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이미지 존재론
이미지라는 것은 현대사회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대해 묻는다면 난감할지 모른다. 존재적인 구성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게 이미지가 아니라 관념적인 영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상이 존재해도 그것은 만지거나 느끼거나 할 수 없다. 가상의 투영체가 현실의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왔다. 흔히 2D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 즉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지로 존재하는 캐릭터는 현실부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한편으로 파생실재(hyper real)의 존재들은 설사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해도 우리에게 과연 그들은 단 한 번이라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 TV 드라마를 그나마 보던 때 최고의 인기배우가 최진실이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그의 아이들은 각종 악플과 루머로 시달린다. 그러나 최진실은 육체적으로 소멸해도 영상에서는 존재한다. 그녀는 정말로 죽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반드시 그녀만이 아니라 많은 연예인조차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도 영상에 남겨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광이라면 반드시 찾는 히로인이라면 오드리 햅번이나 마릴린 먼로 같은 배우일 것이다. 그녀들은 이미 육체적 존재는 현실은 없다. 하지만 영화광들은 그녀들의 사진을 모우고, 때로는 다른 여배우들이 그녀를 흉내 내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 영상은 인간의 죽음조차 죽음이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불러낸다.
이미지 존재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강사 분이 갑자기 <공각기동대>를 이야기할 때 그런 존재론적인 부분이 대략 이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실재로 있다고 여긴 게 과연 진짜였는가? 공각기동대 극장판 <Ghost in the shell>에서 인형사란 존재가 등장하여 의체를 가진 인간의 기억을 해킹한다. 어느 남자가 사진을 보며 자신의 가족이라고 동료에게 소개하나, 막상 그 사진은 강아지가 찍혀있다. 그가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기억이란 과연 사실인가? 허구인가? 가상의 존재에 대해 성행위도 마찬가지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후속 극장판 <이노센스>의 경우 어린 소녀를 납치하여 그 소녀의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를 기본 자료로 삼아 섹스로이드의 운영체계로 만든다.
인간이 아닌 기계인간을 인간과 성행위를 한다는 설정과 더불어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영상으로 가능하기 시작했다. 이미지라는 가상의 영역이 인간에게 미치는 여파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반드시 이미지는 위와 같이 배우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나 공상과학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일상 그 자체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광고를 넘어가면 그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2. 섬뜩한 자본주의의 미학
현대인들에게 신용카드를 가지지 않을 자는 얼마나 있을까? 나도 보통 마트나 술집에 결재할 때 신용카드보단 현금결제를 하려고 한다.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나 사고, 술집에 가서 소주 몇 병 혹은 막걸리 몇 통 정도 마시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보단 현금을 우선하려는 이유는 카드의 이용은 물리적으로 자신의 지갑에 꽂힌 화폐의 수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통장에 있는 잔액을 소비한다. 현대인들은 화폐를 지폐나 동전으로 들고 다니겠지만, 나머지 재산을 봉건시대처럼 집에 금화나 보석으로 나두지 않는다. 유럽 봉건사회에도 은행은 있었지만, 은행 내에 화폐 역시 금화와 보석이다. 강도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그대로 사라질 존재다. 현대의 화폐는 지폐보단 은행에 기록된 사이버머니다.
공인인증서를 로그인하여 은행계좌에 보이는 금액이 나의 현재 재산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의 숫자로 보일 뿐, 자신의 손 안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다. 신용카드의 신기루란 바로 그런 식으로 작용하기에 내가 당장 어느 정도 결재해도 많이 쓴 것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게 해준다. 하지만 1달에 1번씩 우편으로 날아오는 대금청구서는 자신의 소비생활의 비극성을 알려준다. 신용카드의 경제적 패턴이 우리 일상을 깊이 침투할수록 우리는 자본주의의 미학에 빠지게 된다. 원하는 데로 물건을 구입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자유는 오로지 그 개인의 자유이며 권리다. 그러나 뒤에 다가올 경제적 책임은 자유롭지 못한 결박이 된다. 신용카드 광고에서 모든 것이 그 카드 하나로 되는 순간, 우리는 카드로 인해 모든 것이 매개되고, 자신의 생활에 불편함까지 느끼게 된다.
