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2일차

 

<泰山不讓土壤(태산부양토양),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河海不擇細流(하해불택세류),故能就其深 (고능취기심)

산은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기에 큼을 이루고,

바다는 가는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기에 깊음을 이룬다.> - 사기 <이사 열전> 중에서

 

문장은 (秦)나라의 재상 이사(李斯, 기원전 280~208) *축객령(逐客令) 거두어 달라며 진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구절이다. 진왕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여 인재 등용에 있어 작은 것을 버리지 않고, 미미한 재능까지 품게 되었다. 이사의 조언대로 진왕은 마침내 6국을 통일하고 스스로 시황제가 되었다. 이사는 진이라는 변방의 나라를 거대한 제국으로 설계한 명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세세생생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사에게 예상치도 못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진시황이 전국 순시중에 급사하게 것이다. 진시황의 유언대로 장남 부소가 황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호해의 스승인 환관 조고가 호해를 후계자 자리로 밀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지만 조고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교묘한 말로 이사를 설득했다.

부소가 즉위하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 몽염이 권력을 잡으면 지금의 영광도 사라질 것이라는 말, 자손과 가문까지 흔들릴 것이라는 말 앞에서 이사는 흔들렸다.

결국 그는 조고의 대로 부소가 아닌 호해를 선택한다.

명재상이었던 이사가 어떻게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사실 이사는 옳고 그름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알면서도 스스로 무너졌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조고의 혀가 아니라, 그 혀에 반응한 자기 안의 공포였다.

선택의 순간 조고의 말은 조언이 아니라 유혹이 되었고, 유혹은 공포로 변하여 이성을 가려 버렸다.

천하를 설계하던 사람이 끝내 자기 자리, 자기 권력, 자기 안위부터 계산한 것이다.

 

한신도 또한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괴통은 그에게 여러 번 충고했다.

지금 제나라를 얻었으니, 더 이상 남의 장수가 아니라 스스로 한 축이 되라고 조언했고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자기 운명을 자기 손으로 붙들라고 간절히 설득했다.

그러나 한신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천하는 읽었으나, 자기 안의 결핍은 끝내 다 읽지 못한 것이다.

굴욕을 참는 법은 알았지만, 독립을 감당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괴통의 조언은 한신에게는 끝내 받아들일 없는 자유의 무게였는지도 모른다.

 

항우에게도 이러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범증은 여러 그에게 조언을 했다. 홍문연(鴻門宴)에서는 유방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항우는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천하의 판을 굳히기 위해 팽성을 떠나지 말라고 했지만 떠났다. 초회왕을 옹립해야 했지만 결국 죽였다. 그러나 항우는 범증의 조언을 하나도 듣질 않았다.

과연 항우는 범증의 조언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일까.

사실 항우는 범증의  조언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영웅상이 너무 단단했다.

범증의 말은 옳았으나, 옳은 말이 언제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항우처럼 자기 자신에게 이미 매혹 된 사람에게는 옳고 그름은 모두 자기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영웅상에 압도되어 끝내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물이 것이다.

그래서 죽어서 전설이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이사는 공포에 무너졌고, 한신은 결핍에 붙들렸고, 항우는 자기 자신에게 갇혀 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유방은 달랐다.

 

도망자의 무리에서 패현으로 돌아온 유계는 패공(沛公)이라는 호칭을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오히려 소하가 그보다 정돈되어 있고, 더 믿음직해 보였다. 유계는 여전히 사수의 정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하는 물러섰고, 유방을 밀어 올렸다.

유계는 50평생 이렇게 까지 자신이 올라갈지 몰랐다. 그래서 사양했다.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실패하면 모두가 끝이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유계는 결국 소하의 말을 받아들였다.

유계는 소하의 감언이설 같은 유혹에 넘어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소하는 유계의 공포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에게 허영도 부추기지 않았다.

다만 지금 판에서는 당신이 아니면 된다고, 당신이 그 자리를 올라야 한다고 설득했다.

오히려 자기보다 책임의 자리로 걸음 올라간 것이었다.

순간부터 유계는 패공 유방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초한지의 인물들은 단순한 영웅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겹의 마음을 비추어 보여준다.

이사 안에는 공포 앞에서 무너지는 내가 있다.

한신 안에는 인정받고 싶어 끝내 독립하지 못하는 내가 있다.

항우 안에는 자기 확신이 너무 커서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내가 있다.

그리고 유방 안에는, 두렵고 누추하고 모자라 보이지만 그래도 자기보다 큰 책임의 자리로 한 걸음 올라가려는 내가 있다.

 

조언과 충고 그리고 유혹은 늘 비슷한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 온다. 둘 다 길을 제시하고, 둘 다 내 귀에 속삭인다. 문제는 그 말이 무엇이냐보다, 그 말을 듣는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이다.

안에 공포가 가득하면 유혹이 조언처럼 들리고, 내 안에 허영이 가득하면 독이 되는 말조차 격려처럼 들린다. 반대로 내 안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으면, 쓰디쓴 말도 비로소 조언이 된다.

 

그러니 사람을 망치거나 살리는 것은 능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 조언과 유혹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그리고 분별을 가로막는 자기 안의 공포와 허영과 결핍을 얼마나 아는가.

문제는 안에서 만들어 낸다.

 

초한지는 전쟁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선택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선택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다.

똑똑한 이사도, 천재적 장수 한신도, 초패왕 항우도 선택 앞에서 무너졌다.

유방만이 결과적으로 자기보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움직여 천하를 얻었다.

 

 

선택의 순간에 먼저 보아야 것은 바깥의 혀가 아니라, 그 혀에 흔들리는 내 안의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사도, 한신도, 항우도, 유방도 결국은 내 안에 존재하는 여러 얼굴들 중의 하나 일 뿐이다.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로 하루를 선택하고 있는가.

 

: *축객령(逐客令): 진나라에서 실시한 외국인 추방령이다. 당시 진에는 육국의 떠돌이 문사, 재사들이 모여 있어 간첩활동을 하기도 했으므로 그걸 방지하고자 나라 안의 외국인(진을 제외한 6국 사람들)을 모두 추방하고자 명을 내렸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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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0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나니 초한지의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项庄舞剑意在沛公
중국 외무부장 왕이가 한국에 사드배치될 때에 쓴 말이죠.
그 조언과 충고와 유혹이 나의 어디를 건드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