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영화를 보는 순간 내 머리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독립군과 광복군, 그들은 조선의 독립 혹은 대한이 독립을 위해 몸을 투신했다. 가족들이 있어도 홀로 외국에서 싸우고, 하다못해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 더욱 비참한 것은 독립운동가란 이유로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암살>에서도 그런 모티브가 작용한다. 항일전쟁에서 가장 역사적으로 기억이 남는 것은 청산리대첩과 봉오리대첩이다. 대한독립군에서 가장 위대한 지휘관으로 백야 김좌진과 홍범도 장군이 있다. 이들은 일본군을 대패한 이유로 일본군에게 원한을 샀다.

 

일본군은 조선인 정착촌을 덮쳐 남녀노소 불구하고 모조리 살해했다. <암살> 영화에서 2990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일본군의 총칼아래 꽃처럼 흩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 독립운동역사를 보면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대종교 신도였다. 단군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의 얼을 살리고 자주 국가를 위해 노력한 분이다. 하다못해 우리의 한글이 주시경 선생의 도움이 매우 크다. 그분 역시 대종교 신도다. 조선어학회 사건이나 많은 조선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을 탄압받을 때 그 분 대부분이 대종교 신도였다. 김좌진 장군과 그의 군대 역시 그러하다. 그들이 단군신앙을 토대로 한국의 얼과 글과 문화를 지키려 한 것은 단지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인간이란 정체성에 의해 살아가고 정체성에 의해 죽어간다. 자신이 대한민국의 독립군이란 사실에 부끄러움 하나 없이 빛처럼 산화된 그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역사의 후대에서 그들의 노력은 알아주지 못한 채 오히려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작년 광복절에 나는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념하던 전시관에 갔다. 작은 건물에 얼마 되지 않은 평수였지만, 백산 안희제는 대한민국 독립군의 자금의 젖줄이었고, 대종교의 주요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대종교 신도의 죽음은 순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순국이기도 했다. 순교와 순국이 곁 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임오교변(1942)으로 고문으로 서거한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최고의 부자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부자라면 이병철과 안희제였다. 그러나 안희제 선생은 돌아가시고 그분의 후손은 가난을 대물림을 받아 살았다. 영화 <암살>을 보면서 나는 안희제 선생이 갑자기 떠올랐다. 먼 이국에서 독립운동만 하다 돌아가신 분들, 어처구니없게도 많은 독립군들이 해방 후 돌아오니 일제 앞잡이 하던 자들이 그들의 마을에 있었다. 그들은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에게 왜 왔냐는 식으로 말하였고, 경찰과 군인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암살> 영화 마지막을 보면 그런 현실이 드러난다. 반민특위, 반민족을 하던 일제앞잡이를 재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정치적 입지가 떨어지고, 미군정과 신탁통치의 광기,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을 등에 업고 있는 북한군의 도발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1950625일로 보고 있지만, 1949년에 북한의 도발로 몇몇 전투가 있었고, 전투로 인한 순국자가 발생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나라 잃은 설움과 동시에 민족을 죽어야 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암살> 영화는 그 이전에 나라 잃은 설움을 보여준 영화다. 영화를 보면 2가지 서사가 작용한다. 전에 이순신장군을 다룬 영화 <명량>은 명량해전처럼 이순신의 죽음으로 그의 신화화된 요소를 부각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은 신이 되었다. 사당을 지어 매해 그의 위패에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한국은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는 민간신앙이 있다. 하지만 <명량>은 애국서사만 존재했지, 애족서사는 없었다.

 

조선은 결국 명나라와 더불어 왜군을 무찌르고, 조선왕조는 전쟁 이후 300년이나 견뎌내었다. <연평해전> 역시 애국서사만 존재했지 애족서사는 없었다. 전쟁 속에 죽어갔어도 결론은 승리의 역사였고, 그것은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뒤받쳐주는 헤게모니적 요소가 숨어있다. <암살> 영화는 그런 헤게모니적 요소가 해체된 작품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 앞잡이가 반민특위에서 무죄를 받고 귀가 중에 암살을 당한다. 하지만 그만 암살당했지 그 주변의 관료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반민족적인 인물을 국가 법률에 따른 재판에 의해 응징을 당한 게 아니라 개인적인 암살로 통해 응징을 당했다.

