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니메이션과 철학

애니메이션이란 이미지의 세계이다. 이미지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실재 현존하는 공간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세계이다. 우연히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보면서 조금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철학이란 것이 돈은 안 되어도 왜 필요한지에서 단지 지금은 철학이 대세가 아니라는 글을 보았다. 애니메이션과 철학, 너무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애니메이션에 철학이 없을 수도 없고, 철학만을 위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도 존재한다. 철학은 우리 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를 제기하는 이유는 2016년 1/4분기 애니메이션 <무채한의 팬텀월드>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조금 떠오른 작품은 <바케모노 가타리>이다. 그 이유는 2작품 모두 인간 세상에 과학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존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케모노 가타리>는 괴이(怪異)라는 등장시킨다. 아니 정확히 보자면 신이(神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신이란 모든지 숭배되어야 대상도 되나 때로는 내쳐야 할 대상도 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신이란 양과 음의 존재성을 띄고 결국 인간의 무의식적 요구에 따라 변형되어 버린다.

 

신화라는 인간이 만든 서사에서 신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원래서 만든 이야기라는 점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그런 점에서 <바케모노 가타리>의 신이(神異)의 요소를 넘어 상상의 세계까지 확장한 것이다. 즉 인간의 세상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공상과학적 요소, 초능력적인 요소까지 등장한다. 거기에 덧붙여 신화의 세계도 등장한다. 이런 비일상적인 세계가 일상의 세계에 등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일이라 보겠지만, 사실 낯선 것이어야 말로 우리 세계에 내재된 숨어있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잊어버린 이야기라고 볼 수 있고, 다르게 본다면 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다.

 

2)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마주해야할 세계는 인간의 외연도 존재하나, 내적인 세계 역시 존재한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나 <바케모노 가타리>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팬텀과 괴이 현상들은 외부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외부는 인간의 내부에서 만들어낸 잉여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를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탐구하고 사유하는 것이란 철학적 자세가 필요하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들 그렇게 어렵고 따분한 것을 왜 하냐고 한다. 모른다고 해서 삶에 당장 무리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을 알면 좋은 점은 어떤 현상에 대해 그 밖의 화제에 대해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 등장하는 팬텀들은 물질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물질적이지 못한 것들이 물질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에 존재하는 이형의 존재, 즉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즉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적 존재이란 점, 형이상학은 철학에서 고대그리스부터 다루어온 학문이다. 그리스 유명한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란 서적을 저술하고, 그 책은 자연의 세계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다룬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말도 안 되는 비논리성도 있지만, 당시 인간에게 보자면 엄청난 학문적 성과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있기에 인간 역시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영혼의 존재로 승화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 플라톤의 저서들을 보면 인간이 위대해지면 하데스의 궁에 가게 되면 후세사람들로부터 큰 숭배를 받는다고 한다. 플라톤은 죽었지만, 플라톤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저승이란 세계를 글로 남긴다. 그가 진짜 저승세계에 갔는지 혹은 가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단순히 스토리와 주인공 히로인의 모습을 보고 쉽게 넘어가기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란 이름을 거론한 것처럼 주인공 하루히코고 서사 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론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소쉬르, 융, 프로이트 등 철학자와 심리학자 이름이 계속 등장한다. 파롤이란 것은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언어학자인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언어라는 것은 langue and parole로 나누어지고, 후자 빠롤이란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이다. 랑그는 사회적인 개념을 가진 언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3)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의 팬텀

빠롤이란 용어가 나온 것은 목소리를 이용하여 팬텀을 퇴치하는 코이토 때문에 나온다. 그녀가 힘을 발휘하기 전에 주문 같은 영창을 외치고, 그에 따라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위력은 강력해진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서 기호학은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에 의해 구조주의로 발달하고, 구조주의는 20세기 중후반 세계적인 학문으로 이어간다. 그래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를 보다보면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이 등장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스쳐가듯이 바라보면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작품은 어느 연구기관의 사고로 인간의 뇌기능이 변질되고, 뇌의 돌연변이는 인간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존재 팬텀을 등장시킨 것이다. 하루히코가 그려서 소환하던 괴수 역시 형이상학적 존재다. 눈에 존재하지 않은 괴수를 과거 인간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이미지로 남겨 후세사람들에게 기록으로 전한 것이다. 팬텀이란 존재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고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게끼를 전해준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미지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 부여된 팬텀은 인간의 오랫동안 정념을 들인 존재가 많다.

 

마이가 처음 나올 때 퇴치한 림보게임에서 전신주는 인간에 의해 탄생되고, 인간의 생활을 위해 사용된 것이다. 결국 팬텀은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타의에 의해 출현한 존재다. 인간이 그것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결국 인간의 정신세계가 만든 것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중시한 것처럼 신화적 요소를 중시하고, 무의식적 세계를 중시한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는 융이다. 융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제자이나, 반(反) 프로이트학파를 만든 장본인이다.

 

융은 인간에게 전 지구 내지 혹은 지역적으로 무의식 세계가 공통적인 요소가 있으며, 공통적인 무의식 세계가 바로 신화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 수면 중에 꾸는 꿈은 개인의 신화이기에 인간은 이성이 있든지 아니면 이성이 없는 수면 중이라면 신화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의 이야기를 보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고, 허황된 세계지만, 그곳이야말로 인간의 본연적 세계가 드러나고, 인간이 숨겨놓은 욕망과 원하는 바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사유에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그 마지막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팬텀이란 결국 인간에 의해 결정된 것이란 점을 말이다.

 

4) 에니그마 등장은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마지막에 등장한 에니그마는 모든 인간의 초능력을 빼앗으려 한다. 자신이 만약 모든 초능력자의 능력을 가지는 순간 절대적인 존재로 되고, 인간에 의해 탄생된 팬텀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혁명 혹은 쿠데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니그마가 인간에 대한 지배욕구를 품게 된 동기는 그녀에게 가해진 잔인한 생체실험이다. 에니그마는 인간의 비윤리적인 폭력에 악의를 품고 모든 초능력자의 능력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에니그마가 흡수한 능력 중에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기능도 있었고, 하루히코에게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하루히코의 능력을 빼앗기 위해 하루히코의 어머니 몸을 조종한다.

 

인간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이제는 역으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니그마는 인간에 의해 나쁜 감정만 받은 것은 아니다. 거짓의 감정과 거짓의 얼굴로 하루히코와 조우했지만, 하루히코에게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어머니로 등장했다. 어머니의 기억과 하루히코에 대한 관계성을 에니그마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하루히코를 속일 수 있었다. 마지막에 하루히코의 반격으로 퇴치되지만, 하루히코의 생활에 대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다.

 

처음부터 팬텀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고, 그 존재의 시작은 아리야식 연구소의 실험에서고, 에니그마의 탄생은 아리야식 연구소의 소정의 목적이다.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아리야식 연구소에 대해 논하면 다른 블로거(천연마)의 글 내용에 상당히 동의한다. 왜냐하면 아리야식 연구소의 폭발사고는 일본의 핵폭발 사고를 의미한다. 핵이 폭발하면 인간이나 혹은 많은 생명체의 DNA가 변질되어 돌연변이가 생긴다.

