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네 대화 편 -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3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 / 서광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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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저술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칠십 되는 나이 아테네 내에서 고발당하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그가 고발당한 이유는 젊은이들을 현혹하고 신을 모욕한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억지로 밀어붙인 고소는 소크라테스를 법정 앞에 세우게 만들고, 그를 유죄로 심판한다. 그의 유죄선고는 아테네 시민들이 법에 의해 살아가고, 모든 것은 법으로 복종해야 하나 법을 복종하지 않고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소크라테스를 함정에 빠뜨린다.


그 함정에 의해 관아를 향하여 소크라테스는 발을 옮긴다. 가는 도중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한 에우티프론을 만나고, 그와 대화 후 법정에서 변론하는 소크라테스가 보인다. 플라톤의 대화록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말 그대로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것에서 시작하여 재판과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을 보여준 작품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무고한 죽음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정치인이란 꿈을 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리스철학의 중심이 되어 21세기까지 내려온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플라톤의 사상에 다소 위화감을 느낀다. 플라톤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그의 철학에 중심 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라고 해도,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분명 알 수 있다. 귀족적인 시민, 또는 더 나아가 철인(哲人)군주에 의한 통치다. 국내 플라톤과 그리스철학 대가인 박종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중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환상은 우리의 현실을 옭아대는 병이다. 그런다고 철인이 나와 정치를 해도 다 되는 게 아니다. 이미 21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종현 교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한 점을 보고, 그가 1970년대 한참 교수에 있던 점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군사독재 시절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논하나, 사실 소크라테스가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그가 참주제 이후 민주제가 도래했을 때 어느 권력자에게 미움을 받아서이다. 2번째 변론의 해제부분에서 번역자가 당대 권력자인 아니토스에게 바른 말을 하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아니토스의 사주를 받은 밀레토스가 소크라테스를 공격한 것이다. 당대의 권력자와 그 법정에 나온 시민들은 권력의 흐름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가 일치된 전체의지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희생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철학사상에서 장 자크 루소는 기존 플라톤주의를 이어 받은 것 같으면서도 전도시켰는데, 루소는 플라톤이 주장한 국가관에서 시민에 의한 옳은 정치를 지지했다. <사회계약론>에서 제시한 이상적 국가정치관이 그리스로마의 공화제였다. 하지만 그 공화제에서 모든 것이 옳은 게 아니지만, 그 이후 인간의 역사에서 그 만큼 옳은 정치관이 없었다. 공공에 대한 이익을 지지하고, 개인의 이익을 뒤로 하는 일반의지는 시민정치에서 매우 소중한 정신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법이 아니 법을 이용하는 자를 따르게 되면 그 사회는 결국 독재자의 것이 되거나 바르지 않은 정치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은 보자면 바르지 못한 권력자에 향하여 옳은 이야기를 하다 화를 당한 것이다. 박종현 교수가 197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했다면, 그가 한참 교수로 있던 시절은 군부독재권력이 판을 치는 시기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보면서 철학적 사유를 좋아하나, 번역자의 조언이나 사유를 볼 때마다 조금 불편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철학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고대그리스인에게 신에게 가장 접근하기 좋은 학문이고, 신에게 가장 근접하는 것은 육체를 벗어나 영혼의 영원성이다. 영혼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육체를 벗어나 초현실적 존재로 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에서 인간이 살아생전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오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그 자신도 올바른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잘못된 게 있다면 말해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용기란 바로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지혜다. 박종현 교수의 고대그리스철학 연구 분야는 한국에서 분명 최고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말하던 그 분은 전혀 본인 스스로 소크라테스처럼 살지 않았던 것이다. 실천적인 학문이 아니라 이론적인 영역에서 활동한 것이다. 한국 철학이 이렇게 풍부하지 못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행한 지(智)와 행(行)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단지 지(知)와 행(幸)만 추구했을 뿐이다. 자신의 지적인 능력과 그 능력을 토대로 권력과 이익만 탐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전혀 수업료도 받지 않고, 남에게 바른 말만 하던 남자였다. 그런 점에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을 읽는 것은 모순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던 인생, 우리 같은 소시민 혹은 지혜와 용기가 부족한 이들에겐 엄두도 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신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신은 결국 자신에게 끊임없는 시험에 들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왜 신을 믿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제우스께 맹세코! 라는 그 강렬함을 말이다. 신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관념적인 영역이 있기에 죽음이란 세계를 두려워한다. 물론 죽음과 전혀 관계없는 나이나,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관계가 없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정 두려움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죽음 앞에서도 자신 안에 있는 신을 배신하는 게 더 두려운 것이다. 자신 안의 신이란 양심과 의지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이란 신에게 가장 근접한 이유는 인간으로서 일말 양심의 가책을 만든 짓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내린 배심원을 보면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죄인으로 심판했지만, 신의 심판은 그들에게 어리석고 한심한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신은 없다고 해도 후세의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바라보는 인류에겐 소크라테스는 불멸의 철학자고, 그를 죽도록 만든 시민들은 기회주의자로 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아도 죽음을 선택했다.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파이돈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고, 크리톤을 보면 탈옥하지 않고 사형일을 기다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가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구분되어 있고, 육체는 한시적이나 영혼은 영원한 점이고, 인간이 죽으면 명부에 있는 하데스의 궁에 초대된다. 그곳에 가면 신적인 존재, 위대한 서사 시인들을 만날 수 있어 소크라테스는 도리어 죽음을 기대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점은 우리 인간이 선택하는 시점에서 이미 잘못된 것이라도 그 잘못된 몇 가지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국가를 배반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길러주고 먹여주며, 살아온 날을 보여준 아테네가 사형선고를 한다고 해도 아테네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당시 지식인이나 후대의 인간도 안다. 잘못된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로 모든 것을 배신할 수 없고, 오직 자신 안의 신에게 결백해도 분명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대그리스철학에서 중세를 지나 근대 계몽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시민의 의무란 바로 저런 부당한 사례를 없애는 것이 시민의 의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게 충실한 게 시민의 의무라면 그 국가는 관념적인 존재일 뿐이지, 국가란 결국 정부라는 기능이 필요하다. 정부에서 인간이 운영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정부의 기능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탈옥과 망명을 선택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바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자신을 신용한 것인지? 그래도 지혜로 보자면 소크라테스가 가장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볼 수 있다. 지혜라는 것은 사소한 이익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대인들의 지혜를 보면 사소한 이익에 눈이 빠지도록 신경 쓰며, 결국 남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라도 당장 이익이 있고, 법적인 문제가 없어 보인다면(아니 있더라도) 기를 쓰고 덤벼든다.


우리의 지혜란 바로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지혜다. 물론 사소한 것이라 하여 액수나 권리가 사소한 것은 아니나, 지혜의 가치는 사소하다 못해 치졸한 것이다. 아마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던진 많은 사람 역시 그럴 것이다. 중우주의에 빠진 시민들, 그러나 그런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자 역시 그런 중우주의라는 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다 이제 와서 중우주의를 논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플라톤의 대화록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지 잘 보여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 하지만 나에게 철학은 나의 지혜를 사랑하기보단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공공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곳이 좋다. 물론 플라톤의 <국가>나 <향연>을 보면 아름다운 사람이 결국 아름다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 나온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아주 극소수인 점에서 현대에서 실현 불가하고, 다수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필요하다. 중의주의 요소가 그때보다 더 심한 현실에선 더 어렵고 난감한 일이다. 이미 중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 모순이 드러난 시점이다. 단지 그 현실적 문제는 민주주의 제도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민주주의적인 정신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 점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서적 광고를 보니, 마녀사냥에 대한 인류역사를 다루었다. 그런데 책 처음에 등장한 사건이 소크라테스의 죽임이다. 소크라테스가 마녀사냥의 희생자인 점이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흐름이 태동하면 인간 역시 그런 시대를 따라 가야 하나, 자신의 이권은 과거를 지향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지점에 충돌이 발생하고, 희생자는 권력과 재력이 없는 사람이다. 15~17세기 마녀사냥이 광적으로 이루어진 유럽에선 그 희생자가 힘없는 여성이라면, 고대 사회는 지식인이다. 고대사회는 노예가 존재하고, 심각한 계급사회다. 물론 중세 이후의 유럽 역시 계급사회지만, 개인의 노예보단, 국가의 농노가 더 많은 시기다.