 

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범죄적 수단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 명령을 내린 자는 김구 선생으로 나온다. 김구 선생은 영화 마지막에서 반민특위가 열린 1949년 장교 안두희에 의해 살해당한다. 안두희 역시 권력자의 손길에 의해 승승장구하다 박기서라는 사람에게 살해당한다. 김구 선생은 총에 의해 서거당하나, 안두희는 몽둥이에 의해 암살당한다. 역사에서 그 당시 패배한 자는 자신의 이상을 펼치지 못한 채 이슬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에서 희비가 엇갈려도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늘이 주어지는 당연한 처사이므로, 후세에 부끄러움 한 점 남기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이 선비의 정신이고 지식인의 의무였다.

 

하지만 현실적 배경에선 그게 어려울 경우가 많다. 영화 <암살>에선 조선에 주둔하는 장군과 그 옆에서 아첨하는 친일파 거부를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암살을 주도하는 주인공과 살해대상자 및 주변 인물들은 가상이라 할 수 있지만, 막상 그 요소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다. 영화는 심각한 내용이나 감독이 전형적으로 영화에 대한 볼거리를 주로 제공하다보니 전개는 경쾌하고 순간적으로 흘러갔다. 특히나 플롯의 전개에서 사전에 복선을 집어넣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뒤 상황을 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해 놓았다. 그런 점에서 대중적인 영화에선 좋은 평가겠지만, 영화라는 예술적 접근에선 미묘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강인국 사장의 딸인 미치코가 죽는 장면은 너무 무리수가 강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장면만 부드럽게 진행되었다면 조금 더 높은 완성도를 보였을 것이라 여겼다. 아마 감독은 영화를 너무 어렵게 여기게 만들기보단 액션 장면을 잘 조합하여 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심어 넣으려 했던 것 같았다(권총으로 사격하여 원 샷 원 킬로 죽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래도 복선에서 주어지는 미세한 조건과 상황설정은 도망자와 추격자의 상태를 잘 보여준 것 같았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독립군에 대한 내용이므로 과거에 장동건이 주연한 <아나키스트>와 비교하면, <아나키스트>는 매우 딱딱한 영화다.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배우 장동건이 맡은 세르게이는 절망으로 인해 마약에 빠지고 아나키스트 활동 중에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 당시 동료들도 모두 죽는다. 독립군의 분파와 계파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영화 <암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시작된 조직이라면, <아나키스트> 영화의 경우 단재 신채호와 이회영 같은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이 해외에서 활동할 때 그들의 사상에 심취된 자들의 이야기다. 테러에 의한 살해와 공작행위, 그들도 자신의 한 일에서 조국이 해방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는 자신의 현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과 우울증은 충동으로 얼룩져 술, 마약, 섹스로 가득하다.

 

대한민국 독립운동 하던 분들의 특징을 보면 그들은 남루한 옷을 입지 않았다.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고 하얀 와이셔츠에 수염까지 아주 댄디하게 길러 다녔다. 그들은 항상 옷차림에 신경 쓰고 멋지게 꾸몄다. 그 이유는 언제 죽을 줄 모르므로, 그들의 양복은 곧 그들의 전투복과 장례식복이었다. 희대의 멋쟁이로 보여 마치 거리를 활보하는 신사로 보여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청춘과 목숨을 민족에게 바치고 사라졌다. 나라를 잃은 민족, 그들은 나라는 없지만 민족은 있었다. 국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이다. 국민이 없다면 국가란 없다. 국가가 생기기 전에 그 지역에 살아간 인간들은 인민(peoples)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가가 설립되면 인민은 국민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살지 못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정신을 만든 그들은 이름도 밝히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을 위해 죽어간 동료들은 자신들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옆에 같이 있던 자신들을 말이다. 역사에서 그들의 이름은 사라져도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한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오늘 내가 여기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그것만을 기억해달라고 한다.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잊어지는 것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미래, 자신이 있었다는 것조차 사라지는 망각, 그들은 그것이 두려워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죽지만, 그 인간이 살아있던 사회는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고 망각하는 세상이란 그들에겐 오히려 철저하게 싸우던 그 때보다 더 서러운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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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baal 2015-08-20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종교라는 부분에 관심이 가는데요.

만화애니비평 2015-08-21 08:49   좋아요 0 | URL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시일야방성대곡 위암 장지연, 천연두 지석영 선생도 여기 대종교 인물이죠. 종교적 형태를 현대사회에 갖춘 것 같기도 하나, 조선말기와 광복시기까지는 완벽한 독립군 단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