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다. 스펙타클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익숙해져 그 자체로서만 스펙타클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된 것이라고 하여도 이미지는 가상의 영상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적 요소로도 드러낸다. 스펙타클의 발생범주는 단순히 이미지 영상매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나 사고방식에 크게 미친다. 스펙타클의 영향은 바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자신의 판단력에 의해 살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기만성으로 가득한 TV, 라디오, 영화, PC, 핸드폰 등의 매체로 영향을 받는다. 21세기에 도래하면서 정보과잉은 인간에게 주어진 정보 이상의 혼란을 준다. 미디어의 발달은 결국 그 미디어의 주인가 누구냐에 따라 변수가 결정된다. 미디어란 자본력이란 경제와 사회적 영향을 주는 정치적 입장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미디어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미디어를 통제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사회의 지배자란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돋보이기 위해 미디어의 영향을 따라 더 가속화시킨다.

 

가령 어느 영화에서 나온 상품이나 이미지를 보고 구매하거나 따라하며, 어느 특정 장소에 몰두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미디어의 환경에 따라 좌우된다. 스펙타클은 언제나 일정한 모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대체된다. 물론 그 근본적인 스펙타클적인 요소는 항상 동일한 규칙은 가지고 있으나, 인간에게 보이는 매체적인 콘텐츠는 늘 바뀐다. 즉 사라지는 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그것은 새로운 상품소비와 더불어 인간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다. 인간에게 지나친 미디어의 간섭은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고를 정지시킨다.

 

영상 안의 주어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비판적 요소를 끌어 올리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유리한 상황만 전개해놓고 거기에 반대되는 의견을 무시하려고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런 정보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들은 자신의 입장을 미디어에 의해 지배되면 될수록 자신의 발언을 포기한다. 포기라는 의미는 자신이 정말 추구해야할 가치이며, 그 가치 대신 미디어로 전파되는 스펙타클로서 완성된다. 그렇다면 이런 스펙타클에 저지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인간은 하루 24시간 중에서 대략 7


시간 내외를 수면으로 보낸다. 인간의 생물학적 능력과 사회적인 시간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인간이 수면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식사, 세면 등과 같은 생리적 행위를 빼면 15시간 이상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란 얼마인가? 학교에서 학생은 수업을 받고,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근무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여유시간 여가로 활용할 수 있는 문화적인 시간이 과연 얼마나 남을까? 거의 남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정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그가 집에 오면 여유시간은 4시간 내외다. 4시간 동안 인간들은 취미생활과 자기계발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영향, 스펙타클적인 관계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게다가 많은 인간들은 자신만의 시간, 그 누구의 간섭으로부터 배제되기 보단, TV와 PC로 통해 살아간다. 자신이 선택하는 콘텐츠보단 자신에게 주어진 콘텐츠만 소비한다. 이 시간은 휴식시간이라 여기겠지만, 그 시간조차 노동이다. 왜냐하면 TV에서 수많은 상품이 광고되며, 그 시청시간은 기업에 대해서는 이윤을 증대한다. 자신에게 이윤이 도달하지 않고, 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상품을 직접적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상품을 간접적으로 구매하는 셈이다.

 

그런 관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미디어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의해 생활양식이 완결되는 셈이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자신의 시간은 빠르면서도 지루하게 흘러간다. 시간이 남아도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체계가 이미 자신에 의해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의 거대한 틀에 빠져있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게 만드는 스펙타클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애초부터 스펙타클 자체를 해체할 수 있어도 그 자체를 소멸시킬 수가 없다. 인간에게 스펙타클의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위해서는 통신과 전화가 두절되는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간은 루소의 말대로 곰과 같이 자연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자신의 자연성을 회복하고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그 어떤 계기이고, 그것은 충격이다. 인간에게 충격을 주는 것으로 기존 생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근대 이전 탄생하여 근대시대에 무섭게 성장하여 현대에서 예술은 일상에서 자주 접하면서도 멀기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단어가 되었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 루소가 제기한 예술은 이미 부르주아 시대로 흘러가는 18세기 프랑스처럼 예술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토대로 탄생하는 물질적(영화와 음악이 저장되는 시기가 아니므로) 혹은 시청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루소가 생각하는 예술성에서 그는 피아노 하나에 혼자 또는 다수의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영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웅장한 오페라 곡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고급문화로서 지배계층의 우월성을 보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루소가 보던 시기에 연극조차 마찬가지다. 가령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배고픈 프랑스 파리의 비참한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 작품에서 불쌍한 시민들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질병으로 비참한 삶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작품을 보던 후대사람들은 작품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보고 감동하나, 문제는 그 감동은 극장 내부에서 끝나고 밖에 나오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된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예술을 보여주는 이유는 새로운 감정과 사고 그리고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대중이 아무리 그런 예술을 접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강연을 하시는 교수님은 문학적인 요소 즉 공감대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예술이 필요한가? 인간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고 비겁한 모습이 많다. 자신은 남에게 좋은 인간이고 싶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결국 그런 이중적 잣대가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뭉치면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 대신 전체의지가 탄생한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고, 자신들의 이익에 피해가 가면 그 누구든지 단결하여 과다한 응징과 처벌이 이루어진다. 양심의 가책보단 다수라는 제도적 이익에 치중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고정관념과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 시작은 자신의 계몽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계몽적 요소를 마주하기 어렵다. 대부분 대중들은 자신들의 현실에서 부당한 일에 휘말릴 경우가 적다. 그렇다면 결국 그런 상황이 만약 온다면? 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가 왜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가? 결국 우리는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에 의거하여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다. 철학의 시작은 형이상학에서 시작되었다. 물리학에서 물리적 존재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연구한 것이 철학에서 많은 검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보단 눈에 보이나 그 현상을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에게 시선을 돌린다.