 

그리스의 노예들은 오히려 그리스 남자성인들 즉 시민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구가 전체 10%인 점에서 말이다. 발언권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점은 그 만큼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시민에게 보장되어 있고, 그 책임 역시 막중했다. 시민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통제하는 자다. 그리고 그것이 전도되는 이상 시민의 국가가 아니라 권력자의 국가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시절과 지금의 시절은 다르나, 소크라테스가 적어도 무엇을 위해 희생했는지 본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하늘을 보며 당당히 길을 걷을 수 있을까? 반성과 사유가 없는 인생은 그저 공허한 삶이다. 죽음은 물론 두렵지만, 공허한 인생을 산 자들은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고, 맹목적인 믿음과 광적인 언행을 보인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만큼 어려운 말은 없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볼 점이 있다. 죽음을 한자어로 사망(死亡)이라 하고, 한국인은 귀천(歸天)이라 한다. 영어권에서 죽음이란 death이나, 소크라테스가 말한 죽음은 Thanatos이다. 타나토스는 죽음이기도 하나, Eros와 다르게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Eros는 삶에 대한 열망이란 정신분석적 용어처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왜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으로 가는지 생각하면 타나토스란 단어를 생각해 볼 점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고대그리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에서 윤회설은 없을 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으면 호메로스를 만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어도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 영혼의 삶, 내가 세상에 없어도 역사는 나를 기록한다. 소크라테스가 육체적으로 죽어도 정신적으로 살아있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거론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 역시 역사에 남겨질 것이고, 역사적 가치가 없다면 역사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족보에 내 이름이 올라가겠지만). 만약 내 이름이 후대에 간다면 어떻게 보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은근히 욕먹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 거기서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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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1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르스 발언 때문에 박원순 시장이 검찰 고소되었단 얘길 들었습니다. 법의 칼날이 - 그 속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 해괴망측하게 움직이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이재명 성남시장의 시원한 법적 맞대응 문화가 탄탄해졌으면 합니다. 좋게 좋게 처리하는 게 현명하다는 통념이 많이 깨졌으면 합니다. 돈 없어서 이마저도 못하는 억울함도 많지만...

만화애니비평 2015-06-15 08:27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면 먼저 법적으로 고소당할 자는 따로 있는데 말이죠. 자본이 지배한 세계에서 한계인 것 같습니다.

오쌩 2015-06-16 01:09   좋아요 0 | URL
도대체 어떤 근거로 고소를 한거죠.법에 처벌할 명문화된 조항이 없을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개판이네요.법에도 없는 유언비어 확산을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멍멍이들을 보면...

오쌩 2015-06-16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잘봤어요. 플라톤의 철학,저도 별로 좋아하지않아요.
70년대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철인을 박정희에 비유하는 헌사를 바치는것을 보고, 머리를 저었어요.
군국주의 ,반자유주의,전체주의 를 정당화하는 철학의 시초가 플라톤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6-16 08:52   좋아요 0 | URL
아 과연 70년대이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현대철학자가 존 롤즈인데, 이 양반 밑에서 사사한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있습니다.
이 양반 1980년대 전후로 육군사관학교 철학과 교수에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더불어 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번역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어쩌고 어쩌고 하나, 하는 짓거리가 가관이죠.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간들이 과거 권력에 노예에서 이제 자유로우니 자신의 지위에 노예가 되는군요. 어째 루소의 가르침이 그대로 드러나는지.

소크라테스는 시민으로서 아테네를 위해 살아온 점에서 아이러니하죠. 그가 전쟁 3번과 각종 지위를 맡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나, 그런 그가 민주정에 의해 희생당했죠.

아마 멍청한 중의주의에 의해 뽑힌 정치가보단 처음부터 정치가를 지도하여 양성하는 게 옳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죠.
공부 잘하고 머리 좋아도 결국 양심이 문제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죠.
머리 좋은데 양심이 없는 자와 머리가 나쁜데 양심이 없는 자 중에서 누가 더 시민에게 악영향을 주는가에서 전자라고 하더군요. 후자는 고의보단 무의식적이 요소고 전자는 고의적으로 악질이니깐요. 박통 시절이 바로 그런 시대죠.

오쌩 2015-06-16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민주주의를 반대해 반민주주의를 추구했는데,그가 역설한 철인정치 아래였다면, 소크라테스는 더 빨리 처형당하지 않았을까요.

알옥 2016-05-15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법정에 고발당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 박종현 교수에 대한 비판글 여기서 그냥 글 안읽고 내렸습니다. 플라톤 전집을 읽어보았다면 솔직히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할만 일들을 여럿 했습니다. 특히 초기와 중기 사이의 대화편을 보면 항상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나 소피스트들이나 거기서 거기로 보였을텐데.. 초기나 중기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지인들 대표적으로 크리톤등이 소크라테스에게 경고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없는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없는 궤변론이네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5 22:39   좋아요 0 | URL
걱정마세요. 존 롤즈 번역자인 황경식 교수님은 더 깝니다.
정암학당 향연을 읽었지마는 개인적으로 천병희선생님이 마음이 가네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8 20:56   좋아요 0 | URL
그러면 그런 내용을 저에게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독학했습니다.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궤변론 맞을지도 모릅니다. 공대 졸업하여 독학하면서 님의 그런 지칭 처음 들어봅니다. 답답하면 그렇게 알려주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비꼬는 말투에 대해 님 태도가 바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린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여러모로 성격이 강직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님만큼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데 남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에 대한 이해도에 부분에 대하여 님이 저보다 많이 알겠죠. 제가 박종현 교수를 겨냥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그래 말하면서 그의 지행일치를 논하면서 막상 본인은? 이런 겁니다. 오늘 518인데 황경식 교수는 그 사건을 두고 ˝사태˝라고 하더군요.

아직도 제글에서 플라톤만 잘 알고 모르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시고, 님의 기분이 좋지 못하면 제게 부족한 점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런 양질의 도서를 소개해주면 되는 겁니다. 이 글이 플라톤만 적어내리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요.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님은 오리지널 철학과 전공자가 왠지 허접하게 보이는 사람 잡고 궤변론자이니 답답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정도의 사람일 뿐입니다. 님의 덧글은 ˝내가 아는데 넌 왜 몰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비로그인 2018-05-1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이글을 읽에 되었습니만 꼭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는 징검다리를 건넘니다.
518이 사태 맞지 않습니까?
어찌 말은 잘 하는데 직시하지 못하는 행동은 어디에서 나오는건지
모택동도 스탈린도 정권을 잡은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말이 앞서기전에 사태의 공정함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차안대를 쓰고 어찌 주의를 바라볼수 있습니까

만화애니비평 2018-05-18 08:57   좋아요 0 | URL
일베하세요?
 
