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라는 이름으로 강연을 들을 때 내가 생각난 것은 국내 헤비메탈 그룹 블랙홀 5집 앨범 <City Life Story>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나온 앨범으로 대표적인 곡은 <바람을 타고>란 곡이었다. 뮤직비디오가 막 떠오르던 시기, 많은 대중가수들은 자신의 곡을 인기곡을 포장하기 위해 뮤직비디오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다. 그러나 '바람을 타고'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 어느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 “저요? 낮에 일하죠. 가스배달해요. 저는 음식점에서 일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아무것도 부럽지 않게요. 바람처럼 달리는 거죠.”

 

도시라는 공간은 과연 어떤 공간인가? 블랙홀 5집 그 '바람을 타고'를 듣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옆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보게 된다. 길가에 보면 되도 않은 양아치들이 경적소리 내고, 억지로 머플러를 개조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사람들을 본다. 물론 나라도 달린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대신 차로서 달린다. 대신 내 차는 일반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오토매틱 기어가 아니라 수동 기어로 달린다. 달려도 내 손과 발이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차를 조작한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 어찌 보면 내가 감각적으로 공기의 저항을 맞으며 차가운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는 행위다. 단지 그 행위가 '바람을 타고'에서는 오토바이를 타는 유저다. 단지 그들은 멋진 차를 몰거나 좋은 옷을 입는 게 아니다. 음식점에서 배달가거나 가스통을 맺고 달리는 바이크족, 그들은 현실에서 보자면 소외된 계층이고, 그들 나름대로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달린다는 그 솔직한 말은 나는 살아있다 라고 말한다.

 

비단 '바람을 타고'만이 아니다. '앵벌이 합장' 같은 경우, 지하철에서 거주하는 거지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새벽의 DJ'는 어두운 밤과 새벽에 고독에 지친 인간이 기대는 것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DJ의 목소리다. 아마 소통이 없는 냉혹한 도시 공간에서 인간은 고독과 고립이란 감정에 좌절한다. 마지막 곡은 노래가 아니라 기타 반주곡 ‘비가 오는 도시 위에는 달의 강이 흐른다’로 마무리 된다. 블랙홀은 시나위와 부활하고 더불어 한국 전통메탈의 선구자다. 그들이 연주하는 앨범에서 항상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과 아픔을 기타와 목소리로 토해내었다. 나이가 먹어도 긴 생머리를 흔드는 그들에게 우리 사회란 그들에게 여전히 아픔의 공간이다.

 

비아트 강의 3번째를 정리하면서 공간이란 시각적 정보를 블랙홀의 음악이란 청각적 정보를 대비한 이유는 인간의 감정은 시각보다 청각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물론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노래한 4집 수록곡 ‘마지막 일기’는 지금도 들어도 애절하다. 한국이란 사회 그리고 그 한국에서 도시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비극은 치유되지 못한 채 계속 이어져간다. 인간의 기록인 역사 안에서 공간은 계속 그 곳에 존재하는 고정식이나, 사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하는 존재다. 영원성과 이동성이 같이 공유하는 공간이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블랙홀의 음악을 내가 화두로 던진 이유는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라는 공간은 언제나 세련되고 활기차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장소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강의 3번째에서 제시한 주제, “예술과 장소 그리고 공간적 실천”과 적합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완성은 자연의 파괴고, 노동의 착취의 결과다. 노동을 하고 그것을 쌓아올린 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놓았는데도 그것의 주인으로서 행세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노동력만 제공한 것에서 끝나버린 사회적 소외자이다. 블랙홀 5집 ‘바람을 타고’에서 음식점에서 일하는 그들은 우리 도시에서 흔히 말하는 중국집의 철가방일 수 있고, 피자배달도 될 수 있다. 가스배달은 우리 가정에서 사용하는 프로판가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했지만, 우리 사회가 각종 변화가 일어난다. 혁명이든 전쟁이든 뭐든지 말이다.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 사회의 혼돈을 보겠지만, 그 혼돈조차 유지되려면 늘 누군가의 노동이 필요하다. 겨울이라면 난방시설을 이용해야 하고, 계절을 넘어 하루에 식사를 꾸준히 해야 한다. 나라의 기능이 마비되거나 없어지거나 또는 사라져서 새로 탄생해도 사람들의 입속에 빵은 항상 들어가야 한다. 바로 그것을 제공하는 것은 그 누군가의 노동이다. 우리는 노동을 제공하여 살아가고 노동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노동으로 돌아가는 공간, 그게 바로 도시다.

 

도시가 아닌 농촌과 어촌도 노동은 필요하나, 그 노동의 성과물은 그 나라 정치체제가 구시대적인 발상이 아닌 경우 그 노동을 실행하는 자에게 돌아간다. 노동자와 노동의 산물이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라는 점이다. 농경산업과 그리고 농경산업 이전의 수렵채취산업 시대에는 인간의 노동이 곧 실행자에게 부여된다. 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 도시의 노동은 자기가 하는 만큼 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임금의 형태로 돌아온다. 강의주제에서 노동과 임금체계를 말하려던 것은 아니나, 결국 도시라는 공간은 노동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란 점이다. 노동이 가진 의미는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그 사회의 종속적 존재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구조적인 요소다.

 

강의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바로 시간의 개념이었다. 농경산업에서 농부들은 공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찾아낸다. 비가 오면 집에서 쉬고, 날이 밝으면 논에 나가 어두워지면 집에 와서 잠을 잔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자연이란 공간에서 시작된다. 자연의 변화가 곧 인간의 삶으로 연결되었기에 인간은 자연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자연적 인간이란 숲 속의 동물처럼 미개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그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도시의 발전과 농촌의 파괴 그리고 시간의 개념,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조건이었다. 도시의 이야기에서 강의자가 나누어준 자료에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와 앙리 르페브르가 등장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문화비평가로서 길을 걸으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의 학문을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공간에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보는 관점은 인간의 노동이 집중화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가둘 수 있는 주거가 필요했고, 그 공간에서 거주하는 인간은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들 역시 공간이란 점이다. 인간의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대상이 아니라 물적 조건을 성립시키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변모된 점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시간이란 개념이다.

 

도시는 시간이란 개념으로 움직이고, 그것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은 자연적 흐름에 의해 계산되는 게 아니라, 시계의 초침과 분침으로 구분되게 된 점이다. 도시는 시간이 곧 재산이고 법칙이다. 시간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측정하게 되는 척도가 된다. 도시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일을 한다. 일을 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노동은 시간으로 측정된다. 시간의 흐름에서 일정시간에서 생산된 것은 곧 자신의 임금으로 가겠지만, 그 임금 이상으로 고용주에게 큰 이익이 돌아간다.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란 도시에서 곧 자본을 움직이는 수단이 된다.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자신에 대한 재생산이 필요하다.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의상과 주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으니 취미생활과 문화생활이 생긴다. 인간의 시간은 그 누구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이 주어지겠지만, 인간은 영원불멸로 24시간을 사용할 수 없다. 일정 수명이 되면 사망하고, 사망한 자를 대신하여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 도시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유지는 인간의 재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 생산되는 것이다. 인간이 생산하는 것은 계속 도시의 팽창으로 이어지고, 그 팽창은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빈부격차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된다.

 

강의하는 분과 강의 자료를 보면 도시에 대한 언급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루소가 생각났다. 루소의 <에밀>을 읽으면 농촌생활이 인간의 심신에 좋고, 도시는 온갖 죄와 병으로 가득하며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공간인 점을 묘사한다. 인간이 태어난 이상 공동체 이상으로 사회라는 큰 조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인 점을 감안하여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저술하여 도시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가치관을 제시했다. 그러나 적어도 루소의 사상을 공부하면 루소는 도시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루소가 가장 잘 지적한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는 인간이라고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기 어려우니 그럴지도 모르나, 가장 인간에게 필요한 게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가장 저렴했다라고 말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소모성이 강하며, 밀과 치즈처럼 일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소모되어야 하는 점에서 인간의 운명은 비참한 수레바퀴에 영원히 맴도는 비극에 처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가 바라보던 도시는 매우 비참했다.

