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님의 서재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다가 작년에 작고하신 전우익 할아버지의 글이 생각나 책을 찾아 들었습니다. 삼십대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난 정영상님을 그리며 쓰신 할아버지의 글에서 만난 시입니다.
목욕탕에 가면 -정영상
목욕탕에 가면 바닥에 뒹구는 일회용 면도기들이 언젠가 두고 보자며 나를 벼르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칫솔, 비누, 때타올 등 제 목숨껏 살지도 못하고 쓰레기 더미가 된 일회용들이 으드득 이를 갈며 한결같이 큰 재앙이 되어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면도를 하는 동안에도, 때를 미는 동안에도 계속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는 보람도 없이 억울하게 버려지는 물들이.
"인간들아,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씨불씨불 흘러가는 물들이
바닥에 질펀한 죄를 씻어 내리며
언젠가, 언젠가 두고보자! 그렇게 벼르는 것 같습니다.
불야성의 시대, 밤낮없이 밝은 이 시대가 더욱 캄캄합니다.
날이 밝았어.
형은 저승으로, 나는 들로 나가야지요.
1993년 5. 25.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