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앤디 앤드루스 지음, 서남희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하여 나는 이 책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란 없다. 코카콜라의 이사나, 대기업의 CEO나 또는 장군이나 방송국 프로듀서 등등 말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좋고, 교훈 있는 이야기는 좋다. 하지만 문학적 예술을 논하려면 결국 그로테스크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좋은 놈이 좋은 놈으로 되려고 하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악당이나 적이 있어야 한다. 윈스턴 처칠의 명언 중에 “뒤를 멀리 돌아보면 볼수록, 앞을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라는 것으로 이 책에서는 처칠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본다.

 

처칠을 대해 내가 아는 정도는 소위로 임관하여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큰 활약을 하여 나치 독일을 무찌른 철의 남자다. 하지만 그라고 하여 모든 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철저한 앵글로색슨족의 우월감에 빠진 남자였고, 그가 영국에서 벌인 정책 중에 인종차별 행위는 그야말로 경악할 수준이다. 강도가 외국인이란 이유로 그들이 있는 건물이 화재가 났는데도, 처칠은 오히려 그들을 불타 죽어도 마땅하다고 여겼다. 철저한 인종 차별주의자에 노동자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행동을 했다.

 

물론 어느 한 정치인에 대해 모든 것을 두고 판단할 수 없으나, 적어도 공과 사를 판단하려면 그에 대한 어느 정도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아람어를 새겨진 것이라고 하니 결국 아랍문화권이라고 보겠지만, 그것이 진짜 아랍에서 말하는 알라라는 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본래 이스라엘의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처음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그리고 사막이 배경이란 점에서 어느 민족인지 모르겠다.

 

단지 의상이 무어인들이 입는 것이 나오기에 아랍문화권이란 점만 가늠케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단 1화에서 끝난다. 단지 죽은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들만 남겨두고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차라리 아들이 살아남아 어떤 과정을 지나쳐 20세기 미국에서 새로운 사건이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편이 더욱 개연성이 높게 보여주었다. 이 소설은 흔히 History라는 역사와 더불어 소설의 Fiction 개념을 반 정도 섞은 Faction을 추구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20세기 미국에서 18세기 미국과 19세기 미국까지 이어진다.

 

내가 보이는 미국이란 국가가 어느 돌을 가진 인물에 의해 큰 영향을 끼쳤고, 그나마 다른 인물이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서의 쉰들러가 유일하게 미국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비중은 너무나도 약했다. 물론 인종이나 피부를 모든 것을 차별한 것만은 아니나, 흑인과학자의 이야기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고, 과학이란 학문이 관념적인 이론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넘어 물질적, 생물학적, 화학적 객관성이 토대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뉴턴이 왜 사과가 떨어지는가? 라는 질문에 그것은 지구의 중앙부에 위치한 핵과 맨틀이 가진 중력에 의해서라고 우리는 대답하겠지만, 그것이 모두 신의 뜻? 이란 대답은 농담도 아주 나쁜 농담이 될 뿐이다.

 

단지 과학자인 조지는 단순히 배부르게 해라, 존 애덤스는 자유롭게 하라, 또는 저명한 부자는 살아가게 하라, 식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물론 내용은 인간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되지만, 현실에서 분명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지금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하자면 너무 심한 갭이 보인다. 세상을 위해 조국과 우리 민족을 위해 또는 타인을 위해서는 고귀하나, 너무 아름다운 행동에만 치중하기에 이 소설은 나비효과가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누구는 너무 알려진 인물이다. 이 소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 정의한 것처럼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명제와 어긋나 버렸다.