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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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시작하면서 그 가치를 더해간다. 과거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이란 서적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라나고 죽을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은 것들이 이야기다. 즉 스토리텔링이란 것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혹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에게 즐거움이다. 이야기란 즐거움에서 어느 이야기이든지 와전되거나 혹은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거나 또는 그 일을 만든 사람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의 뇌란 그 기억력이 한계가 있고, 어느 특이한 영역이 없다면 기억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원래 고대 그리스 비극시를 예전에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전집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극시는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대본으로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공연장에 모여 서로 관람했다. 문제는 코러스부터 시작하여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기본적으로 “크로노스의 아드님이시고,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이신 제우스이시어!” 아마 이 대사가 가장 많이 나올 것이다. 제우스란 존재는 보통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듣는다. 내가 제우스를 처음 접해본 계기는 어린이 인형극에서 헤라클레스의 모험을 보여준 것이다.


 

헤라에게 지독한 질투를 받는 그가 헤라의 영광이란 말에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인간이면서도 신과 같은 위용과 용모를 가지고 있다. 반신반인(半神半人), 신인지 인간인지 모호한 것인가? 아니라면 둘 다에 속하는 것인가? 그리스의 비극이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등장해도 그 인간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고, 마치 신이나 신의 손 안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흔히 동양에서 부처님 손에서 논다는 말이 있다. 어디에 있든지 인간은 신이란 운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 처음부터 내려진 것이다.


 

그런 숙명적 굴레에서 단순히 나는 <일리아스>를 읽고 스토리를 이해하고 나열하는 게 목적이 아닌 것 같다. 인간에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은 높은 설산(雪山) 자락에 어느 작은 돌이 눈을 굴리고 내려와 그게 결국 눈사태로 변하는 이치와 같다. <일리아스>란 바로 그런 눈사태가 일어나는 인간의 이야기다. 일단 누군가의 소개를 보자. 신에서 아테네의 경우 두 눈에서 빛이 나고, 아킬레우스는 준족이고, 투구가 빛나는 헥토르 등등,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상징성이 되었다.


 

거기에 말을 잘 길들이는 트로이아족,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을 본다면 특히 그렇다. 왜 신화를 이야기로만 보지 말고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실 <일리아스>라는 작품은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를 데리고 오면서 비극은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왜 종족이나 국민들의 모습을 저렇게 표현했냐는 뜻이다. 그것은 트로이아족은 말을 잘 길들이는 것으로 보면 그들은 육군전이 능한 종족이고,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은 보병에 능한 종족일 것이란 판단이다.


 

특히 아카이오이족 동맹전사들은 배를 타고 10년 가까이 트로이아족과 전투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들은 배를 타고 온 점에서 해상 전에서 백병전을 펼치는 종족일 것이란 점이다. 신화는 그 나라 혹은 그 민족의 이야기다. 물론 신이 진짜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다. 종교가 없고, 단지 이신론(理神論)적인 요소를 인정하고, 그 이신론이라고 해도 다신족적인 요소를 보기에 그 당시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과 무척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일리아스>에서 말하는 요지는 실제 그 당시 전쟁이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이다.


 

실제 그 전쟁이 있었다면 왜 그들은 인간의 전쟁에 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했을까? 플라톤 서적 중에 하나인 <국가>라는 책을 아주 예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물론 갓 인문학에 발을 들인 시점이라 자세히 이해되지 않았고, 지금은 기억이 한참 남아있지 않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국가>에서 논하고 있다. 인간과 신의 역사에서 황금, 은, 동 그리고 철의 시대가 있다고 말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과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그 당시 그리스가 헬라스로 불리던 곳은 철기문화다. 그런데 <일리아스>는 철기문화 이전의 청동기문화다.


 

청동기문화의 특징은 이제 인간의 역사는 정착이 시작된 점이다. 금속의 발전은 과거 석기시대와 다르게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농사를 획기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왜 제우스가 강력한 신인가? <일리아스>에서 모든 전쟁의 운명을 제우스가 가지고 있다. 제우스의 심기가 곧바로 영웅의 죽음과 삶, 죽음 이후 비참한 모욕까지도 말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신은 제우스만이 아니라 헤라, 아테네, 테티스, 포세이돈 등 매우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준족의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죽마고우인 파트로클로스 죽음에서 전투를 시작한 지점이다.


 

친구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과 증오 그리고 복수심으로 불탄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아의 모든 남자의 씨를 말릴 작정으로 전장으로 뛰어든다. 그의 놀라운 용맹은 신들조차 분노하고 기뻐하고, 아킬레우스가 무참하게 죽인 트로이아의 남자들은 그 인근에 있던 강에 내던진다. 강에 빠진 남자들은 피와 기름을 내뿜으며 하데스의 궁으로 인도된다. 그들의 시체에 냄새가 시큼한 피가 새어나오자 주변에 물고기가 그 흐름을 따라 모인다. 시체를 뜯어먹는 물로기의 모습에서 하신(河神)은 분노한다.


 

아킬레우스를 제압하려던 하신은 헤라의 아들, 불의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의 힘에 의해 제압된다. 그는 하늘의 신인 제우스에게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한다. 강의 신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리아스>의 시기는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동의 시기도 하나, 사실 농업문화가 꽃피우던 시기다. 제우스가 모든 신들 중에 가장 무섭고 위대한 이유는 그가 천둥번개를 던지기 때문이다.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기상현상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적란운에 의한 집중강우, 소용돌이이나 태풍에 의한 기상재앙, 바다에서 폭우를 동반하는 무서운 기상현상이다.


 

번개가 내려치는 것은 비와 바람이 불고 대지를 모조리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옛날에 과학이란 지식은 없다. 과학이라고 믿은 것조차 사실 비과학적인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이고 정당한 사실이다.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은 만큼 그들의 눈에는 기상이변이 신의 두려움으로 느꼈을 것이다. 번개가 치는 이유는 기상현상이 아닌 신의 분노라고 말한다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다. <일리아스> 해설 편에서 트로이아전쟁의 기원전 1200~1500년이라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를 지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던 기원전 4~5세기에서 <일리아스>는 하나의 텍스트로 끌고 온다. 1000년이란 시간에서 <일리아스>는 그리스사람들의 삶에 큰 기반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 기술은 아직까지 번개현상에 대해 밝히지 못했고, 제우스는 영원히 위대한 아버지로 남아있다. 바로 이 아버지란 존재에서 우리는 인류학에 대한 기반 요소를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은 등장인물의 이름 그대로를 적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 누구의 후손이다.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은 아버지 제우스다. 심지어 제우스가 양육하고 제우스가 사랑하고 제우스가 이끌어낸 영웅들에서 <일리아스>는 아버지란 이름이 심하게 강조한다.


 

아가멤논조차 인간의 왕이기도 하나, 그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로 나온다. 아버지의 이름을 등장시킨 것은 결국 모든 인간, 특히 영웅에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필수적인 요소다. 아버지의 이름이란 점에서 당시 사회는 남성중심의 권력이고, 남성들은 자신의 권력을 아버지로부터 승계 받는다. 단지 차이나는 부분은 그리스신화 그 자체에서의 모순이다. 가이아는 아들이면서도 남편인 우라노스에게서 크로노스를 낳지만, 그 크로노스와 합세하여 우라노스를 내친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을 잘라버리고, 후에 크로노스는 자신의 누이이며 아내인 레아에 의해 제우스로부터 도망친다.


 

신들의 세상에서 제우스가 신의 왕이 되면서 신들의 전쟁은 종결된다. 더 이상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거세당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가 제우스가 된다. 일리아스는 그야말로 신과 신의 전쟁에서 인간과 인간의 전쟁으로 전환되는 신화다. 단지 신은 직접적으로 신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인간을 매개로 하여 싸운다.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않고, 사랑하는 인간에게 행운을 내리고, 미워하는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다. 신이 신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소심한 소인배로 등장한다.