 

미국의 만화인 X-MAN이나 혹은 많은 히어로 장르에서 주인공이 특수능력을 가지게 된 동기는 방사능과 같이 인간 유전자를 변질시키는 광선이나 가스 등에 노출된 경우가 많다. 즉 핵 사고는 단순히 폭발력과 열에너지만 무서운 게 아니다. 낙진에 의해 떨어진 방사능은 인체에 머물면 반감기 기간이 수십에서 수백년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방사능의 유해성은 인간 유전자를 변질시켜 새로운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공포심을 심어준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아리야식 연구소가 하는 짓은 마치 그런 짓을 2번 반복하는 것과 같다.

 

5) 팬텀은 새롭게 등장한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이 등장한 것

여기에 인간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가? 아니라면 저지해야 하는가? 아리야식 연구소 간부들은 그 원인을 알고도 문제해결을 위한 단서를 주지 않는다. 결국 권력과 지식이란 서로 재생산하는 것으로 이권을 추구하는 담합을 보여준다. 팬텀이란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팬텀이 나와서 인간 세상이 문제가 되는 것도 있지만, 팬텀 그 자체가 인간의 현재 모습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팬텀이야말로 인간이 그동안 가려오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작품의 주인공인 하루히코에게 늘 루루라는 작은 요정 같이 생긴 팬텀이 있다. 아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그래도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귀여운 캐릭터이다.

 

작품 초반부터 생각했고, 나중에 완전히 밝혀진 것이지만, 루루는 하루히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다. 하루히코는 평소 독서만 하고, 성실한 성격에 매사 착실하다. 하지만 그런 하루히코는 많은 하루히코 모습 중에 가장 많이 평소에 드러난 것이지 그에게도 은밀한 욕망 내지 어리광 피우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다. 루루는 하루히코의 아니마(남성성 안의 여성성)으로 기존 남성성의 하루히코는 절제와 단정이라면 루루는 자유분방함과 나태함이다. 에니그마에게 일부 능력을 빼앗길 때 루루의 성격이 원래가 아닌 하루히코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다시 회복할 때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루히코가 그려낸 루루의 모습은 하루히코가 평소 결핍으로 가득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남자아이가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사랑받고 싶은 감정을 대체한 것이다. 루루는 하루히코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사주신 동화책에 나온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겼다. 루루의 모습은 그동안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하루히코의 욕구불만을 드러난 캐릭터다. 하루히코의 슬픈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과 같이 그네와 시소를 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루히코가 어린아이로 변할 때 옆에 마이가 있었고, 하루히코가 마이를 따르는 이유는 마이가 다른 여성 캐릭터보다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진 가슴의 크기에서 단순히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가슴이 가지고 있는 여성성, 어린아이가 가장 원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인 것처럼, 풍만함 가슴은 모든 인간(남녀 구분 없이)이 가진 원초적인 보금자리다. 물론 마이가 다른 히로인보다 하루히코와 오랫동안 알았던 사이고, 마이가 하루히코를 좋아하는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하지만 하루히코의 어머니가 나오는 점에서 하루히코는 어머니에 의한 정신적 안정으로 인해 마이나 다른 여성 캐릭터에게 고백하는 일은 쉽게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6) 팬텀을 이기는 법

이런 요소는 비단 하루히코만이 아니다. 또 다른 히로인인 레이나의 경우를 보면 부유한 명문가정의 아가씨인 그녀는 집이란 공간을 매우 불편하게 여긴다. 부모님이 다정하기보단 다소 엄격하고, 언니가 바이크를 타는 것을 좋아하나 부모님의 반대로 가출하고 만다. 레이나 내의 정신적인 빈곤은 언니의 부재와 부모님의 갈등이 자리 잡았기에 가정문제가 그녀에게 큰 짐이 되었다. 이상한 버스를 타고, 레이나가 원하는 팬텀세계의 부모님은 평소 레이나가 그려오던 환상의 가족이다. 가족문제에서 레이나 그리고 하루히코 역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 특히 어린 아이거나 청소년들에게 가정문제는 심리적인 박탈감과 동시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마이 역시 자취를 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있고, 코이토 역시 어린 시절 초능력으로 인해 왕따 당한 기억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 있다. 팬텀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부족한 마음일지도 모르나, 그런 팬텀을 이겨내야 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다듬어가기 어렵다. 인간의 한자어가 人間이다. 사람의 사이가 인간이다. 인간에게 사람이란 존재가 서로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인간이란 존재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팬텀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나타난다. 인간은 이성이란 정신적 활동을 하나, 감정과 무의식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도 가지고 있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을 다시 생각해보자면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란 물리학 이론처럼, 단순히 학문적 영역을 떠나 고양이란 생물이 그동안 정들었던 인간과의 추억으로 생긴 것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은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팬텀은 인간의 마음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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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 대한민국 네티즌이 열광한 KBS 화제의 칼럼!
박종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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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방송국에서 한국경제를 다룬 박종훈 기자의 컬럼이 <대담한 경제>라는 책으로 나왔다. 본래 경제학 전공출신 전문기자인 점에서 그의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는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일반적인 사람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다. 도서모임에서 한 번 소개받은 서적으로 내용이 어느 정도 전문성을 높게 다룰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일반대중을 위한 책으로 보편적이고 쉬운 문체로 작성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인이 보기엔 좋을지 모르나, 깊이 경제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책이 말하고 있는 초점이나 대상이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의 설명으로 진행된 점에서 심도 있게 들어갈 수 없는 점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책에서 경제학을 다룬 점에서 기억나는 이름은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 그리고 슘페터이다. 둘 다 경제학자인 점에서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저술 시기는 영국에서 중상주의를 강조하던 시기다. 그런데 지금 경영학자 중에서 중상주의를 표방하는 자도 많으며, 국가정부와 대기업의 행동을 보면 신자유주의라고 하나, 막상 그것은 중상주의에 가깝다.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낡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지금의 국가정책은 애덤 스미스가 그 당시 매우 낡아 빠졌다는 중상주의와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다. 과연 어느 것부터 우선적으로 낡아빠진 정책인가?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본다. 시카고대학, 이른바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하고 매우 관련된 대학교, 시카고학파가 존재할 정도로 시카고대학은 미국 경제학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연관이 있다. 20세기 아니 21세기에도 하이에크와 밀턴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통화의 정책과 정부의 관여성에서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는 것, 즉 시장자유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의 “보이지 않은 손”과 다른 “보이고 싶은 않은 손”이 되고 말았지만, 적어도 신자유주의는 최소한 시장조율에서 소비자를 바보로 취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소비자와 생산자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자본과의 관계성은 다변적이면서 한편으로 단순하다.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상은 제각각이나 모두들 경제적인 경영적인 마인드는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에 대한 서로의 관점에서 변수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대상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현실적 조건이다. 중상주의가 문제인 점은 국가와 대상인 간의 정경유착 관계가 물가를 좌우하고,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킨다. 심지어 별 것 아닌 제도조차 건축양식과 의복문화까지 바꾸니 경제라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벗어나려도 벗어날 수 없는 필수불가결적인 존재다. 다시금 애덤 스미스를 논하고 싶은 것은 경제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경제부분 기자가 말한 것처럼 경제의 필수는 돈만 버는 것만큼 돈이 현실에서 돌고 도는 게 중요하다. 즉 필요한 물건이 제대로 돌아가게 해야 경제가 사는 것이다.

