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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앤드루스 지음, 서남희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하여 나는 이 책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란 없다. 코카콜라의 이사나, 대기업의 CEO나 또는 장군이나 방송국 프로듀서 등등 말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좋고, 교훈 있는 이야기는 좋다. 하지만 문학적 예술을 논하려면 결국 그로테스크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좋은 놈이 좋은 놈으로 되려고 하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악당이나 적이 있어야 한다. 윈스턴 처칠의 명언 중에 “뒤를 멀리 돌아보면 볼수록, 앞을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라는 것으로 이 책에서는 처칠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본다.

 

처칠을 대해 내가 아는 정도는 소위로 임관하여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큰 활약을 하여 나치 독일을 무찌른 철의 남자다. 하지만 그라고 하여 모든 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철저한 앵글로색슨족의 우월감에 빠진 남자였고, 그가 영국에서 벌인 정책 중에 인종차별 행위는 그야말로 경악할 수준이다. 강도가 외국인이란 이유로 그들이 있는 건물이 화재가 났는데도, 처칠은 오히려 그들을 불타 죽어도 마땅하다고 여겼다. 철저한 인종 차별주의자에 노동자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행동을 했다.

 

물론 어느 한 정치인에 대해 모든 것을 두고 판단할 수 없으나, 적어도 공과 사를 판단하려면 그에 대한 어느 정도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아람어를 새겨진 것이라고 하니 결국 아랍문화권이라고 보겠지만, 그것이 진짜 아랍에서 말하는 알라라는 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본래 이스라엘의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처음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그리고 사막이 배경이란 점에서 어느 민족인지 모르겠다.

 

단지 의상이 무어인들이 입는 것이 나오기에 아랍문화권이란 점만 가늠케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단 1화에서 끝난다. 단지 죽은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들만 남겨두고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차라리 아들이 살아남아 어떤 과정을 지나쳐 20세기 미국에서 새로운 사건이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편이 더욱 개연성이 높게 보여주었다. 이 소설은 흔히 History라는 역사와 더불어 소설의 Fiction 개념을 반 정도 섞은 Faction을 추구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20세기 미국에서 18세기 미국과 19세기 미국까지 이어진다.

 

내가 보이는 미국이란 국가가 어느 돌을 가진 인물에 의해 큰 영향을 끼쳤고, 그나마 다른 인물이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서의 쉰들러가 유일하게 미국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비중은 너무나도 약했다. 물론 인종이나 피부를 모든 것을 차별한 것만은 아니나, 흑인과학자의 이야기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고, 과학이란 학문이 관념적인 이론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넘어 물질적, 생물학적, 화학적 객관성이 토대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뉴턴이 왜 사과가 떨어지는가? 라는 질문에 그것은 지구의 중앙부에 위치한 핵과 맨틀이 가진 중력에 의해서라고 우리는 대답하겠지만, 그것이 모두 신의 뜻? 이란 대답은 농담도 아주 나쁜 농담이 될 뿐이다.

 

단지 과학자인 조지는 단순히 배부르게 해라, 존 애덤스는 자유롭게 하라, 또는 저명한 부자는 살아가게 하라, 식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물론 내용은 인간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되지만, 현실에서 분명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지금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하자면 너무 심한 갭이 보인다. 세상을 위해 조국과 우리 민족을 위해 또는 타인을 위해서는 고귀하나, 너무 아름다운 행동에만 치중하기에 이 소설은 나비효과가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누구는 너무 알려진 인물이다. 이 소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 정의한 것처럼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명제와 어긋나 버렸다.

 

이미 미국의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되고, 저명한 과학자, 실제 일어나던 사건까지 보여준 것만으로 모순에 대한 문제점을 알려주기보단 그 모순에 의해 생긴 문제로 새롭게 탄생한 영웅만을 다른 식으로 부각시킨 것뿐이다. 왜냐하면 아랍인이던 아버지가 존경을 받는다고 하나, 그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의 행방에서 떠나온 운명처럼 어느 한 사람에게 다가가자, 그 돌을 가진 것만으로 어떤 고귀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돌은 어느 시대에 유명한 인물이 가지고 있었고, 그 돌을 가진 예전 주인은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그 돌을 물려받은 후계자는 예전의 주인과 비교할 수 있는 업적을 남긴다.

 

어떻게 보면 돌의 가치를 알고 찾아낸 인물이 단지 운명과 같은 만남에서 영웅 같은 인물이 되었다는 설정은 겉으로는 모두가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고, 어디선가 작은 행동이 큰 물결이 되어 나비의 날갯짓이 사이클론을 만들어낸다는 나비효과를 말하고 있다. 나비효과가 전혀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 확률은 너무 낮다는 점이다. 모르겠다. 전에 어느 섹시한 여자가수가 해고된 노동자를 위해 자신이 먼저 노란봉투에 월급을 대신 모금하자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차라리 나비효과라면 그것이 더 좋지 않을까?

 

잔 다르크가 신의 소녀라고 하여 많은 백성을 구했지만, 결론은 왕족과 귀족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잔 다르크를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모든 승리의 열쇠가 되었을 때는 위대한 성녀지만, 전쟁 후에는 마녀로 취급당해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을 나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 전쟁에서 참전한 용사는 잔 다르크만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잔 다르크의 용맹과 그 위상은 찬양할 만해도 그런다고 그녀만이 모든 것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앤디 앤드루스 <선택>은 바로 그런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이었다. 단지 알 수 없는 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는 것으로 그 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적 믿음으로 업적을 남기고, 대단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결과론적인 요소였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모든 인간에게 가져야할 정신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돌에 의해서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는 인간의 운명이 결국 보편적으로 다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으나, 그 돌을 마주하는 점에서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돌이 선택한 것으로 연계된다.

