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남편은 제주도 출장 가고 없고 아이 둘을 흔들어 깨워 부산 역으로 나간다.

토요일 새벽, 아침은 칠서 휴게소에서 라면으로 떼우고 이른 아침 공기 속의 해인사를 만난다.

단풍이 너무 아름다워 아이들의 입에서, 보살들의 입에서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성철 스님 13주기 행사가 새벽 한시에 끝나고 사리탑에서 회향하는 데 비가 쏟아졌단다. 7일간 팔만사천배의 회향식을 마치고 -그냥 들어도 무거운데 비에 젖기까지한- 좌복을 사리탑에서 백련암까지 날라서 관음전에 불을 넣어 말리고 있었다.

 스님 돌아가시고 십년이 넘었는데도 불자들로 하여금 이렇게 끝없는 그리움을 갖게 하는 스님의 마음이, 올라가는 길에 만난 "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쓰인 연등에 남아있는 것을 느낀다.

관음전을 쓸 수 없어 고심원에서 절을 하였다.

 이번 기도엔 초보들이 없고 거의 절을 해 오던 사람들이라 다섯 번으로 나누어 하던 기도를 천배, 천배 끊어서 하고 칠백배와 삼백배로 나누어 하니 평소보다 한시간이나 빨리 끝났다.

절을 하다보면 거의 무심의 경지에서 절을 하게 되는데, 낚시줄을 드리운 강태공처럼 어느 순간 마음에 낚여 올라오는 생각이 있다.

이번 기도엔 갑자기 친정 엄마가 생각이 나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참아야했다.

엄마가 우리  아이 둘을 다 키우셨는데, 큰 애가 첫 손주라서 그런지, 키운 정도 남달라서인지, 큰 아이를 너무 좋아하신다.

지난 주에도 추어탕을 끓여놓았다고 하셔서 모처럼 집에 있는 아이 둘을 다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더니 고등학교 가고부터 과묵해져서 말이 없는 큰 애를 보시고는, "우리 봉학이가 이제 다 커서 말도 없어지니 할머니가 외롭네" 라고 하신다. 그때는 큰 아이도 나도 농담으로 듣고 웃었는데, 갑자기 절하다가 그 말씀이 생각나면서 엄마의 그 말이 그대로 가슴에 담기는 거였다.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소년이 돌아올 때마다 가지를 흔들며 온 몸으로 기뻐하는 장면이 엄마의 모습과 그대로 겹쳐지면서, 그루터기만 남아도 소년에게 무얼 더 해줄까만 생각하는 나무의 짝사랑에 가슴이 메였다.

어디 우리 엄마만 그럴까. 시어머니도 친정 아버지도, 돌아가신 시아버님도,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렇지 않을까.  힘든 세상 살아오신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늙음의 고통은 피해갈 수 없더라도 병없이 천수를 누리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고가 도착하는 서부산 톨게이트 입구엔, 아내와 아이들을 실으러 온 남편들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티비에서, 영화에서 사랑을 아름답게도 왜곡되게도 표현하지만, 절하고 돌아온 아내와 아이들을 마중나오는 남편의 얼굴에서, 비좁은 봉고 안에서도 아이의 재잘거림에 아이와 똑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보살들의 모습에서, 서로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더 해주려는 도반들의 마음에서 세상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된다고 했는데도, 엄마를 따라 절에 와서 삼천배 마쳐준 우리 아이들에게, 출장에서 돌아와 바로 우리를 실으러 와준 남편에게  감사의 삼배를 올린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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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11-12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가정입니다.
깊어가는 가을의 하늘은 맑고 햇살을 투명합니다.

