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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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시작하면서 그 가치를 더해간다. 과거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이란 서적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라나고 죽을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은 것들이 이야기다. 즉 스토리텔링이란 것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혹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에게 즐거움이다. 이야기란 즐거움에서 어느 이야기이든지 와전되거나 혹은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거나 또는 그 일을 만든 사람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의 뇌란 그 기억력이 한계가 있고, 어느 특이한 영역이 없다면 기억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원래 고대 그리스 비극시를 예전에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전집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극시는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대본으로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공연장에 모여 서로 관람했다. 문제는 코러스부터 시작하여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기본적으로 “크로노스의 아드님이시고,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이신 제우스이시어!” 아마 이 대사가 가장 많이 나올 것이다. 제우스란 존재는 보통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듣는다. 내가 제우스를 처음 접해본 계기는 어린이 인형극에서 헤라클레스의 모험을 보여준 것이다.


 

헤라에게 지독한 질투를 받는 그가 헤라의 영광이란 말에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인간이면서도 신과 같은 위용과 용모를 가지고 있다. 반신반인(半神半人), 신인지 인간인지 모호한 것인가? 아니라면 둘 다에 속하는 것인가? 그리스의 비극이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등장해도 그 인간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고, 마치 신이나 신의 손 안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흔히 동양에서 부처님 손에서 논다는 말이 있다. 어디에 있든지 인간은 신이란 운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 처음부터 내려진 것이다.


 

그런 숙명적 굴레에서 단순히 나는 <일리아스>를 읽고 스토리를 이해하고 나열하는 게 목적이 아닌 것 같다. 인간에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은 높은 설산(雪山) 자락에 어느 작은 돌이 눈을 굴리고 내려와 그게 결국 눈사태로 변하는 이치와 같다. <일리아스>란 바로 그런 눈사태가 일어나는 인간의 이야기다. 일단 누군가의 소개를 보자. 신에서 아테네의 경우 두 눈에서 빛이 나고, 아킬레우스는 준족이고, 투구가 빛나는 헥토르 등등,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상징성이 되었다.


 

거기에 말을 잘 길들이는 트로이아족,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을 본다면 특히 그렇다. 왜 신화를 이야기로만 보지 말고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실 <일리아스>라는 작품은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를 데리고 오면서 비극은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왜 종족이나 국민들의 모습을 저렇게 표현했냐는 뜻이다. 그것은 트로이아족은 말을 잘 길들이는 것으로 보면 그들은 육군전이 능한 종족이고,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은 보병에 능한 종족일 것이란 판단이다.


 

특히 아카이오이족 동맹전사들은 배를 타고 10년 가까이 트로이아족과 전투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들은 배를 타고 온 점에서 해상 전에서 백병전을 펼치는 종족일 것이란 점이다. 신화는 그 나라 혹은 그 민족의 이야기다. 물론 신이 진짜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다. 종교가 없고, 단지 이신론(理神論)적인 요소를 인정하고, 그 이신론이라고 해도 다신족적인 요소를 보기에 그 당시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과 무척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일리아스>에서 말하는 요지는 실제 그 당시 전쟁이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이다.


 

실제 그 전쟁이 있었다면 왜 그들은 인간의 전쟁에 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했을까? 플라톤 서적 중에 하나인 <국가>라는 책을 아주 예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물론 갓 인문학에 발을 들인 시점이라 자세히 이해되지 않았고, 지금은 기억이 한참 남아있지 않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국가>에서 논하고 있다. 인간과 신의 역사에서 황금, 은, 동 그리고 철의 시대가 있다고 말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과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그 당시 그리스가 헬라스로 불리던 곳은 철기문화다. 그런데 <일리아스>는 철기문화 이전의 청동기문화다.


 

청동기문화의 특징은 이제 인간의 역사는 정착이 시작된 점이다. 금속의 발전은 과거 석기시대와 다르게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농사를 획기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왜 제우스가 강력한 신인가? <일리아스>에서 모든 전쟁의 운명을 제우스가 가지고 있다. 제우스의 심기가 곧바로 영웅의 죽음과 삶, 죽음 이후 비참한 모욕까지도 말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신은 제우스만이 아니라 헤라, 아테네, 테티스, 포세이돈 등 매우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준족의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죽마고우인 파트로클로스 죽음에서 전투를 시작한 지점이다.


 

친구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과 증오 그리고 복수심으로 불탄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아의 모든 남자의 씨를 말릴 작정으로 전장으로 뛰어든다. 그의 놀라운 용맹은 신들조차 분노하고 기뻐하고, 아킬레우스가 무참하게 죽인 트로이아의 남자들은 그 인근에 있던 강에 내던진다. 강에 빠진 남자들은 피와 기름을 내뿜으며 하데스의 궁으로 인도된다. 그들의 시체에 냄새가 시큼한 피가 새어나오자 주변에 물고기가 그 흐름을 따라 모인다. 시체를 뜯어먹는 물로기의 모습에서 하신(河神)은 분노한다.