 

“산업이나 기술이 보급되고 번영됨에 따라 남의 멸시를 받으며 사치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세를 짊어지게 되고, 더구나 노동과 기아사이에서 일생을 보내게끔 되어 있는 농민은 논밭을 버리고, 본디 그가 그곳에 가지고 가야 할 빵을 구하러 도회지로 간다. 도회지가 백성의 우둔한 눈을 경탄케 하면 할수록 논밭은 버림을 받고, 토지는 황폐해지며 한길에는 불행한 시민들이 우글대는 모습을 보고 한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들은 거지나 도둑으로 변하여 언젠가는 수레로 찢어 죽이는 극형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시의 발전은 과학기술과 산업 활동에 의한 산물이다. 그게 바로 가난한 자들의 고통으로 이룩한 신기루 같은 현실이다. 참고로 루소의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탄생 200주년(1912년)에 루소가 칸트와의 관계성을 놓고 봤지만, 250주년(1962년)에는 루소를 마르크스와 놓고 연구했다. 루소와 마르크스의 관계를 놓고 보면 관계성이 의아할 줄 모르겠지만,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는 루소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로베스피에르의 아버지라고 한다. 몇 년 전에 타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역사와 흐름을 설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설명에서 마르크스의 시점은 헤겔 좌파라고 하나, 막상 마르크스는 리카도학파 좌파와 더불어 자코뱅파 좌파로부터 이어진 것이고, 자코뱅파에서 대부분 인물들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에게 영향을 받지만, 그 안에서 최고인 자는 루소다. 루소의 사상을 토대로 엥겔스 편을 보면,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엥겔스는 영국 신흥 공업도시인 맨체스터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을 정리할 때 이미 루소의 사상을 상당히 인용한 점이다. 도시라는 공간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장소는 물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면서 한편으로 이념이란 시스템이 우리의 무의식마저 지배한다.

 

게다가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관념에 의해 존재하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공간이란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시간착오라는 단어와 더불어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공간착오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짜증나는 것은 거리에 나부기는 깃발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깃발이 넘실거리는데, 이미 그 당시 새마을운동은 도시화를 위해 기존 낙후된 마을을 산업화의 영향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이다. 대도시를 비롯한 많은 국토가 이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져 있고, 마천루의 도시는 바벨탑처럼 솟아올라 인간의 욕망은 이미 신을 초월했을지 모른다.

 

그런 도시에서 새마을운동 깃발이 매우 넓은 대로 양쪽 깃발꽂이에 몇 ㎞나 계속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공간착오라는 개념이 바로 저런 것을 알 수 있다. 대도시화된 현실에서 더 이상 1970년대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지만, 아직도 살아가기 바라는 점이다. 지금은 산업화로 인해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여 건강한 자연생태조건이 도시와 어울리는 것이 도시계획의 목표다. 그런 현대적인 도시계획과 다르게 전혀 다른 가치와 구시대적 산물이 여전히 도시를 아우르는 점이다. 문제는 그런 가치들은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단 계몽주의가 아닌 계몽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점이다.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도시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법칙이 아니라 도시가 그래던 것처럼 그 사회의 관습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는 당연히 이래야 해라는 가치관마저 도시의 이념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시는 많은 인간들이 상주하고 있고, 도시는 사회적 공간으로 작용한다. 사회적 공간에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눈에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은 약속에 얽매인다. 공간은 인간의 이성과 더불어 무의식에도 작용한다. 가령 부산이란 도시는 1950년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내려와 만들어진 도시다. 그 이전인 일제강점기에는 경제수탈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되었다.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는 경부선, 부산항과 영도대교 역시 일본이 경제수탈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공간적 재현이 바로 그들의 이익에 연결되었다. 그러나 경부선을 한국에서 가장 이용이 많은 철도구간이고, 부산항은 많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며, 영도대교는 많은 관광객들이 다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온다. 친일적인 사고에서 일본이 만들어낸 근대화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대화가 이룬 성과가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자수탈로 이어졌고, 이익을 본 자는 극히 일부였고, 그들은 일제의 억압에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올라가면 서울이란 대도시는 조선개국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하여 한강과 넓은 평지를 도시적 기능을 살려 왕조로 이어갔다. 서울에 남아있는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현대적인 요소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기능과 지명에 의해 남아진 것이다. 그래서 도시는 움직일 수 없는 고정식이라도 그 형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연속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그 기능은 강연에서 말하듯 공간적 재현일 수 있고, 혹은 재현적 공간일 수 있다.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합리적 공간이 존재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공간도 있다. 부산이란 도시는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도시로 발전하고, 유명한 국제시장 역시 피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모여든 곳이 그런 명소로 된 것이다.

 

루소가 바라본 파리라는 도시는 처음에 화려한 궁전과 귀족들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지만, 그가 본 것은 가난한 거지들이 모여 빈민촌이 생겼고,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인 창녀촌도 있었다. 그들은 결코 원하지 않은 현재의 삶을 살았고, 그것이 공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재현적 공간은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들이 활동하여 그들은 자연이란 공간을 보존했다. 도시의 팽창은 공유지를 없애고 사유지로 전환되며, 가난한 자들은 계속 멀리 도시 안에서 외부로 내쫓고, 외부의 공간마저 도시가 점유하기 시작한다.

 

16세기 양모 산업이 영국에서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농지를 잃고 도시로 흘러 빈민촌을 형성하고, 빈민들은 거지가 되어 구걸하다 국가에 의해 처벌을 받고, 심지어는 사형을 당했다. 도시에서 바로 자본의 차이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 조금 가진 자,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들까지 말이다. 블랙홀 5집의 ‘바람을 타고’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란 물질적인 자본이 아니라 단지 차가운 밤하늘을 가르는 바람이었다. ‘바람을 타고’는 유일하게 그들이 도시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다.

 

삶에 대한 애착에서 유일한 해방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공간에서 공기의 저항이란 자연적 조건이다. 도시는 인간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에서 보여준 사진이 인상이 깊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나 그 작가는 자신의 아내가 국경 없는 의사회 일원이었고, 아내의 해외봉사를 가면서 그도 따라간다. 그곳에 본 가난한 도시빈민들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었다. 컬러사진 아닌 빛과 조명을 왜곡시킨 흑백사진에서 비참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환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미지의 인간처럼 보였다. 그 중에 인상 깊은 사진 2매가 있다. 광산에서 채굴하는 노동자들이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 것, 고층건물을 짓기 위해 안전장치 없이 골조비계를 타고 올라가는 나이 어린 노동자의 모습이다.

 

