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
김진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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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누구나 잠시나마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이다. 5분이면 우리 인간은 무얼 할 수 있는가? 직장이나 가정에서 통화를 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전달하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고, 5분이면 성격 급한 나 같은 사람들은 밥 1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차로 운전하면 고속도로에선 15㎞ 이상 나가고, 시내버스로는 정류장 3코스 정도 갈 수 있다. 5분이란 시간을 이렇게 내어보면 아주 일반적인 패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서울부산을 왕래하는 기차에선 5분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수험생에게 수험 중의 5분은 황금같은 시간이다.


5분이란 시간은 이렇게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다. 만약 어느 누군가 길에서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거나 심장마비에 걸려 의식을 잃었다면, 5분은 생과 사가 오고가는 시간이다. 척추에 손상을 입었거나 또는 심장이 정지할 때 그 5분 안에 구급차량의 도착과 의료진의 응급조치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한다. 5분이란 시간은 이렇게도 서로 다른 조건에 놓여 있다. 그런 5분은 상황적 순간이 아니라 그저 우리 안의 인식에서 시작하면 어떻게 전환될 수 있는가? 이번에 뉴스타파 기획에서 제작한 『5분,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은 바로 그런 인식적 배경을 바꿀 수 있는 책이다.


말이 5분이지 앞으로 살아갈 5년 이상의 가치를 바꿀 수 있는 책이다. 물론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 편에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제시된 이 문구에 많은 감정이 밀려온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운 것은 선거기간뿐이고, 그 뒤로는 오로지 노예일 뿐이다." 1762년 프랑스에서 나온 이 서적은 대한민국헌법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토대가 된 책이다.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나라에서 루소의 사상은 큰 바탕이 된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에선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실적인 요소를 추구한다. 우리에게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란 무엇인가? 5분이란 시간은 잠시 귀를 기울여도 아깝지 않을 시간이다. 그러나 그 5분에 들어간 내용적 가치에서 우리가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은 것들은 앞으로 우리 미래를 바꿀 거름이 된다. 인간에게 역사적 순간과 기록이 왜 중요한가? 앞으로 우리는 계속 고민하고 방황하며 결국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과연 어떤 게 최선일까?


사람들의 착각들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고 최고의 선택지라 믿는다. 그 믿음만큼 위험성은 없다. 독일의 나치나 일본의 군군주의를 실천할 때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아무런 의구심을 넣지 않았다. 그 당위성 하나가 큰 대의가 되는 순간 세상은 그들의 이상적 사회가 아니라 파괴와 공포 그리고 죽음의 물결로 이루어진다. 5분이란 시간에 그런 과거에 있던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놓인 선택을 좀 더 심사숙고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나는 정의에 대해 어느 책을 보면서 생각한 점이 있었다. 미국 20세기 후반 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의에 대한 그의 사유에서, 부정의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불의는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부정의는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부정의를 선택하는 일이란 자신이 선택한 부정의보다 더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서란 점이다. 어째 보면 악이란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 보겠지만, 자신의 선의 입장이 타인에게 악이 되고, 타인의 악이 자신에게 악이 된다. 선악의 이분법에서 윤리적 가치가 사라진 이상 그 정의란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단지 세력 간의 다툼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세력다툼에 모든 것을 내던진다. 왜 세상의 이토록 부조리한데 그것을 개선하지 못하는 것인가? 5분이란 시간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와 근본이 그래 잘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화두로서 안내로서 5분의 시간을 주어진다면 어떤 것인가? 작은 5분이 결코 작은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선 우리 사회 문제점 18가지를 2가지 테마로 구분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사회, 문화, 경제, 정치, 역사, 군사 등등 우리 일상부터 주변까지 다양한 주제로 포괄하고 있다.


개인적 나는 인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란 논리와 이성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 안의 정체성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체성의 강박관념이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게 되어 자신의 입장에 맞지 않은 가치에 대해 응징의 철퇴를 내리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분명 헌법의 나라, 법치의 나라인데, 이 나라는 과연 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 자유로우나 사회라는 틀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 있다.


그 사슬에 의해 인간은 그 사슬을 얼마나 잘 활용해야할지 어떻게 그 부조리는 올바른 곳으로 유도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방법론이 정치다. 정치에서 루소가 말한 것처럼 선거기간에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지만, 그들의 인식은 자유가 없다. 그런 인식적 구조가 어디서부터인가? 이 책에서 과거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시작하여 독재정부의 통치방법을 거론했다. 다른 가치를 무시하고, 한 가지 목적에 어울리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그 무서움을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타협이 중요한 이유는 타협을 해야 한다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왜 타협해야 하는가?