 

그렇다면 돌에 의해 연계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굳이 그 돌이어야 하는가? 돌에 새겨진 가치는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도덕이다. 그 도덕에 은근히 미국의 독립정신을 말하고 있다. 미국독립정신은 나도 존중하나, 그 독립 이후로 보이던 노예문제, 작가는 노예문제에 대해서도 부당하고, 노예에 대한 문제를 변호한 인물도 등장인물로 나오게 한다. 심지어 조지라는 흑인이 어렸을 때 자신을 구해준 백인에 대해 일화를 보면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개인에 의해서 된다고 하지만, 개인이 밀집된 것은 사회이지, 사회가 개인 그 자체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사회를 바꾸나, 그 가능성이란 누구나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과 조건이 갖추어야 가능한 것이다.

 

왜 추천자들이 대부분 어느 기관의 높은 분들같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 차라리 저널리스트나 평론가 혹은 시민들이 그 의견을 내놓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단순히 영웅에 대한 업적이 돌과의 만남이란 자체가 너무 현실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만나야했던 운명일까? 개인에게 선택이란 주어진 것이고,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치적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면, 선택은 최선의 결과보다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결정하는 최소한의 피해라고 본다. 좋은 선택 그 자체가 좋은 결과는 주는 것은 당연하나 그 모든 선택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선택에서 도덕적 관념이 중요하다. 그 관념은 그 사회에 순응하는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야 한다.

 

이래저래 포장되어 있지만, 자유의 국가를 만든 백인, 죽을 위기애 처한 흑인아이를 구해 그 아이가 후세 큰 업적을 만들도록 했던 백인, 20세기 위대한 경찰관인 마크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분리되어 있지만, 결론적으로 마크와 도리 부부가 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가면서 마크가 최연소 경찰서장이 되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결론은 마크가 어떻게 성장하여 어떤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상관없이 범인을 잡고 사라진 아이들을 찾은 것은 훌륭하나, 그것이 자신의 노력보단 돌의 계시라는 것은 마치 신의 계시가 이어져온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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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시나리오 구성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진들이 직접 구성하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만화,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은 콘텐츠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런 콘텐츠 이외에도 역사와 문학이나 신화, 민담, 전설과 같은 설화 등과 같은 이야기들도 이용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독특한 미학은 실사영상에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제작할 수 있는 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정령이 이미지로서 구현하고, 말을 할 수 없는 동물들도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과 같은 경우 농장주인 존스와 존스 이외에도 다른 농장주들이 실제 인간으로 등장하지만, 매너농장에서 사육하고 있는 돼지, 말, 당나귀, 양, 닭들과 같은 동물들도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물들이 인간처럼 말할 수 있는 점은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이 우화적인 요소를 지닌 작품이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란 점에서 알레고리적 배치로 통해 풍자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이 제작된 시기는 1954년 영국으로 당시 국제사회는 자유주의 국가와 공산주의국가로 분리된 냉전시기였다. 미소 냉전과 관련하여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자유주의 국가인 영국에서 적대국가인 소련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를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 할라스가 제작한 <동물농장>의 원작은 영국작가 조지 오웰이 저술한 <동물농장>으로, 조지오웰은 1944년 2월에 <동물농장>의 탈고를 마친다.

 

존 할라스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각각 비교해보면 처음에는 비슷한 이야기로 진행하다가 서로 다른 내용으로 전개된다. 조지 오웰이 저술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존 할라스의 경우에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만들었다. 따라서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둘 다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관점이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두 작품을 비교할 때 가장 많이 차이나는 점은 외양간전쟁 이후 스노볼이 나폴레옹에 의해 공격받을 때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은 나폴레옹이 키운 개에 의해 도망쳤다면,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는 개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원작인 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이 동물농장 내에 좋지 않은 일들이 발생하거나 혹은 다른 동물들이 반항할 경우 스노볼과 그의 추종자들이 꾸민 계략이라고 거짓말을 하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나폴레옹이 다른 동물들이 반항할 경우 그 동물에 대해 존스와 스노볼 같은 존재로 취급한다.

 

그런 점에서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는 원작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등장하는 스노볼에 대해 상당히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농장>은 본래 러시아혁명과 러시아내전, 그리고 신경제정책 NEP와 모스크바재판 등을 농장 내의 동물들로 통해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한다. 나폴레옹이란 돼지는 스탈린이란 독재자라면, 스노볼이란 돼지는 트로츠키라는 인물이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더불어 볼셰비키에서 활동하던 러시아혁명가로서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스타인이며, 1879년에 태어나 1940년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 따라서 본 리뷰는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 등장하는 스노볼이란 캐릭터에 대해 고찰하고, 스노볼의 알레고리 인물인 트로츠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룰 것이다.

 

첫째, <동물농장>에서 스노볼

둘째, 트로츠키의 죽음과 동물농장재판

셋째, 트로츠키에 대한 재평가

 

2. 본론

2.1 <동물농장>에서 스노볼

<동물농장>에서 처음 이야기는 매너농장의 수퇘지인 메이저 영감이 죽기 전에 모든 동물을 소집하여 유언을 이야기할 때부터이다. 메이저가 모든 동물들 앞에서 연설할 때 스노볼이 가장 맨 앞자리에 앉는 장면이 나오며, 메이저가 하는 말에 대해 매우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는 모습으로 듣는 모습이 나온다. <동물농장>에서 돼지영감 메이저는 독 일 사회철학자인 카를 마르크스이며, 스노볼은 돼지와 더불어 러시아 볼셰비키 일원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중에서 레닌, 플레하노프, 보그다노프, 바자로프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다. 트로츠키는 1897년부터 남부러시아 노동자동맹을 조직하여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에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한다.

