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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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에서 지배이데올로기에 관한 도서는 줄기차게 발간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류기록에서 아마 최초로 마녀사냥으로 죽었다고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대화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렸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아테네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더불어 스파르타라는 국가정체를 도입하기를 바란 내용이 나온다. 플라톤의 저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분량이 많은 <국가(政體)>이다.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이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끝이 볼테르고, 루소는 그 끝에서 새롭게 시작한 사상가다. 왜냐하면 볼테르가 프랑스대혁명에서 위대한 정신적 지주라고 해도 그는 결국 다른 누군가보단 우월한 지위와 부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국내 루소 저서 전문번역가이면서 전문가인 김중현 교수가 말한 것처럼 루소 역시 가난하고 지위한 낮은 힘이 없었던 자였기 때문이다. 힘이 없었던 사상가인 루소는 그토록 많은 적과 싸우며 마지막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그의 몽상이란 단순히 자폐적인 망상이 아니라 자아성찰과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루소의 마지막 명저 <고독한 몽상가의 산책>은 글이 매우 안정적이며 부드러운 반면, 이번에 다시 또 읽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은 매우 글이 날카롭고 열정적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10번째 산책 글을 미완으로 남긴 채 서거한 루소이기 때문에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한 경지에 올랐다.

 

생각해보면 인류의 성인에서 소크라테스보다는 나는 차라리 루소를 선택하고 싶다.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자신 안의 신과의 대화로 통해 진실과 정의를 추구했다면, 루소는 소크라테스를 넘어 신뿐만 아니라 자연이란 공간까지 동원했다. 소크라테스는 인류애적인 요소가 같은 아테네인 내지 더 나아가 헬라스(그리스)지역 사람 정도일 것이다. 노예와 어린아이, 여성, 그리고 이방인에게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였다. 루소는 오히려 노예제를 경멸했고, 여성과 남성의 자연적 불평등을 인정해도 그는 결코 여성 그 자체를 내려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인종차별(<新엘로이즈> 참조)을 미워했고, 심지어 동물까지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서구사회에서 근대철학은 르네 데카르트부터 시작했다. 이성의 의해 과학적 법칙을 세웠지만, 인간을 구분하는 것도 모자라 인간 이외에 존재하는 것은 도구로 보았다. 심지어 동물은 인간처럼 이성능력이 없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생각했다. 기계론적인 철학관은 동물들을 무참하게 죽였고, 자연을 짓밟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성을 살리는 것에서 자연을 짓밟는 행위를 바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인간의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이기심과 병폐만 안겨주고, 가난한 자들이 일하면 할수록 더 비참한 삶을 영위하여 마침내 차형을 당해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최후로 이어진다.

 

루소에게 불평등이란 자연적 신체적인 요소와 도덕적 정체적 불평등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도덕이란 가치를 윤리하고 같은 조건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윤리와 도덕은 명백히 다르고 도덕이란 단순히 옳은 가치가 아니라, 단지 그 사회에서 옳아야 했던 가치이다. 즉 사회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거나 모순이 있어도 그 어긋난 가치가 하나의 정당성을 가진 것이다. 정의라는 가치 혹은 도덕이란 가치가 그런 것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가치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무슨 과오가 있는지를 명확히 생각해야 하나, 그것이 용납되지 않은 점이다.

 

볼테르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은 후에 루소를 숲에 곰이나 같이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답장을 한다. 그러나 사실 인간불평등기원을 밝히는 것이란 결국 부와 지위, 권력과 명예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된다. 명예를 보자면 이미 위에서 언급한 플라톤의 저서에서 등장한다. 플라톤은 국가 혹은 그 정체에 대한 최고의 가치는 수호자들의 행동력이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더라도 오로지 심신을 단련하여 강력한 철인이 되어 적으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내국인에 대해서는 아주 훌륭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수호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에 관심이 없어야 한다. 단지 그들에게 오는 것은 모든 이들의 존경과 무료 숙식이다. 하지만 이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명예로운 인간이 되어 영원히 추앙받는 존재가 된다. 명예욕에서 만약 인간이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타인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 정도의 명예욕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 명예욕에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명예를 가지고 싶어서 명예를 가진 게 아니라 명예를 얻는 과정에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가치에서 명예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부와 지위, 권력은 그것하고 다르다. 부와 지위, 권력은 자신의 명예를 올리기도 하나, 한편으로 땅 밑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반대로 그것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갈망의 끝은 반대에 위치한 자들에게 파멸을 안겨준다. 농부가 땅을 일구지 못한 채 도시에 와서 빈민과 도둑이 되어 결국 비참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란 국가의 멸망하고 있다는 전초를 보여준다.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루소가 저술했다고 해도 출판사와 번역자를 서로 다른 사람 것을 통해 읽고 있지만, 참으로 그 느낌이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망해가는 국가에 대해 루소는 그 나라는 부유할지 모르나, 농부와 시민이 가난하여 마침내 인구가 감소하게 되면 그 나라는 결국 분노에 가득한 시민들에게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나라가 무너지지 않으면 그 나라의 시민은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소멸할 것이다. 국가의 토대는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다. 국가의 모든 주권과 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면 그 시민이 없어지는 나라란 과연 존재하겠는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깨우치지 못한다. 그것을 몰라도 상관없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은 그런 불행을 교묘히 이용한 자들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자연적 조건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후천적인 정치적 불평등은 분명 선천적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인위적이라면 분명 고칠 수 있는 것이고, 고쳐야만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잔인한 폭력이다.