예전에 내가 사람들을 내 차를 태우고 대구 팔공산에 간 적이 있었다. 팔공산에 위치한 파이데이아 인문연구소 북 카페를 가기 위해서였다. 가는 도중 같은 도서모임 한 분이 내 차를 보며 놀라듯이 말했다. “어라 중형차인데, 수동이네요. 게다가 하이패스와 네비도 모루 분리되었고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된 상태도 있었지만, 일부로 차량을 수동을 구매했다. 기름연료도 아끼고 구매비도 저렴하나, 더 중요한 건 운전은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지 차의 편리성에 기대기가 싫었다. 하이패스를 지날 때 단말기를 이리저리 옮기고, 일일이 하나하나 정리하는 내가 재밌게 보일지 모르나, 나는 “자동에 의존하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안 되면 엄청 불편해요.”라고 했다.
신용카드의 광고로 돌아가면 신용카드 하나가 모든 것을 통용하게 해준다. 버스지하철, 식당과 핸드폰요금 결재, 심지어 불우이웃돕기가 카드로 세금도 카드결재가 가능하다. 분리된 기능이 하나로 모이면 모일수록 편리함은 증가하나, 만약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더욱 놀란 것은 모바일 기능이었다. 모바일기능
이 작동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마트폰 단말기를 분식하고 교체하는 순간 엄청난 수고가 들인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해킹이 만연하고, 스마트폰에 금융기능은 더더욱 금융범죄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에게 편리한 도구는 인간 그 자체에게 더 불편한 족쇄를 걸게 해주는 함정이 되었다. 문명의 이기와 편리함에 빠진 인간, 결국 그런 일들은 인간 스스로 의존적이고, 시스템에 의해 사육되어가는 수동적 존재로 전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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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도구에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루소가 이 책을 저술할 때가 1750년 중반 정도다. 250년 훨씬 지난 지금의 문명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광고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40대 남성, 실제 그가 찾아야 할 사람은 늦은 나이라도 같이 삶의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미래를 같이 열어갈 사랑을 찾아야 하는 게 바르다. 광고 속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다를 수 있으나, 광고에서는 신용카드의 기능이 모든 일상을 차지했다. 인간의 곁에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대체된 것이다. 어째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자본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의 만능을 보여주는 광고는 자본주의의 미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30초 광고는 식당에서 식사할 때 잠시 본 기억은 난다. 3분은 아니다. 3분에 나온 광고는 신용카드의 아름다움보단 차라리 소름이 돋는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였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다가가는 것처럼 말이다.
3.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어?
위 제목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책 제목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에게 다양한 문명혜택이 돌아가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불만투성이다. 실재 이 책에서는 미국의 1960~1980년대 이야기를 해준다.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늘어나는데, 왜 불량품이 많은지, 소비자가 불량품을 구매하여 항의해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은지 말이다. 이미 우리 사회도 그런 형태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의 중심으로 가는 점에서 소비사회에 소비자는 권리를 누리는 경제적 주권자가 아니라 단순히 기업의 이윤을 위해 소외되는 존재로 전략했다. 문제는 소비하는 주체들은 거의 대부분 많은 국민이나, 그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하기보단 그저 그 개인의 영역으로 돌린다. 개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관계에서 자유적인 조건이 이런 식으로 전도된 게 아닌가 싶다.
신자유주의 국가 중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도 되겠지만, 우선 미국이다. 자본주의 영역은 자유주의와 함께 겹치어 갔지만, 자유의 조건은 철학에선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가깝다면, 현실의 자본의 차이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을 따라가는 것처럼 말하나, 고전경제학의 애덤 스미스나 최후의 보루인 존 스튜어트 밀까지 넘어가면서, 밀의 <자유론>을 보면 인간의 자유란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성의 절대적 판단으로 그 사람의 판단과 논리가 중요하며, 타인에 대하여 이타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아마 이런 논리라면 현대에선 보인 신자유주의라는 게 자유주의철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드러난다.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지 않고, 자본의 자유로서 움직이나, 자본의 자유에서 자본 그 자체는 자율성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자본은 자본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점이다.