 

중상주의 한계, 잡 집어내듯이 최근 우리나라는 무역흑자를 맞이했다고 한다. 외화관계에서 수출이 수입을 초과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수출입 관계에서 수출의 증대가 아니라 단지 수입이 적게 된 것이었다. 스미스는 수입이란 것을 지나치게 의존하면 문제지만, 수입하지 않아도 문제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필요한 재화를 구할 수 없을 경우 생활의 질이 하락되고, 현재 그 삶의 질이 낮아짐에 따라 사람들이 수입물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결국 경제적으로 성장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다.

 

나도 언제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주변에도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도 버거워 하는 것이 부동산 문제다. 국내는 부동산이 주요 시장이 되었고, 부동산으로 들어가는 국가세금과 국민의 경제력, 토목건설공사로 많은 국가세금이 나라를 갉아먹고 있다. 왜 국내 경제가 어려운가? 그것은 경제라는 것은 생산을 하면 소비가 되어야 하고, 소비가 되려면 임금이 필요하다. 임금을 받아야 하나 취업이 잘 안 되고, 하더라도 비정규직이 되어 임금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여 기계의 도입은 많은 임금노동자를 거리로 내몬다. 그런다고 공장기계나 도구를 부수는 과거의 행태는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된다면 새로운 가치관을 맞이하고, 거기에 대한 대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바둑시합에서 구글에서 나온 알파고 컴퓨터가 바둑9단 선수를 5전 4승으로 이긴 적이 있었다. 뉴스에서 나온 말이 알파고의 기능이 상용화 되면 지구의 일자리가 반 정도가 사라진다. 인간 생활 진보를 위한 도구가 오히려 인간을 삼키는 도구로 도래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던 일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응책은 새로운 변화를 맞춘 기술이 필요하고, 거기에 많은 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최근 제사를 지내러 시골에 가면서 작은아버지하고 우연히 정수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수기는 기본적으로 막여과라는 섬세한 여재를 이용하여 이물질을 제거한다. 내가 다니는 사무실의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는 도중, 정수기를 살펴보니 정수기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우는 집수통 바닥이 붉은 색을 띠었다. 원인은 아마 물속에 있는 산화철일 가능성이 높다. 수도관이 알루미늄이나 콘크리트도 사용되나 과거에 주철관 같은 쇠를 사용했다. 물의 화학반응은 쇠를 산화시키므로 정수기의 기능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작은아버지는 정수기 교체에서 미국 것을 사용했는데, 과거의 물맛과 다르고, 그 물이 고급 커피숍에도 사용될 정도로 좋은 물건이라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생각하면 물에 대한 설비기능, 환경적인 관점에서 결국 장비의 수준은 신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국내 정수기업체가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라 만드는 흉내 내기가 가능해도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내는 창조성은 없다. 창조경제를 외치나, 창조적인 것은 과연 그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1세기에 도래하기 전에 이미 20세기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맞이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서 문제는 대량생산의 기능은 증강하는 반면 대량소비의 기능은 감소한다. 인간이 하루식사 량이 정해져있고, 옷을 입을 수 있는 개수도 한계다. 그런데 웃기게도 먹고사는 것이 걱정인 21세기가 되었다. 생각하면 간단하다. 좋은 먹거리와 좋은 옷을 사야할 돈이 쓸데없는 곳에 사용되거나 또는 억지로 돈을 꼴아 박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 원하고 조장했는가? 국민들은 정부 책임론을 말하나, 막상 그런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다. 심심하면 일어나는 것이 우리 집 앞에 왜 고층 아파트를 세우는지 혹은 왜 우리 동네 주변 산업단지나 대규모 공단이 오는가에서 그것을 만드는 민간업체의 무책임도 있지만, 그것을 허락해주는 정부의 기능도 있다.

 

그런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고, 그것을 용인한 것도 국민이다. 부동산 경제에 대한 문제는 금리인하 후 무리한 대출로 집에 대한 과다한 가격으로 집이 없는 사람들이나 혹은 집을 빚을 내서 구매한 사람들은 대출이자 원금으로 고생한다. 그런데도 빚으로 구매한 집값이 오르기를 바란다. 집값으로 서민들은 고민하면서도 차액을 남기려고 하니, 결국 집 말고 다른 곳에 사용될 돈이 적어진다. 돈이 없으니 결혼하기도 부담스럽고, 아이를 낳아 길러주는 것은 거의 각오해야 할 수준이다. 한국 인구에서 재생산될 수 있는 인구, 즉 여성 1인당 출산비가 1.1 조금 넘는다. 여성 1명이 아이 1명을 조금 넘게 낳고, 문제는 그 아이들조차 모두 100% 무사히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는 18세기 이전부터 문제라고 지적했고, 스파르타가 용감해도 인구감소로 모두 멸망했다. 그 원인은 빈부격차이고, 빈부격차는 재생산이란 경제적 시스템을 파괴한다. 새로운 노동인구의 생성은 새로운 시장경제의 원천이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인재다.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시대까지 인구가 급속히 폭발하다 이제 그 당시 인구가 노년화로 되어 노동력을 상실 후, 집에서 연금을 받아야 하나, 점점 이들을 부양할 젊은 계층들이 감소되면서 한국사회는 침하하고 있다. 문제는 이 중요한 안건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본다고 해도 그 객관성이 공공의 영역으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이익에서인지 혹은 집단적 이권에서 보는 지에서 큰 갈림길이 나누어진다.

 

한국사회의 경제는 단순히 한국만의 입장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흐름과 더불어 기존 한국 사회의 변화가 복잡다양하게 얽혀 움직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 대안을 어떻게 찾을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비롯되는지를 알려면,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가 단순히 기록물의 누적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전쟁, 외교,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종훈 기자의 <대담한 경제>는 기본적으로 외국의 역사적 문헌에서 경제적 문제를 찾아내어 현실의 한국사회와 대조한다.

 

누군가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생각할지 모르나, 민주주의 개념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철학적 사상도 없이 일반적인 국가권력 계몽주의는 단지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세뇌시킬 뿐이다. 특히 경제는 그렇다. 어떤 이권이나 이익이라도 그 최종적 형태는 경제적 조건으로 드러난다. 말로만 청년실업, 노년빈곤, 출생률 저하, 내수침체를 말하나 그 기초는 어디서부터인가? 최근 담배와 술 가격이 올랐다.

 

한국의 세금출처에서 간접세가 절대적이다. 술과 담배 가격이 올랐다는 것은 세금이 부족하고, 세금이 부족한 이유는 원래 거두어야 세수가 구멍이 나서 대신 메운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대담할지 모르겠다. 어째든 작가는 마지막 말에 희망은 있다고 보나, 희망은 여전히 죽어나가고 있으니 어찌 <대담한 경제>가 아닐 수가 있을까? 물론 저자도 언급하듯이 사토리 세대, 일본의 청년층들의 뭐든지 포기하기(마음이 편하지?)는 당장 불만이 보이지 않은 나라가 불능이 되는 지름길이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 마음은 당장 편할지라도 모순의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단지 현실도피라는 마약을 과다하게 섭취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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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혈의 오펀스> 이것은 <건담>인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건담>이란 작품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개인적인 취향이 메카 장르 보단 일상물이나 개그 쪽을 더 선호한다. 그런다고 해도 전쟁물이나 로봇이 나오는 메카 장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메카가 나온다는 것은 전쟁이 필수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문명에서 전쟁은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은 영원한 이야기들이다. 최초의 문학과 서사라고 불리는 신화,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그리스신화에서 처음 알게 되는 인물은 제우스와 그의 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시인 호메로스의 의해 만들어진 <일리아스>이다. 트로이전쟁에서 영웅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에서 신인 아테네와 아폴론의 손짓이 전사들의 운명을 가른다.