혜덕화 2006-11-1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평온한 일요일 아침입니다. 달팽이님 옆의 천사들이 떠오르는군요. 아이들의 재잘거림, 투명한 햇살보다 더 우리 마음을 투명하고 아름답게 해주는 거죠.
단풍이 너무 아름다워, 안그래도 오늘 오후엔 통도사에 물을 뜨러 갈 생각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는 인연이 감사합니다.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_()_
 

로드무비님의 서재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다가 작년에 작고하신 전우익 할아버지의 글이 생각나 책을 찾아 들었습니다.  삼십대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난 정영상님을 그리며 쓰신 할아버지의 글에서 만난 시입니다.

목욕탕에 가면      -정영상

목욕탕에 가면 바닥에 뒹구는 일회용 면도기들이 언젠가 두고 보자며 나를 벼르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칫솔, 비누, 때타올 등 제 목숨껏 살지도 못하고 쓰레기 더미가 된 일회용들이 으드득 이를 갈며 한결같이 큰 재앙이 되어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면도를 하는 동안에도, 때를 미는 동안에도 계속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는 보람도 없이 억울하게 버려지는 물들이.

"인간들아,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씨불씨불 흘러가는 물들이

바닥에 질펀한 죄를 씻어 내리며

언젠가, 언젠가 두고보자! 그렇게 벼르는 것 같습니다.

불야성의 시대, 밤낮없이 밝은 이 시대가 더욱 캄캄합니다.

날이 밝았어.

형은 저승으로, 나는 들로 나가야지요.

                                    1993년 5. 25.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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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6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을까진 겨우 두 시간 거리입니다.  하지만 저 곳에 가지 않고 여기서 하룻밤 묵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중략> 그녀는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를 만날지 아니면 며칠 동안 다른 마을로 떠나 있을지 생각하고 양단간 결정을 하겠지요. 그녀가 떠나 있기로 마음먹으면, 우리는 그녀를 쫓아갈 수 없습니다."

내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내가 그토록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말이오?"

"그렇게 말한다면 선생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왜 선생의 수고가 사랑하는 사람의 복종과 감사, 혹은 인정으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죠? 선생께서 이 곳에 온 것은 아내의 사랑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선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데 엄청 오래 걸렸다.

이제 드디어 도서실에 돌려 줄 수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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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10-2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연체됐다는 생각이 났어요. ㅠㅠ
<오 자히르> 저도 읽어볼까요?^^

혜덕화 2006-10-2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홀로 설 수 있어야 사랑도 가능하다는 말을, 아주 길게 현학적으로 써 놓았는데, 별로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코엘료를 좋아한다면 한번쯤 읽어도 좋을 것 같군요.

니르바나 2006-10-25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턴가 소설이 안 읽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3종 구입했는데 시도를 해보아야겠어요.
노벨문학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유럽의 변방 취급받는 터키의 작가라서
마음에 들어서요. 위에 수선님 뵈니까 생각나는 소설도 읽어야 하는데..
혜덕화님, 오늘 하루도 편안하시길 빕니다. _()_

혜덕화 2006-10-27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책을 못 읽고 있습니다. 너무 편식하는 것 같아서 요즘은 일부러라도 책을 읽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비 온 후의 가을이 너무 아름다운 나날입니다._()_

비자림 2006-10-28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달팽이님 서재에서 한두 번 뵌 것 같습니다만 인사는 처음 드리네요. 이누아님 서재 갔다가 이 글 보고 왔습니다. 초면에 퍼 가옵니다. 다른 분들도 읽으면 좋을 것 같네요. 이 아침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혜덕화 2006-10-28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좋은 글 마실 다니다 보면 이렇게 인연이 넓어지네요. 저도 곧 한 번 방문하겠습니다._()_
 

늘 토요일 저녁에 삼천배를 시작했었는데, 이번엔 첫 주가 추석이라 둘째주 새벽에 출발하였다.

부산역에서 6시에 출발해서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10시부터 1000배 하고 점심 공양.

남은 절은 30분씩 쉬어가면서 해도 6시가 안되어 끝났다.

 

밤 기도 보다는 낮 기도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느꼈다.