돈을 은행에 넣고 가만히 넣고 있다면 예전에는 이윤이 제법 되었지만, 금리의 조정으로 통장의 이자가 낮아지면서 어느 누군가는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 돈을 제대로 굴리지 못한다고 여긴다. 결론은 누군가 계속 돈을 굴리는 일이 생기면, 반대로 누군가는 굴리지 못할 것이고, 돈을 굴리지 못한 사람 중에는 그나마 생계수단을 유지할 수 있는 부류도 있는 반면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처음에 나온 자들은 빈민의 여성이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활보할 때 국가세금을 낭비하는 자들을 매도하고, 그들 대부분이 흑인여성이라고 미디어에서 떠들던 시기를 예를 들었다.
전에 TV를 보면서 미국의 어느 백인관료가 흑인 슬램 가를 돌면 젊은 흑인남성에게 군에 입대할 것을 제안한다. 미국은 거대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이며, 군대를 운영하려면 첨단화된 시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군인이 필요하다. 군인을 선발하려면 장군과 장교 같은 지휘관과 고급인력이 필요하나 아래로 부사관과 사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력으로 본다면 장교와 부사관보단 사병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 병사를 충원하기 위해 가난한 흑인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흑인여성 특히 아이를 양육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각종 감시와 언론의 매도성은 그들은 계속 그 사회에서 고립 내지 또는 소모되어야 할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위직과 재벌가문의 후예들은 군에 가지 않거나 면제받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군에 가는 것은 평범한 집의 남성이다. 그런데도 그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군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부분보다 오히려 남녀 간의 불평등으로 전도시킨다. 특히 미디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또는 문제가 터지면 그 일들을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물꼬를 돌린다. 최후에는 이상하게도 그런 문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반드시 그런 일은 군대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아니라면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일도 많다. 처음 주제인 이미지, 이미지는 TV의 화려한 광고와 드라마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문잡지, 인터넷, 스마트폰, 심지어 길가에 네온간판과 전단지도 포함이다.
우리의 관심사를 우리의 생활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접해도 아무 관계없는 것들로 대체된다. 가끔 연예인 기사가 뜨면, 주변에 사람들이 화제로 삼아 입을 올린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게 나보고 뭐 어쩌라고?”, 여자연예인들이라면 “내하고 만날 거야? 데이트할 거야? 평생 나하고 손잡을 일도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언론에 접하는 비극적 소식에 대해 논하면 사람들은 “뭐 좋은 일이라고, 나와 관계없자나.”라고 한다. 아무 관계없는 일에 열을 올리는 반면, 타인의 불행한 사고에는 자신의 무관계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지만, 이제는 언론과 미디어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고가 시보다 더 철학적인 세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중들은 전체화와 개별화란 이중적인 잣대로서 서로의 영역을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어떤 A란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B라는 사람에게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 보는 나는 C라는 사람이다. 결국 B가 당하는 상황에서 D라는 인물이 무관심하게 보고, 만약 내가 A의 비극을 논하고 B의 상태를 이야기하더라도 D는 요지부동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좋지 않은 일 대신 어떤 이익에 대한 일이라면 어떨까?
4. 비판과 비판에 대한 비판, 대안은 무엇으로?
어떤 부당한 압제에 대해서도 그 압제자와 주변 무리들은 자신들의 테제가 있다. 되도 않은 논리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잘 포장한다. 그렇다면 이에 반대하는 안티테제가 있다. 안티테제들은 그들의 주장과 의도하는 바를 폭로하고 저항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관계에 있던 자들이 서로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있고, 압제자이든 아니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태클을 거는 일도 있다. 반대를 위한 게 과연 무엇을 위한 반대인가?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인가? 목적보단 집단적인 행동인가? 과거 독재자와 압제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분명 안티테제의 효과는 정당성이 있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안티테제만으로 가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무조건 하기와 안 하기의 경계선에서 나오는 것은 힘겨루기고 힘겨루기가 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 하나를 밟는 일이었다. 주로 우리나라에선 80년대까지라 보면 될 것이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한 정치적 수단은 무력에 의한 통치다. 그러나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지식과 행정에 의한 통치로 전환되었다. 특히 지식이 무지식의 대중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식은 국가권력과 시장자본과 결탁하기 시작했고, 언론과 미디어에서 지원했다. 지식의 세분화, 관료행정의 책임보단 하위행정에 책임전가로 이어졌다. 지식과 권력은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고, 지식에 대한 폭로 역시 지식에 의해서였다.