그들의 삶에는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들의 입장을 너무 비참하더라도 불쌍하게 봐달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삶의 기억과 경험은 많은 것을 잡아 댕긴다. 건축은 도시의 승리를 상징하는 물질이다. 건축의 존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어진 사실은 은폐한다. 회사 다닐 때 옆에 같이 근무하던 동료의 아버지가 어느 대단지 고급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 그 동료가 상주가 되어 장례식을 지키고 있을 때 나 역시 조문하러 갔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치고, 복귀하여 그 사고를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런 현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식으로 대답했다. 도시의 승리는 과연 위대했다. 인간의 목숨을 잃어도 그런 비극은 어디서나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현실이 틀려도 인간들은 문제의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나와는 무관하다는 식이다. 도시의 인간은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각자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소개된 사진 중에 마치 기숙사처럼 보이는 건물에 많은 노동자들이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들은 원래 시골에 올라온 사람들이고, 시골에 가면 저녁에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한 방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눈다.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지만, 아무도 자신의 옆에 있지 않았다. 단절에 의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립되어 고독한 도시를 느끼는 것이다. 아파트 주거환경에서 아파트는 과거 부의 상징이었으나, 아파트는 인간을 분리된 존재로 만들고, 숫자로 매겨버린다. 아파트는 그 사람의 생활수준과 봉급 그리고 계급까지 구분한다. 이런 도시의 모습은 우리 일상생활이 되어 그 자체가 당연성이 되었다. 참고적으로 앙리 르페브르는 프랑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그룹과 상당히 친밀했다. 그 중에 라울 바네겜이란 <일상생활의 혁명>의 저자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동기가 바로 앙리 르페브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골목, 거기서는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커피와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터전이었다. 도시계획의 목적은 도시정비와 발전이나, 또 한편으로 가난한 자들을 멀리 내쫓는 것이다. 현대의 인클로저 현상이 도시계획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정비를 하게 되면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여 좋겠지만, 막상 그 보상금으로 다른 곳에 집을 얻으려도 부족하고, 그 자리에 다시 올라간 집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도시의 확장은 계속 빈민을 몰아내는 것이다. 빈민들이 모인 골목에는 다양한 상점이 들어서고 그들의 자리를 없애는 대신 백화점이 들어선다. 골목상권을 지키자 그리고 합리적 소비생활을 하자고 슬로건을 외치는 현실이나, 막상 그런 게 불가능한 것은 도시의 형태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공간의 배치에서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가는 것이 당연하고, 교통의 흐름을 이용하여 직장과 학교,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그 공간을 누가 배치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활환경은 크게 변한다. 예술의 역할은 바로 그 공간성을 어떻게 보고 설정할 것인가이다. 예술은 시각적 정보로서 많이 드러낸다. 음악은 재생장치가 없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각적인 정보는 그 자리를 메우는 공간이 된다. 인간 개인 자신의 삶에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란 어렵다. 하지만 그 자신의 의지와 목적을 이룰 수 없더라도 그 가치조차 가질 수 없다면 그 세상은 매우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다. 지루한 세상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 권태만 존재한다. 물론 그 권태로움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인간들은 영원한 방관자 spectator가 되어 수동적인 인생을 살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로서 충실하나 그 충실함이 여실할수록 권태의 지배만 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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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7-1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 전 제가 청각보다는 시각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공감각적인 거였네요. 내용이 제겐 좀 어려워 범접하기 힘들지만 생각을 해볼 단초를 제공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__)

만화애니비평 2015-07-20 10: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음에 이햐가 쉽도록 작성해야겠네요

양철나무꾼 2015-07-20 10:14   좋아요 0 | URL
아뇨~, 충분히 이해하기 쉽도록 잘 써주신 좋은 글인데, 다만 제가 그동안 이쪽으로 생각이 고착되어 있어 어렵게 느껴졌나 봅니다. 몸과 마음뿐 아니라 생각도 유연하게 해야겠다 다짐을 해봅니다, 불끈~!

AgalmA 2015-07-20 0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본문 중 말씀하신 사진 작가는 세바스티앙 살가도로 추정됩니다. 말씀하신 사진은 <workers>에 수록되어 있을 거고요. 살가도가 난민과 빈민들 사진 찍다가 문명에 대해 낙담하고 실의에 빠져서 사진 찍기를 포기했었죠. 그리고 다시 재기하여 환경 운동과 함께 그런 사진으로 사람들에게 뜻을 전달하고 있죠.

만화애니비평 2015-07-20 08:51   좋아요 1 | URL
세바스티앙 살가도로

맞네요. 검색하니 그 작가입니다. 환경운동가를 하는 것조차도 강의에서 들었습니다.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참 부끄러워지는군요.

마립간 2015-07-2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에 만화애니비평 님의 댓글을 인용했습니다. 맥락상 왜곡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5 10:00   좋아요 0 | URL
특별히 문제없어요. 저 생각은 저나 신해철씨나 많은 분들이 여기는 부분이니깐요
 


 

위 사진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희생자를 초모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미술작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만화작가가 하나의 일러스트를 그린 것처럼 그려놓았다. 그런 점에서 위의 그림이 만화작가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면 예술로서 보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 것인가? 2014년 7월 23일에서 29일까지 안산시 단원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비아트에서 2번째 강연을 개최했다. 1번째와 다르게 2번째는 유입물 대신 영사기를 하얀 벽면에 비추어 전시된 작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주제는 만남이란 것이다. 만남 그것은 어떻게 보는 것이 맞을까?

 

우선 예술에 대해 내가 공부하기론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는 예술을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삶 자체가 예술의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예술로서의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삶에 들어있는 인간의 미적 가치를 끓어 올려 주어 그것이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에게 전달하여 그들에게 미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에서 그런 예술적인 요소로 본다면 무엇이 부족한가? 예술에 대한 정의는 다분하지만, 전에 강의에서도 그러하듯이 우선 예술은 대중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 글을 적는 필자의 경우 서브컬처에 의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서브컬처 향유자 겸 아마추어 비평가로서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에 대해 바라본다. 인간의 시각에서 자신이 속하여 있는 사회나 조직에서 그 안에 갇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오로지 그 주변이나 변두리에 존재하는 인간이야말로 대다수의 인간이 속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을 관찰하는 이와 비판하는 이는 항상 소수의 입장이거나 격리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런 대다수가 속한 세계의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떤 점에서 바를지도 혹은 무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어려워하는 이유가 있듯이 예술은 또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이런 역설적 관계가 놓인 것이다. 따라서 예술을 같이 즐기기란 이런 난해한 역설적 관계에서 줄 달리기를 하는 점이다. 그런데 우선 저번 강의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지적하고 싶은 것은 왜 대중에게 예술이 전달이 어려운가라는 점이다. 필자와 같은 사람들은 이른바 서브컬처로서 대중문화 아래에 존재하는 문화를 향유하나, 그 문화는 대중들의 입장에서 천박하고 유치하고 이상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무시당하거나 천대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고급문화와 더불어 서브컬처로 들여다보면 입장이 다르다.

 

서브컬처 안에는 인간이 겉으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 근원에 대한 요소를 보여준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안다고 했다. 예술에서 말해주는 것이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점에서 전후맥락 관계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전후맥락을 생략한 채 예술가들이 입장만 강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난감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에게 특히 현대예술이란 영역에서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공감이나 교감이다.

 

대중은 무지할 수 있다. 이른바 중의주의적인 요소와 토크빌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쉬운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일반 대중하고 분리되기 보다는 오히려 대중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부족한 것은 대중에 대한 현실적 상황판단이다. 20세기에 도래하면서 영상매체 발달은 정보의 과잉으로 인해 대중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정보를 찾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받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형이 되었다. 비아트 1번째 강연에서 전성욱 교수가 나누어진 유입물을 자세히 봐야 할 이유는 바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모습이다.

 

대중들이 왜 예술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가? 강연에서 <인터스텔라>를 본 관객들이 그 영화에서 나온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점, 그리고 그 작품이 아니더라도 흥행한 작품이나 또는 여러 가지 매체에 등장한 예술이나 오브제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하면 영화에서 기념이 되는 장소에 체험하는 것은 좋지만, 그 자체로 자신을 거기에 가두는 현실이 된 셈이다. 가령 영화 <변호인>에서 작중의 김영애씨가 순애연기를 할 때 아들인 진우를 찾다가 지쳐 골목에 등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송변호사가 골목계단에 앉아 있는데, 그 배경이 부산 영도구 영선동 일대의 주택지역이다. 그곳에 가면 <변호인> 촬영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국제시장> 흥행 후 실제 부산 중구 부평동 일대가 관광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물론 작품을 흥행에 따라 부산지역 관광객 유치에 좋을지 모르나, 실제로 거기가 촬영지라도 하여도 영화와의 관계성이 적다. 인증으로 온 관광객들이 넘치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어째보면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의 경우 영화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적 공간에서 중요하다. 프랑스대혁명이 바스티유감옥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어 바스티유광장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키요틴의 칼날 아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나 역사적 공간에서 그 역사적 감동과 현실적 공간에서 많은 생각을 전달해준다. 물론 단순히 프랑스에서 비싼 요리만 먹고 향수만 구매하려는 분들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공간에 가서 경험하는 것이란 새로운 전율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단순히 미디어에 흥행한 이유로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보단 자신들의 주변에 나온 이야기를 찾는 열렬한 수동적인 인간만 양성한다. 따라서 예술이란 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점에서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문제는 예술이 대중에게 어렵다는 점과 강연하신 분이 프랑스 사회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텍스트를 인용하듯이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학력과 지식수준에 따라 소요시간이 다른 점이다.