 

<일리아스>의 거대한 분량의 서사시(詩)가 신화이면서도 전쟁을 노래하는 비극이기도 하고 영웅을 찬양하기 찬미가이기도 한다. 영웅의 등장은 언제나 위기와 갈등의 최고조에 등장하고, 그의 활약은 거대한 세력 안에서 이루어져 하나의 역사와 신화를 창조한다. 이렇게 거대한 세계와 이념 안에서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고, 거기서 등장하는 영웅의 활약을 노래하는 것이 그리스신화의 비극 시들이다. 영웅의 죽음은 자기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때 가장 강한 모습일 때의 자신을 남기고 떠난다.

 

이런 점을 <건담>에 비유하는 이유는 사실 건담이 미래공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이기에 SF 장르이기도 하나, 고대 그리스신화와 비교하여 그 기본적 명제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퍼스트건담>부터 주인공 파일럿은 우연의 사건으로 건담 프레임에 탑승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장을 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로 레이의 같은 경우는 살기 위해 건담에 탑승했다면, <역습의 샤아>에서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탑승한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전투 병기에 탑승했던지 그가 움직이는 의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보단 자신이 원하지 않은 거대한 조류에 의해 움직인다.

 

<건담>이란 작품은 이른바 거대서사(巨大敍事, Master Narrative)라는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건담>이란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대표적인 거대서사의 작품이다. 관념적인 이념 안에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에 도취하여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집단주의가 전쟁의 시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많은 <건담> 시리즈에서 그런 요소를 지닌 것과 아닌 것도 있다. 더블Z 같은 경우 자신의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오로지 건담 프레임에 탑승하는 조종사도 있듯이, 각자가 원하는 목표와 방향성이란 무한대이다. 그렇지만, <건담>은 조종사가 자의든 타의든 그 거대한 물결을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조종사는 아직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다.

 

<Thunder Bolt>의 경우 장교로 임관한 조종사가 나오나, 사실 그가 파일럿으로 활약해도 결국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지구연방군과 지온군의 대립)에서 빛을 내는 장기말 같은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2016년 1분기에 종료된 <철혈의 오펀스>는 기존 <건담>과는 상당히 이질감이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 거대서사라는 거대한 틀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대서사라는 거대한 틀을 부수기 위해 진행되는 작품이다. 그런다고 거대한 서사 밖이나 그것을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사소한 작은 이야기(小敍事, Small Narrative)는 아니다.

 

그 거대한 세력과 이념에 대항하는 다른 방식의 거대서사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철혈의 오펀스>에서 건담 프레임을 탑승하는 미카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살인기계처럼 철화단 리더 올가의 명령이나 의지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단지 자기들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담>의 작품세계를 본다면 관념적인 요소, 즉 상위기관이나 국가적 대립, 세력 간의 갈등권력자들의 이기심들이 인간을 운명의 시험장에 보낸다면 <철혈의 오펀스>는 거기에 휘말리는 인간들이 저항하는 이야기다.

 

2. 마주침의 철학

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건담> 그리고 <케이온>에 대한 글을 보다, 조금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 등장한 철학자와 그의 이론을 최근에 내가 독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출처 말고 다른 곳에서 그 글이 나올 때는 많이 웃었다. 그 사상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 철학자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면서도 거기서 철학을 교육했던 사람이다. 20세기 철학과 사상은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하다 나치정권 이후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프랑스로 바뀌었다.

 

21세기 철학이나 사상, 심지어 문화나 예술에서 프랑스가 최고로 된 것은 전쟁과 많은 연관이 있다. <건담>을 알려면 우선 전쟁의 비극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인간은 계몽주의(프랑스대혁명 정신)적 가치관인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의지보단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인 세계, 그리고 현재 살아가는 경제적, 환경적, 물질적 조건들이 어떤 식으로 정치나 사회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여기게 되었다. 19~20세기는 그야말로 전쟁과 혁명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자국의 국민과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착취했고, 전쟁은 많은 물자와 인명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전쟁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 유명한 사례로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일어난 볼셰비키혁명이다. 러시아 소비에트가 차르체제와 케렌스키 정권 붕괴 후 최초로 사회주의국가 설립 선언을 했다. 당시 혁명가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소비에트연방은 마르크스의 실험이 최초로 시행될 수 있었던 나라였다. 시행된 게 아니라 시행될 수 있다는 말은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적인 조건, 즉 물질적으로 하부에서 일어난 조건에 의해 상부의 체계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소비에트가 독재정치로 바뀌었고, 스탈린의 독재는 많은 이들을 충격을 몰아갔다.

 

문제는 소비에트연방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들어서 그들의 나라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21세기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나라에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고, 독일정부 같은 경우 마르크스의 도서가 유네스코 세계인류 문화유산에 등재됨과 동시에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정리하고 있다. 20세기 프랑스에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여전히 많았고, 우리가 그토록 저주하는 그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찬양하는 천재화가 피카소도 있다. 문제는 소비에트연방의 행보 때문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순에 빠졌고, 이때 새롭게 이론을 전개한 사람이 루이 알튀세르이다.

 

그의 저서 중에 <철학에 대하여>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이 되었고, 여기에 다시 새로운 유물론적인 가치관(아니면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을 대립시켜 새로운 방향을 나오게 한다는 우발적인 유물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이론을 그대로 <건담>과 <철혈의 오펀스>로 대치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철혈의 오펀스>에서 철화단은 어떤 철학이나 사상 그리고 이상에 대한 집착은 없다. 단지 그들이 시작하고 끝을 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의지이다.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사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자유와 평등적 가치관이 시작된다.

 




3. 갈라르호른의 모순

갈라르호른은 지구방위와 우주평화를 핑계로 아주 오랫동안 많은 권력과 이권을 누리고 있었다. 갈라르호른에게도 건담프레임이 존재했고, 아리아식이 본래 철화단의 소년병이 아니라 갈라르호른의 기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이 건담을 이야기할 때는 지구평화가 위기에 빠지고,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등장하는 공포의 기체라고 말한다. 갈라르호른은 건담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이고, 역사를 가진 무장집단이다. 그런데 <철혈의 오펀스>에서 오히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여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 명제를 망각했다. 화성을 침공할 때 소년병들이 무참하게 죽은 점, 권력 투쟁, 쿠델리아의 지구 행에서 보인 행위들은 테러에 가까운 만행이었다.