지식이 인간을 속이는 도구로 되고, 속임수를 파헤치는 도구로 되었다. 강연자분이 말한 것과 뒤풀이에서 나온 4대강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4대강은 대통령만이 아니라 정치 관료와 국가행정기관의 합작품이다. 국토부와 환경부를 주도한 작품이다. 마치 거대하게 포장한 이 사업을 만약 우연히 하천 인근을 지나면 허구임을 알게 해준다. 문제는 당시 설계과정 시에 제대로 된 현장조사를 하지 않았고, 지도 위에 선을 긋는 수준이라고 한 점에서 현장과 설계의 관계가 전혀 맞아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국토부가 사업자와 승인권자로 되었다면 협의권자는 환경부다.
환경영향평가 협의 시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게 위에 드러나지 않은 점은 사업자와 협의부서, 그밖에 환경관련 학회조차 문제를 제대로 의문시하지 않은 것이다. 행정기관 말단은 이 일을 실제로 담당하나, 이 일에 대한 권한은 없다. 협의과정은 담당자로부터 하나, 사업에 대한 진행은 상부에서 결정한다. 관료주의적 행정은 그 문제의 해결권을 가진 자와 그 일을 수행하는 자가 분리되어 문제가 된 것이다. 말단관료는 관련규정에 따르고 결재권이 없어서 책임회피가 되고, 상부기관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지 않기에 담당자에게 문제를 제기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핑퐁게임 같은 피해보는 사람만 방황하여 결국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비단 이런 문제는 4대강만이 아닐 것이다. 그마나 4대강은 하천이 공공의 재산이고, 개인이 소유할 수 없고, 개발조차 어렵다. 하천구역은 친수구역으로 설정하여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유도하지 않은 이상 하천은 복원 및 보전구역으로 설정된다. 개발은 주로 이루어진 곳은 도시지역과 도시인근지역이다. 도시내부와 도시인근은 결국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다. 도시의 개발이 머리 아픈 것은 개인의 이익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도시의 개발은 주거환경개선, 교통소통, 공원부지로 통한 자연환경 향유라는 슬로건이 따라 붙는다. 문제는 도시의 땅은 국유지와 공유지보단 사유지에 기반 한다. 특히 부동산의 이익은 나의 영역이 아닌 옆에 있어도 영향이 온다.
대규모아파트 주거단지가 오면 모두 환영하고, 만약 혐오시설이 오면 반대를 한다. 강연에서 말한 푸코의 저항을 실현하려면 먼저 그 시설이 오는 기능적 요소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도시에서 아파트단지가 오고, 특히 재개발이 오면 땅값이 몇 배로 오른다. 집값이 오른 사람은 좋겠지만, 나중에 자기가 받은 돈으로 다른 곳에 갈 수 없으면 문제가 된다. 대규모공사는 부동산증가라는 이익과 더불어 공사 시 분진, 소음, 진동, 토사유출이 문제가 되고, 완공 후에는 교통체증, 교통소음, 일조권장해, 빛 반사 등이 문제가 된다.
환경적으로 본다면 개발은 이중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개발은 필요하나 막상 그 지역의 주민들의 입장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나 주변 이권단체와 관련단체가 사업자와 국가세력을 지지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부산에 당초 공원지역이나 공공시설이 유치되기로 한 지역에 대규모 상업시설이나 공업시설로 용도 변경된 경우가 있다. 그 일을 추진하는 자들은 자본가들이고, 그 자본가들은 정치행정과 결탁한다. 문제는 주민이 피해를 보는데도, 그 주민들은 자본가들에 대해 반발하면서 그 자본가와 결탁하고 있는 정치행정들에게 비판 없는 지지를 보여주는 일들이 있다.
