를 구하고 공덕을 베풀게 되는 시점이 온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기관목인에게 물어보면.

그럼 기관목인은 답을 해주는가?

모른다.

그런데, 기관목인에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기관목인을 기관목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물을 수 있는데?


분별이 끊어진 사람, 즉 절학무위휴도인(絶學無爲休道人) 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기관목인에게 물을 수 있다. 무념, 무생, 불부생에 대하여.

또 조주선사는 잣나무에게 물을 수 있다. 달마서래의?

기관목인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내 말이 아니다. 영가스님과 조주스님이 말씀 하신 것이다.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환취기관목인문, 求佛施功早晩成

기관목인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 , 부처를 구하고 공덕 베푸는 일을 조만간 이루리다.


<일일 소견>

음력 12 8일은 약 2600년전 부처님이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새벽 별을 보고 깨우친 날이다.  성도절(成道節) , 혹은 성도재일(成道齋日)이라고 한다.

(보리수? 기관목인, 뜰앞의 잣나무 등 모두 나무와 연관 되었네, 뭐야.... 깨달음은 나무와 인연이 깊은 것 같은데....)

우리나라 전국의 선원에서 붓다가 이루신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오늘 새벽까지 철야정진과 용맹정진(勇猛精進) 을 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도 부처님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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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6

오늘의정진:  誰無念誰無生(수무념수무생)  어느 누가 무념하고 무생하는가?


- 100일 정진, 1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 한번째 구절은

<比來塵境未曾磨, 今日分明須剖析/ 비래진경미증마, 금일분명수부석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 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였다.

나의 본래 청정한 성품은 닦을 것 조차도 없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분명히 닦아 내었다면 닦을 것 조차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열두 번째 구절

誰無念誰無生 (누구 수, 없을 무, 생각 념, 누구 수, 없을 무, 날 생 ) 수무념수무생

어느 누가 무념하고 무생하는가?

若實無生無不生 (같을 약,열매 실,날 생,없을 무, 아닐 불, 날 생) 약실무생무불생

만약 무생이 진실이라면 불생 또한 없다.


이건 무슨 말인가?

無念(무념) , 생각이 없고, 無生(무생) , 태어남이 없다니?

그리고 무생이 진실()이라면 不生(무불생) , 안 태어남도 없다라니?  

무념, 무생, 무불생 같은 간단한 단어이지만 그 속 뜻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누가? ? (중국어로 발음하면 '쉐이'? (shéi))

도대체  누가? 무념, 무생, 무불생 한단 말인가?

사실은 이건 증도가(證道歌) 전체 노래에 흐르는 변주 된 멜로디에 불과 하다.


바로 증도가에서 가장 핵심 구절인 두 번째 구절

<絶學無爲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절학무위휴도인, 불구망상불구진)

배움이 끊어진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추구하지도 참됨도 구하지 않나니>

의 서곡을 변주했다.

누가 어떻게?  바로 배움이 끊어진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참됨도 구하지 않는 바로 그 자가 바로 무념, 무생, 무불생 하다는 것이다.

생각이 끊어지고, 태어남이 없고, 또한 안 태어남도 없는 그 자리를 증득한 사람이 바로 증도가를 노래하고 있다.


본래 우리의 성품(性品)은 태어남도 태어나지 않음도 없고, 생각이 있다, 없다도 없다.

이는 반야심경의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물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垢不淨, 不增不減) "이 모든 법은 공()하여 태어남도 없고, 멸 함도 없고, 더러운 것도 깨끗함도 없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과 같은 뜻과 상통(相通) 한다.

다시말해 우리의 본 성품은 공() 하다는 것이다.


본래 우리의 자성(自性)은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불생불멸의 자리이고,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또한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증도가는 시종일관 도의 본체, 자성의 본체를 노래하고 있다.

오로지 내 본성(本性)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닦아도 닦을 것 조차 없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면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한 그 자리, 바로 본성품을 노래하는 것이다.


증도가의 첫 구절이 군불견() 이었다.

그대 보이지 않는가의 첫 물음, 당신의 마음의 눈에는 보여지지 않는가 하는 묻는 것은 그냥 묻는 물음이 아니다.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 수무념수무생, 약실무생무불생

누가 생각이 없으며 , 태어남이 없는가?  만약 진실로 태어남이 없다면 태어나지 않음도 없다.

그 누가는 바로 깨달은 사람, ()과 무()의 자리를 깨달은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을 얻은 도인(道人)이 특별한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다. 바로 그대()여야 한다. 바로 그대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대와 나는 다르지 않다.

군불견(), 그대 보여지는가? 나는 보았다. 이제 그대 또한 보여질 것이다.

"내가 노래하는 깨달음의 노래는 그대에게 곧 들릴 것이고 그대에게 보여질 것이다" 라고 영가현각 (永嘉玄覺스님(674~713)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엄청난 비약(飛躍)같지만 바로 진실이기도 하다. 무념(無念) 해야 들린다.