 

화성 인근에 위치한 갈라르호른 조종사가 지구에 왔을 때, 지구 조종사들은 화성 조종사가 지구출생이 아니란 점에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장면도 나온다. 갈라르호른의 역사가 오히려 갈라르호른이 시작했던 이상을 반대로 가게 되었고, 여기서부터 마주침이 발생된다. 지구의 평화라는 이념, 안위라는 슬로건은 오히려 평화를 파괴하고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지구 근처에 위치한 인공 콜로니에서 노동자들은 쿠델리아와 철화단을 보고 그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위해 도우러 온 조력자로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들이 그런 무장봉기를 하려고 했던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라고, 죽을 때까지 자신들은 여전히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하고, 그 장소는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했다.

 

이때 이들의 봉기를 뒤에서 조종하고, 오히려 이들을 반국가세력 내지 테러조직으로 내몰게 만들어 모조리 몰살당하는 비극을 보여준다. 결국 <철혈의 오펀스>는 거대한 세력 간의 다툼이란 거대서사의 일반적인 흐름을 벗어나 거대한 세력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몸부림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떤 전쟁이나 혁명, 큰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은 운명적으로 일어나는 것보단 본래부터 일어날 수 있던 에너지가 잠재되었을 뿐이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기 위한 도화선의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았을 뿐이다.

 

4. 철화단의 운명

철화단은 운명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진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함과 배고픔에 시달렸고,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빠져 나온 자들도 많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란 오로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정한 세계다. 갈라르호른의 침공에서 우연히 얻은 건담 발바토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담은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는 공포의 병기이다. 하지만 건담 발바토스 프레임은 갈라르호른이 가지고 있던 기체보다 성능이 뒤쳐진(제작년도가 상당히 오래된) 기체이다. 갈라르호른이 가지고 있는 다른 건담 프레임보다 더 건담의 원초적 요건을 갖춘 셈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쥐새끼들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이때 바로 쿠델리아가 등장하고, 쿠델리아는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어중간한 정보에서 쿠델리아는 지금의 현실을 바꾸자는 이상이 생긴다. 쿠델리아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이유, 그녀가 혁명의 소녀가 되어야 했던 점은 그녀가 철화단의 소년병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소년병들은 자신의 살 길을 원했지만, 그 길을 어떻게 찾아가야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오로지 올가의 명령에 따르고, 올가는 자신들의 고용주 쿠델리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철화단을 결국 현실에서 갖은 박해와 억압을 당하는 피지배계층이고, 쿠델리아는 자신이 원래 지배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향하는 이상주의자인 것이다. 그녀가 가진 이상은 분명 인간의 윤리적 가치로 본다면 옳은 것은 분명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델리아의 아버지는 자신을 갈라르호른에게 팔아넘기려 했고, 친구라고 믿었던 후미탄은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자의 첩자였다.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고, 그녀는 자신이 몰랐던 잔혹한 현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분노의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한 의미로써 철보다 더 강한 마음을 가진 혁명의 소녀로 탄생한다.

 

그녀는 화성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구와 지구 밖의 다른 콜로니의 사람까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많은 목숨이 자신에게 맡겨지고, 자신은 절망의 고통이란 이름을 가슴에 품고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했다. <건담>에서 쿠델리아의 영향으로 전투 장면보단 그녀의 발언과 정치적 행위에 상당한 시간에 할애되었다. 또한 쿠델리아와 철화단의 움직임이 단순히 그들만의 의지뿐만 아니라 뒤에서 이권을 노리는 자들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갈라르호른은 부패했고, 그들은 세계 정치와 경제 이권에 많은 부분을 간섭했다. 갈라르호른의 배제는 단순히 인간불평등을 해소하는 길만이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보이지 않았던 손’까지도 움직인다.

 

어떤 큰 사건들은 누군가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을 움직이게 되는 계기는 잠재된 에너지와 토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쿠델리아의 지구잠입은 어느 마카나이의 정치적 이익, 상회들의 경영이익, 갈라르호른의 부패, 화성인들과 사회적 약자의 분노가 충만한 상태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도착한 것이다. 물론 쿠델리아가 움직이는 것 역시 그 임계점의 도달에서 본 잔혹한 현실을 각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대한 세계에 그녀는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갈라르호른 입장에서 쿠델리아는 지구평화를 방해하고, 세계를 혼란으로 빠뜨리려고 하는 최악의 인물이고, 그들은 쿠델리아의 철화단, 심지어 무장봉기(무기를 일부러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내주고, 거기에 때맞추어 토벌했던)를 하던 노동자까지 평화를 파괴하는 대상으로 봤다. 평화라는 것은 누군가의 입장, 누군가의 권력, 누군가의 이익에 의해 판도가 바뀐다. 만약 쿠델리아가 뒤에서 방송회선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면 쿠델리아와 철화단은 완벽한 테러리스트로 몰릴 뻔했다. 이미 갈라르호른은 언론까지 장악한 점에서 부패의 깊이가 매우 심각했다.

 

5. 탈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인 철화단과 쿠델리아

철화단의 소년병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한 고아와 노예였다. 그들은 폭력과 억압에 의해 강제로 노역과 전투를 해야 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현재 목숨을 바라보고 산다. 그들에게 내일이란 미래란 있을까? 인간에게 미래와 내일 그리고 희망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살아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철혈의 오펀스> 후반으로 갈수록 철화단은 마치 광기에 젖은 짐승처럼 전장을 누빈다. 아직 사춘기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소년이 무기를 잡고, 적을 향하여 투쟁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때까지 자신들은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도구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생물학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에서 어떤 이상이나 이념에 구애되지 않았다. 단지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1기 엔딩곡 ‘오펀스의 눈물’을 보면 매우 슬픈 멜로디와 반주가 들린다. 평화로운 넓은 들판에 건담 발바토스가 철화단 멤버들과 평화롭게 앉아있다. 살상병기가 평화의 상징이란 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들의 살 곳을 찾기 위해서는 현실의 부조리와 투쟁할 수밖에 없는 충돌이 일어난다.

 

갈라르호른이 말하는 질서와 평화라는 이데올리기, 갈라르호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철화단, 그래서 철화단은 탈 이데올로기적인 모습으로 갈라르호른과 충돌한다. 문제는 여기서 쿠델리아는 탈 이데올로기화된 철화단의 이데올로기로 된다. 쿠델리아의 연설은 철화단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만 아니라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대변해준다. 철화단이 갈라르호른을 거부하여 저항해도 결국은 자신들이 살아간 사회라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 커뮤니티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길, 이상과 이념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쉽지 않고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철혈의 오펀스> 오프닝에서 쿠델리아가 심각하게 망가진 건담 발바토스의 모습을 보고 있다. 1기 마지막에서 건담 발바토스는 자신의 부하를 견디지 못해 심하게 파손되고, 조종사 미카는 눈 하나를 잃고 팔 하나가 정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이 철화단이란 이름으로 영원히 꽃이 지지 않은 강한 철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오직 그 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탈 이데올리기의 한계점은 저항의 시작이 되나, 한 번 튀어나간 이상 다시 선로를 찾지 못하면 증오의 광기로 얼룩져 결국 마지막에 파멸하고 만다. 부조리한 거대서사에 대항하나, 결국 자신들 역시 거대서사라는 사회로 들어오게 된다. 단지 그곳에서 갈라르호른처럼 부패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갈라르호른처럼 자신만의 역사에 갇히지 않은 채 자신들의 처음 모습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스스로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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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제나 이런 책들 읽어보게 될지...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3-30 09:12   좋아요 0 | URL
저 때문에 북다이제스터님, 북 과식이 되겠습니다!!!! 어허허허
 
마르크스의 『자본』 탄생의 역사 - 마르크스 40년 경제 이론 작업의 전모를 밝히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3
비탈리 비고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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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늘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친구하고 오랜만에 만나거나, 심지어 식당에 식사하는 도중 옆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경제이다. 그들이 말하는 경제는 Economics가 아니라 Business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경제적 관심은 국가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개인적 영역의 경제와 공적인 영역의 경제는 다르다. 게다가 어떤 사업을 하면서 수행하는 경제성 평가가 공공기관이 한다면 모르나. 일반 민간사업자가 하는 것이라면 그건 경제성이 아니라 경영성이라 말하는 것이 바르다.

