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패스> TV판을 보면 주제가 바로 「감시와 처벌」이다. 코가미 신야가 자신의 스승에게 찾아가 마키시마 쇼코를 추적할 때, 스승과 제자는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그것을 피해가는 쇼코에 대한 추리를 한다. 그때 나온 단어가 푸코와 벤담의 파놉티콘이란 일원감시망이다. 시빌라 시스템이란 모든 정점의 최고에 올라 자신의 볼 수 있는 시선으로 모두 감시한다. 즉 전 지구적인 감시, 인간의 눈이 아니라 신이 준 눈으로 보는 것이다. 시빌라(Sibylla)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시빌(Sibyl)의 원조로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무녀를 지칭한다.
그녀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에 의해 축복을 받은 무녀로서 신탁을 내리는 재능이 있다. 신탁을 내리는 것은 곧 신의 말을 전하는 것, 인간의 신체로 인간이상의 존재의 말로서 모든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신화 내지 또는 비극, 특히 위대한 그리스시인 호메로스가 저술한 「일리아스」를 조금 읽으면 조금 감이 올 수 있다. 시빌라 시스템의 의도를 보자면 곧 인간이 만든 제도이나, 인간 이상의 존재가 만든 체계 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들의 원류가 면역체질의 인간, 즉 마키시마 쇼코 같은 인간들의 뇌가 밀집하여, 자신들의 판단으로서 모든 사회를 지배한다. 그들은 육체가 존재하지 않고, 뇌라는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만 남는다. 육체가 사라진 인간에게 필요한 욕망은 무엇인가? 신체를 가진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식욕이다. 음식을 섭취하여 자신의 체력을 유지하며, 그것이 만족하면 성욕이다. 성욕은 자신의 성적 무의식 리비도에 의해 성행위를 나누고, 그것은 새로운 자신의 분신, 후손을 남긴다.
그러나 성욕과 식욕이 만족되면 인간을 무엇을 추구하는가? 결국 인간은 문화적 존재로 살아가고, 그 문화에서 문명의 발전과 사회적 진보는 결과적으로 진행된다. 문제는 그 문화적 존재로 살아가는데, 그 정치사회적 체계가 달려있다. 22세기 세계는 분쟁으로 인해 단절되고, 본 작품의 세계에서 일본은 시빌라 시스템이 모든 것을 정한다. 시빌라 시스템이 추구하는 목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이른바 공리주의라는 사회제도로서 이것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이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체계다. 공리주의는 그 자체로서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정치체계를 우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코 패스>에서 공리주의가 모든 정치제도의 머리 위에 존재한다. 즉 시빌라 시스템이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한 것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법위에 존재하는 통치자, 즉 노모스(nomos)로서 존재하고, 이 통치자는 육체가 없는 정신적 영역만 존재하므로 이상적인 정치사회를 구현하려 한다. 문제는 인간의 정치제도의 이상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은 고대사회부터 현대사회로 이어지는 게 우리의 역사다.
이 역사적 흐름에서 계급투쟁이 처음에 족장과 부족(고대 이전 사회), 신화적 왕과 신민(고대사회), 왕족‧귀족과 성직자와 농노(봉건사회), 다음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체계로 이행된다. 이런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혁명, 반동과 반란의 세상이다. 인간이 그토록 투쟁하며 살아온 이유는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자신의 주인으로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시발라 시스템이 일본을 제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 투쟁의 역사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주인으로 살아가기보단 자신의 욕망과 안위를 위해 살아간 것이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의 선택이다.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 사유로서 이성적 비판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성의 자유를 최고의 자유로 여기는 것은 고대그리스부터 근대사상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인간은 이성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가이다. 오히려 자유라는 의지를 이성보단 자신의 감정과 무의식이란 욕망에 의해 스스로의 자유를 파괴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만든 사회화는 자신이란 존재는 군중의 벽 뒤로 숨어버린다.
시발라 시스템이 왜 일본에서 최적화되었는가? 마키시마 쇼코가 왜 그런 테러를 준비했는가?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사이코 패스> 1기에서 쇼코의 행동은 분명히 테러이고, 반(反) 사회적인 행위이며, 명확한 악으로서 보여준다. 하지만 쇼코의 입장에서 쇼코의 논리로 들어가면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에서 그 역시 정의가 존재한다. 정의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정의는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의지이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쇼코의 정의는 시빌라 시스템이 인간을 가축으로 길들이고,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에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에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이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식으로 쇼코는 인간의 불안한 충동을 실험하고 사회에 대한 공격을 가한다. 시빌라 시스템이 우려하는 것은 사회의 분란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세상에 불순물이 생기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따른 두뇌스캔에서 인간의 심리가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진 것에 따라 그 사회의 불순물이 될지 혹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지 분리한다. 인간의 심리란 후천적인 영향을 받지만, 인간의 심리 혹은 영혼 역시 선천적 영향을 받는다.