 

인간에게 위대한 신이 왜 그렇게 인간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는가? <일리아스>는 신과 인간이 동시에 등장하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순간적으로 동물과 같은 모습이 나온다. 인간의 왕인 아가멤논이 준족의 아킬레우스로부터 전리품 소녀를 빼앗은 시점부터 신들의 장난이 나온다. 당시 인간의 왕이라면 용감한 전사고, 현명한 지도자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심하고 어리석은 모습이 나온다. 그런 모습을 나오는 이유는 인간이 의도한 게 아니라 신의 장난이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에 알 수 없는 이유,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 신들이 저지른 업적이란 뜻이다.


 

<일리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 앞에서 운명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든 발광해도 그 운명의 사슬에서 멈추고 만다. 그리고 인간이 그런 운명 앞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신과 같은 은총에 길이 명성을 남긴다고 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인간이 영생의 영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죽음을 생물학적인 사망보단 하데스의 곁으로 갔다고 하고, 하데스의 신전에 가면 예전에 만난 사람도 만날 수 있다 한다. 인간의 필멸하나, 그 필멸 뒤에 하나의 새로운 영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신화의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인간의 필멸과 영원성에 대한 갈등이다. 신이란 죽지 않고 영원한 불사신이나, 인간은 죽는다. 그런 신이 인간에게 부조리한 장난이 거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부조리에 의해 생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쟁을 보면 그들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많은 그리스 전사들은 전투 중에 죽는다. 그들의 죽음은 비참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들의 무구를 빼앗기는 것이다. 전쟁영웅의 무구를 빼앗아 가는 것만큼 치욕적인 일은 없다.


 

아킬레우스가 친구에게 자신의 무구를 맡겼는데, 친구는 저승에 가고, 그 무구들은 헥토르가 챙긴 시점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성을 빼앗을 정도다. 오로지 어머니 여신 테티스의 음성만이 그의 마음을 안정케 하고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친구의 죽음 앞에 복수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죽음이 앞을 내려 보고 있어도 혼자 도망치는 것은 전사에게 치욕적인 일이다. 날카로운 무기에 의해 베고 찍혀 죽는 것은 잔인하고 비참한 결말이다. 그러나 전사는 그 죽음 앞에서 당당해지는 이유는 자신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는 이유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아버지에게 누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미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내친 불효자다.


 

그런 불효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분명 바뀐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돌고 있지만, 그런 신의 존재는 인간에게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여름 오면 성장을 하며,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 오면 죽음이 도래하여 다시 봄이 온다. 하데스의 신전에 갇힌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보면 안다. 그녀가 오는 시점은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는 시기고, 그가 하데스의 궁에 갇히는 것은 농사를 할 수 없는 시기다. 인간이 보는 자연의 신이 숨 쉬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가 모든 아버지로 되는 이유는 농경사회와 고대국가의 설립이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모든 왕들이 보여주는 대인이다. 대인이란 각 마을이나 소국가의 추장이나 왕이 자신의 재산을 모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들이 주는 선물은 많은 동맹군을 만들고, 많은 이들에게 충성과 사랑을 보장받는다. 아가멤논이 주둔한 병사들은 각각 동물들을 잡고, 고기와 술로서 마음을 달랜다. 이때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음식을 돌아가고, 그것은 모두 공평하게 만족하는 수준까지 제공했다는 점이다. 계급이 왕인 자가 최고의 전사고, 최고의 통치자이나, 모든 전사와 동등한 입장을 가진 점이다.


 

완벽한 계급체계에 그 계급에 대우가 매우 다른 현대 군인에서 오로지 군복만이 평등하게 입고 다닌다. 하지만 저 때는 모두가 공평한 음식과 술을 내어주고, 보상도 충분히 아래 전사까지 이어진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왕과 원로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고, 전쟁 시에 왕 자신이 참전하기에 가능하다. 대인제도로서 전리품은 모든 부하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은 왕을 위해 목숨이 위험한 전장에서 투혼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 왕들은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후예인 점이다. 왕은 신의 후예, 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과 통치력은 보장받는 셈이다. 농경사회가 처음 정착된 고대국가에서 왕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가는 점은 동양도 마찬가지다.


 

삼국지에서 조조나 유비가 병력을 이끌고, 적의 장수를 향하여 돌진한다. 물론 왕의 신분이 되면서부터는 부하에게 맡기나 왕이 되더라도 전장의 지휘관이란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일리아스>는 바로 그런 영웅들, 왕 혹은 왕과 같이 높은 지배계급이 보여주는 전쟁에서 비참하게 쓰러져도 그 모습을 위대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사실 전쟁에서 사람이 죽고, 사람 얼굴이 터져 뇌수가 나오고, 치아가 사방으로 튀는 모습은 보기가 흉하다. 그 흉한 현실적 비극을 훌륭하고 아름답고 가슴 뛰는 영웅서사시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마 이야기하기의 묘미일까?


 

인간은 과거를 지향하면 자신을 스스로 궁지로 몰게 되고, 미래를 보게 되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부여한다. 미래는 지금의 현실을 다시 보게 해주는 거울이 된다. 신화이야기인 <일리아스>가 실존인물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신이란 영원한 불사신을 신봉함으로서 자신을 신 앞에 내놓았을 것이다. 신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부끄러운 행동과 비열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다른 이는 모르나 신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게 고대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일리아스>를 읽는 것은 단순히 영웅서사라는 비극시가 아니다. 지금의 인간에게 매력을 끌어내는 이유는 당시 인간만큼 더 인간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얼마나 진실적인가? 제우스의 저울은 우리에게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는 <일리아스>를 읽고 제우스의 저울에 저울질 당하는 영웅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리아스>를 읽으면 보통 소설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노래에 가깝다. 인간이 노래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노래와 춤이다.


 

무당인 샤먼들이 미친 듯이 뛰고 노래하며 환호하는 이유는 그들은 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어가 서로 달라도 노래로서 음악으로서 서로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음률을 가진 가락에서 인간은 미묘한 감정이 생긴다. 그 감정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감정 내지 무의식적인 영역에 이끌어낸다. 신은 우리의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의 대리자다. 그러나 그 신이 욕망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인간의 공감을 보여주는 존재다. 아카이오이족과 트로이아족이 서로 죽일 것처럼 싸워도 어느 시점에서 인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들에겐 제우스란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을 받아주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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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
김진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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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누구나 잠시나마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이다. 5분이면 우리 인간은 무얼 할 수 있는가? 직장이나 가정에서 통화를 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전달하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고, 5분이면 성격 급한 나 같은 사람들은 밥 1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차로 운전하면 고속도로에선 15㎞ 이상 나가고, 시내버스로는 정류장 3코스 정도 갈 수 있다. 5분이란 시간을 이렇게 내어보면 아주 일반적인 패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서울부산을 왕래하는 기차에선 5분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수험생에게 수험 중의 5분은 황금같은 시간이다.


5분이란 시간은 이렇게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다. 만약 어느 누군가 길에서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거나 심장마비에 걸려 의식을 잃었다면, 5분은 생과 사가 오고가는 시간이다. 척추에 손상을 입었거나 또는 심장이 정지할 때 그 5분 안에 구급차량의 도착과 의료진의 응급조치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한다. 5분이란 시간은 이렇게도 서로 다른 조건에 놓여 있다. 그런 5분은 상황적 순간이 아니라 그저 우리 안의 인식에서 시작하면 어떻게 전환될 수 있는가? 이번에 뉴스타파 기획에서 제작한 『5분,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은 바로 그런 인식적 배경을 바꿀 수 있는 책이다.