 

예술이 너무 어려운 점에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금방 나오나, 억지로 거짓말로 자신이 본 시간보다 더 늘린다. 하지만 이미 충분한 지성을 갖춘 자들은 그 시간을 굳이 거짓말 할 이유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예전에 계층과 계급, 지식수준이 이제 문화자본의 구분까지 나눈 것이다. 가령 우리가 아는 플라톤, 호메로스, 칸트 등과 같은 위대한 저자들의 책을 아는 자들이 많지도 않고, 그들의 서적을 읽은 자들은 더 작으며, 그들의 사상을 논하는 자들은 더욱 적다. 예술에서 문학과 철학의 연계성이 결국 하나의 모티브로 전동되나, 대중에게 철학자와 문학자들의 이야기란 낯설고 거부스러운 존재다.

 

하지만 대중들은 결코 자신들을 무지하려 보이지 않는다. 억지스럽게 미술관에 가서 돈만 쓰고 나오는 형태는 미술예술가들의 권력을 드높게 하는 문제도 있다. 현대미술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기존 모더니즘에서 아방가르드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해체에 따라 없어졌다.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로 이루어진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한계성은 이야기가 없다. 관객들 중에 어느 정도 예술적 지식이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또는 이해하고자 하나 대중은 그렇지 못하다. 이야기가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2번째 강연 주제가 만남이라면 만남은 소통의 시작이다. 소통이 시작되기 전에 만남에서 낯선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강의 후 토론시간에 나 같은 경우 그런 현실적 괴리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아니라면 서브컬처에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덧붙이자면 그 당시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요한 소재는 이때까지 서구사회에 의해 억눌린 동양과 제3세계다. 그들의 문화는 생동감이 있고, 야생적이며, 독특한 미학이 있다. 레비 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원주민들의 장식구를 수집하면서 그것은 원주민의 생활습관에 의해 만들어진 도구 혹은 주술적 요소를 반영된 기구다. 하지만 인류학자에게 그것은 새로운 문화의 결정체고, 예술적인 작품이라 보던 것이다.

 

한국에서 그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어느 작가가 유명한지 나 같은 일반인도 아닌 서브컬처 향유자는 알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현대미술이 일반인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점이다. 게다가 나는 뒤풀이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국내에서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대구지역에 피카소 전시회가 열려 많은 이들이 보러 간다. 피카소는 프랑스 미술가로 프랑스의 자랑이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다. 한국에서도 중고교 미술교육시간에 피카소란 이름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마르크스주의자고 프랑스 공산당으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에는 그런 정치적 입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프랑코 독재정치에 반대하고, 게다가 1937년 스페인 내전에서 활동한 레지스탕스들의 비참한 죽음과 프랑코의 학살에 분노하여 만든 ‘게로니카’는 분명 중요한 가치가 숨어있다. 피카소의 작품은 그림에서 이해하기 힘든 큐비즘이라 해도 그 안에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무 힘 없는 약자들이 학살당하는 점이다. 1953년 한국전쟁에서 민간인들이 군인들에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에서 우리는 그림이 이상하게 보이나, 그 내용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다. 피카소의 예술은 사상적으로 어렵지 않다. 오히려 간단명료하고 리얼리즘을 배제한 인상적인 요소를 남긴다.

 

지금의 예술인들이 만드는 작품이 왜 피카소와 같이 공감이 없을까 라는 점에서 그들은 아마 대중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강연 중 사진들을 보면 이해하기 힘든(실제 보지 못했고, 그 작가를 모르며, 옆에 다른 분들은 이미 그 작가를 알고 있는 분이 많았기에) 점이 많으나, 어느 공동체 마을에서 계단손잡이에 쟁반을 옆에 붙여 거기에 막걸리나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계단이 의자로 활용한 작품이 있었다. 예술이 곧 삶이란 공간에 녹아있는 것이다. 목연포차를 보면 마트 생활오브제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을 동원한 재미난 도구들이 대중의 삶으로 흘러가는 게 현대예술가들의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은 안다. 내가 예술에 대한 부분에서 현대미술보단 차라리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서브컬처가 예술적 기능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기 쉽고 용이하다 했다. 가령 국내 최고 만화작가인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 <아기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 <100℃>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장면을 해학적으로 또는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100℃>의 경우 2014년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최규석 작가 전시에도 올라온 작품으로 1987년 6월 항쟁을 그려낸 작품이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저런 공감대가 필요한 이야기다. 만화가 지닌 강점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만화는 누구나 만들고 그리고 즐길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 남긴 말로 “만화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대중들의 의한 문화이다”라고 한다. 물론 모든 작가가 만화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렵고 난해한 작품들도 나름 그 특성이 있어야지 다양성을 유지하고, 다른 작가들의 아이디어로 이어지는 모티브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예술을 논하려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적인 영역에서 예술은 지식인들에게 통하는 것이지만, 그러지 않은 이상 감정코드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가 세월호 추모전시회로 보자.

 

내가 세월호 전시회에서 인상적으로 본 작품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을 재각색한 작품이다. 누구에 따라 광주 사태, 광주민주화운동이라 하겠지만, 나라면 광주민간인학살사건이라고 부르고 싶다. 군인은 헌법에 의해 대한민국을 지키고, 그 이유는 국민들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나, 오히려 국민들을 총칼로 살해한 것은 군인의 본분을 어긴 것이다. 군인은 오로지 계급에 의해 상부의 지시에 따르므로, 세월호 사건에서 해결되지 않은 진실규명은 결국 권력자들의 압력이 가해진 점이다. 만화가와 웹툰작가, 그밖에 작가가 모여 만든 전시회가 예술로서 그리고 대중에게 접근이 가능한 것은 그런 공감능력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도래하면서 예술은 대중을 지배해야할 대상 혹은 계몽대상이 아니라 같이 느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대중의 이성적 논리를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는 윤리적 가치를 선행되지 않으면 논리로서 가치가 없다고 한다. 단지 기계적 논리는 자신의 주머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줄 것인지 혹은 자신에게 얼마나 편할 조건만 찾는 것인지에 관심을 둘 뿐이다. 내 옆에 어느 작가분이 자신의 전시회를 이야기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다니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찾아 그 길을 향하여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걷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생각난 것이 기 드보르의 <나체의 파리>라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도시는 구역정비와 도로의 일괄적 분류로 가난한 자들로부터 도시에서 추방하고, 감시가 용이하고 통제가 유리한 구역으로 만들었다. 골목길이 많고 어지러운 건물 배치는 가난한 이들이 뭉치고, 예술인과 문학가들이 모인다. 알베르 카뮈나 장 폴 사르트르가 파리에 거주하면서 가난한 거리에 거주한 이유 도로가 정비된 곳은 부동산이 비싸 살기가 어렵고, 복잡한 가난한 마을은 다양한 무리들을 와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기 드보르의 <나체의 파리>는 그런 도시계획이 정비된 길이 아닌 골목이나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 서로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건 바로 삶의 주인공인 일반 대중으로 보는 것이고, 도시화에 따른 공간은 결국 가난한 약자들에게 가혹한 곳으로 변한다. 자본주의 문제점은 돈의 차이로 인권과 자유까지 차이난다. 헌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것처럼 말하나, 그것은 말의 요식이 지나지 않는다. 최근 영화 <연평해전>에서 정치적 문제가 드러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연평해전>에서 사망한 수많은 병사들은 의무복무로 해군에 지원한 것이고,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그 대상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일반 대중 혹은 서민들의 죽음이다. 또한 같은 시기에 개봉한 <소수의견>에서 철거민 아들과 의경복무자 역시 알고 보면 우리 주변의 소시민이다.

 

소시민들이 모여 서로 의지하기 보다는 편을 가르고 싸워야 하는 시기에 예술적 기능은 바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윤리적인 입장에서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최근 한 의원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을 이야기하고,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대한민국 헌번 제1조 제2항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 그 자신이나,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개인의 주체자로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개인은 수동적 자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는 열렬한 스펙테이터(spectator)가 되었다. 예술이 대중과 따로 논다는 것에서 예술조차 스펙테이터의 열렬한 행위로 수동적으로 변해간다.