 

주변에서 재테크나 혹은 돈을 어떻게 벌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대개 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판도와 가치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들이 나보다 우월하게 알고 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내가 가진 지식의 단 1%도 존재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요새같이 자기계발서 중에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책들이 넘치고,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이익을 보는 이는 소수라는 점이고, 대부분 주식에서 큰 손해를 보거나, 부동산의 경우 내 집값이 오르면 옆 동네 집값도 오른다.

 

이런 부분에서 조금 걱정을 지나 많은 인간들의 가면을 보게 된다. 겉으론 나라와 경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나, 막상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위로 이어진다. 물론 나도 내 인생하고 내 가족이 소중하다. 그러나 나라면 그렇게 자기 주변의 밭에만 물을 대기를 바라는 것보다, 밭의 물이 알아서 잘 내려갈 수 있는 형태를 원한다. 한국사회에선 아직도 낙수효과 Trickle Down 신화를 믿는 모양이다. 최근 불경기와 실업률 증가, 물가 상승은 어디에서 왔을까?

 

전에 어느 책에서 일본의 경제문제를 위한 정책에서 일하는 사람의 임금을 올리려 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의 디플레이션 경제는 소비위축과 더불어 일본의 인구가 축소됨에 따라 일본정부가 새롭게 시도하는 정책이다. 인구가 감소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비율에서 전반적으로 입이 큰 도자기 병처럼 20~40대 인구가 제일 많고, 10대나 영유아가 계속 유입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그 나라의 생산력과 그리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진다. 그러나 요새는 입구가 좁고 가는 도자기 병처럼 되고 있다.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추세고, 노령인구가 할 수 있는 노동력의 한계가 온 것이고, 게다가 그들을 부양할 수 있는 정책이 날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노년의 빈곤에 따라 노년의 실업은 양날의 검이 된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과거에 할 수 없으나, 단순노무나 사무실의 문서정리, 일반적인 서비스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건강이나 신체적 능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청년실업과 관련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친구의 통화에서 아쉬운 부분은 어느 부분에서 친구의 말을 옳을지도 모르나, 친구는 장사를 한다. 판매하는 물건들이 사치품은 아니나, 살 수 있는 부류가 일반 서민들이고, 비싸지 않은 기호식품 내지 건강식품이다. 따라서 서민층의 경제적 기반이 되지 않으면 전혀 팔리지 않을 물건이다.

 

경제적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고, 국가정책과 국민적 정서가 따르기 마련이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친구는 주식시장에 관심이 많고, 금리나 코스닥에 관심이 많다. 난 다소 관심이 없고(나중에 거시경제학을 따로 공부할 생각이나), 사회적 구조에서 접근한다. 내가 결론내린 부분은 항상 부동산 문제다. 회사에서나 친구나, 오랜만에 만난 과거 직장동료나 식사 중에 들리는 이야기는 바로 부동산이다. 부동산의 문제에서 돈을 버는 것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벌어도 그것은 벌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소소한 것으로 번다면 그것을 노리는 사람은 더 많이 번다. 그럼에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현명함이다.

 

어느 순간 집값이 폭등하고, 그 지역이 어느 정도 과밀화되면, 도심지 사람들은 변두리에 가격이 저렴한 곳에 가고, 다시 사람들이 모여 부동산을 활성화시킨다. 그러면 결국 그 지역 토박이 주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이 오기 시작한다. 처음에 집값이 오르면 좋으나,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아도 같은 지역 아파트에 갈 돈이 나오지 않고, 주변에 아파트가 모이면 물가가 급격히 상승한다. 치킨 가격 비밀에서 요새 치킨이 조금 저렴하면 15,000원, 보통 2만원 정도한다. 치킨의 비밀에서 닭의 가격, 즉 생닭의 가격이 최근 오르지 않았고, 치킨에 필요한 식용유와 전분 그 외의 식재료가 오른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임시로 일하는 직원 급료가 올랐는가? 불과 5년 전 치킨 값은 15,000원도 비싸다고 여겼다. 그런데 5년 후에 최저 급료가 1,500원 올랐다. 그러나 집값은 2배 정도 올랐다. 알바르바이트생의 시간당 급료가 5년 전에 비해 1,500원이 올랐다고, 치킨 값이 5,000원이 올랐다면 말이 안 맞다. 나머지 3,500원에서 소득세나 각종 세금, 사장의 수익이 그렇게 오를 리가 없다. 문제는 임대료다. 지방에서 삼겹살 1인분이 4,000원이 현재 7,000원까지 오르고, 수도권에서 1인분이 10,000원 이상은 기본이다.

 

임금의 상승폭이 정말 크다면 저렇게 올라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문제는 임대료다. 내가 이런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수익을 3가지로 나눈다. 임금, 이윤, 지대라고 말이다. 이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자본>에도 나오나, 사실 이미 그 전부터 존재한 개념이다. <국부론>이 18세기에 저술된 책이나, 현대 자본주의에서 거의 대부분 일치할 정도로 시장경제학을 연구한 도서다. 바로 사람들은 자신의 딜레마, 즉 이익의 모순이 지대라는 점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 강하게 지적하고 싶은 이유는 사람들은 현재의 이익에 충실하기도 하나, 자신의 미래에도 관심을 가진다. 내 직장동료나 친구도 자기의 수중에 돈이 오르는 것을 바라지만, 마지막은 자기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다. 자기 자녀들은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말로 끝낸다. 문제는 본인들의 자녀를 계속 몰고 가는 사람은 다른 이도 아닌 바로 자신이란 사실이다. 물가의 상승, 최저임금의 상승해도 결국 1일 8시간 주5일의 근로기준법을 지켜도 세금을 공제해도 100만원도 안 된다. 요새 100만원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나?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세상이다. 우연히 알게 된 한 분이 서울 유명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왔지만, <자본>을 읽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솔직히 <자본>을 돈 벌라고 보는 책이 아니라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 보는 책이다(물론 이 책을 보고 경영적으로 연구한 자도 있다고 한다). <자본>의 탄생에서 당시의 자본주의와 현재의 자본주의는 다르나, 21세기에도 <국부론>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고 하면, <자본> 역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세계 4대 경제학으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그리고 케인즈와 하이에크가 있다. 우리의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걸어가고 있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나온 경제학 도서가 이미 현대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고 있다. 문제는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수요의 공급이 제대로 되는가에서 현재 수요의 대상이 점차 적어지고 있다. 인구가 축소하여 거품처럼 올라오는 부동산은 어느 일정지역을 제외하면 유령의 마을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임금의 문제, 지나친 노동 강도 그리고 현실의 경제적 조건들은 인간들의 미래를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미래라는 담보로 현대 자본주의 시장은 돌아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기보단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에 대해 지적했다. 당시 다른 사회주의자와 달리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시장체계인 점을 알았다.