 

아킬레우스를 제압하려던 하신은 헤라의 아들, 불의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의 힘에 의해 제압된다. 그는 하늘의 신인 제우스에게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한다. 강의 신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리아스>의 시기는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동의 시기도 하나, 사실 농업문화가 꽃피우던 시기다. 제우스가 모든 신들 중에 가장 무섭고 위대한 이유는 그가 천둥번개를 던지기 때문이다.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기상현상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적란운에 의한 집중강우, 소용돌이이나 태풍에 의한 기상재앙, 바다에서 폭우를 동반하는 무서운 기상현상이다.


 

번개가 내려치는 것은 비와 바람이 불고 대지를 모조리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옛날에 과학이란 지식은 없다. 과학이라고 믿은 것조차 사실 비과학적인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이고 정당한 사실이다.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은 만큼 그들의 눈에는 기상이변이 신의 두려움으로 느꼈을 것이다. 번개가 치는 이유는 기상현상이 아닌 신의 분노라고 말한다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다. <일리아스> 해설 편에서 트로이아전쟁의 기원전 1200~1500년이라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를 지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던 기원전 4~5세기에서 <일리아스>는 하나의 텍스트로 끌고 온다. 1000년이란 시간에서 <일리아스>는 그리스사람들의 삶에 큰 기반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 기술은 아직까지 번개현상에 대해 밝히지 못했고, 제우스는 영원히 위대한 아버지로 남아있다. 바로 이 아버지란 존재에서 우리는 인류학에 대한 기반 요소를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은 등장인물의 이름 그대로를 적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 누구의 후손이다.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은 아버지 제우스다. 심지어 제우스가 양육하고 제우스가 사랑하고 제우스가 이끌어낸 영웅들에서 <일리아스>는 아버지란 이름이 심하게 강조한다.


 

아가멤논조차 인간의 왕이기도 하나, 그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로 나온다. 아버지의 이름을 등장시킨 것은 결국 모든 인간, 특히 영웅에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필수적인 요소다. 아버지의 이름이란 점에서 당시 사회는 남성중심의 권력이고, 남성들은 자신의 권력을 아버지로부터 승계 받는다. 단지 차이나는 부분은 그리스신화 그 자체에서의 모순이다. 가이아는 아들이면서도 남편인 우라노스에게서 크로노스를 낳지만, 그 크로노스와 합세하여 우라노스를 내친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을 잘라버리고, 후에 크로노스는 자신의 누이이며 아내인 레아에 의해 제우스로부터 도망친다.


 

신들의 세상에서 제우스가 신의 왕이 되면서 신들의 전쟁은 종결된다. 더 이상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거세당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가 제우스가 된다. 일리아스는 그야말로 신과 신의 전쟁에서 인간과 인간의 전쟁으로 전환되는 신화다. 단지 신은 직접적으로 신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인간을 매개로 하여 싸운다.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않고, 사랑하는 인간에게 행운을 내리고, 미워하는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다. 신이 신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소심한 소인배로 등장한다.


 

인간에게 위대한 신이 왜 그렇게 인간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는가? <일리아스>는 신과 인간이 동시에 등장하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순간적으로 동물과 같은 모습이 나온다. 인간의 왕인 아가멤논이 준족의 아킬레우스로부터 전리품 소녀를 빼앗은 시점부터 신들의 장난이 나온다. 당시 인간의 왕이라면 용감한 전사고, 현명한 지도자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심하고 어리석은 모습이 나온다. 그런 모습을 나오는 이유는 인간이 의도한 게 아니라 신의 장난이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에 알 수 없는 이유,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 신들이 저지른 업적이란 뜻이다.


 

<일리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 앞에서 운명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든 발광해도 그 운명의 사슬에서 멈추고 만다. 그리고 인간이 그런 운명 앞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신과 같은 은총에 길이 명성을 남긴다고 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인간이 영생의 영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죽음을 생물학적인 사망보단 하데스의 곁으로 갔다고 하고, 하데스의 신전에 가면 예전에 만난 사람도 만날 수 있다 한다. 인간의 필멸하나, 그 필멸 뒤에 하나의 새로운 영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신화의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인간의 필멸과 영원성에 대한 갈등이다. 신이란 죽지 않고 영원한 불사신이나, 인간은 죽는다. 그런 신이 인간에게 부조리한 장난이 거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부조리에 의해 생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쟁을 보면 그들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많은 그리스 전사들은 전투 중에 죽는다. 그들의 죽음은 비참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들의 무구를 빼앗기는 것이다. 전쟁영웅의 무구를 빼앗아 가는 것만큼 치욕적인 일은 없다.