 

기 드보르가 보여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행동에서 대표적인 게 영화다. 그 중에서 <사드를 위한 절규>는 1시간 정도의 필름에서 단 4차례의 대화만 잠시 등장하고 검정 화면만 나왔다. 관객들은 분노하고 환불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즉 SI(시튀)들은 모두 만족하면서 성공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극장에서 관객들은 아방가르드라는 작품을 보길 기대했으나, 실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관객의 예술을 무참하게 박살내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강연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예술가들은 대중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강연자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보다 토론자의 이야기를 들은 것보다 그것을 보고 내가 판단하여 정리한 내용이지만, 조금 생각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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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신화편 세트 - 전3권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신과 함께>는 만화작가 주호민의 작품이다작품을 보면 현대인의 관점에서 과거에서 지금까지 내려온 신화를 그려놓은 것이다물론 스토리텔링은 현대적이나그 신화에서 배경과 인물들은 과거의 산물이다한국의 신화를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프다한국인의 감정에서 한()이란 비극적 정신이 숨어 있다그 비극이 우리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그것은 처음 <신과 함께신화편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인간의 문명은 문명 이전이던 야생의 자연보다 못하며오로지 배신과 시기질투로 가득하다.

 

<대별왕과 소별왕>의 이야기처럼 옥황상제의 두 아들은 서로 인격과 재능을 토대로 승부를 겨루나 마지막에 소별왕의 계략으로 대별왕은 패배한다그래서 옥황상제는 하늘동생 소별왕은 이승그리고 형인 대별왕은 저승의 왕으로 추대된다왕이라고 하나 그들은 엄연히 신이다올바른 판결이 아닌 부정한 방법으로 왕 자리가 바뀌었으니 세상은 이미 부정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기본적으로 <신과 함께>를 읽어보면 무속신화가 베이스다민간신앙의 토대로 우리 일상생활에 깊게 내려온 우리의 재산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경시하고 천대하였다조선사대부 시대에도 그렇게 했지만그런다고 조선왕조가 모든 것을 빼앗지 않았다서구사회가 도래하고 나서 합리화란 이름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자신들만의 이념으로 우리의 사상을 짓밟았다현대사회에서 서구화라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우리가 한국인이란 점을 피할 수 없다한국 땅에서 태어나든지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다른 나라에 있든지 어느 소속에 있든지 그 하나로만으로 한국인이란 혼을 버릴 수가 없다.

 

물론 한국인이 최고의 가치고모든 것의 기준이 아니다단지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가는 것을 알아가기 위해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경험해야 한다. <신과 함께>라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우선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무속신화가 토대다하지만 무속신화 이전에 있던 창세신화가 뿌리라고 볼 수 있다창세신화 중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륵과 석가는 한국의 대표적 신화다미륵이 본래 탁월하고 인격적으로 고매하나석가는 이에 반해 질투와 시기그리고 속임수로 가득한 인물이다.

 

두 신이 세상을 놓고 대결할 때 석가의 속임수로 미륵은 패배하고미륵은 영원성을 상징하는 인물 두 사람마저 돌과 소나무로 만들고석가의 무리는 수 천 명을 데리고 온다인간세상을 석가가 지배하면서 미륵은 석가와 인간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그리고 음식도 생식이 아니라 화식으로 되면서곧 불의 이용은 문명세계를 말하고인간의 문명은 죄로 가득한 수라 길로 변한 것이다. ‘대별왕과 소별왕’ 이야기 역시 미륵과 석가’ 신화와 크게 다른 점은 없다그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란 어느 존재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점이다.

 

대부분 이야기에서 신으로 되는 인간들은 분명 이승에서 바르게 살았지만이승의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인물들이다그들이 신이 된 이유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에 이끌리거나 세속의 흐름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원칙을 지켰다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권력과 이속의 논리가 반영된 제도와 도덕이 아니라 윤리적 가치였다대별왕이 염라대왕을 임명하고염라대왕은 다시 저승사자인 차사를 임명한다차사로 임명된 사람 역시 누군가를 괴롭히고 해코질하려 하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사려 했지만 세상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신들이 되는 인간들은 바로 우리와 같이 억압받거나 또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부류다이승은 공명하지 못하나저승은 공명정대하다아마 민중의 의식에서 억압에 의한 해방의식이 무속신화에서 뿌리깊이 내려박혔다따라서 무속신화는 우리가 잘 아는 건국신화와 조금 다르며건국신화에서 보이는 형태가 다르다원래 건국신화로 유명한 단군신화에서 인간의 문명은 인간을 이롭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한국의 신화에서 단군신화가 가장 오래된 기록문헌으로 남은 신화다그 신화에서 단군이 주장한 세계란 인간이 귀한 것이란 인본주의적인 가치다생각해보면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정사상가이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조에 조선후기의 모습은 단군의 시대보다 못하다고 했다세월이 지나 학문적 수준이 높아지고 기술적 발명도 탁월해지는 시점에서 오히려 백성의 삶을 피폐하고 굶주림에 가득했다무속신화는 건국신화처럼 기록이 아니라 입으로 내려오는 구비전승이기에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모된다.

 

<신과 함께>에서 대별왕과 소별왕의 형태를 보자면 신선이 존재하는 선교(仙敎)적 관점이 강하고하얀 삵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의복관제를 보면 조선시대에 가깝다그리고 사라도령과 할락궁이가 등장하는 이공본풀이에서 꽃 감관을 되는 사랑도령이 서천에 간다는 설정은 서유기에서 말하는 서축 즉 인도를 가리키고그것은 불교문화를 말한다민간신앙은 한국 마지막 왕조인 조선에서 유교의 성리학에 선교와 불교 그리고 무속신앙이 결합하여 특이한 형태의 무속신화가 탄생했다.

 

대부분 무속신화가 이승이 배경보단 저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저승에 가지만그 인간 모두가 신으로 되는 점신이라도 좋은 신도 있지만평생 죄를 뉘우치거나 처벌을 받아야 하는 악신도 등장한다그러면서 사라도령은 아들 할락궁이에게 꽃 감관직을 물려주고 자신의 아내와 이승에서 부부의 연을 이어가는 점은 신이 다시 인간이 된다는 속성도 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오고지상에서 단군은 산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서구사회에서 대표적인 신화는 고대그리스에서 내려온 그리스신화다올림포스 신인 제우스를 필두로 많은 신인간수많은 이형적 존재가 등장한다인간이 죽으면 그들 모두 하데스의 신전으로 인도받고그들의 죽음이란 death가 아니라 thanatos(타나토스)라고 한다타나토스는 정신분석에서 삶의 욕망인 eros의 반대말인 죽음의 욕망이다인간은 삶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욕망을 가진 것이다그러나 하데스의 신전에 간 인간은 돌아올 수 없지만한국에서 죽음은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매장문화에서 지금은 국토의 협소와 간단한 장례절차로 매장보단 화장을 선호한다.

 

한국의 선조들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그들의 집터는 거의 대부분 산자락에 있는 양지바른 곳에 묻는다산으로 가는 인간은 하늘로 되돌아가고하늘에서 온 환웅처럼 하늘과 땅의 신과 인간은 서로 왕복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무속신화는 그런 점에서 다소 인간세상에 대한 절망이 숨어있다이승은 고통만 존재하여 저승의 세계가 오히려 공명정대한 사실에서 현실의 민중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그런 점에서 한국 대표적 문화재인 미륵석상들은 미래의 세계에 좋은 세상이길 바라는 민중의 욕망이 담겨있다.

 

신화란 바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풍자와 해학이 숨어 있다우리 선조들의 가치는 현실의 고통을 그렇게 이야기 식으로 전해오다 이제는 그 명맥이 끊기는 비운에 놓여있다다행히 그 이야기의 출처를 기록하여 구전문학이나 전래동화로 다시 세상에 내놓으나 신화는 그 시대적 상황에 따라 계속 새롭게 변화하고 만들어진다신화는 지금과 앞선 시대가 다른 형태로 등장하지 내부적인 가치는 변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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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10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속과 근대를 잘 섞은 다음 웹툰 <귀신>도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11 15:40   좋아요 0 | URL
무속신화보다는 무속에서 말하는 민담에 가깝다고 봅니다. 논문의 주제와 조금 다르지만, 분명 추천할 만한 작품은 분명하군요.
 