말이 5분이지 앞으로 살아갈 5년 이상의 가치를 바꿀 수 있는 책이다. 물론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 편에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제시된 이 문구에 많은 감정이 밀려온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운 것은 선거기간뿐이고, 그 뒤로는 오로지 노예일 뿐이다." 1762년 프랑스에서 나온 이 서적은 대한민국헌법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토대가 된 책이다.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나라에서 루소의 사상은 큰 바탕이 된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에선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실적인 요소를 추구한다. 우리에게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란 무엇인가? 5분이란 시간은 잠시 귀를 기울여도 아깝지 않을 시간이다. 그러나 그 5분에 들어간 내용적 가치에서 우리가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은 것들은 앞으로 우리 미래를 바꿀 거름이 된다. 인간에게 역사적 순간과 기록이 왜 중요한가? 앞으로 우리는 계속 고민하고 방황하며 결국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과연 어떤 게 최선일까?


사람들의 착각들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고 최고의 선택지라 믿는다. 그 믿음만큼 위험성은 없다. 독일의 나치나 일본의 군군주의를 실천할 때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아무런 의구심을 넣지 않았다. 그 당위성 하나가 큰 대의가 되는 순간 세상은 그들의 이상적 사회가 아니라 파괴와 공포 그리고 죽음의 물결로 이루어진다. 5분이란 시간에 그런 과거에 있던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놓인 선택을 좀 더 심사숙고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나는 정의에 대해 어느 책을 보면서 생각한 점이 있었다. 미국 20세기 후반 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의에 대한 그의 사유에서, 부정의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불의는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부정의는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부정의를 선택하는 일이란 자신이 선택한 부정의보다 더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서란 점이다. 어째 보면 악이란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 보겠지만, 자신의 선의 입장이 타인에게 악이 되고, 타인의 악이 자신에게 악이 된다. 선악의 이분법에서 윤리적 가치가 사라진 이상 그 정의란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단지 세력 간의 다툼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세력다툼에 모든 것을 내던진다. 왜 세상의 이토록 부조리한데 그것을 개선하지 못하는 것인가? 5분이란 시간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와 근본이 그래 잘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화두로서 안내로서 5분의 시간을 주어진다면 어떤 것인가? 작은 5분이 결코 작은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선 우리 사회 문제점 18가지를 2가지 테마로 구분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사회, 문화, 경제, 정치, 역사, 군사 등등 우리 일상부터 주변까지 다양한 주제로 포괄하고 있다.


개인적 나는 인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란 논리와 이성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 안의 정체성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체성의 강박관념이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게 되어 자신의 입장에 맞지 않은 가치에 대해 응징의 철퇴를 내리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분명 헌법의 나라, 법치의 나라인데, 이 나라는 과연 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 자유로우나 사회라는 틀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 있다.


그 사슬에 의해 인간은 그 사슬을 얼마나 잘 활용해야할지 어떻게 그 부조리는 올바른 곳으로 유도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방법론이 정치다. 정치에서 루소가 말한 것처럼 선거기간에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지만, 그들의 인식은 자유가 없다. 그런 인식적 구조가 어디서부터인가? 이 책에서 과거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시작하여 독재정부의 통치방법을 거론했다. 다른 가치를 무시하고, 한 가지 목적에 어울리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그 무서움을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타협이 중요한 이유는 타협을 해야 한다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왜 타협해야 하는가?


사회 내외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타협점이란 공통대안을 찾는 것이다. 국론의 분열과 혼란에서 국가가 언제나 평화로운 것이라면 모든 국민이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평화롭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평적인 폭력관계가 발생되는 이유는 인간은 선천적인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가 더 크다는 점이다. 국론이 분열되는 이유는 누군가 불이익을 당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어느 누군가의 불이익으로 혜택을 본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성립이다. 겉으로 동일한 법과 제도로서 지키고자 하나 그 이면에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개선할 여건도 없다. 단지 이런 상황에서 이권을 지닌 자들에게 더 이상의 피해가 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이익을 더 증대하려 한다. 최근 세금과 관련하여 자동차세, 담배세, 주류세 등과 같은 세금은 간접세로서 소비자들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종목들은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거나 이용한다. 단지 그 이용자들이 소득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소비하는 점이다.


회사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장의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 재미있다고 하나 그것은 하나의 블랙코미디처럼 쓰고 달달한 초콜릿 같았다. 게다가 씹히는 맛이 너무 강하고 오래 가서 지금도 그 초콜릿을 씹는 기분이다. "야! 우리나라에서 애국자가 누군지 아나? 군인, 경찰, 아니라면 정치인? 아니야. 바로 내다. 왠지 아나? 내 술 마시고 담배 피우지, 게다가 차도 중형차지, 세금 제일 많이 낸다." 생각하면 그렇다. 아무리 비싼 차라도 세금은 처음 취득세만 그렇지 후에 자동차세에서 차량 배기량으로 가격을 매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기량의 차등으로 매긴 세금의 액수도 조금 바뀐 것으로 들었다.


담배와 술, 담배는 피지 않으나 술은 마실 때가 있다. 소주, 맥주, 막걸리 등에 주요 소비계층은 일반 국민이다. 그런 간접세로 충당될 때, 물가가 오르면 간접세 역시 더 수금된다. 그런 직접세를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기업의 법인세 및 다른 세금, 혹은 증여세, 부동산 등은 가난하거나 평범한 사람에게 머나먼 관계다. 그런 세금을 할인해준다는 황금의 말이 현혹하나 막상 적용의 범위와 효용은 절대적인 차이를 보인다. 허나 사람들은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그 대상에 집중한다. 이런 사회를 조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선택이다.


그 계기는 언론과 여론이다. 모든 정보의 출처가 미디어로서 전달된다. 미디어는 누군가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이권이 반영되어 있다. 공공성의 미디어가 결국 사적인 이익에 직결되는 순간, 공정이란 단어는 이미 사라진 의미다. 공정은 누군가 유리하게 만든 룰에 얼마나 잘 따라주는 것이고, 거기서 멀어지면 도태의 대상이고, 거기서 벗어나면 반사회적 인물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만든 리그가 아니라 그들만의 각본이 만들어낸 리그에서 아무 의미 없이 쳇바퀴를 돌고 있다.


하루를 매일처럼 생계를 위해 뛰고 있으니 세상에 대해 보는 눈이 없어지고, 자신의 판단 역시 정해진 루트만 의존한다. 그들조차 자신의 존재에 대해 본다면 충분히 똑똑하거나 지혜롭다고 여긴다. 그런 착각 속에 그들이 선택하는 것이란 정의라고 보겠지만, 이미 윤리성이나 지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인지 생각한 게 아니라 자신들도 옳다고 여긴 것이다. 사회에서 왜 빈곤층에서 부조리한 사회에 가장 피해보면서 개선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5분이 중요하다. 그 5분을 통해 자신의 삶에 어떻게 가야 할지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삶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의 주변에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어서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다. 인간의 한자가 人間 사람 사이다. 우리에게 삶이 중요한 것은 현재도 있지만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살아가야 할 내 자신도 있지만, 내 주변 사람들도 있다. 만약 자신에게 가정이 있고, 그 가정에 자녀들이 있으며, 그 자녀조차도 아들딸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옳을까?


한국은 인구가 한국전쟁 때 축소하다 다시 산업화로 인해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증가된 인구는 노년층이 되었고, 새롭게 등장해야할 신규 계층은 노년층의 수만큼 오른 게 아니라 그 반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가고 있다. 2인 부부 출산인구가 1인이 겨우 넘는 시점에서 한국의 미래는 암울한 장마와 같다. 나라에선 계속 인구증가를 위한 결혼과 출산 장려홍보를 내세우나, 홍보와 달리 실제 부부 사이는 생활에 직결된 문제다. 결혼마저 의무보단 선택이 되어 가고 있다. 소외된 인간들에게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린 것인가?