()은 비약이며 진실이기 때문이다.


<일일소견>

업식에 끌려다니지 말고 , 업식의 주인이 되려면

내 근본 마음 , 자성에 맡겨야 한다. 믿지 못하니 맡기지 못한다.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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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없는데이터 2025-01-06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업식에 끌려다니지 말고, 업식의 주인이 되라˝는 문장은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좌우하는 과거의 습관적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나, 이를 주체적으로 통제하며 살아가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현대 사회에서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기준과 환경에 휩쓸리며 자신의 본질을 잃고 살아가지만, 이 글은 내면의 자성과 본질로 돌아가라는 진지한 요청처럼 느껴집니다. 한 해의 시작에 깊은 울림을 주는 글로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마힐 2025-01-06 16:36   좋아요 0 | URL
제가 업식에 많이 끄달려서요. 더 이상 끌려 다니면서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내 자성의 목소리에 좀 더 귀기울여 할 것 같아서요. 함께 자각하는 분들이 많아진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 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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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년 15

오늘의정진 比來塵境未曾磨(비래진경미증마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더니


- 100일 정진, 1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열 번째 구절은 

<無罪福無損益寂滅性中莫問覓

무죄복무손익적멸성중막문멱

죄와 복도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으니적멸한 성품 가운데 묻고 찾지말라였다.

분별심이 사라지면 그 세계가 바로 무위의 세계이다.

 

오늘은 열한 번째 구절

比來塵境未曾磨 (아닐 비올 래먼지 진경계 경아닐 미거듭 증갈 마 )

비래진경미증마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 더니

今日分明須剖析 (이제 금날 일나눌 분모름지기 수쪼갤 부쪼갤 석)

금일분명수부석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선()에서  거울은 내 마음 자리를 비추는 것을 상징 한다.

가만히 놔두어도 거울에 먼지가 끼듯이 내 마음에도 시시때때로 먼지가 낀다.

먼지가 낀 거울에 비춘 내 얼굴이 깨끗히 보이지 않듯이내 마음의 거울에는 번뇌와 분별심이 먼지처럼 달라 붙는다

거울 닦듯이 내 마음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예전에 즉깨닫기 전에는 내 마음의 때를 닦으려 했으나 미처 닦지 못했다.

어쩌면 때가 너무 많이 껴서 잘 닦이지도 않았을 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닦을 생각 조차 안 할 수 도 있었다

때긴 상태가 오히려 습관이 되어 그냥 그런 상태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닦아 보면 안다깨끗한 거울에 비춘 본래 청정한 나의 모습이 얼마나 깨끗한 지를


이제야 깨닫고 보니 본래 나의 자성 마음은 더럽고 깨끗함이 없는 청정한 자리이다

때가 낀 거울에 비춘 내 자성이 본래 더러운 게 아니었다.

나의 자성에 때가 낀 것이 아니다본래 내 자성은 청정하다.

거울이 더럽다 하여 내 자성이 더러운 게 아니었다.  

내 마음의 거울에 낀 분별 망상으로 인해 내 본래 마음자체가 더러운 것 인줄 알았는데 본래 나의 마음은 때가 낀 적이 없다

비춰 보는 마음의 거울을 보지 말고 그대로 내 본래 청정한 마음을 봐야 한다.

거울에 낀 먼지를 보지 말고 내 본래 청정한 마음 자리를 보야야 한다.


그러면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 선사가 말 했던 본래무일물의 뜻이 명확해 진다.


<菩提本无树(보리본무수)明镜亦非台(명경역비대)

  一物(본래무일물),  何处惹尘埃(하처약진애)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거울 또한 대가 아니라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어디에 티끌이 일어나리까?> 


성품은 드러나야 한다. 저절로 비춰져야 한다깨달음은 보여지는 것이다.

내 마음의 거울도 닦으려고 해서 닦아 지는 게 아니라 닦아진 상태가 되야 한다.

'본래무일물' 은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닦을 먼지 조차도 없는 경지가 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신수(神秀606~707) 대사가 쓴 시는 깨닫기 전의 일이 되는 것이다


身是菩提树(신시보리수)心如明镜台(심여명경대)

  时时勤拂拭(시시근불식)勿使惹尘埃(물사야진애)

  몸은 보리수요마음은 명경대(거울대)

  부지런히 털어내고먼지가 앉지 않도록 해야 함이다.> 


아직 본래무일물’ 임을  알기 전까지는 부지런히 내 마음 거울을 닦아야 한다.

거울을 닦는 것그것이 바로 수행이자 정진이다.

 

 

<일일소견>

거울의 먼지는 쉴 새 없이 들러 붙는다

아직도 올라오는 분별심속지 말고 지켜본다.

지켜 보는 것그것이 바로 닦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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