사회 내외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타협점이란 공통대안을 찾는 것이다. 국론의 분열과 혼란에서 국가가 언제나 평화로운 것이라면 모든 국민이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평화롭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평적인 폭력관계가 발생되는 이유는 인간은 선천적인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가 더 크다는 점이다. 국론이 분열되는 이유는 누군가 불이익을 당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어느 누군가의 불이익으로 혜택을 본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성립이다. 겉으로 동일한 법과 제도로서 지키고자 하나 그 이면에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개선할 여건도 없다. 단지 이런 상황에서 이권을 지닌 자들에게 더 이상의 피해가 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이익을 더 증대하려 한다. 최근 세금과 관련하여 자동차세, 담배세, 주류세 등과 같은 세금은 간접세로서 소비자들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종목들은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거나 이용한다. 단지 그 이용자들이 소득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소비하는 점이다.


회사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장의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 재미있다고 하나 그것은 하나의 블랙코미디처럼 쓰고 달달한 초콜릿 같았다. 게다가 씹히는 맛이 너무 강하고 오래 가서 지금도 그 초콜릿을 씹는 기분이다. "야! 우리나라에서 애국자가 누군지 아나? 군인, 경찰, 아니라면 정치인? 아니야. 바로 내다. 왠지 아나? 내 술 마시고 담배 피우지, 게다가 차도 중형차지, 세금 제일 많이 낸다." 생각하면 그렇다. 아무리 비싼 차라도 세금은 처음 취득세만 그렇지 후에 자동차세에서 차량 배기량으로 가격을 매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기량의 차등으로 매긴 세금의 액수도 조금 바뀐 것으로 들었다.


담배와 술, 담배는 피지 않으나 술은 마실 때가 있다. 소주, 맥주, 막걸리 등에 주요 소비계층은 일반 국민이다. 그런 간접세로 충당될 때, 물가가 오르면 간접세 역시 더 수금된다. 그런 직접세를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기업의 법인세 및 다른 세금, 혹은 증여세, 부동산 등은 가난하거나 평범한 사람에게 머나먼 관계다. 그런 세금을 할인해준다는 황금의 말이 현혹하나 막상 적용의 범위와 효용은 절대적인 차이를 보인다. 허나 사람들은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그 대상에 집중한다. 이런 사회를 조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선택이다.


그 계기는 언론과 여론이다. 모든 정보의 출처가 미디어로서 전달된다. 미디어는 누군가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이권이 반영되어 있다. 공공성의 미디어가 결국 사적인 이익에 직결되는 순간, 공정이란 단어는 이미 사라진 의미다. 공정은 누군가 유리하게 만든 룰에 얼마나 잘 따라주는 것이고, 거기서 멀어지면 도태의 대상이고, 거기서 벗어나면 반사회적 인물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만든 리그가 아니라 그들만의 각본이 만들어낸 리그에서 아무 의미 없이 쳇바퀴를 돌고 있다.


하루를 매일처럼 생계를 위해 뛰고 있으니 세상에 대해 보는 눈이 없어지고, 자신의 판단 역시 정해진 루트만 의존한다. 그들조차 자신의 존재에 대해 본다면 충분히 똑똑하거나 지혜롭다고 여긴다. 그런 착각 속에 그들이 선택하는 것이란 정의라고 보겠지만, 이미 윤리성이나 지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인지 생각한 게 아니라 자신들도 옳다고 여긴 것이다. 사회에서 왜 빈곤층에서 부조리한 사회에 가장 피해보면서 개선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5분이 중요하다. 그 5분을 통해 자신의 삶에 어떻게 가야 할지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삶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의 주변에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어서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다. 인간의 한자가 人間 사람 사이다. 우리에게 삶이 중요한 것은 현재도 있지만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살아가야 할 내 자신도 있지만, 내 주변 사람들도 있다. 만약 자신에게 가정이 있고, 그 가정에 자녀들이 있으며, 그 자녀조차도 아들딸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옳을까?


한국은 인구가 한국전쟁 때 축소하다 다시 산업화로 인해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증가된 인구는 노년층이 되었고, 새롭게 등장해야할 신규 계층은 노년층의 수만큼 오른 게 아니라 그 반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가고 있다. 2인 부부 출산인구가 1인이 겨우 넘는 시점에서 한국의 미래는 암울한 장마와 같다. 나라에선 계속 인구증가를 위한 결혼과 출산 장려홍보를 내세우나, 홍보와 달리 실제 부부 사이는 생활에 직결된 문제다. 결혼마저 의무보단 선택이 되어 가고 있다. 소외된 인간들에게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린 것인가?


사회적 문제는 사회구조겠지만, 그 사회구조를 보고 문제를 모르거나 혹은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또는 자신과 무관계하다 여기면 그 사회는 계속 무너질 것이다. 그런 위기의 순간의 5분, 위에서 응급환자에게 5분이란 생사를 결정한다. 우리 사회는 그런 생사가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그 순간 5분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내려줄까? 판단은 언제나 개인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판단조차 하지 않는다면 결국 최후는 몰락의 연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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