사회적 문제는 사회구조겠지만, 그 사회구조를 보고 문제를 모르거나 혹은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또는 자신과 무관계하다 여기면 그 사회는 계속 무너질 것이다. 그런 위기의 순간의 5분, 위에서 응급환자에게 5분이란 생사를 결정한다. 우리 사회는 그런 생사가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그 순간 5분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내려줄까? 판단은 언제나 개인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판단조차 하지 않는다면 결국 최후는 몰락의 연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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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산을 옮기다
윤태영 지음, 노무현재단 기획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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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인간의 기록에서 역사는 항상 좋은 것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통과 파괴로 얼룩진 반란과 전쟁 그리고 학살 등이 우리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역사란 결국 투쟁과 갈등의 기록인 셈이다. 정치적인 사건이 역사적으로 큰 기록으로 남는다. 어느 개인에 대한 사소한 일들을 역사로 남는 것은 무리한 설정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공간에서 그 어느 누구라도 역사적 사건에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지, 그 공간에 머문 존재고 분면 역사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


역사란 그런 과거의 일들을 다시 찾아내고 해석하여 지금의 현실과 마주보게 만든다.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제기한 것처럼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연 그러하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역사로서 지나간 시간의 일들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우리가 왜 역사를 배우냐는 말에 사람들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가?


인간에게 그런 공감과 이성적 판단능력이 결핍이 되지 않을까 여긴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만족한다. 아니라면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에 머문다. 물은 고이면 썩게 되고, 그 물에서는 생명은 제대로 살 수 없다. 물론 인체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해충이나 병원성 미생물은 서식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환경이다.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여 서식할 수 있는 해충과 병원성 미생물은 자신의 이익만 찾아간다. 주변에 숙주나 희생양은 그래도 사멸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생태학적인 조건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적용된다. 인간은 문명의 공간에서 온갖 기술과학과 문화제도에 의존하고 있다. 야생의 자연에 벗어나 자신들만의 제국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이란 존재는 만만치 않은 존재다. 인간의 환경파괴로 환경은 그대로 당하고 있지는 않는다. 각종 자연재해나 병충해, 전염병조차도 그런 충격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다. 지구의 공기가 더워지고 오염이 되면 태풍이 불어 그것을 정화하고 온도를 낮춘다. 그렇다면 인간이 계속 지구를 병들게 한다면 지구 역시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


역사적 교훈에서 유럽의 페스트 내지 각종 전염병 사례로 본다면 인간의 위생관리와 정부의 통제능력, 그리고 국민의 인식에서 알 수 있다. 자연은 스스로 일어나는 재앙이나, 그것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재난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실패와 실수를 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같은 사고는 반복되면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2015년 6월), 한국에서 MERS라고 불리는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다행히 내가 사는 지역은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이 크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저 MERS라고 불리는 전염병은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잠복기가 1~2일 정도이며, 고열과 기침 같은 감기 증세를 보여준다. 예전에 사스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 세계 언론은 전염병의 무서운 전파력과 치명적인 증상에 두려워했다. 점막의 침투나 구강의 투입이 아닌 호흡으로 전달되는 병원성 미생물은 참으로 귀찮다.


결국 일이 터지면 이것을 어떻게 통제하는가에서 그 사회의 관리체계나 구조를 알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미 사망자가 발생하고, 다수의 감염자가 격리 중이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잠재적인 환자가 얼마나 더 있는가이다. 위에서 언급하듯이 MERS는 잠복기가 1~2일이다. 감염된 직후 바로 증상이 오는 게 아니라 잠복기를 거친 후 갑작스레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어떻게든 역학조사와 질병통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극심해진다. 가령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부산, 광주, 대구, 원주 등과 같이 전국으로 간다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병에 노출되고, 그 사람들이 평소대로 활동하면 전국적인 참극이 발생된다.


결국 국가운영 체계에서 얼마나 질병이나 재난통제의 수준이 그 상황을 타파하는 척도가 된다. 2003년 당시 사스가 전 세계를 타격하고, 게다가 그때 태풍 매미까지 한국을 타격했다. 한국에서 태풍은 7~8월인 장마철 주로 오나 가끔 가을태풍이 오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가을태풍은 한국을 위태롭게 만든다. 태풍의 이동경로에서 9월 태풍은 한국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매미태풍은 폭우와 회오리바람으로 많은 재산피해를 일으킨 자연재앙이었다. 그 태풍이 지나가고 그 해 2013년 12월에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다음해 자대에 배치 받았다.


내가 속한 부대는 공사와 용역설계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건설사무소였다. 공사행정을 업무를 보던 나는 하자보수 건으로 외부업체들과 계속 업무를 진행했다. 그런데 공사대장을 찾아보니 대부분 2003년에 공사를 계약하여 그 해 내지 2004년 초에 다 정리된 공사가 많았다. 대규모 보수공사를 정리하면서 계약일과 공사과업을 살펴보니 그것은 태풍 매미로 인해 파손된 시설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공사인 것이다. 빠른 공사 집행과 관리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예산과 관련된 말에서 나는 조금 더 놀랐다.


군대라는 곳은 지방세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국비로 운영한다. 국방부가 예산운영기관과 협의하여 예산을 받아온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예산소요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삼군 참모총장에게 공문을 시달하고, 삼군 참모총장은 다시 예하부대로 그 사항을 지시하여 소요를 보고하게 한다. 그러면 여기서 끝이 아니라 그 예하부대의 소속 부대들은 소요를 제기하여 그것을 집계하여 정리하면 기간이 제법 걸린다. 그러다 보면 예산을 관리하는 담당관조차 그것을 구분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왜냐하면 예산을 받기 위해 예산운영기관의 관리만 아니라 행정부와 국회 등과 같은 다른 기관에서 협의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자세히 몰랐으나, 업무를 하고 사회에 나와 계속 건설용역 관련 업무를 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예산은 국가운영의 예산이 아니라 개인의 판공비였다. 어느 공무기관의 부서장이 자신의 업무에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예산이 태풍 매미의 복구예산으로 나온 것이다.


2014년 8월 폭우로 인해 침수피해에 대한 복구 관련 용역 및 공사가 2015년에 한창 진행되는데, 이미 그때는 이미 1달도 안 되어 그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국가재난상황에 빠른 대응과 대처, 그리고 후속 조치가 국가기관 업무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국가라는 조직은 바로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체계를 마련하고 관리해주는 기관이어야 한다. 관리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평시에는 별 상관없으나 전시, 준전시, 재난 시에 그 피해가 극에 달한다.


2014년 4월 팽목항에서 일어난 세월호 선박사고는 수많은 인명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다. 국가기관의 재난통제능력은 바로 이런 계기에서 바로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일어난 재난사고는 누가 과연 컨트롤 타워가 되어 운영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우왕좌왕한 사이 배를 가라앉았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나, 그 주인은 차디찬 하데스의 신전으로 가야했다. 포세이돈이 등장해서 기적이라도 일으켜 주면 좋겠지만, 기적은 없고, 기만으로 가득한 언론과 여론만 생겼다.


