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산을 옮기다
윤태영 지음, 노무현재단 기획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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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인간의 기록에서 역사는 항상 좋은 것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통과 파괴로 얼룩진 반란과 전쟁 그리고 학살 등이 우리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역사란 결국 투쟁과 갈등의 기록인 셈이다. 정치적인 사건이 역사적으로 큰 기록으로 남는다. 어느 개인에 대한 사소한 일들을 역사로 남는 것은 무리한 설정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공간에서 그 어느 누구라도 역사적 사건에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지, 그 공간에 머문 존재고 분면 역사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


역사란 그런 과거의 일들을 다시 찾아내고 해석하여 지금의 현실과 마주보게 만든다.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제기한 것처럼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연 그러하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역사로서 지나간 시간의 일들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우리가 왜 역사를 배우냐는 말에 사람들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가?


인간에게 그런 공감과 이성적 판단능력이 결핍이 되지 않을까 여긴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만족한다. 아니라면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에 머문다. 물은 고이면 썩게 되고, 그 물에서는 생명은 제대로 살 수 없다. 물론 인체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해충이나 병원성 미생물은 서식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환경이다.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여 서식할 수 있는 해충과 병원성 미생물은 자신의 이익만 찾아간다. 주변에 숙주나 희생양은 그래도 사멸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생태학적인 조건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적용된다. 인간은 문명의 공간에서 온갖 기술과학과 문화제도에 의존하고 있다. 야생의 자연에 벗어나 자신들만의 제국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이란 존재는 만만치 않은 존재다. 인간의 환경파괴로 환경은 그대로 당하고 있지는 않는다. 각종 자연재해나 병충해, 전염병조차도 그런 충격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다. 지구의 공기가 더워지고 오염이 되면 태풍이 불어 그것을 정화하고 온도를 낮춘다. 그렇다면 인간이 계속 지구를 병들게 한다면 지구 역시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


역사적 교훈에서 유럽의 페스트 내지 각종 전염병 사례로 본다면 인간의 위생관리와 정부의 통제능력, 그리고 국민의 인식에서 알 수 있다. 자연은 스스로 일어나는 재앙이나, 그것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재난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실패와 실수를 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같은 사고는 반복되면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2015년 6월), 한국에서 MERS라고 불리는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다행히 내가 사는 지역은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이 크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저 MERS라고 불리는 전염병은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잠복기가 1~2일 정도이며, 고열과 기침 같은 감기 증세를 보여준다. 예전에 사스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 세계 언론은 전염병의 무서운 전파력과 치명적인 증상에 두려워했다. 점막의 침투나 구강의 투입이 아닌 호흡으로 전달되는 병원성 미생물은 참으로 귀찮다.


결국 일이 터지면 이것을 어떻게 통제하는가에서 그 사회의 관리체계나 구조를 알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미 사망자가 발생하고, 다수의 감염자가 격리 중이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잠재적인 환자가 얼마나 더 있는가이다. 위에서 언급하듯이 MERS는 잠복기가 1~2일이다. 감염된 직후 바로 증상이 오는 게 아니라 잠복기를 거친 후 갑작스레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어떻게든 역학조사와 질병통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극심해진다. 가령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부산, 광주, 대구, 원주 등과 같이 전국으로 간다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병에 노출되고, 그 사람들이 평소대로 활동하면 전국적인 참극이 발생된다.


결국 국가운영 체계에서 얼마나 질병이나 재난통제의 수준이 그 상황을 타파하는 척도가 된다. 2003년 당시 사스가 전 세계를 타격하고, 게다가 그때 태풍 매미까지 한국을 타격했다. 한국에서 태풍은 7~8월인 장마철 주로 오나 가끔 가을태풍이 오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가을태풍은 한국을 위태롭게 만든다. 태풍의 이동경로에서 9월 태풍은 한국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매미태풍은 폭우와 회오리바람으로 많은 재산피해를 일으킨 자연재앙이었다. 그 태풍이 지나가고 그 해 2013년 12월에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다음해 자대에 배치 받았다.