 

<동물농장>에서 러시아혁명이 동물농장혁명이고, 러시아내전은 외양간전쟁이다. 동물농장혁명에서 매너농장주인 존스에게 처음으로 반항한 캐릭터가 스노볼이었고, 외양간 전쟁에서 지휘를 맡은 캐릭터도 스노볼이었다. 볼셰비키혁명에서 트로츠키가 레닌과 더불어 사전에 준비하고, 혁명 이후 소비에트 건립에서 역시 트로츠키가 직접 관여한다. 볼셰비키혁명이 발발할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혁명으로 인해 쫓겨난 귀족과 장교로 이루어진 백위군과 연합국들은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를 침공하려 한다.

 

이때 트로츠키는 적군을 모집하고 지휘하는 군사인민위원을 맡으며 직접 열차를 타고 전쟁 현장에 가서 전술을 짜고, 전쟁을 지휘하여 러시아내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 후에 러시아 경제정책인 NEP에서 사회주의국가를 추구하던 소비에트가 내수시장과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체계를 도입할 때, 트로츠키가 제안한다. <동물농장>에서 외양간전쟁 이후 동물농장의 살림을 꾸준히 성장시키던 스노볼은 자신의 권력보단 계속 동물농장의 미래를 생각하고, 다른 농장에 동물농장의 소식을 알리며, 교육에 큰 심혈을 기울인다.

 

트로츠키와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 캐릭터의 원초인 스탈린이 대립되는 지점은 볼셰비키혁명 이후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의 충돌이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에게 경고하기를 “처음에는 당 전체를 대신하게 되고, 다음에는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중앙위원회를 대신해 한 사람의 ‘독재가’가 등장하게 된다.” 결국 트로츠키의 예언대로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을 사회민주주의국가가 아닌 독재국가로 만들게 된다. 볼셰비키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수 천 명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계몽주의자들이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을 때 볼셰비키 내지 소비에트에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 내지 계몽주의 사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던 초등교육 수준 교육이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소비에트라는 평의회에서 활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료집단에 들어가 벼락출세를 꿈꾸는 자들이 많았다. 결국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의해 정치적으로 축출이 가능했던 점은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이 다른 동물들에게 교육으로 통해 의식개혁을 시켜보려고 해도 불가능했던 점이고, 오히려 권력의 이익을 보고 따르는 볼셰비키 내지 코민테른 회원들이 많았다.

 

레닌이 뇌일혈로 사망한 후에 스탈린은 소비에트의 서기장으로서 권력을 잡으면서 트로츠키를 정치적으로 견제했는데, 1925년 트로츠키를 군사혁명평의회에서 해임시켜 토론하지 못하도록 하고, 1927년 소비에트 공산당에서 축출당하고, 1929년 소비에트에서 추방당해 망명의 길에 오른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도 스탈린이 트로츠키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밀경찰인 게페우를 상징하는 개들이 스노볼을 내쫓는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는 그냥 내쫓는 것으로 스노볼은 등장하지 않으나,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는 개들이 스노볼은 공격하여 암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2.2 트로츠키의 죽음과 동물농장재판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이 게페우로 상징되는 개들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나오나, 실제 트로츠키의 사망원인은 1940년 8월 20일 스탈린이 보낸 자객인 라몬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의 머리에 피켈을 가격하여 트로츠키는 뇌출혈로 일해 8월 21일에 사망한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자객에게 살해당한 이유는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되기 전에 스탈린에게 가장 정치적으로 큰 방해세력이었고, 볼셰비키 및 소비에트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레닌에게 큰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1922년 테러로 인해 부상을 입게 되고, 1924년 뇌일혈로 사망한다. 레닌은 자신이 사망하기 전에 스탈린이 소비에트 지도자로서 부적당한 사실을 인지하여 스탈린을 견제하려 했으나, 뇌일혈 증세로 일해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레닌 사후 레닌의 유언장을 공개하려고 했으나, 소비에트 당 대회에서 유언장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났었는데, 레닌의 유언장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스탈린은 서기장 직에서 해임돼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이 사망 전에 볼셰비키혁명 이전부터 같이 활동한 볼셰비키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트로츠키였고, 가장 경계하던 인물이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입장에서 볼셰비키혁명과 러시아내전에 가장 최전선에 있었고 레닌의 신뢰를 받은 함부로 트로츠키를 죽일 수가 없으므로 정치적으로 숙청하여 망명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망명 후에도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에 대해 계속 투쟁하고 있었으며, 1936년 <배반당한 혁명>이란 도서로 통해 스탈린과 그의 관료주의에 대한 문제점과 그리고 스탈린으로 인해 인근국가에서 일어날 일들을 분석하고 예언하였다.

 

그 결과 스탈린은 1939년 나치독일과 독일·소비에트연방 불가침조약을 맺게 되었고, 1941년 나치독일은 2차 세계대전 시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소비에트연방을 침공한다.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을 집필 이후와 때맞추어 스탈린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4번에 거친 모스크바재판으로 통한 대숙청을 시작한다. 이때 스탈린은 자신이 레닌의 후계자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레닌과 같이 활동했던 많은 볼셰비키 인물들을 숙청하였으며, 스탈린을 가장 옆에서 보좌하던 부하린까지 처형하게 되었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의 압제로 인해 다른 동물들이 불만을 느끼자, 나폴레옹은 그 동물들에 대해 매너농장주인 존스와 스노볼 같은 존재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폴레옹의 개들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4회나 걸쳐 이루어진 모스크바재판에서 대부분 희생자는 러시아혁명 전부터 활동한 볼셰비키들이란 점이고, 그들을 모두 트로츠키와 내통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했다. 게다가 히틀러가 집권하고 있는 나치의 대두에 따라 트로츠키를 독일 나치 내지 차르세력의 앞잡이로 매도하였다.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달리 무장 세력이나 막대한 권력이 없었으며, 오로지 연설과 집필로 통해 스탈린에게 대항했다. 스탈린이 집권하던 시기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과 소비에트연방을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하고, 스탈린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 덕분에 트로츠키와 관련된 많은 인물들이 스탈린이 보낸 자객이나 스탈린주의자에 의해 암살이나 숙청을 당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저지른 모스크바재판과 트로츠키의 암살은 스탈린이 세계 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지와 코민테른의 정치적 도구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볼셰비키혁명이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한 혁명이란 점에서 전 세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지배하고 있는 소비에트연방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거나 또는 스탈린의 행동에 대해 회의감을 품은 사람들은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2.3 트로츠키에 대한 재평가