법정영화로 국내에서 <부러진 화살>을 이어 <변호인그리고 <소수의견>이란 작품이 나왔다. <부러진 화살>의 경우오판심리로 인해 수학교수의 투쟁을 다룬 것을 본다면 <부러진 화살>은 어느 개인과 권력을 가진 자의 대립구조로 이어져 있다이에 반해 <변호인>과 <소수의견>은 조금 다른 성향을 보인다이건 어느 개인이 권력을 잡은 자를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집단의 개인이 국가권력 앞에 대항해야 하는 점이다. 3작품은 이렇게 하여 서로 갈림길 처음 나뉜다그리고 <변호인>과 <소수의견>은 자본과 권력의 관계에서 나누어진다군사독재 정권시절에 자본은 권력에 아첨을 했다하지만 이제는 권력이 자본 아래 결합하여 정경유차이란 관료주의적 유착관계로 이어진다.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는 곳에 반드시 권력의 입김이 작동하는 것이다. <변호인>은 경제적 이익으로 공권력이 오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이념이 작용하는 것이다이에 반해 <소수의견>은 경제적 이익이 난점으로 올라와 국가권력의 이념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작품 내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어느 누군가의 사주로서 이루어진다그 사주자는 바로 국가권력과 연계한 자본의 손길이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노동자가 서로를 위해 일을 하여 이익을 창출하고 그것은 곧 국가의 부로 이어지는데그 원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그렇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은 손이 아니라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선 인간의 노동력으로 얻어지는 이윤과 그 노동력을 제공한 자에게 지급되는 임금그리고 부동산의 지대다그런데 사실 경제적 현상에서 국내 정황을 보면 과장 돈 벌기가 수월한 것은 부동산의 지대다지대로서 부동산 임대료로 먹고 산다면 자신의 노동력을 들일 이유도누구를 고용할 이유도 없다그저 건물을 신축하여 그 건물을 팔거나 임대하는 순간 막대한 이익을 챙기려 한다대한민국에서 부동산투기가 과잉으로 이루어지고건물임대로 또는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대부분의 현명하다고 여기는 국민으로 제 살 깎아먹기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점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거나 혹은 타인의 이익에 현혹되어 부러워하기만 한다이것은 현실적인 문제다어느 주택지역에 재개발이 들려오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값이 오른 것에 환영을 했다그런데 그 곳은 대부분 대단지 아파트가 있던 곳이 아니라 주택 단위가 있었던 주거지역이었다주택은 아파트보단 가격이 낮으며보상비가 적다게다가 공시지가도 낮기 때문에 아무리 땅값이 올라도 그 돈을 받고 다른 곳에 가더라도 살만한 곳이 없다자신의 집을 팔아도 다른 집을 살 수 없었고오히려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도장찍어줄 때 순간이 더 나은 상황이란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과거 주택재개발사업 시 개발구역 주민들은 임시적으로 다른 곳에 살다가 아파트가 완공되면 그 집으로 이주할 수 있었지만점점 그럴 기회는 잃게 되었다설사 아파트에 살아도 철거예정인 아파트의 매각가격과 그 자리에 올라앉은 아파트의 가격은 사실상 1 = X가 아니라 1 < X이었다문제는 그 X라는 가격이 과연 얼마나 올라가는가에서 시작된다게다가 상가지역에 임대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상가건물 주인이 그 건물을 매각하면 자신들의 입장이 무척이나 곤란해진다세상은 인간의 인정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손실관계를 보고 움직인다.

 

문제의 여기서 시작한다자기 집을 팔아도 갈 곳이 없거나임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아무런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덕분에 생긴 비극이 용산참사고그 소재로 만든 영화가 <두 개의 문>이다진압으로 온 경찰관과 안에서 시위하던 철거민들의 생사가 갈린 투쟁에서 결국 화재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희생된다과연 그건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헌법에서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지만막상 생존권보단 개인의 재산권을 우선 시하는 게 대한민국이란 나라다생존에 위협받게 되는 순간 인간은 동물적 본능에 의해 날카롭게 반응하고만약 자신의 가족이 희생되면 이성이 잃어버리고난폭한 맹수가 된다.

 

<소수의견>은 바로 이런 사회적 모순관계에서 생긴 현상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영화는 다큐멘터리나 르포르타주 계열이 아니라면 실제가 아니 허구의 이야기를 만든 영상서사다하지만 이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인물과 어느 상황적 배경 자체만 허구이지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현실과 같다하지만 우리는 저 현실에 대해 잘은 모르고언론미디어에서는 대중에게 특정 정보만 제공한다현실에서 일어나도 그게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알 수가 없다.우리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지 않은 일은 오로지 미디어로서 받아들일 뿐이다.

 

<소수의견>에서 문제가 된 것은 진압과정이다용역으로 이루어진 깡패집단과 그들과 같이 철거민들을 제압하는 경찰은 서로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어느 특정시기에 진압을 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무리한 작전을 시작한다이때 철거민인 박재호는 아들 신우가 오는 것을 보고경찰진압으로 아이가 다칠 것을 걱정하여 방 안 은신처에 숨기게 한다그때 박재호에게 다가온 의경 2의경 중 한 사람인 김희경은 박재호가 밀어뜨린 가구에 의해 넘어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박재호의 죄목은 공무방해치사죄다공무집행 중인 의경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그를 살해한 이유다인간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은 매우 큰 죄에 해당된다그러나 죄인인 박재호는 오히려 무죄를 외치며 그 당시 상황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박재호의 아들이 병원응급실에 운송 중 사망했는데그 원인은 낙하에 의한 추락사였다하지만 박재호는 아들의 죽음이 추락사가 아니라 과잉진압이라고 말한다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꼬이고 흔들리게 된다물론 영화를 보면 충분히 알고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놓인 박재호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된다단순히 플롯으로서 검사와 변호사의 대립관계만이 전부가 아니라이 영화에서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가 박재호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세상이 바뀌었다고 봤지만 결국 크게 바뀌지 않은 것 역시 말해주고 있다작품에서 윤진원 변호사는 지방대학 출신의 변호사다.

 

그는 지방이란 이유로 무시당하고어디 크게 좋은 자리도 못 간 채 국선변호사로 2년차 살아간다그 옆에는 윤변호사의 SM520와 비교되는 BMW를 몰고 다니는 이혼전문 변호사 장대석이 등장한다그는 과거 80년대 아마 서울대 법대생으로 데모시위를 했었고용의자로 수배되어 우연히 자기 친구 집에 갔다가 윤진원을 만나 그에게 공부를 가르친다하지만 결국 잡혀 들어가고군에 가게 되었으며자신과 같이 시위하면 사귄 여자는 다른 놈과 결혼했다면서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여준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과거를 후회해도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마지막까지 이길 수 없는 재판에 끝까지 조력하던 장변호사는 속물적 시대에 살아가는 무리 중에 남은 인간미를 찾을 수 있었다.

 

<부러진 화살>, <변호인>, <소수의견>은 모두 변호사가 인정받지 못하고검사들과 권력들의 집단으로부터 모진 견제를 받는다이기지도 못할 싸움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에 인간의 고뇌가 보인다특히<소수의견>과 같은 경우 이 세상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으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낭만주의 내지 휴머니즘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세계에 신이란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 신은 분명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전지전능한 능력과 그들을 숭배하는 엘리트의 솜씨로 신은 불가시적인 존재로 작품으로 등장한다그리고 그 신은 그들의 기도에 감응하여 철거를 강제로 시키고,경찰청에 압력을 가하며살인현장의 검증조차 제거한다.