시빌라 시스템에서 운영되는 뇌들은 선천적인 존재이고, 자신들은 선택받았기에 신을 대신 신탁자로서 인간을 통치하고, 모든 것을 감시한다. 그런 시스템이 일본이 아니라 타국에 간다면? 여기서부터 <사이코 패스> 극장판의 본질적 문제가 드러난다. 시빌라 시스템은 동남아시아 연합이 국가적 기능이 붕괴한지 2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내전만 존재하는 비국가적인 체계다. TV판에서 아카네가 시빌라 시스템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빌라 시스템이 하나의 법적 제도적 체계가 되었다.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시빌라 시스템이 만들어낸 법적인 체계를 인정했다. 즉 아카네는 법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 TV판의 모습과 극장판 모습에서 아카네 감시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TV판에서 시빌라 시스템을 부정하지만, 그 시스템이 만든 공리주의 사회체계는 긍정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연합에서의 시빌라는 부정한다. 동남아시아연합은 계속 내전 중이고, 군벌과 반정부 게릴라는 계속된 내전으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다. 이때 반정부에 대한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개입을 두고 아카네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바로 인도네시아의 인민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라는 점이다. 아카네의 역설적인 반응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아카네가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카네는 동남아시아 연합의 인민들의 선택에 의한 정치를 만드는 게 합당하다고 했다. 시빌라 시스템이 동남아시아 연합에 개입한 이유는 그것은 군벌에 의한 압제로 인해 하나의 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가적 기능에서 국민이 없으면 국가로 볼 수 없다. 국민이 없는 이전의 사회, 그곳에 주거하는 인간에 대해 인민이라 한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은 오로지 법에만 복종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은 모든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통치자 내지 정치가 역시 법에 복종하여 정치를 실행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아카네의 논리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인도네시아 군벌세력은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으로 관료주의의 폭력성을 정당화하여 인도네시아 연합 주민들을 탄압한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다른 군벌세력과 반정부 게릴라를 섬멸한다.
반정부 게릴라는 본래 민주주의국가를 정착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무리다. 인도네시아 연합 수도에 들어가면 일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목에 목걸이를 차고 있다. 그 목걸이는 만약 군벌세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바로 처벌할 수 있게 만든 도구다. 「감시와 처벌」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체계로 군벌세력은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지배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던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구절)."
군벌은 남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시빌라 시스템을 이용하여 그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인 (권력의) 노예였다. <사이코 패스> 극장판에서 TV 1기 실종된 코가미 신야를 쫓아 인도네시아 연합으로 간 아카네지만, 그 스토리 이면에 가려진 작품세계는 인간이 가진 자유와 의지다. 왜 반정부 게릴라는 거대한 군벌의 무기 앞에 무참히 죽어가도 그 총을 놓지 않은 것인가? 왜 코가미 신야의 친구인 게릴라지도자는 죽을 줄 알면서도 옆의 동료 옆에서 적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인가?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구절).”
사실 아케네가 일본에서 일어난 테러범들의 출처가 코가미 신야의 연계성을 보고 넘어간 것이나, 그곳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아카네와 코가미의 활약에서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에서 가치가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카네 친구의 결혼이다. 그녀는 드레스를 고르면서 상대남자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빌라 시스템에서 정해준 것이라 말한다. 사랑과 가족관계 역시 시빌라 시스템으로 이어지면 인간은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들은 없다.
단지 정해진 틀에 의해 기계적인 삶만 살아간다. 그런 완벽하게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바라는 것이 시빌라 시스템이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 이상의 의지가 존재하기에 그렇다. 글 초반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거론한 이유는 이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들의 의지에 의해 농락당한다. 제우스와 그 주변 신들의 힘에 의해 전사들은 하데스의 신전에 찾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신의 입 바람으로 활과 창이 상대방의 심장과 머리에 박힌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이 인간세상에서 하나의 정당성이 되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쇼코를 죽인 코가미는 오히려 쇼코처럼 되어간다. 단지 쇼코는 개인적 취향, 미적감각에 의해 인간들을 움직이나, 코가미는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위해 싸우는 지성인으로서 투쟁한다.
“나는 인류 속에서 두 종류의 불평등을 생각한다. 그 하나를 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 부른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연령이나 건강이나 체력의 차이와 정신, 또는 영혼의 질의 차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종의 약속에 의존하여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정해지든가 정당화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 부를 수 있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은 얼마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침으로써 누리게 되는 갖가지 특권,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부유하다든가 존경을 받고 있다는가 권력이 있다는가, 나아가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킨다는 특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이코 패스> TV판과 극장판에 등장하는 불평등은 2가지로 볼 수 있다. TV판에서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고, 극장판은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다. 그래서 전자는 이미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굴레에 살아가고, 후자에서는 투쟁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이코 패스>에서 일본의 인간들은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이코 패스>는 먼 미래를 사회적 배경을 삼은 SF범죄 장르다. 이 작품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 이상적인 가치관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시민의 자유의지가 아닌 시빌라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소수 인간의 뇌만으로 결정된다. 비록 그 세상이 안정되더라도 어떻게든 인간사회에선 특이한 존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존재에 대해 우리는 배타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받아들여 하나의 가치로 인정할 것인가?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 이외의 가치를 모조리 부정한다. 그곳 세계는 민주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이란 존재 아래 자신의 기계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만 존재할 뿐이다. <사이코 패스>에서 쇼코가 가진 책으로 조지 오웰의 <1984>가 있다. 하지만 작품을 계속 보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가고 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이미 당신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해져 있다 말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