트로츠키의 악평은 그가 죽어도 계속 이어졌다. 스탈린이 처음에는 트로츠키를 차르나 나치의 협력자로 활동하는 것처럼 비난하다가 어느 순간 트로츠키라는 이름 자체를 소비에트 내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심지어 스탈린 사후에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 및 총리를 맡은 흐루시초프가 1960년 마오쩌둥에게 했던 말과 1956년 마오쩌둥이 흐루시초프에게 했던 말은 모두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스탈린이 사망 이후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잡아 모스크바재판 시기에 처형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어도 트로츠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않았다.

 

그나마 트로츠키의 억울한 누명과 그의 업적을 제대로 본 사람 중에 <동물농장>을 저술한 조지 오웰이 있었다. 조지 오웰의 경우 1937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경험을 살려 저술한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스탈린의 게페우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트로츠키 지지자 및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투옥하거나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에서 트로츠키 지지자들이 억울한 희생에 대해 다루었으며, 1948년에 저술한 <1984>의 경우 정보미래사회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캐릭터를 스탈린에 맞추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브라더와 오세아니아를 위협하는 인물로 골드스타인으로 등장시키는데, 골드스타인은 한 번도 작품에 나오지 않고, 단지 스크린 영상에서만 등장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염소 같은 수염과 안경을 꼈으며, 본래 오세아니아를 창립 당시 빅브라더와 같이 세웠으나, 반역죄로 숙청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골드스타인이 저술한 그 책은 오세아니아에서 금지도서로 지정되는데, 그 도서는 바로 <배반당한 혁명>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소비에트 연방을 이상적인 국가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는데, 프랑스 현상학자인 메를로 퐁티는 <폭력과 휴머니즘>을 저술하면서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비판했으며, 스탈린이 지배하던 공산주의를 옹호하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에 대해 독일,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판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산주의를 자신들이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에 따라 영화나 서적 등으로 통해 트로츠키에 대해 다루거나 혹은 트로츠키를 등장시키는 콘텐츠가 등장했다.

 

1972년 영화감독 조셉 로지가 제작한 <트로츠키 암살사건>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힘없이 살해당하는 노인으로 보여주어 인간 트로츠키 본연의 모습을 강조했다. 그러나 몇 번의 암살기도가 있었음에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스탈린에 맞서는 인물로 보여줌에서 한편으로 트로츠키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최근 철학자 제이슨 바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영화 <맑스 재장전> 영화포스터 및 도서표지에서는 트로츠키가 화면 중앙에 빨간약을 들고 서 있으며, 그 옆에는 영화에서 실제로 등장하는 슬라보예 지젝, 안토니오 네그리, 자크 랑시에르 등과 같은 세계적 석학 8명이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등장한다. <맑스 재장전>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영상이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영화로 작품 내에서 캐릭터로 등장하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로 통해 현대철학자들의 관점에서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스탈린의 폭력정치의 문제점을 드러나면서 이와 반대로 트로츠키의 업적을 재평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3. 결론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토대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냉전시기에 독재정치를 하고 있는 공산권 국가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만든 우화적 작품이다. 특히 등장인물에서 스탈린을 상징하는 나폴레옹과 트로츠키를 상징하는 스노볼의 대립에서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스노볼이 개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트로츠키는 게페우에게 바로 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망명 중에 암살로 인해 살해당한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더불어 볼셰비키혁명을 주도한 혁명가고, 러시아내전을 승리로 이끈 정치인이었다. 그가 스탈린에 의해 당에서 축출되면서 스탈린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을 해왔으며, 스탈린에 의해 오명을 쓰게 된 마르크스주의를 계속 지켜오던 인물이었다. 특히 <배반당한 혁명>으로 통해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로 인해 독일나치 및 파시스트 국가들에 대해 스탈린이 동맹조약을 맺을 것이란 예언이 적중하면서 스탈린에게 정치적으로 견제한다.

 

러나 조직과 권력이 부족한 한계로 인해 스탈린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의 이름은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으나,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으며, 그의 저작들은 다시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20세기 소비에트 연방 및 공산진영국가의 모순과 문제점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하나, 그것으로 인해 볼셰비키혁명 그 가치를 훼손시키면 안 된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스티브 스미스가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에 의해 훼손된 볼셰비키혁명의 가치를 다시 복원하는 점에서 스탈린이 철저하게 검열했던 트로츠키의 재평가는 필요하다. 트로츠키의 재평가에서 그가 이룬 업적인 볼셰비키혁명 이외에도 트로츠키가 가장 강조한 부분은 관료주의화로 인한 독재정치다.

 

 

 

트로츠키는 레닌에게 경고한 것처럼 “처음에는 당 전체를 대신하게 되고, 다음에는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중앙위원회를 대신해 한 사람의 ‘독재가’가 등장하게 된다.”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관료주의적 정치행태가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배신당한 혁명>에서 스탈린에 의한 정치적 숙청이 프랑스대혁명에서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똑같은 사건으로 보았고,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했던 자코뱅당에 가입했던 나폴레옹이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했다.