내가 속한 부대는 공사와 용역설계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건설사무소였다. 공사행정을 업무를 보던 나는 하자보수 건으로 외부업체들과 계속 업무를 진행했다. 그런데 공사대장을 찾아보니 대부분 2003년에 공사를 계약하여 그 해 내지 2004년 초에 다 정리된 공사가 많았다. 대규모 보수공사를 정리하면서 계약일과 공사과업을 살펴보니 그것은 태풍 매미로 인해 파손된 시설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공사인 것이다. 빠른 공사 집행과 관리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예산과 관련된 말에서 나는 조금 더 놀랐다.


군대라는 곳은 지방세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국비로 운영한다. 국방부가 예산운영기관과 협의하여 예산을 받아온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예산소요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삼군 참모총장에게 공문을 시달하고, 삼군 참모총장은 다시 예하부대로 그 사항을 지시하여 소요를 보고하게 한다. 그러면 여기서 끝이 아니라 그 예하부대의 소속 부대들은 소요를 제기하여 그것을 집계하여 정리하면 기간이 제법 걸린다. 그러다 보면 예산을 관리하는 담당관조차 그것을 구분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왜냐하면 예산을 받기 위해 예산운영기관의 관리만 아니라 행정부와 국회 등과 같은 다른 기관에서 협의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자세히 몰랐으나, 업무를 하고 사회에 나와 계속 건설용역 관련 업무를 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예산은 국가운영의 예산이 아니라 개인의 판공비였다. 어느 공무기관의 부서장이 자신의 업무에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예산이 태풍 매미의 복구예산으로 나온 것이다.


2014년 8월 폭우로 인해 침수피해에 대한 복구 관련 용역 및 공사가 2015년에 한창 진행되는데, 이미 그때는 이미 1달도 안 되어 그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국가재난상황에 빠른 대응과 대처, 그리고 후속 조치가 국가기관 업무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국가라는 조직은 바로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체계를 마련하고 관리해주는 기관이어야 한다. 관리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평시에는 별 상관없으나 전시, 준전시, 재난 시에 그 피해가 극에 달한다.


2014년 4월 팽목항에서 일어난 세월호 선박사고는 수많은 인명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다. 국가기관의 재난통제능력은 바로 이런 계기에서 바로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일어난 재난사고는 누가 과연 컨트롤 타워가 되어 운영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우왕좌왕한 사이 배를 가라앉았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나, 그 주인은 차디찬 하데스의 신전으로 가야했다. 포세이돈이 등장해서 기적이라도 일으켜 주면 좋겠지만, 기적은 없고, 기만으로 가득한 언론과 여론만 생겼다.


그러면서 과거 어떤 남자가 생각났다. 무능한 것이 아니라 무력한 남자, 그래도 『캉디드』도 아닌데도 낙관주의로서 세상을 보려했던 남자, 노무현이 생각났다. 내가 군복무 할 때 그가 대통령이었다. 재난에 대한 관리체계가 12년 전과 지금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그냥은 아니었다. 『바보 산을 옮기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6주년에 나온 서적이다. 어느 한 인물이 죽어 세상에 없어도 그에 대한 서적이나 이야기는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매년 5월만 되면 계속 끊이지 않은 인간은 아마 노무현밖에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국가적 재난, 피해자가 속출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국민, 국가의 대응체계에 그저 무력하게 바라보는 현실에서 언제나 그렇지만 노무현이란 이름이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이 책은 과거 그의 비서관으로 활동한 윤태영 씨가 작성한 것이고, 그는 이 서적을 만들기 전에 『기록』이란 서적을 출간했다. 처음 <바보 산을 옮기다>를 읽으면 유시민 전 장관이 만든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와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면 어느 위기나 역사적 순간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시선이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에만 의존한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후맥락을 읽지 않으면 편향된 판단력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가려진 이야기보단 가려질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여기서 잘 알 수 있는 윤태영 전 비서관이 바라본 노무현의 정치관이다. 노무현은 노동자를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되었다. 그가 가진 꿈을 갖고 정치에 입문해도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처럼 이미 세계는 자본의 국경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20세기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된 21세기에 자본이 결국 모든 것을 지배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자본이 모든 것을 가진 것을 인정하듯이 자본이 우선인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자본 그 자체를 무리하게 억제하는 것은 시대적 역행이고, 그것만 우선하면 대다수의 약자인 국민들은 피해본다. 결론은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피해가 오고, 그에게 기대한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임된 순간, 대한민국이 바로 바뀌지 않는다. 단지 바꿀 수 있는 정점만 생길 뿐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다고 해서 바로 프랑스 민중생활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인간들의 실수는 모든지 체계나 정치제의 개편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올 것이 여기나, 그것은 명백한 바보 같은 소리다. 단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만약 그 기회를 버리면 더 심각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은 프랑스를 위대한 독재자 나폴레옹의 손으로 가게 만들었다.