 

어느 정도 사회가 발전하려면 물적 토대가 되어야 가능한데, 현재를 보고 그때를 봐도 물적인 토대인 상품은 넘치나 그것을 소모할 수 있는 시장수요는 줄고, 그것에 의해 공황이 닥치고, 치명적인 위기로 이어진다.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부동산이 끼여 있고, 한국의 지금 부동산 열기는 식을 생각이 없다. 최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시대에서 주택문제는 그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단지 마르크스가 보던 시기는 주요 대상이 상품에 투하되는 되는 노동력이고, 현재는 노동력보단 금융시장이다. 그러나 결국 금융시장에서 얻어지는 돈은 그냥 땅에서 솟아난 돈이 아니라 누군가의 돈을 당겨오는 것이어야 가능하다.

 

임금의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빚을 내어 통화량을 증폭시켜 인플레이션 되는 현실에서 사실상 가장 현실적으로 문제를 파고든 것은 마르크스의 <자본>이다. 신자유주의 역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보이지 않은 손을 다시 찬양하며 따라가나, 문제는 신자유주의 역시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 소비하지 못하면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내 친구의 장사불경기와 마트에 살 것 없다고 말하는 회사동료의 말을 들으면 어디서부터 단추가 어긋났는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자본>에선 지대에 부분은 현실의 이런 미친 임대료까지 예상하지 않으나, 지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광기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 게 사실인가? <자본>의 탄생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본질적 문제가 당시에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고, 여기서 마르크스는 새롭게 경제학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생각하면 아직도 21세기에 1970~80년대 산업재해가 다시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사실 <자본>을 읽다보면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통계적으로 조사한 내용이 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 아직까지 농촌에 많은 인구가 상주하고 있으나 21세기는 농촌보단 도시에 인구가 치중하고 있다. 산업예비군들이 언제라도 보충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일자리 부족한 것도 있지만, 미래에 일자리가 넘쳐도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악몽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자본>의 탄생이 그냥 한 사람의 광기 내지 오만이 아니라 현실적 모순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내기까지 그도 역시 현실적으로 깨닫지 못한 부분도 있었고, 예전부터 존재한 경제학 도서를 참조하면서 경제학에 대한 역사와 통계 그리고 철학과 문학까지 반영했다. 딱히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말대로 하란 것은 아니나, 적어도 현실의 문제를 생각하려면 카드를 다른 방식으로 돌려볼 수밖에 없다. 2010년대 도래하자 한국의 키워드 중에 하나가 경제민주화이다.

 

사실 이런 정책은 케인즈의 사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나, 케인즈 역시 자본주의 거시경제학 개념에 마르크스의 사회구조 분석을 상당히 참고했다고 하니, 경제정책이 국가의 조율과 조정이란 통제 아래 진행되면 신자유주의적으로 문제지만, 한편으로 현 상태를 보자면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제민주화에서 먼저 정리할 부분은 물가와 임금일 것이다. 국민들이 일자리만 얻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곳의 임금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소비 없는 생산품들이 넘치면 결국 경제적으로 부도와 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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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18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시바! 닭들이 왜 비싼가 했어! 생닭은 가격이 안 오르는데....임대료였구나 임대료...

만화애니비평님 대단하십니다.... 전 마르크스는 항상 읽어보고 싶고, 관심이 많이 가는데 아직도 제대로 이 분의 책을 읽지를 못 했어요.. ㅠ.ㅠ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하여 경제학의 전혀 기초지식이 없는 저 같은 우매한 자가 읽기 좋은 책이 있을까요? 전 이사야 벌린인가 그 사람이 쓴 `마르크스 평전`만 읽었어요 ㅠ

만화애니비평 2016-06-19 11:37   좋아요 0 | URL
사실 임대료가 저렴한 시골에서 고기를 먹으면 비싼 이유는 임대료 대신 노동력이죠. 시골촌닭은 닭사육장이 아닌 시골집터 안에서 소량으로 키우니 그만큼 인력이 드는 것이고요. 닭에 대해 생각해보면 제가 맡은 업무 중에 가축분뇨관리기본계획이 있습니다. 저희 지역에 닭의 사육두수가 급증한 것은 치킨의 위력이죠.

저도 처음에 마르크스 잘 몰랐지만, 읽어도 참으로 어렵지만, 덕심으로 밀어붙였죠. 오덕오덕!! 마르크스는 한번 강신준 교수님의 서적을 읽어보세요.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라던지 혹은 다른 마르크스 서적이 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석좌교수님이신 김수행 교수님이 별세하여 자본번역가로는 강신준 교수님만 남았지만, 볼만할 겁니다. 사실 이분은 직접 강연을 들으면 재미있습니다.

루쉰P 2016-06-19 22:07   좋아요 0 | URL
흠 대체 뭐하시는 분인지...가축분뇨관리기본계획이라니...제 상상속에는 뿔테 안경을 쓰고 양 손을 턱에 괴고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에반게리온의 신지 아버지 모습이 잠깐 훅 지나가네요...ㅋ
전 차라리 노동력에 값을 지불하고 싶어요. 임대료 따위에 치킨값을 내야 하다니 니미럴...치느님에 대한 모욕이라구요!!!!

강신주 ㅠ.ㅠ 그거 책 샀었는데, 경제적 고난의 파도에 헌책방에 팔았던 기억이 납니다. 흐흐흑

다시 사야지 헤헷, 마르크스 참 매력적인 이름이에요. 왠지 친해지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한다고 할까요? 흠 노무사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를 읽어보지도 못한다면 그건 노동에 대한 모독이에요 훗

추천 감사합니다잉 ㅋ

만화애니비평 2016-06-19 22:28   좋아요 0 | URL
저요? 환경공학을 전공했고, 환경 대관협의하고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 된 일인지 오덕이 되어 이상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ㅎㅎㅎ

뿔태안경은 안끼고 애니나 영화볼때나 안경끼지만, 덩치는 좋은 편입니다.ㅎㅎㅎ

강신준 교수님 경제학 서적들이 쉬운 편은 아니나 그나마 쉽게 만든 편이죠. 처음부터 새로 구매하지 마시고 도서관에서 천천히 들여본 뒤에 결정을 하십시오..ㅎㅎ
 

영화 <Hunger>를 보면서 2가지 영화가 생각났다. 하나는 <남영동 1985>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2가지 영화 모두 흥행성보단 작품성 그리고, 작품 안에서 보여주는 예술적인 감각으로 인정받았다. 예술이라 것은 보이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여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끔찍하고 두렵고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큰 전달력을 전해줘야 한다. 아직도 한국 대중사회는 이런 예술적인 요소보단 대중성에 두고 “예술이야!”라고 말한다. 예술은 입맛을 맞추기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입맛의 다양한 선택을 늘려주는 천연 향신료다.