 

스탈린 역시 레닌과 같이 활동한 볼셰비키이면서도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실시한 것을 보면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 사건이 발생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온 문구처럼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프랑스대혁명에서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의해 목숨을 잃은 로베스피에르나 스탈린에 의해 추방된 트로츠키를 보면서 프랑스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 에서 기존의 독재자를 대체하여 새로운 독재자가 나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단순히 보면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에 의한 공포정치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스노볼로 통해 트로츠키가 지적한 것처럼 단순히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만이 아니라 관료주의적인 정치로 인해 국가는 독재정부가 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독재정부에 의해 핍박받는다는 사실이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 등장하는 스노볼에 대해 다룬다는 것은 단순히 러시아혁명과 내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좀 더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4. 참고문헌

존 할라스, 한창완 역, 『존 할라스 유럽 애니메이션 이야기』, 한울, 1999.

조지 오웰, 도정일 역, 『동물농장』, 민음사, 1998

조지 오웰, 정희성 역, 『1984』, 민음사, 2003

조지 오웰, 오증자 역,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0

아이작 도이처, 김종철 역,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5

아이작 도이처, 한지영 역,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7

아이작 도이처, 이주명 역,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7

루이 알튀세르, 서관모 역, 『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1997

레온 트로츠키, 김성훈 역,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

필 에반스, 타리크 알리, 정연복 역,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책벌레, 2002

스티브 스미스, 류한수 역,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 박종철출판사, 2007

카를 마르크스, 최형익 역,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비르투, 2012

모리스 메를로 퐁티, 박현모 역, 『폭력과 휴머니즘』, 문학과 지성사, 2004

<동물농장>(Animal Farm, 1954, 존 할라스)

<맑스재장전>(Marx Reloaded)

<트로츠키 암살사건>(The Assassination Of Trotsky,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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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림픽이 열렸을 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응원하지도 않았다. 인터넷 뉴스홈에서 그저 메달 몇개 순위만 알았다. 밤새가면서 한국 응원하지 않았다. 거의 이번달에는 일메나 메여있었고, 게다가 주말에도 이런 저런 일로 계속 밖에 나가있었다. 그리고 시간나면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다. 게다가 이번에 월드컵 축구 경기 역시 매한가지다.

 

그런 나에게 한국이 사랑스러운가? 애국심은 있는가에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군입대전에는 그랬다. 군입대후에는 일에 찌들렸고, 전역 후에는 논문으로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면 왠지 군부대 있을 때부터 것에 대해 생각하면 나도 부끄럽고, 주변도 부끄럽다.

 

 

 

참고로 기본적으로 나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필두로 한 자연주의와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그래서 헌법의 기본적인 이념에 대해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이후, 프랑스 인권선언문이 작성되어 그것이 21세기까지의 헌법의 틀이 된다. 우리나라 헌법을 볼까? 다 볼 수 없어도 1조 위를 보아도, 대략적으로 프랑스인권선언문과 비슷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근데 보면 조만간 삼일절인데, 나는 조용히 지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것이 조금 그렇다. 내가 어설픈 민족주의에 대해 짜증나는 것은 그렇게 민족주의라고 하면 어느 때 민족주의냐는 것이다. 대놓고 나는 민족주의이오! 라고 하는 것도 뭔가 이슈가 있을 때이다. 내가 조금 부끄러운 것은 내가 사는 지역에 백산 안희제 선생의 기념관이 있는 것은 알았는데, 이제 무엇을 한 분인지 알았다.

 

상해임시정부 자금 60%를 지원했고, 언론을 세우고, 지금의 상고를 만들었다. 그런데 뭐가 짜증나기 시작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족의 단결이라 하면서 진짜 민족의 근본이 뭔가 싶은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고, 사상의 자유? 역시 보장되는 게 맞으나, 단군신앙까지 믿으란 것은 아닌데,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이다.

 

상해임시정부 요원이 대부분 대종교란 사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지석영, 주시경 선생 등이 대종교 인물이란 사실을 알거나 혹은 인지할 때마다 쇼크다. 대종교가 임시정부, 혹은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광복군 역시 대부분 대종교에서부터다.

 

대종교를 믿겠다는 것이나 믿으라는 것은 아니나, 민족주의에 대한 열기와 광기를 띄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평소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은 있는가? 없다. 그런다고 해도 독립군 투사로 보는 대종교 인물들에게 파시스트 요소는 없다. 다른 민족을 억압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애를 낳으면 삼신할매가 점지해준다고 하는데, 삼신은 사실 三神으로 세명의 신이다. 애를 낳을 때 물을 받아 기도하거나, 또는 미역국을 끓이거나 우리 일상과 문화에 녹아있다. 축구 찰 때만 붉은 악마라고 하여 단군의 아들 나간다는 뻔한 클리셰를 생각하니, 같이 응원하고 거기에 빠져들기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한국에서 헌법조차 1번 읽어본 국민들은 몇 %일까? 헌법의 기원을 아는 사람은 그 %에서 %일까?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깐 지금은 초딩학교 그때는 국민학교, 응원가나 행사에 꼭 나온 노래가 있다. 한국을 빛낸 100인위인들

 

결국 코메디인 노래인가? 아니면 월드컵에서는? 딱히 강조하는 것은 아니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작 그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에서 처음 나온 이름을 두고 제대로 실천한 사람들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니 말이다. 사회시간, 역사시간, 국어시간에 그들이 대종교란 사실을 아무도 알리지 않았다. 한국인이고 한국인데, 왜 한국을 배우라고 하는데, 안 가르쳐주는 것이지?