 

아킬레우스가 친구에게 자신의 무구를 맡겼는데, 친구는 저승에 가고, 그 무구들은 헥토르가 챙긴 시점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성을 빼앗을 정도다. 오로지 어머니 여신 테티스의 음성만이 그의 마음을 안정케 하고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친구의 죽음 앞에 복수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죽음이 앞을 내려 보고 있어도 혼자 도망치는 것은 전사에게 치욕적인 일이다. 날카로운 무기에 의해 베고 찍혀 죽는 것은 잔인하고 비참한 결말이다. 그러나 전사는 그 죽음 앞에서 당당해지는 이유는 자신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는 이유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아버지에게 누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미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내친 불효자다.


 

그런 불효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분명 바뀐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돌고 있지만, 그런 신의 존재는 인간에게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여름 오면 성장을 하며,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 오면 죽음이 도래하여 다시 봄이 온다. 하데스의 신전에 갇힌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보면 안다. 그녀가 오는 시점은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는 시기고, 그가 하데스의 궁에 갇히는 것은 농사를 할 수 없는 시기다. 인간이 보는 자연의 신이 숨 쉬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가 모든 아버지로 되는 이유는 농경사회와 고대국가의 설립이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모든 왕들이 보여주는 대인이다. 대인이란 각 마을이나 소국가의 추장이나 왕이 자신의 재산을 모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들이 주는 선물은 많은 동맹군을 만들고, 많은 이들에게 충성과 사랑을 보장받는다. 아가멤논이 주둔한 병사들은 각각 동물들을 잡고, 고기와 술로서 마음을 달랜다. 이때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음식을 돌아가고, 그것은 모두 공평하게 만족하는 수준까지 제공했다는 점이다. 계급이 왕인 자가 최고의 전사고, 최고의 통치자이나, 모든 전사와 동등한 입장을 가진 점이다.


 

완벽한 계급체계에 그 계급에 대우가 매우 다른 현대 군인에서 오로지 군복만이 평등하게 입고 다닌다. 하지만 저 때는 모두가 공평한 음식과 술을 내어주고, 보상도 충분히 아래 전사까지 이어진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왕과 원로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고, 전쟁 시에 왕 자신이 참전하기에 가능하다. 대인제도로서 전리품은 모든 부하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은 왕을 위해 목숨이 위험한 전장에서 투혼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 왕들은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후예인 점이다. 왕은 신의 후예, 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과 통치력은 보장받는 셈이다. 농경사회가 처음 정착된 고대국가에서 왕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가는 점은 동양도 마찬가지다.


 

삼국지에서 조조나 유비가 병력을 이끌고, 적의 장수를 향하여 돌진한다. 물론 왕의 신분이 되면서부터는 부하에게 맡기나 왕이 되더라도 전장의 지휘관이란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일리아스>는 바로 그런 영웅들, 왕 혹은 왕과 같이 높은 지배계급이 보여주는 전쟁에서 비참하게 쓰러져도 그 모습을 위대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사실 전쟁에서 사람이 죽고, 사람 얼굴이 터져 뇌수가 나오고, 치아가 사방으로 튀는 모습은 보기가 흉하다. 그 흉한 현실적 비극을 훌륭하고 아름답고 가슴 뛰는 영웅서사시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마 이야기하기의 묘미일까?


 

인간은 과거를 지향하면 자신을 스스로 궁지로 몰게 되고, 미래를 보게 되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부여한다. 미래는 지금의 현실을 다시 보게 해주는 거울이 된다. 신화이야기인 <일리아스>가 실존인물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신이란 영원한 불사신을 신봉함으로서 자신을 신 앞에 내놓았을 것이다. 신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부끄러운 행동과 비열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다른 이는 모르나 신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게 고대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일리아스>를 읽는 것은 단순히 영웅서사라는 비극시가 아니다. 지금의 인간에게 매력을 끌어내는 이유는 당시 인간만큼 더 인간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얼마나 진실적인가? 제우스의 저울은 우리에게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는 <일리아스>를 읽고 제우스의 저울에 저울질 당하는 영웅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리아스>를 읽으면 보통 소설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노래에 가깝다. 인간이 노래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노래와 춤이다.


 

무당인 샤먼들이 미친 듯이 뛰고 노래하며 환호하는 이유는 그들은 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어가 서로 달라도 노래로서 음악으로서 서로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음률을 가진 가락에서 인간은 미묘한 감정이 생긴다. 그 감정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감정 내지 무의식적인 영역에 이끌어낸다. 신은 우리의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의 대리자다. 그러나 그 신이 욕망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인간의 공감을 보여주는 존재다. 아카이오이족과 트로이아족이 서로 죽일 것처럼 싸워도 어느 시점에서 인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들에겐 제우스란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을 받아주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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