 

이미 미국의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되고, 저명한 과학자, 실제 일어나던 사건까지 보여준 것만으로 모순에 대한 문제점을 알려주기보단 그 모순에 의해 생긴 문제로 새롭게 탄생한 영웅만을 다른 식으로 부각시킨 것뿐이다. 왜냐하면 아랍인이던 아버지가 존경을 받는다고 하나, 그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의 행방에서 떠나온 운명처럼 어느 한 사람에게 다가가자, 그 돌을 가진 것만으로 어떤 고귀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돌은 어느 시대에 유명한 인물이 가지고 있었고, 그 돌을 가진 예전 주인은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그 돌을 물려받은 후계자는 예전의 주인과 비교할 수 있는 업적을 남긴다.

 

어떻게 보면 돌의 가치를 알고 찾아낸 인물이 단지 운명과 같은 만남에서 영웅 같은 인물이 되었다는 설정은 겉으로는 모두가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고, 어디선가 작은 행동이 큰 물결이 되어 나비의 날갯짓이 사이클론을 만들어낸다는 나비효과를 말하고 있다. 나비효과가 전혀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 확률은 너무 낮다는 점이다. 모르겠다. 전에 어느 섹시한 여자가수가 해고된 노동자를 위해 자신이 먼저 노란봉투에 월급을 대신 모금하자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차라리 나비효과라면 그것이 더 좋지 않을까?

 

잔 다르크가 신의 소녀라고 하여 많은 백성을 구했지만, 결론은 왕족과 귀족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잔 다르크를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모든 승리의 열쇠가 되었을 때는 위대한 성녀지만, 전쟁 후에는 마녀로 취급당해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을 나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 전쟁에서 참전한 용사는 잔 다르크만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잔 다르크의 용맹과 그 위상은 찬양할 만해도 그런다고 그녀만이 모든 것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앤디 앤드루스 <선택>은 바로 그런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이었다. 단지 알 수 없는 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는 것으로 그 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적 믿음으로 업적을 남기고, 대단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결과론적인 요소였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모든 인간에게 가져야할 정신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돌에 의해서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는 인간의 운명이 결국 보편적으로 다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으나, 그 돌을 마주하는 점에서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돌이 선택한 것으로 연계된다.

 

그렇다면 돌에 의해 연계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굳이 그 돌이어야 하는가? 돌에 새겨진 가치는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도덕이다. 그 도덕에 은근히 미국의 독립정신을 말하고 있다. 미국독립정신은 나도 존중하나, 그 독립 이후로 보이던 노예문제, 작가는 노예문제에 대해서도 부당하고, 노예에 대한 문제를 변호한 인물도 등장인물로 나오게 한다. 심지어 조지라는 흑인이 어렸을 때 자신을 구해준 백인에 대해 일화를 보면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개인에 의해서 된다고 하지만, 개인이 밀집된 것은 사회이지, 사회가 개인 그 자체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사회를 바꾸나, 그 가능성이란 누구나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과 조건이 갖추어야 가능한 것이다.

 

왜 추천자들이 대부분 어느 기관의 높은 분들같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 차라리 저널리스트나 평론가 혹은 시민들이 그 의견을 내놓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단순히 영웅에 대한 업적이 돌과의 만남이란 자체가 너무 현실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만나야했던 운명일까? 개인에게 선택이란 주어진 것이고,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치적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면, 선택은 최선의 결과보다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결정하는 최소한의 피해라고 본다. 좋은 선택 그 자체가 좋은 결과는 주는 것은 당연하나 그 모든 선택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선택에서 도덕적 관념이 중요하다. 그 관념은 그 사회에 순응하는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야 한다.

 

이래저래 포장되어 있지만, 자유의 국가를 만든 백인, 죽을 위기애 처한 흑인아이를 구해 그 아이가 후세 큰 업적을 만들도록 했던 백인, 20세기 위대한 경찰관인 마크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분리되어 있지만, 결론적으로 마크와 도리 부부가 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가면서 마크가 최연소 경찰서장이 되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결론은 마크가 어떻게 성장하여 어떤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상관없이 범인을 잡고 사라진 아이들을 찾은 것은 훌륭하나, 그것이 자신의 노력보단 돌의 계시라는 것은 마치 신의 계시가 이어져온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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