 

어차피 한글날, 개천절, 삼일절은 노는날이고, 나도 쉬기에 좋아한다. 딱히 기념일에 기념이 중시되는 게 아니라 한 번 정도 이렇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최근 일본 극우들이 망언과 독도문제를 걸고 넘어지는데 흥분하면서도 정작 그들과 투쟁한 사라져간 사람들은 까먹는다. 본도전말의 상황에서 일본 극우들은 전범을 기리고 참배한다. 우리는 무시한다. 그러니 한심하다는 점이다. 참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면 알아주면 좋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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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18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을 종북좌파로 국정원에 고발하거임....(국정원 시계 타야지..ㅎㅎㅎ ) 바그네 만세...

만화애니비평 2014-06-18 09:06   좋아요 0 | URL
만세~ 천황폐하 만세(그분의 아버지가 혈서로 적었지요)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모비 딕>을 읽는 순간, 나는 문득 내 뇌리에 새겨진 어느 밴드이름이 생각났다. 그룹이름은 Led Zeppelin, 즉 납으로 만든 비행선인 레드 제플린이다. 브리티쉬 하드락으로 불세출의 뮤지션으로 남은 살아있는 전설인 그 밴드를 말이다. 소설 <모비 딕>으로 말해보자면, 그 늙은이들의 흰머리는 마치 흰 머리를 가진 자 큰 고래가 마치 성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그 성난 이빨의 엄니를 모든 색을 빨아들일 수 있는 괴물이지. 제 아무리 노아의 방주가 와도 그들을 데리고 타나토스의 궁전에 있는 하데스에게 찾아가, 하데스가 미소 짓는 저 표정마저 전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가브리엘의 전사지!

 

이런 말투를 사용했다면 어떠한가? 레드 제플린은 1970년대 브리티쉬 하드락으로 세계를 강타하고,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를 강타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나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들이 내뿜는 사운드는 마치 향유고래가 숨구멍에서 뿜어 나오는 거친 분수와 같으리라! 그들의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새하얀 태양으로 변한다. 태양이 되어버린 그들의 광채, 마치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기에 귀로서 그들을 느낀다.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투박하게 들리는 목소리, 터질 것 같은 드럼 소리, 뱃사람들을 파도로 데리고 갈 것 같은 사이렌의 소리를 담은 베이스, 이 모든 것이 레드 제플린일 것이다.

 

소설 <모비 딕>을 읽으면서 레드 제플린을 들어야 제 맛인 이유는 레드 제플린 2집에는 오로지 드러머 존 본햄을 위한 곡 <Moby dick>이 있다. 하지만 앨범이 아니라 이것은 인터넷으로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라이브 연주를 봐야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 세상에 육체조차 존재할 수 없을 드러머의 연주가 오직 영상 안에 살아있다. 인간은 육체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게 된다. 왜냐고? 저 미친 흰 고래인 모비 딕이 바다에서 난폭한 군주로 군림하기 때문이다. 모비 딕이 존재하는 한, 포경선을 탄 모험가는 죽음이 무섭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채 죽어간다.

 

그래서 죽음으로 이끌어 내는 모비 딕을 찾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는 피쿼드호처럼 이미 존재하지 않은 드러머의 소리를 듣기 위해 나도 모비 딕을 듣는다. 모비 딕을 듣는 순간 포경선이 노를 펼치면 거친 파도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바다에서 나의 적, 너의 적, 우리의 적 그 녀석을 만났어. 바로 그녀석인 모비 딕이야. 이 게으름뱅이들아! 어서 닻을 내리고 보트를 내리고, 그 망할 엉덩이를 나무 바닥에 붙여! 너희는 이제 인간이 아니라 보토 위에 있는 작살과 보트 노가 되어 그냥 저기로 가는 거야.

 

모비 딕이 큰 입을 벌리고, 우리 앞에 동굴처럼 만들고 있어. 녀석도 우리를 반기는 거야. 오늘 바다에 있는 붉은 색은 우리의 피지. 아니 성자, 성령, 성부께서도 내린다는 그 포도주가 지금 바다 위에 흘러가는 것이지. 아니면 어떠하니? 모비 딕의 입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닌 신이 살고 있는 세계지. 제우스조차도 그 녀석에게 상대되지 않아! 왜냐고? 모비 딕이야말로 바다의 제왕이고, 포세이돈의 맞수이지! 그래 우리는 지금 바다의 왕을 죽이고, 바다의 신 제우스 형제의 맞수를 잡으러 가는 것이지.

 

하지만 레드 제플린의 모비 딕을 들어본다면 여전히 모비 딕의 싸움은 모비 딕의 일방적인 공격이다. 드러머의 거친 드럼 솔로는 마치 고래가 자신의 주변에 오는 배를 무참하게 박살내고, 숨구멍에서 분수가 튀어나와 마치 그 자리에 폭풍이 오는 것처럼 보여준다. 꼬리는 파초선처럼 강력한 바람과 바스티유를 노리는 대포처럼 모든 것을 가르고 가른다. 인간이든 나무든 아니라면 신이든 말이다. 육지와 바다를 비교하면 지구의 2/3이 바다로 이루어져있고, 세계의 물 대부분 거의라고 말할 수 있는 물이 바다에 있다. 심지어 우리 인간이 마실 수 있는 얼음덩어리가 극지방에 분포하여 바다 위의 빙산처럼 존재하지 않은가?