민주주의 역사가 시작된 프랑스가 오히려 제국주의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부르봉왕가의 부활, 후에 일어난 혁명을 보면서 역사를 배우는 바로 그런 것이며,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는 이야기란 사실이 이런 연유다. 노무현이란 인간은 그런 역사를 알았다. 대통령 노무현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려 했다. 하지만 인간은 논리와 이성으로 이루어진 동물이 아니다. 감정이라 해도 연민의 감정만이 아니라 질투와 시기, 우월의식에 고취된 무의식적인 공격성도 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한 일반의지가 아니라 어느 집단의 이기심이 하나의 정치적인 가치관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전체의지로 표출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지역의 차이로 인간을 차별하고 그것이 정치적 갈등이 되어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아킬레우스 같은 뛰어난 전사가 아닌 상태에서 발목을 잡힌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그걸 바라볼 수 없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을 선례로 남겨야 한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보면 처음 이상을 가지고 뛰어든 전사는 비참한 인생과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가진 이상과 반대된 자들은 득세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반대세력조차 자연의 섭리에 의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이상을 위해 투쟁한 자는 역사의 새로운 안내자가 된다.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혁명가들의 복음서 『사회계약론』을 저술한 루소조차 그렇다. 좌파의 시작인 그가 좌․우파 모두에게 찬사와 비난을 받았으나, 지금 21세기 그는 세계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2012년 유네스코에 정한 인물). 루소는 아마 산을 옮길 수 있는 설계도면이나 지침서를 주었다면 그 후에 등장한 인물들은 산을 옮기려 했거나 실제 옮겼을 것이다.


『바보 산을 옮기다』를 읽으면서 『사회계약론』이 많이 떠올랐다.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정치인이 아니라 법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시민들은 오직 법에만 복종해야 하는 점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자가 나오면 독재가 되고, 많은 시민들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게 『사회계약론』의 가르침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외적으로 정치체계로서 존재하지 모르나, 진정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성적 성찰과 비판, 그리고 토론과 협의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평가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관료체계는 바로 그런 조직적 힘을 뒷받침하기 것이나, 그게 어느 개인과 집단적 이익관계가 개입되면 법은 모든 인간의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인간만 위에 군림하게 만들게 된다. 노무현이 말한 산이란 바로 그런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을 모두 법 아래로 내려놓기 위함이다. 그 법 위에 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각종 차별의식을 불어넣고 언론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인다. 물론 노무현의 사상 자체가 모두 옳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바에서 진정 우리가 비판적 자세로 이성적 성찰을 한다면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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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6-0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스때와 메르스의 지금을 비교하면 누가 덜 나쁜지는 자명하죠.노무현이라고 다 최선일 수는 없지만 지금은 최악입니다.
지도자가 무능하면 국민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고통의 범위가 달라질겁니다. 지금은 정부가 없는 셈이죠.무능은 속수무책을 만들죠.

만화애니비평 2015-06-06 12:31   좋아요 0 | URL
반정부도 무정부도 아닌 비정부가 맞을지도
아나키스트도 아닌 자들이 정부를 해체하고 있으니..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