 

게다가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오히려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예로부터 마키아벨리도 말한 것이지만, 진정한 공화국이란 조용한 나라가 아니다. 지금 조용한 나라라는 말보다 차라리 침묵의 나라, 고요의 나라, 또는 전제군주 아래 모두가 시민(市民)이 아닌 신민(臣民)으로 되는 사회가 아니다. 늘 토론과 논쟁이 존재해야 하며, 그 사회의 작은 문제 하나하나 여기저기서 담론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공화국이란 우리가 추구해야할 민주공화국이란 가만히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가 하나의 운동력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힘이 적든 크든 혹은 넓든 좁든 최소한 사회적 문제를 공론화하여 그 사회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은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누군가 그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이고, 누군가 고통을 받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이 고통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는 나만이 공간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줘야 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나만이 그런 공간을 가지고 타인들이 그 공간이 사라져 버리면, 최후에 나의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침범은 단순히 정치적 관계로만 끝나지 않을 수가 있다. 치명적인 경우에 놓일 경우 나의 목숨 역시 보장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루소의 서적을 보면, 볼테르의 글을 보고 그가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가라고 하고, 혹은 자기 책처럼 프랑스 국민의 빈곤함을 보고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나, 정말 그의 예언대로 혁명이 다가왔고, 프랑스 루이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이16세는 압제자는 아니나, 압제자만큼의 고통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주었다. 봉건사회, 즉 왕족과 귀족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사회에서 그 외의 계급은 늘 착취와 억압만 당할 뿐이다. 그래서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은 19세기 마르크스 시대보다 100년 이전에 존재한 혁명적인 도서였다. 루소는 혁명을 하라는 말을 이 책에 적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넣었다.

 

21세기 전근대사회를 탈피하여 탈근대사회를 넘어온 우리에게 루소의 사상은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면서 소름 돋는 문구는 많다. 하지만 이 문구는 너무 놀라 때로는 루소가 현재 살아있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또 지배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을 갈라놓아 약화시킬 수 있으며, 겉으로는 사회의 화합의 분위기를 주는척하면서 실제로는 분열의 씨를 뿌릴 수 있으며, 신분들 사이에 권리와 이익을 서로 대립시켜 상호 불신과 증오심을 야기하여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를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조장하는 것을 볼 것이다."

 

"전제군주제가 서서히 그의 추악한 머리를 들어 국가의 온갖 분야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하고 건전한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움으로써 마침내 법과 인민을 짓밟고 공화국의 폐허 위에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무질서와 대변혁들 속에서다. 이 최후의 변화 이전의 시기는 혼란과 대재앙의 시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것이 그 괴물(전제군주제)에 의해 삼켜져 버릴 것이다. 인민은 더 이상 지도자나 법이 아닌 전제군주만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전제군주제가 행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든 전제군주 외에 어떠한 다른 지배자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제군주가 입을 열자말자 고려해야할 청렴이나 의무는 없어져 버리고, 노예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미덕은 가장 맹목적인 복종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을 따르던 돼지들은 어리석은 양들에게 계속 이상한 문구가 외치도록 한다. 그 양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돼지가 주입하는 대사가 되새김질 한다. 노예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미덕은 가장 맹목적인 복종이란 말처럼 말이다. 루소가 살던 시절에 전제군주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전제군주제는 사라져도 전제군주 같은 자들은 계속 나올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계몽주의 이름 아래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마음이 들지 않으나, 적어도 계몽적인 현실자각은 필요하다고 여긴다.

 

계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은 계몽이 아닌 압제이겠지만,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파악 그리고 거기에 대한 판단력은 참으로 중요하다. 루소가 문명인이 오히려 미개인보다 못하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문명인들은 도구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자신을 스스로 속박시킨 점이다. 자신의 편리함을 쫓을수록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즉 뭔가 자신에게 없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바보가 되는 것이다. 우리 현실은 우리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망각한 채 계속 흘러간다면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인구가 계속 감소하여 최후엔 그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운영하지 못할 상황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 기차는 탈선한 채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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