 

빙산은 하얀 향유고래 모비 딕의 성처럼 인간의 배를 박살낸다. 모비 딕은 바다를 누비며 배들을 박살낸다. 모비 딕은 과연 존 본햄의 드럼처럼 마지막에는 비명 크게 지르고 그냥 사라진다. <모비 딕>이 왜 3대 비극이 되어야 했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삼키는 고래 모비 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잡을 수 없는 고래, 작살을 아무리 던져도 마치 자신에게 영광의 훈장인양 달고 다니는 고래, 그러면서 최후에는 보트와 포경선까지 박살내어 버리는 고래!

 

<모비 딕>을 읽으면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가 싶다. 우리가 흔히 뱃사람이라고 불리는 거친 남자들은 왠지 다른 세계에 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인간 이하인 자들, 그 많은 인간이하인 자들이 모비 딕을 잡기 위해 피쿼드호에 탑승한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 주인공 이슈메일, 그는 평범한 뱃사람이나 고래의 아름다움에 반했는지 아니면 고래라는 죽음이 이끌려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식인종 왕자 퀴퀘그와 형제의 맹세를 나눈다.

 

피도 같지 않고, 피부와 머리 색, 심지어 옷차림까지 모두 다른 퀴퀘그, 용감한 전사의 아들로 태어난 퀴퀘그,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용사로서 제일 먼저 바다에서 위용을 떨친다. 마치 페르세우스가 바다에서 안드로메다를 구하기 위해 바다괴물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처럼 보이는 것은 괴물처럼 보이는 식인왕자 퀴퀘그일 것이다. 자신이 포획한 인간의 머리를 잘라내어 그것을 암시장에 파는 무법의 살인자를 말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위대한 용사다. 실사 그뿐이랴? 살인자에 의해 가족을 잃은 목수, 흑인 겁쟁이 소년 핍, 다리를 하나 잃어 16달러의 금화를 포상으로 준다는 에이해브 선장까지 말이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 버린 받은 호모 사케르 같은 존재다. 오로지 자신들을 받아줄 곳은 저 넓은 바다에서 가장 강한 고래일 뿐이다. 그 강한 고래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 왜 고래로 그들로 적수를 왜 거대한 향유고래로 해야 하는가? 그들은 모두가 꺼리기에, 모두가 꺼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추방되어 바다에서 고래를 잡는 사나이들, 그들은 모비 딕의 유령에 씌워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작가인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마치 니체의 서적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안에는 모든 진리를 깨기 위한 진리로 가득한가? 고래라는 동물은 상당히 위험하고 포악하며 무서운 동물이다. 지금의 포경산업에서 과학기술과 첨단무기로 무장한 배가 고래를 잡아 유유히 항구로 돌아오겠지만, 적어도 <모비 딕>의 포경선은 나무로 만든 배고, 그 배에는 고래와 키스를 나누는 것으로 공중제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다로 간다.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그들이 있어야 할 공간은 무엇인가? 포경선은 한 번 나가면 1년이 아니라 3년이 기본이고, 그들이 먹는 음식은 육군 보병사단의 1달 식량만큼 많을 터이다. 그들의 배에는 풍족한 술과 고기로 가득하다. 그런 배에만 풍족함이 있기에 그들이 원래 있던 곳에는 풍족함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비참한 노래만이 흐른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비참함을 가진 도시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구로 모인다. 더 비참한 세계로 흘러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모비 딕>에서 모든 이야기는 허먼 멜빌이 만드나, 그 안의 선원들과 고래에 대한 노래는 마치 철학자의 노래와 같다.

 

인간의 비참한 세계, 자기만의 유령을 찾아 떠나는 미치광이 에이해브 선장, 어떻게 보면 비참한 인간들에겐 자신의 목표란 없다. 목표 없는 인간은 육체는 존재해도 정신은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망령이 될 자를 골라 바다로 이끌려간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경계에 있는 서로를 보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모비 딕>에서 보이는 인간의 존재란 거대한 자연 앞에서 끈질기게 투쟁하는 존재다. 처음부터 <모비 딕>은 인간을 자연 앞에서 나약하지만, 그 나약함을 버리고 싸우는 존재로 그린다. 그래도 최후의 승자는 자연이었다.

 

죽음의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진리로 갈 수 있다는 것처럼 고래이야기와 고래 뼈로 만든 모든 사물들은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고, 경건함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향유고래에서 나오는 기름과 향수들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며, 고래의 수염과 꼬리는 여자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이것이 모두 바다 최고의 폭군 고래에 의해서다. 그런 공간에서 죽음과 삶이 희비하기에 선원들이 내뱉는 말투는 욕도 아니고 때로는 농담도 아닌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때로는 절대적 관념을 추구하는 플라톤주의자들을 비웃듯 그들은 고래로서 그들을 비웃는다.

 