그러면서 과거 어떤 남자가 생각났다. 무능한 것이 아니라 무력한 남자, 그래도 『캉디드』도 아닌데도 낙관주의로서 세상을 보려했던 남자, 노무현이 생각났다. 내가 군복무 할 때 그가 대통령이었다. 재난에 대한 관리체계가 12년 전과 지금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그냥은 아니었다. 『바보 산을 옮기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6주년에 나온 서적이다. 어느 한 인물이 죽어 세상에 없어도 그에 대한 서적이나 이야기는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매년 5월만 되면 계속 끊이지 않은 인간은 아마 노무현밖에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국가적 재난, 피해자가 속출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국민, 국가의 대응체계에 그저 무력하게 바라보는 현실에서 언제나 그렇지만 노무현이란 이름이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이 책은 과거 그의 비서관으로 활동한 윤태영 씨가 작성한 것이고, 그는 이 서적을 만들기 전에 『기록』이란 서적을 출간했다. 처음 <바보 산을 옮기다>를 읽으면 유시민 전 장관이 만든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와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면 어느 위기나 역사적 순간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시선이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에만 의존한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후맥락을 읽지 않으면 편향된 판단력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가려진 이야기보단 가려질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여기서 잘 알 수 있는 윤태영 전 비서관이 바라본 노무현의 정치관이다. 노무현은 노동자를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되었다. 그가 가진 꿈을 갖고 정치에 입문해도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처럼 이미 세계는 자본의 국경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20세기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된 21세기에 자본이 결국 모든 것을 지배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자본이 모든 것을 가진 것을 인정하듯이 자본이 우선인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자본 그 자체를 무리하게 억제하는 것은 시대적 역행이고, 그것만 우선하면 대다수의 약자인 국민들은 피해본다. 결론은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피해가 오고, 그에게 기대한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임된 순간, 대한민국이 바로 바뀌지 않는다. 단지 바꿀 수 있는 정점만 생길 뿐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다고 해서 바로 프랑스 민중생활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인간들의 실수는 모든지 체계나 정치제의 개편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올 것이 여기나, 그것은 명백한 바보 같은 소리다. 단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만약 그 기회를 버리면 더 심각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은 프랑스를 위대한 독재자 나폴레옹의 손으로 가게 만들었다.


민주주의 역사가 시작된 프랑스가 오히려 제국주의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부르봉왕가의 부활, 후에 일어난 혁명을 보면서 역사를 배우는 바로 그런 것이며,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는 이야기란 사실이 이런 연유다. 노무현이란 인간은 그런 역사를 알았다. 대통령 노무현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려 했다. 하지만 인간은 논리와 이성으로 이루어진 동물이 아니다. 감정이라 해도 연민의 감정만이 아니라 질투와 시기, 우월의식에 고취된 무의식적인 공격성도 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한 일반의지가 아니라 어느 집단의 이기심이 하나의 정치적인 가치관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전체의지로 표출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지역의 차이로 인간을 차별하고 그것이 정치적 갈등이 되어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아킬레우스 같은 뛰어난 전사가 아닌 상태에서 발목을 잡힌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그걸 바라볼 수 없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을 선례로 남겨야 한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보면 처음 이상을 가지고 뛰어든 전사는 비참한 인생과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가진 이상과 반대된 자들은 득세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반대세력조차 자연의 섭리에 의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이상을 위해 투쟁한 자는 역사의 새로운 안내자가 된다.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혁명가들의 복음서 『사회계약론』을 저술한 루소조차 그렇다. 좌파의 시작인 그가 좌․우파 모두에게 찬사와 비난을 받았으나, 지금 21세기 그는 세계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2012년 유네스코에 정한 인물). 루소는 아마 산을 옮길 수 있는 설계도면이나 지침서를 주었다면 그 후에 등장한 인물들은 산을 옮기려 했거나 실제 옮겼을 것이다.


『바보 산을 옮기다』를 읽으면서 『사회계약론』이 많이 떠올랐다.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정치인이 아니라 법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시민들은 오직 법에만 복종해야 하는 점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자가 나오면 독재가 되고, 많은 시민들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게 『사회계약론』의 가르침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외적으로 정치체계로서 존재하지 모르나, 진정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성적 성찰과 비판, 그리고 토론과 협의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평가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관료체계는 바로 그런 조직적 힘을 뒷받침하기 것이나, 그게 어느 개인과 집단적 이익관계가 개입되면 법은 모든 인간의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인간만 위에 군림하게 만들게 된다. 노무현이 말한 산이란 바로 그런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을 모두 법 아래로 내려놓기 위함이다. 그 법 위에 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각종 차별의식을 불어넣고 언론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인다. 물론 노무현의 사상 자체가 모두 옳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바에서 진정 우리가 비판적 자세로 이성적 성찰을 한다면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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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6-0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스때와 메르스의 지금을 비교하면 누가 덜 나쁜지는 자명하죠.노무현이라고 다 최선일 수는 없지만 지금은 최악입니다.
지도자가 무능하면 국민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고통의 범위가 달라질겁니다. 지금은 정부가 없는 셈이죠.무능은 속수무책을 만들죠.

만화애니비평 2015-06-06 12:31   좋아요 0 | URL
반정부도 무정부도 아닌 비정부가 맞을지도
아나키스트도 아닌 자들이 정부를 해체하고 있으니..아이고...
 

<사이코 패스> TV판을 보면 주제가 바로 감시와 처벌이다. 코가미 신야가 자신의 스승에게 찾아가 마키시마 쇼코를 추적할 때, 스승과 제자는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그것을 피해가는 쇼코에 대한 추리를 한다. 그때 나온 단어가 푸코와 벤담의 파놉티콘이란 일원감시망이다. 시빌라 시스템이란 모든 정점의 최고에 올라 자신의 볼 수 있는 시선으로 모두 감시한다. 즉 전 지구적인 감시, 인간의 눈이 아니라 신이 준 눈으로 보는 것이다. 시빌라(Sibylla)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시빌(Sibyl)의 원조로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무녀를 지칭한다.

 

그녀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에 의해 축복을 받은 무녀로서 신탁을 내리는 재능이 있다. 신탁을 내리는 것은 곧 신의 말을 전하는 것, 인간의 신체로 인간이상의 존재의 말로서 모든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신화 내지 또는 비극, 특히 위대한 그리스시인 호메로스가 저술한 일리아스를 조금 읽으면 조금 감이 올 수 있다. 시빌라 시스템의 의도를 보자면 곧 인간이 만든 제도이나, 인간 이상의 존재가 만든 체계 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들의 원류가 면역체질의 인간, 즉 마키시마 쇼코 같은 인간들의 뇌가 밀집하여, 자신들의 판단으로서 모든 사회를 지배한다. 그들은 육체가 존재하지 않고, 뇌라는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만 남는다. 육체가 사라진 인간에게 필요한 욕망은 무엇인가? 신체를 가진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식욕이다. 음식을 섭취하여 자신의 체력을 유지하며, 그것이 만족하면 성욕이다. 성욕은 자신의 성적 무의식 리비도에 의해 성행위를 나누고, 그것은 새로운 자신의 분신, 후손을 남긴다.

 

그러나 성욕과 식욕이 만족되면 인간을 무엇을 추구하는가? 결국 인간은 문화적 존재로 살아가고, 그 문화에서 문명의 발전과 사회적 진보는 결과적으로 진행된다. 문제는 그 문화적 존재로 살아가는데, 그 정치사회적 체계가 달려있다. 22세기 세계는 분쟁으로 인해 단절되고, 본 작품의 세계에서 일본은 시빌라 시스템이 모든 것을 정한다. 시빌라 시스템이 추구하는 목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이른바 공리주의라는 사회제도로서 이것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이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체계다. 공리주의는 그 자체로서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정치체계를 우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코 패스>에서 공리주의가 모든 정치제도의 머리 위에 존재한다. 즉 시빌라 시스템이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한 것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법위에 존재하는 통치자, 즉 노모스(nomos)로서 존재하고, 이 통치자는 육체가 없는 정신적 영역만 존재하므로 이상적인 정치사회를 구현하려 한다. 문제는 인간의 정치제도의 이상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은 고대사회부터 현대사회로 이어지는 게 우리의 역사다.