 

헌법체계와 그 밖에 수많은 법률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며인간이란 모두 법 아래에 존재해야만 민주주의국가이나어느 누구는 법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법 위에 군림하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알아서 그들의 숭배자들이 움직여준다그 대표자가 홍재덕 검사다홍재덕 검사는 의경 하나가 죽고 시위자 아들이 죽은 현장을 존치해야 하나오히려 용역업체와 짜고 그 흔적을 지운다그 이유는 시위진압 중 과잉진압으로 민간인 그것도 미성년자를 살해한 게 작전의 실수였기 때문이다만약 그 사실을 알려지면 철거과정의 과잉대응과 미성년자의 살해로 철거의 본질을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박경철 의원은 그 이유를 잘 알려준다그 자리에 돈을 투자한 투자가들이 일정기간 안에 철거가 시작되지 않으면 투자 금을 회수하고그 사업자는 그동안 투자받은 돈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은행대출금의 이자와 이로 인한 손해부담이 막강했던 점이다결국 자본은 권력을 동원하고권력은 관료주의로서 움직였다관료주의는 학벌과 출신으로 이어졌고박변호사는 지방대학이란 이유로 멸시 당한다심지어 신우와 의경이 병원에 올 때 그들을 응급실에서 진찰한 의사마저 연세대 출신이란 점에서 법정에서 대놓고 무시하는 여검사의 모습도 나온다법의학자인 검시관은 서울대 출신이란 이유로 정형외과 전문의 소견을 깔아뭉개는 현실이 드러난다.

 

학벌주의와 정경유착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물론 학력으로서 좋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하나양심과 윤리가 없는 엘리트들이 다수 양성되면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진다.재판에서 패해도검사의 옷을 벗겨내지만검사는 국내 최고의 법무법인인 광평에 들어간다전관예우에 고액의 연봉으로 검사보다 못한 권력이라도 자본과의 유착관계는 여전하다올바른 양심보다 권력과 지위 앞에서 꼰대로서 내세우는 그는 윤변호사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사람은 희생당하는 자,국가에 봉사하는 자가 있는데자기는 국가에 봉사했는데윤변호사는 도대체 무얼 했냐고 묻는다.

 

그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우리 관객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키겠지만그것은 차라리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영화는 리얼리즘으로 이루어진 허구이지만허구로 만들어졌기에 현실에서 말할 수가 없는 진실을 허구인척 보여줄 수 있다재판과정에서 계속 불리한 상황만 처해지고검찰은 증인조차 빼돌리려고 한다실제 그럴 일이 일어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으나권력자들은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에 방해되거나 눈에 가시거리가 되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친다는 점이다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 모든 희생자와 그 희생자조차 진압해야 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 옆에 있는 서민들이란 점이다.

 

박재호와 신우는 가난한 소시민이고김의경 역시 가난한 아버지와 살아가는 사람이다가난한 집안 살림을 생각하여 의경에 가면 추후 경찰시험에 가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군복무로 대체하나 변을 당한다처음에 박재호와 윤변호사를 증오로 바라보던 김의경의 아버지는 박재호의 사연과 모습을 보고 흔들리기 시작한다자신의 아들이 남을 죽일 리가 없는데그 누구보다 착하고 좋은 아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가 없다고 말이다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없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박재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이지만박재호 입장에서 김의경은 자신의 아들을 눈앞에서 죽인 원수다하지만 그 아들들은 모두 세상에 없고아들 잃은 나약한 아버지만 있다.

 

자신의 삶을 모조리 잃어버린 두 아버지는 한 사람은 죄인이 되어 한 사람은 희생자가 되어 눈물로서 설움을 토해낸다과연 이 두 사람에게 왜 절망을 안겨줘야 했는지왜 박재호가 죄인이 되어야 했는가김의경은 신우를 무참하게 폭행하고김의경은 박재호가 내려친 쇠파이프를 맞고 의식을 잃는다.박재호는 아들을 품에 안고김의경은 동료의경의 품에 안겨 서로 눈물과 절규를 외친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영화는 진압에 투입된 의경도 건물에서 시위 중인 철거민도 모두 죄인이 아니라 희생자라고 말한다그러면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철거민과 의경그들은 서로 원수를 보듯이 혐오스러운 악마의 얼굴을 바라보듯이 증오한다하지만 알고 보면 소시민으로 살아오던 철거민그런 철거민 앞에서 본래 일상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는 의경이 둘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저 힘없이 살아가야 하던 소시민들이었다그러나 이때까지도 이제부터 앞으로도 그들은 계속 누군가의 떠밀림으로 증오와 분노로서 싸우고 있다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이들은 자신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라며자신들이 받는 온갖 특혜를 누리고 살아간다그리고 그들은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희생자가 필요하다고 한다그 희생자란 누구란 말인가? <소수의견>에서 바로 그 소수자들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국민이란 점을 말해준다.

 

처음에 모두가 그런 상황에 처해지지 않겠지만어느 순간 그 상황에 도래한다는 점이다영화라는 허구적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소수의견>은 현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고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은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무관한 것으로 볼 것이다그러나 부조리한 일들이 발생하면 그 순간 자신은 대다수로부터 격리되어 소수자로 된다. <소수의견>은 바로 그런 점에서 무거운 영화다영화는 이길 수가 없는 거인을 상대로 계속 덤벼드는 인간을 보여준다.

 

이길 수 없어도 싸우고 또 싸우는 이유는 왜 그럴까윤변호사가 사회적으로 상류집단이 변호사에 속해 있어도 그 안에서 그는 차별을 당한다차별에 의한 불만에서 윤변호사는 박재호라는 인간을 단지 피의자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소수약자로서 동질감으로 뭉친다상대에게 이기지 못했지만결국 윤변호사는 자신의 양심과 삶의 가치에서 승리한다우리는 삶의 승리란 과연 어떤 길인가영화에서 카메라 관점은 피해자를 변호하는 윤변호사의 관점으로 움직인다현실 언론미디어의 카메라는 윤변호사가 아니라 윤변호사 반대의 관점으로 움직인다이 거짓 같은 현실과 허구로서 사실 같은 영화에서 판단은 관객의 몫이고그 판단을 할 기회가 영화감상이라면영화감상조차 관객의 몫이다과연 그 책임은 어떻게 풀어 가야할까알아두어야 할 점은 우리 모두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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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다. 스펙타클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익숙해져 그 자체로서만 스펙타클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된 것이라고 하여도 이미지는 가상의 영상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적 요소로도 드러낸다. 스펙타클의 발생범주는 단순히 이미지 영상매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나 사고방식에 크게 미친다. 스펙타클의 영향은 바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자신의 판단력에 의해 살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기만성으로 가득한 TV, 라디오, 영화, PC, 핸드폰 등의 매체로 영향을 받는다. 21세기에 도래하면서 정보과잉은 인간에게 주어진 정보 이상의 혼란을 준다. 미디어의 발달은 결국 그 미디어의 주인가 누구냐에 따라 변수가 결정된다. 미디어란 자본력이란 경제와 사회적 영향을 주는 정치적 입장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미디어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미디어를 통제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사회의 지배자란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돋보이기 위해 미디어의 영향을 따라 더 가속화시킨다.

 

가령 어느 영화에서 나온 상품이나 이미지를 보고 구매하거나 따라하며, 어느 특정 장소에 몰두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미디어의 환경에 따라 좌우된다. 스펙타클은 언제나 일정한 모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대체된다. 물론 그 근본적인 스펙타클적인 요소는 항상 동일한 규칙은 가지고 있으나, 인간에게 보이는 매체적인 콘텐츠는 늘 바뀐다. 즉 사라지는 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그것은 새로운 상품소비와 더불어 인간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다. 인간에게 지나친 미디어의 간섭은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고를 정지시킨다.