넓은 바다에 엄청난 덩치의 고래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이다. 실제 신화에서 본 무서운 바다동물들은 고래인 것이고, 고래를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 고래를 말하는 것만큼 웃기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모비 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래에서 불처럼 뻗어 나오는 분수를 페티시즘에 걸린 환자처럼 집착한다. 에이해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사로잡혔는지 아니면 모비 딕이 에이해브 선정에게 사로잡혔는지 서로 모른 채 계속 누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이 항해는 계속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원동력은 분명히 에로스라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처럼 유령 같은 얼굴로 유령처럼 선실에 박혀 있다가, 악령에 붙잡힌 미치광이처럼 선실 밖으로 튀어나와 밤낮으로 비가와도 모비 딕을 찾아 나선다. 얼굴에는 분노로 일그러진 지옥의 사냥개처럼 죽음조차 가소롭게 여긴다. 죽음의 위기로부터 돌아온 그가 오히려 죽음의 세계에 있는 자연이란 거대한 세계에 몸을 던지는 이유는 인간은 에로스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분노와 저주, 광란과 착란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한쪽 다리가 고래에게 먹혀, 이제는 외발이 선장처럼 돌아다니나, 그의 영혼에서는 한 쪽 발의 아픔은 여전히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며, 형이상학적 세계에서는 고래에 대한 악몽과 보복심리만이 춤을 춘다. 인간이란 삶의 원동력을 어디서 얻는 것일까? 희망조차 보이지 않은 이들에게 오히려 분노의 작살이야 말로 삶의 원동력인가? 작가 허먼 멜빌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처음 항구로 가서 심각한 불평등을 겪는다. 허무한 자신의 삶에서 에이브해 선장처럼 허먼 멜빌은 자신의 <모비 딕>을 어디에 정착하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따라서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는 것은 레드 제플린의 <모비 딕>을 듣고, 또 다시 모비 딕에 끌려가는 에이해브 선장을 만들고 같이 끌려가는 허먼 멜빌과 같은 것이다. 어디에 안주할 수 없는 운명의 방랑자, 그래서 어디에 안주할 수 없기에 절대적인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모비 딕>을 읽은 고래에 대한 이야기, 에이브해 선장은 모비 딕에 대한 이야기만 나온다. 주인공인 이슈메일은 그런 자신의 눈으로 미쳐버린 선장이 오히려 인생종착지가 있는 피쿼드호에서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이 아주 철저하게 냉정하고 판단적인 이유는 진심으로 그가 어디에 미쳐있거나 빠져있어야 가능하다. 그의 이성은 오로지 감성적 폭발로 인해 채워진 그릇일 테니 말이다.

 

모든 것을 잃어도 없어져도 결국은 다시 찾아가고 또 찾아간다. 이슈메일이 왜 추후에 모든 기록을 기록하는 지질학자가 되어야 할까? 레이첼호에서 잃어버린 고아 대신 이슈메일이 고아의 대체물이 되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하여 몸을 날리는 피쿼드호의 선원들, 모비 딕이란 결국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존재다. 보이는 것은 분명하나 왠지 손에 닿을 수 없을 만큼 과격하고 위험한 존재다. 그러나 그것은 이슈메일과 그 동료들을 좀을 먹고 있는 존재이나, 이슈메일 일행들의 존재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하지만 안타까울 이유는 없다. 이슈메일이 다른 동료와 헤어져도 새로운 이슈메일은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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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8-06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만화애니비평님, 이렇게 귀 쟁쟁한 리뷰라니요. 먼 바다와 허먼 멜빌의 난동하는 문체를 리뷰로 다시 봅니다. 생각을 힘차게 끌어 긴 마침표를 찍는 것 또한 모비 딕의 이해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8-06 08:32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8-06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난 이거 아무래도 청소년용으로 읽은 거 같습니다. 스무살 무렵에 읽었는데 청소년용이라고 해도 엄청나게 두껍더라고요... 이 영화는 제 인생의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4-08-06 10:47   좋아요 0 | URL
어라 모비딕건으로 오늘 사람들이 덧글을 남기는데, 뭔가 떴나요? 곰발님 읽어보세요. 정신이 산란해집니다.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

 

Lumière: L'Arrivée d'un train a la gare de ciota

 

1분짜리 필름인데, 시작은 10초가 되면 나온다. 잔잔한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저 멀리서 레일 위로 열차가 한 대가 다가온다. 그리고 열차는 멈추면서 승객이 내리고, 다른 승객이 올라탄다. 지금 보면 옛날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유럽의 풍경으로 보이겠으나, 당시 프랑스인을 비롯한 많은 관객들이 실제 열차가 자신에게 들이 닥치는 것으로 착각했다.

 

이른바 가상의 세계가 현실의 인간을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이다. 화질도 흑백인 점에서 분명 당시 사람들은 이 필름에서 흑백이겠지만, 본래의 존재성에서 컬러를 인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화관은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1950~60년대 흑백 TV가 보급될 쯤, 드라마에 나온 인물을 보고 많은 시청자들이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실제하지 않은 존재, 혹은 파생실재라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만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지금과 당시의 차이점은 당시로는 가상적 존재가 물리적인 영역까지 넘어온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가상과 현실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 극현실적인 Hyper-reality로 되어버렸다.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에서 보듯이 1분이란 시간동안 우리가 볼 수 것에서 그 어떤 연출이나 편집은 없다. 시퀀스는 연속으로 이어지는 롱 테이크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연기자들의 연기력과 카메라 감독의 촬영기술 그리고 녹음, 소품, 미술 담당 등의 호흡이 맞춰지지 않으면 롱 테이크이란 시퀀스를 소화해내기 어렵다.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는 단지 들어오는 기차를 보고 찍었기 때문에 미쟝센적으로 그저 철로 역에 서서 고정된 기차역의 풍경만 찍은 것이기에 큰 구경거리는 없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상황은 어떨까? 그때 사람들이 촌스럽다고 말하지 마라. 우리는 아예 가상으로 이어진 존재에 대해 - 그것이 파생실재에 의한 연예인이든지 애니메이션으로 의한 캐릭터이든지 - 마치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소중하게 다루고 있지 않은가? 연예인이든 캐릭터이든 존재성에서 그 자체로서의 존재할 수 없다. 연예인들은 내가 영상으로 본 1초와 지금 상황의 1초가 다른 존재고,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시간적 초단위는 무의미하기에 다들 그 존재성으로 존재할 수도 혹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있는 영상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이미지라는 관념세계로 통한 자기 의식 합리화이지, 물리적 존재는 변화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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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1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인문학'이란 책 어떻습니까. 읽은만합니까 ? 워낙 비슷비슷한 내용의 책을 진중권이 많이 써서 겹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06-16 21:02   좋아요 0 | URL
비슷비슷한 내용이 많으나, 이번에는 조금 어렵고 색다른 내용이 많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