 

이 역사적 흐름에서 계급투쟁이 처음에 족장과 부족(고대 이전 사회), 신화적 왕과 신민(고대사회), 왕족귀족과 성직자와 농노(봉건사회), 다음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체계로 이행된다. 이런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혁명, 반동과 반란의 세상이다. 인간이 그토록 투쟁하며 살아온 이유는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자신의 주인으로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시발라 시스템이 일본을 제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 투쟁의 역사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주인으로 살아가기보단 자신의 욕망과 안위를 위해 살아간 것이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의 선택이다.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 사유로서 이성적 비판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성의 자유를 최고의 자유로 여기는 것은 고대그리스부터 근대사상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인간은 이성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가이다. 오히려 자유라는 의지를 이성보단 자신의 감정과 무의식이란 욕망에 의해 스스로의 자유를 파괴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만든 사회화는 자신이란 존재는 군중의 벽 뒤로 숨어버린다.

 

시발라 시스템이 왜 일본에서 최적화되었는가? 마키시마 쇼코가 왜 그런 테러를 준비했는가?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사이코 패스> 1기에서 쇼코의 행동은 분명히 테러이고, () 사회적인 행위이며, 명확한 악으로서 보여준다. 하지만 쇼코의 입장에서 쇼코의 논리로 들어가면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에서 그 역시 정의가 존재한다. 정의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정의는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의지이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쇼코의 정의는 시빌라 시스템이 인간을 가축으로 길들이고,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에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에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이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식으로 쇼코는 인간의 불안한 충동을 실험하고 사회에 대한 공격을 가한다. 시빌라 시스템이 우려하는 것은 사회의 분란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세상에 불순물이 생기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따른 두뇌스캔에서 인간의 심리가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진 것에 따라 그 사회의 불순물이 될지 혹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지 분리한다. 인간의 심리란 후천적인 영향을 받지만, 인간의 심리 혹은 영혼 역시 선천적 영향을 받는다.

 

시빌라 시스템에서 운영되는 뇌들은 선천적인 존재이고, 자신들은 선택받았기에 신을 대신 신탁자로서 인간을 통치하고, 모든 것을 감시한다. 그런 시스템이 일본이 아니라 타국에 간다면? 여기서부터 <사이코 패스> 극장판의 본질적 문제가 드러난다. 시빌라 시스템은 동남아시아 연합이 국가적 기능이 붕괴한지 2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내전만 존재하는 비국가적인 체계다. TV판에서 아카네가 시빌라 시스템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빌라 시스템이 하나의 법적 제도적 체계가 되었다.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시빌라 시스템이 만들어낸 법적인 체계를 인정했다. 즉 아카네는 법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 TV판의 모습과 극장판 모습에서 아카네 감시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TV판에서 시빌라 시스템을 부정하지만, 그 시스템이 만든 공리주의 사회체계는 긍정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연합에서의 시빌라는 부정한다. 동남아시아연합은 계속 내전 중이고, 군벌과 반정부 게릴라는 계속된 내전으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다. 이때 반정부에 대한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개입을 두고 아카네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바로 인도네시아의 인민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라는 점이다. 아카네의 역설적인 반응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아카네가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카네는 동남아시아 연합의 인민들의 선택에 의한 정치를 만드는 게 합당하다고 했다. 시빌라 시스템이 동남아시아 연합에 개입한 이유는 그것은 군벌에 의한 압제로 인해 하나의 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가적 기능에서 국민이 없으면 국가로 볼 수 없다. 국민이 없는 이전의 사회, 그곳에 주거하는 인간에 대해 인민이라 한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은 오로지 법에만 복종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은 모든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통치자 내지 정치가 역시 법에 복종하여 정치를 실행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아카네의 논리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인도네시아 군벌세력은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으로 관료주의의 폭력성을 정당화하여 인도네시아 연합 주민들을 탄압한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다른 군벌세력과 반정부 게릴라를 섬멸한다.

 

반정부 게릴라는 본래 민주주의국가를 정착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무리다. 인도네시아 연합 수도에 들어가면 일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목에 목걸이를 차고 있다. 그 목걸이는 만약 군벌세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바로 처벌할 수 있게 만든 도구다. 감시와 처벌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체계로 군벌세력은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지배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던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구절)."

 

군벌은 남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시빌라 시스템을 이용하여 그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인 (권력의) 노예였다. <사이코 패스> 극장판에서 TV 1기 실종된 코가미 신야를 쫓아 인도네시아 연합으로 간 아카네지만, 그 스토리 이면에 가려진 작품세계는 인간이 가진 자유와 의지다. 왜 반정부 게릴라는 거대한 군벌의 무기 앞에 무참히 죽어가도 그 총을 놓지 않은 것인가? 왜 코가미 신야의 친구인 게릴라지도자는 죽을 줄 알면서도 옆의 동료 옆에서 적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인가?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구절).”

 

사실 아케네가 일본에서 일어난 테러범들의 출처가 코가미 신야의 연계성을 보고 넘어간 것이나, 그곳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아카네와 코가미의 활약에서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에서 가치가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카네 친구의 결혼이다. 그녀는 드레스를 고르면서 상대남자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빌라 시스템에서 정해준 것이라 말한다. 사랑과 가족관계 역시 시빌라 시스템으로 이어지면 인간은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들은 없다.

 

단지 정해진 틀에 의해 기계적인 삶만 살아간다. 그런 완벽하게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바라는 것이 시빌라 시스템이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 이상의 의지가 존재하기에 그렇다. 글 초반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거론한 이유는 이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들의 의지에 의해 농락당한다. 제우스와 그 주변 신들의 힘에 의해 전사들은 하데스의 신전에 찾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신의 입 바람으로 활과 창이 상대방의 심장과 머리에 박힌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이 인간세상에서 하나의 정당성이 되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쇼코를 죽인 코가미는 오히려 쇼코처럼 되어간다. 단지 쇼코는 개인적 취향, 미적감각에 의해 인간들을 움직이나, 코가미는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위해 싸우는 지성인으로서 투쟁한다.

 

나는 인류 속에서 두 종류의 불평등을 생각한다. 그 하나를 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 부른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연령이나 건강이나 체력의 차이와 정신, 또는 영혼의 질의 차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종의 약속에 의존하여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정해지든가 정당화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 부를 수 있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은 얼마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침으로써 누리게 되는 갖가지 특권,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부유하다든가 존경을 받고 있다는가 권력이 있다는가, 나아가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킨다는 특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이코 패스> TV판과 극장판에 등장하는 불평등은 2가지로 볼 수 있다. TV판에서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고, 극장판은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다. 그래서 전자는 이미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굴레에 살아가고, 후자에서는 투쟁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이코 패스>에서 일본의 인간들은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이코 패스>는 먼 미래를 사회적 배경을 삼은 SF범죄 장르다. 이 작품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 이상적인 가치관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시민의 자유의지가 아닌 시빌라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소수 인간의 뇌만으로 결정된다. 비록 그 세상이 안정되더라도 어떻게든 인간사회에선 특이한 존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존재에 대해 우리는 배타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받아들여 하나의 가치로 인정할 것인가?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 이외의 가치를 모조리 부정한다. 그곳 세계는 민주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이란 존재 아래 자신의 기계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만 존재할 뿐이다. <사이코 패스>에서 쇼코가 가진 책으로 조지 오웰의 <1984>가 있다. 하지만 작품을 계속 보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가고 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이미 당신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해져 있다 말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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