잠과도, 피로와도 싸워야 하는 밤 기도보다는 아름다운 산사의 청명한 햇살을 받으며 하는 낮기도는 삼천배를 마치 삼백배처럼 느끼도록, 몸도 마음도 가볍게 해, 휴식 시간마다 늘어져 있는 사람 보다는 활기찬 대화가 이어지는 잔칫집 같았다.

 

기도는 실천이다.

책을 수만권을 읽어서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실천에 쓰이지 않는 지식은 무의미한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을 갖춘 고급 지식도 활용되어 쓰이지 못한다면, 지식만을 위한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다.

이번 기도엔 교사들이 참 많이 참가하였다.

교사들이 닦아야 하고 부모가 닦아야 하고, 어른이 먼저 닦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 자리를 모르고 백년을 살아봐야 그림자를 따라 살 뿐이다.

 

금요일 밤, 아들이 자기 반 아이의 엄마가 돌아가셔서 학급 전체로 문상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사람들은 더 많은 재산을 모으려고 하고 높은 직위에 오르려고 하고 언제나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모르고 산다면, 수 많은 정보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마음에 밟혀 너무 안타까웠다.

가을 햇살 속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찰나가 영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이 바로 영원이다.

순간 순간 내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잘 보고 살필 일이다.

이 순간에도 슬픔으로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을 햇살이 위로가 되어주었으면, 기도할 뿐.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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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10-16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셨어요? ^^
와, 매주 3천배를 하시나봐요? 전 아침에 나올때 어머니가 틀어놓으시는 불경테이프 잠시 듣는게 전부인데요. 저도 이 가을에 절에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아무리 바빠도. ^^

혜덕화 2006-10-1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정말 오랫만이네요. 운동 잘 하고 계신 것 같더군요. 님의 글에서^^
매주는 아니고 매달 한 번씩 갑니다. 꼭 절이 아니라도 불경 틀어놓은 그 자리가 법당이 아닌가 합니다. 하긴, 산사의 가을 풍경이 정말 아름답더군요. 어여쁜 처자와 함께 다녀오시기를......^^

이누아 2006-10-18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와서 읽고 갑니다. 그저 왔다 갔다는 인사 남기고 싶어서.

혜덕화 2006-10-1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로 끊었던 커피를 다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선 아예 커피를 사 두지 않고 다른 맛있는 차가 많으니 걱정이 없는데, 학교에선 커피 말곤 피로나 잠을 깨워주는 것을 찾기 어렵네요.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미련과 집착을 끊지 못하고 사는 것, 그것대로 좋은 가을입니다. 이누아님, 아픈데 없으시죠?_()_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오줌이 방광으로부터 그 곳으로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저것은 다 같은 물의 유로써 아래로 흐른다는 성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눈물이란 무엇인가 51쪽-

조선 시대 후기에 살았던 심 노숭이라는 한 문인의 글입니다. 평생을 궁핍과 고난 속에서 살면서도 섬세한 마음의 결을 잃지 않고 살았던,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많이 남긴 한 남자의 글입니다.

달팽이님의 <부생육기> 리뷰를 보다가, 아무리 찾아도 내가 그렇게 아끼던 문고판 <부생육기>는 찾을 수 없고, 읽으면서 비슷한 감동을 느꼈던 이 책을 찾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능엄경을 몰랐던 상태로 읽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능엄경의 어느 한 소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 뒤에 나온 해석부분을 보니, 이 글을 쓸 당시 아내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능엄경>을 열심히 공부했다는 대목이 나오네요.

우연히 따라간 오솔길로도, 많은 책과 사람들의 인연이 엮어져 있음을 느낍니다.

가을인가 보군요. 이런 종류의 글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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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9-08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오랜만이예요^^
저는 참...잘 울어요. 어려서 별명이 "울보"였는데, 커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혜덕화 2006-09-09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물이 많기는 마찬가지랍니다. 수선님, 잘 지내시죠?
열심히 글 쓰기 공부하시는 것 같던데, 글쓰기 공부를 계기로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참 나를 찾기 바랍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