 

윤리학은 철학에서 제1의 학문이 되었고, 윤리학으로 통해 인간에게 부여된 고통과 억압에 대해 탐구가 시작된다. 문학과 예술로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란 결국 인간의 감성과 공감능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와 이성적 판단이다. 인간의 논리보단 오히려 인간의 감정이 앞서는 것이라면 인간의 감정이 어떤 것이냐 따라 논리적 판단력조차 달라진다. 논리에서 윤리적 요소가 선행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진정한 논리가 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 흐름과 대세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 상황적 요소가 바르지 못할 경우가 상당하다. 예술이란 것은 바로 이런 흐름에서 새로운 물꼬를 틀게 하는 샘물과 같다.

 

예술을 알기 위해서는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다. 이미 그 시대의 흐름에 빠져 그 자체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란 매우 어렵다. 인문학에서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그 새로운 길을 찾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보아온 것들과 전혀 다른 세계를 주어지므로 낯설고 어려우며 때로는 혐오감까지 들 수 있다. 예술은 단순히 미술, 문학, 영화, 연극, 음악 등이 아니다. 예술은 그런 매개체로 통해 전달될 뿐이다. 그 어떤 경로로 오던지 그 매체로 통해 자신이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없다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대중들은 예술이 너무 낯설게 느낄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주지 않으면 관객들은 재미없거나 유용하지 못하게 느낀다. 영화에서 이미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자신의 시나리오에 일정부분 만족하지 않을 경우 배신감을 느낀다. 이게 대부분 관객이고, 외국에서 인정받는 예술작품들은 오히려 외면당한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라는 집단심리는 그 외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으로 제외시킨다. 대중에게 물론 효과적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비꼬거나 지적하는 콘텐츠는 존재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쉽게 접근해도 무리수가 있다는 점이다.

 

어떤 매체를 감상함에 있어서 전후맥락 관계 등을 파악하여 현실적으로 무슨 문제를 지적하는지 알려면 그 방법자체가 막막하다. 이미 길들어진 현상에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대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예술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단지 예술 대신 대중문화라는 소비로 통해 자신들만의 세계적 틀을 구축한다. 인간의 틀을 깨어도 다른 틀이 존재하고, 다시 그 틀을 해체되어도 또 다른 틀에 봉착된다. 그러나 틀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느 특정 부문에 몰입하기보단 우리 인간이 사회적 관계로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다. 사회성의 포기는 말 그대로 숲에서 곰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을 찾아야한다. 대중에 대한 인문학에서 인문학 그 자체가 대중의 옆으로 갈 수 있어도 대중의 시선으로 하락할 수 없다. 대중의 관점 그 자체가 사유의 해답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모순이 되풀이되는 현상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소외되는 세상을 방치할 수만은 없다. 예술은 인간에게 기존 세상과 다른 것을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예술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는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로 통해 왜 인간은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는가? 같은 말이다.

 

인간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즐기는 이유는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다. 즐거움을 찾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고, 인간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그 존재적 대상으로 한정적으로 살아간다. 윤회를 하던 혹은 저승에 또 다른 삶이 있든 또는 동물적인 죽음으로 이 세상에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그 자체로 살아가는 기회가 1번뿐이다. 단 하나의 인생을 고통과 절망에 의해 살아간다면, 혹은 그런 세상에 놓여있어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건 매우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예술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만 충족이 아니라 타인의 삶 역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정이란 마음이 있다. 감정이 없는 인간들은 차가운 냉소와 이기심으로 팽배하여 있다. 물론 나 역시 다소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과 회의적인 관점이 다분하다. 즉 나는 내 인생관이 절대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인 것을 넘어 부정적 시야가 강하다. 예술은 물론 행복만이 아니라 때로는 아픔과 고통도 줄 수 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정신적 고뇌와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느끼는 것조차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정말 마지막 인생 끝 지점에 내 인생에 대한 후회는 있는가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여 미신과 광신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고, 판단이다. 자신의 인생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타인과는 어떤 이미지의 매개로서 만나기보단 자신들의 의지와 사유로서 만나 서로 소통을 한다면 외로움의 고립감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독이란 인간에게 무서운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주지 않은 것이란 눈앞에 태양의 빛이 있어도 보이는 것은 어둠의 절망이다. 왜 예술인가?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 누구의 강요나 눈치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물론 타인의 인식과 배려는 소중하다. 이미지로 꾸며진 관계란 지속될 수 없다. 늘 새로운 스펙타클이 기존의 스펙타클을 밀어내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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