강의내용에서 계몽이 새로운 억압과 차별을 만들지만, 계몽적인 요소가 배제된 경우 도시의 난잡한 개발이 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도시의 기능은 주거만이 아니라 인간생활 그 자체를 영위하는 곳이다. 도시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고,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 어느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개발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파괴된다. 도시는 토지라는 개념이 사유지로 되어 있으나 토지 아래의 지하수와 암반, 토지 위의 대기층은 사유화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일정장소의 파괴는 그 장소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이어진다.
물론 도시개발이 중요한 사업이 되어 어느 지역에 큰 발전이 될 수 있겠지만, 때로는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지역의 특성과 지역주민의 입장보단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이 많다. 그래서 대안이 필요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열쇠는 개발사업자와 관료집단보단 지역주민에 의해서 유도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주민에게 그런 지식적 배경이 없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이다. 그런다고 반대만 외쳐도 해결이 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하는 것과 어느 것이든 반대하는 것은 한계성이 다다른다. 대안의 영역은 삶에서 다른 방식을 구현하기를 바란다. 도시에 대한 예술적 기능이란 바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을 만들게 해준다.
삶의 예술성에서 과거 농촌에서 농번기에 서로 농가를 부르는 농민들은 그게 삶의 형태다. 그러나 지금은 무형문화재 내지 민속 문화로 본다. 과거 어부들이 용왕제를 지낸 것이 근대에 이르러 미신에서 다시 그 마을의 축제 내지 그 사회의 문화행사로 전환된다. 농촌과 어촌의 행사도 사실 도시화라는 이름아래 묻혀간 전통들이다. 부산은 기본적으로 농업보단 어업이 활성화되어 있고, 어항이 있는 마을에선 용왕제 외에도 다양한 민간문화가 남아있다. 그런데 만약 주변이 개발되어 어항조차 존폐위기라면 그 문화의 유지에도 치명적인 위기로 될 것이다.
공간의 파괴는 정신적 파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에 어느 지역의 도시개발사업에서 당산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나무는 그 마을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로 민간신앙에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아마 몇 십 년 전이라면 그 나무를 베어 다양한 목공용품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환경영향조사로 나무 존치상태를 점검하여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환경영향평가 제도로 통한 지역주민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물론 반영되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마을은 원래 울산에 위치했지만, 변두리에 위치했으며, 아파트보단 주택이 많았고, 상업시설도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였고, 어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들이 즐비했다.
도시의 발전으로 대규모 주거단지로 많은 인구가 생기고, 이에 대한 인프라로 대형마트로 설립되고, 도로가 넓어진다. 이런 발전은 부동산의 증가로 되고, 세를 들어가는 영세민 입장에서는 그 지역에서 장사를 포기하게 만든다. 만약 그 지역주민에게 적정한 대안이나 혹은 그들이 안심하고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부분 현실에서 그런 상황을 외면했다. 실제 서울수도권에서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신축된 대규모 상업시설로 들어갔으나, 그곳의 임대료가 너무 비싼 나머지 결국 나오게 되었고, 그 건물은 추후에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에 매각되었다.
영세한 지역 상인들에게 고객은 필요하나, 그 고객들이 너무 대규모로 조성된 곳으로 이동하면, 결국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없다는 점이다. 강의를 들으며 전에 읽은 최병두 교수(대구대학교 지리학과)의 <환경갈등과 불평등>이 생각났다. 위천공단 조성에서 당초 경상북도가 지역자치단체에서 대구로 이전되고, 대구시는 위천공단에 대한 문제로 중앙정부와 지역주민과 갈등을 빚어왔다. 대구지역 일자리와 산업시설용지 부족은 산업단지 조성이란 정책적인 방법이 있지만, 그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대규모 단지가 조성되면 사실상 대구주민보단 입주업체에 해당되는 직종과 직렬이 들어온다. 대구지역 주민들이 기계공학 전공자나 자동차학과 전공자가 아니라면 만약 자동차공장이 와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대규모 부지조성 시 곤란한 점은 자본이 중앙정부로부터 나오면 부지공사 시 지방업체가 주도되는 게 아니라 대규모 건설사가 주도되며, 지방업체는 소외된다. 또한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이 입주하면 많은 수익이 지역주민에게 가는 것보단 수도권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부산항의 무역의 이익에서 발생하는 세금이 지방자치단체보다 오히려 중앙정부로 가듯이 기업의 이윤과 국가의 세금이 중앙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단지 오는 것으로 환영하고, 집값이 오른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삶의 질을 저하시킬 우려를 그들 스스로가 만드는 것과 같다.