 

영상 안의 주어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비판적 요소를 끌어 올리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유리한 상황만 전개해놓고 거기에 반대되는 의견을 무시하려고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런 정보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들은 자신의 입장을 미디어에 의해 지배되면 될수록 자신의 발언을 포기한다. 포기라는 의미는 자신이 정말 추구해야할 가치이며, 그 가치 대신 미디어로 전파되는 스펙타클로서 완성된다. 그렇다면 이런 스펙타클에 저지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인간은 하루 24시간 중에서 대략 7


시간 내외를 수면으로 보낸다. 인간의 생물학적 능력과 사회적인 시간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인간이 수면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식사, 세면 등과 같은 생리적 행위를 빼면 15시간 이상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란 얼마인가? 학교에서 학생은 수업을 받고,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근무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여유시간 여가로 활용할 수 있는 문화적인 시간이 과연 얼마나 남을까? 거의 남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정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그가 집에 오면 여유시간은 4시간 내외다. 4시간 동안 인간들은 취미생활과 자기계발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영향, 스펙타클적인 관계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게다가 많은 인간들은 자신만의 시간, 그 누구의 간섭으로부터 배제되기 보단, TV와 PC로 통해 살아간다. 자신이 선택하는 콘텐츠보단 자신에게 주어진 콘텐츠만 소비한다. 이 시간은 휴식시간이라 여기겠지만, 그 시간조차 노동이다. 왜냐하면 TV에서 수많은 상품이 광고되며, 그 시청시간은 기업에 대해서는 이윤을 증대한다. 자신에게 이윤이 도달하지 않고, 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상품을 직접적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상품을 간접적으로 구매하는 셈이다.

 

그런 관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미디어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의해 생활양식이 완결되는 셈이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자신의 시간은 빠르면서도 지루하게 흘러간다. 시간이 남아도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체계가 이미 자신에 의해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의 거대한 틀에 빠져있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게 만드는 스펙타클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애초부터 스펙타클 자체를 해체할 수 있어도 그 자체를 소멸시킬 수가 없다. 인간에게 스펙타클의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위해서는 통신과 전화가 두절되는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간은 루소의 말대로 곰과 같이 자연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자신의 자연성을 회복하고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그 어떤 계기이고, 그것은 충격이다. 인간에게 충격을 주는 것으로 기존 생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근대 이전 탄생하여 근대시대에 무섭게 성장하여 현대에서 예술은 일상에서 자주 접하면서도 멀기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단어가 되었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 루소가 제기한 예술은 이미 부르주아 시대로 흘러가는 18세기 프랑스처럼 예술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토대로 탄생하는 물질적(영화와 음악이 저장되는 시기가 아니므로) 혹은 시청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루소가 생각하는 예술성에서 그는 피아노 하나에 혼자 또는 다수의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영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웅장한 오페라 곡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고급문화로서 지배계층의 우월성을 보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루소가 보던 시기에 연극조차 마찬가지다. 가령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배고픈 프랑스 파리의 비참한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 작품에서 불쌍한 시민들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질병으로 비참한 삶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작품을 보던 후대사람들은 작품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보고 감동하나, 문제는 그 감동은 극장 내부에서 끝나고 밖에 나오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된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예술을 보여주는 이유는 새로운 감정과 사고 그리고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대중이 아무리 그런 예술을 접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강연을 하시는 교수님은 문학적인 요소 즉 공감대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예술이 필요한가? 인간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고 비겁한 모습이 많다. 자신은 남에게 좋은 인간이고 싶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결국 그런 이중적 잣대가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뭉치면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 대신 전체의지가 탄생한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고, 자신들의 이익에 피해가 가면 그 누구든지 단결하여 과다한 응징과 처벌이 이루어진다. 양심의 가책보단 다수라는 제도적 이익에 치중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고정관념과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 시작은 자신의 계몽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계몽적 요소를 마주하기 어렵다. 대부분 대중들은 자신들의 현실에서 부당한 일에 휘말릴 경우가 적다. 그렇다면 결국 그런 상황이 만약 온다면? 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가 왜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가? 결국 우리는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에 의거하여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다. 철학의 시작은 형이상학에서 시작되었다. 물리학에서 물리적 존재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연구한 것이 철학에서 많은 검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보단 눈에 보이나 그 현상을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에게 시선을 돌린다.

 

윤리학은 철학에서 제1의 학문이 되었고, 윤리학으로 통해 인간에게 부여된 고통과 억압에 대해 탐구가 시작된다. 문학과 예술로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란 결국 인간의 감성과 공감능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와 이성적 판단이다. 인간의 논리보단 오히려 인간의 감정이 앞서는 것이라면 인간의 감정이 어떤 것이냐 따라 논리적 판단력조차 달라진다. 논리에서 윤리적 요소가 선행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진정한 논리가 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 흐름과 대세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 상황적 요소가 바르지 못할 경우가 상당하다. 예술이란 것은 바로 이런 흐름에서 새로운 물꼬를 틀게 하는 샘물과 같다.

 

예술을 알기 위해서는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다. 이미 그 시대의 흐름에 빠져 그 자체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란 매우 어렵다. 인문학에서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그 새로운 길을 찾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보아온 것들과 전혀 다른 세계를 주어지므로 낯설고 어려우며 때로는 혐오감까지 들 수 있다. 예술은 단순히 미술, 문학, 영화, 연극, 음악 등이 아니다. 예술은 그런 매개체로 통해 전달될 뿐이다. 그 어떤 경로로 오던지 그 매체로 통해 자신이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없다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대중들은 예술이 너무 낯설게 느낄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주지 않으면 관객들은 재미없거나 유용하지 못하게 느낀다. 영화에서 이미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자신의 시나리오에 일정부분 만족하지 않을 경우 배신감을 느낀다. 이게 대부분 관객이고, 외국에서 인정받는 예술작품들은 오히려 외면당한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라는 집단심리는 그 외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으로 제외시킨다. 대중에게 물론 효과적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비꼬거나 지적하는 콘텐츠는 존재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쉽게 접근해도 무리수가 있다는 점이다.

 

어떤 매체를 감상함에 있어서 전후맥락 관계 등을 파악하여 현실적으로 무슨 문제를 지적하는지 알려면 그 방법자체가 막막하다. 이미 길들어진 현상에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대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예술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단지 예술 대신 대중문화라는 소비로 통해 자신들만의 세계적 틀을 구축한다. 인간의 틀을 깨어도 다른 틀이 존재하고, 다시 그 틀을 해체되어도 또 다른 틀에 봉착된다. 그러나 틀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느 특정 부문에 몰입하기보단 우리 인간이 사회적 관계로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다. 사회성의 포기는 말 그대로 숲에서 곰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을 찾아야한다. 대중에 대한 인문학에서 인문학 그 자체가 대중의 옆으로 갈 수 있어도 대중의 시선으로 하락할 수 없다. 대중의 관점 그 자체가 사유의 해답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모순이 되풀이되는 현상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소외되는 세상을 방치할 수만은 없다. 예술은 인간에게 기존 세상과 다른 것을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예술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는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로 통해 왜 인간은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는가? 같은 말이다.

 

인간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즐기는 이유는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다. 즐거움을 찾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고, 인간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그 존재적 대상으로 한정적으로 살아간다. 윤회를 하던 혹은 저승에 또 다른 삶이 있든 또는 동물적인 죽음으로 이 세상에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그 자체로 살아가는 기회가 1번뿐이다. 단 하나의 인생을 고통과 절망에 의해 살아간다면, 혹은 그런 세상에 놓여있어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건 매우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예술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만 충족이 아니라 타인의 삶 역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정이란 마음이 있다. 감정이 없는 인간들은 차가운 냉소와 이기심으로 팽배하여 있다. 물론 나 역시 다소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과 회의적인 관점이 다분하다. 즉 나는 내 인생관이 절대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인 것을 넘어 부정적 시야가 강하다. 예술은 물론 행복만이 아니라 때로는 아픔과 고통도 줄 수 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정신적 고뇌와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느끼는 것조차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정말 마지막 인생 끝 지점에 내 인생에 대한 후회는 있는가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여 미신과 광신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고, 판단이다. 자신의 인생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타인과는 어떤 이미지의 매개로서 만나기보단 자신들의 의지와 사유로서 만나 서로 소통을 한다면 외로움의 고립감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독이란 인간에게 무서운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주지 않은 것이란 눈앞에 태양의 빛이 있어도 보이는 것은 어둠의 절망이다. 왜 예술인가?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 누구의 강요나 눈치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물론 타인의 인식과 배려는 소중하다. 이미지로 꾸며진 관계란 지속될 수 없다. 늘 새로운 스펙타클이 기존의 스펙타클을 밀어내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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