도시의 기능은 뭐든지 환경과 연결된다. 공간의 배치성에는 수질, 대기, 토양, 소음진동 등과 같은 환경적 영역과 충돌한다. 공원녹지 역시 자연환경과의 배치에서 인간생활환경과 밀접한 연계가 되어 있다. 강의 도중 해운대 동해남부선 선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선로 공간부지가 광대하고, 주변지역 철도로 인해 훼손되지 않았으며, 선로구간에서 보이는 경관은 아주 탁월하다. 그런 공간을 공공재산, 즉 시민의 휴식과 여유 공간이 아닌 기업이 호시탐탐 노린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가 해운대 달맞이고개다. 1990년대 정도만 해도 그렇게 많은 가게가 입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맞이고개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가게가 입주하면 산을 깎고 길을 내어야 하고, 그러면 녹지의 축이 좁아진다. 달맞이고개 도로 밑에 작은 공연장을 만들었는데, 자연석이 아닌 콘크리트 내지 화강암 재질은 녹지의 축을 파괴한다.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던 과거의 해운대 앞바다는 자연적인 모습이 농후했으나, 현재는 점점 갈수록 부산시내의 커피숍과 고급상점이 많은 곳처럼 변했다. 게다가 주변에 아파트나 대규모 주거단지의 조성은 더욱 환경적 부담을 키운다. 모두가 보기 위해서 그곳을 보전하는 것이 바르나, 다들 개인적 소유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자연은 파괴되고, 아름다운 환경은 점차 그 모습을 잃어간다. 공유지의 기능이 사유지화 될수록 환경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자들이고, 그에 반해 빈곤층은 나쁜 공기에 노출되고 불량한 주거환경에 의해 심신이 불편해진다. 도시에서 환경정의는 바로 이런 문제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삶의 예술이란 말은 각 개인의 삶에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민간에서 전해온 예술은 특별히 예술적인 목적이나 예술인이 모인 게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예술로서 만들어 온 것이다. 단순히 무조건 변화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변화라는 그 자체가 무리한 시도가 아닌 하나의 흐름에 따라 온 것이다. 대안의 선택에서 무조건 시도하려는 것과 반대하는 것에서 대안의 자세에서 다른 길을 보여주거나 혹은 잠시 중단하여 후에 의론을 나누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런 안건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예술인들이 하는 예술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나 혐오시설 신축예정지에 환경오염 피해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퍼포먼스로 하는 것 역시 예술이다.
그 예술은 특정한 세계관이 아니라 우리 삶이란 일상에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경고주의보다. 언론과 미디어는 국민의 눈과 귀를 길들여 미디어에 경제적, 정치적 권력자에게 봉사한다.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알아가는 것이다. 강의 자료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것처럼 제작은 그 지역의 자본을 투자하여 이익을 회수하려 하는 이고, 노동은 그곳에 투입되는 노동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어느 곳을 갈취하고, 갈취당하는 곳에서는 노동으로 착취당한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행위라고 한다면 그 행위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고 해체하여야 한다. 그 행위는 일회용이 아니라 연속되는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료 뒷부분에 르페브르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야기가 나온다. 엉뚱하고 도발적인 행위를 하던 그들은 끊임없이 도시 안의 자본주의에 대해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들부터 이상하게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행위에 대한 목적성을 전달한다. 그들을 접하는 대중들은 그들의 도발에 처음 그들에게 분노하겠지만, 상황주의자들은 그것이 목적이기도 하다.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틀에 갇혀 언제나 당연한 것만 받아들이려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 그 인식을 바꾸는 충격이 필요하다. 예술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의 생활에서 삶의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수단으로 자본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지만, 자본 그 자체에 종속당할 수만은 없다. 만약 종속당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권력자들에게 평생 소비만 하거나 노동만 하거나 또는 감시만 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