 

천연 향신료는 내가 직접 따서 먹지 않은 이상 맛을 볼 수 없다. 인스턴트식으로 가공한 조미료는 당장의 입맛에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좋은 게 없다. 오히려 그 입맛에 물들여 최후에 감각이 둔화하여 감성을 메마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가? 어떤 만화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에서 대답은 욕심이었다. 욕심을 생각하면 사랑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인간에 대한 무한애정 역시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욕심의 대상의 자신이냐? 타인이냐 혹은 그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욕심은 어떻게 보면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은 그래서인지 용납될 수 있거나 또는 되지 않을 있으며, 그것이 정당할 수도 아니라면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욕심이란 단어가 과연 나쁜지 아닌지는 도덕적인 사회상과 윤리적인 보편성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영화 <Hunger> 역시 그런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남영동 1985>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마주쳐서 보는 이유는 2가지의 이유다. 하나는 <남영동 1985>의 교도소 내에서 이뤄지는 잔혹한 행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아일랜드의 비극을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일랜드라고 하면 그런 나라가 있지만,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어느 한 기타리스트였다. 영원한 기타 키드의 우상이자 미친 듯이 기타를 연주하는 Mr. Guitar Crazy 게리 무어(Gary Moore, 1952.4.4~2011.2.6)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에 하나이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쳤던 사나이”다. 그의 기타소리는 그의 감성이 탁월한 것도 있으나,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란 점이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20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했지만, 완벽한 독립을 하지 않았다.

 

영국의 세력이 닿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에서 벌여진 비극은 한국으로 따지자면 한국전쟁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만큼이나 잔혹한 비극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원했다. 영국은 겉으로 아일랜드라는 나라만 인정했지, 영국여왕에게 충성하고 정치적으로 많은 간섭을 하였다. 아일랜드는 독립을 하기 위해 영국과 투쟁했으며, 영국은 아일랜드 사람끼리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독립 아닌 독립을 해준 것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인들이 가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아일랜드 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난은 조선이 일제 강점기 일본에게 당한 것을 생각나게 만들 정도로 잔인했다.

 

아일랜드 전통게임을 하는 것을 금지했고, 하는 것을 적발하면 무참한 폭력이 일어났고, 폭력의 잔인함은 결국 사망으로 이어졌다.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이런 국가적 민족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항쟁하기 위해 투쟁하고, 그 역사의 기간은 조선독립운동사 만큼이나 처절했다. 실제 영국 첩보기관은 죄 없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과 각종 불법행위를 일삼았고, 아일랜드 인들은 영국인들의 폭압에 분노를 넘어 증오로서 대했다. IRA은 매우 거칠고 과격하며, 테러를 일으켜 폭행과 살인까지 저지른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을 보여준 비극이라면, <Hunger>는 1980년 전후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 수상 집권 시기에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 영화를 감상하면 대처의 연설이 나온다. 대처는 1970년대 경제위기에서 새로운 내각으로 등장한 철의 여인이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적 위기를 타진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의 자본주의국가에서 이른바 케인즈의 이론, 거시경제학으로 돌입한다.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통화량이 증가하고 임금이 올라가면 인플레이션이 닥치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고 물가가 계속 오르게 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한다.

 

이때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경제정책은 거시경제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환된다. 그때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대표적인 정치인이었고, 영국은 대처의 집권으로 초반에 안정화되었던 것처럼 보이나, 추후 큰 문제를 일으킨다. 대처의 노동탄압도 큰 문제였지만, 그와 더불어 아일랜드 인권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개인적으로 대처는 노동문제의 갈등을 외교문제로 국민의 눈을 돌리려 했는지 않을까 싶다). IRA가 급격한 테러를 하면 그들을 정치범으로 수용했다. 정치범은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위험이 될 수 있으며, 반국가적 세력으로 국가체제에 대한 위협하는 인물로 보겠지만, 대처는 IRA 요원들을 그저 흉악범으로 취급했다.

 

흉악범은 정치범과 다르게 정치적 성향이나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타인을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희생시키는 반윤리적 인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다르다. 도덕은 권력의 힘이 작용하나, 윤리는 권력의 힘으로 볼 수 없다. 도덕적 권력이 IRA를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이다. 아일랜드 죄수를 수용하는 감옥은 열악하고, 비정상적인 공간이다. 물론 여기에 반항하는 IRA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벽에다 똥칠하고, 샤워도 하지 않고 최대한 영국 간수에 대해 반항한다.

 

영화 처음 나오는 인물은 IRA 요원이 아니라 영국인 간수다. 그는 조심스레 현관을 나서고, 차 밑에 혹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다. 게다가 아내는 창문 너머로 남편의 출근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그는 감옥 밖에서 담배를 피며 눈 내리는 모습을 아무런 느낌도 없이 바라본다. 손가락 윗면 관절은 어디에 부딪혔는지 상처가 나있다. 그의 임무는 샤워를 거부하는 아일랜드 사람을 목욕탕 욕조에 집어넣어 비누를 몸에 바른 후 긴 빗자루로 몸을 씻어내는 것이다. 이때 저항하는 죄수를 저지하기 위해 매우 심각한 폭행을 휘두른다.

 

그런다고 IRA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면회를 가정하여 서로 간의 정보를 교환하고, 면회자들과 물품을 교환하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입안에 메모지를 넣어 어느 여인과 키스를 하여 건네거나, 라디오를 받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면회객으로 온 여성은 자신의 손을 치마 안에 집어넣어 남의 손이 함부로 가서는 안 될 곳에서 용기를 꺼내어 죄수에게 건네준다. 목숨을 거는 투쟁은 잊을 수 없다. 영화 <남영동 1985>가 생각나는 이유는 故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로부터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을 당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에서 끌려온 주인공은 갖은 고문을 당할 때 자신만 울고 절규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고문을 지켜보던 형사들도 칼로 마음을 도려내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고문은 당하는 사람이나 가하는 사람 모두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처럼 <Hunger> 역시 그렇다. 영화에서 IRA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IRA 요원이 영국정부의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인간 최후의 저항인 단식투쟁을 한다. 이때 시작한 주인공이 66일 동안 단식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 뒤로 9인이 추가로 사망한다. 이때 IRA은 그 감옥의 영국인 간수 26명을 살해하는 일이 벌여진다.

 

분명 어느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죽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원해서 그런 더럽고 위험하고 잔인한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영화 <Hunger>는 피해자가 아일랜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아일랜드 사람을 감시하고 폭행하는 영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죄수를 목욕시킬 때 그들은 철저하게 반항한다. 진압부대가 곤봉을 들고 와서 아일랜드 죄수들을 가차 없이 봉을 휘두른다. 이때 처음 온 한 영국인이 광기어린 진압장면에 슬퍼하며 벽 뒤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영화는 꿈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듯이 신임 경찰대원은 파란색이 보이는 복도 쪽이었고, 진압하는 자들은 어둡고 컴컴한 감옥 복도에서 미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옥에 와서 12년을 선고받은 IRA, 손등에서 피가 나는 간수, 단식으로 생명을 포기하는 IRA, IRA에 의해 살해당하는 간수들을 보면 이 모두가 피해자였다. 역사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은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을 쇠사슬처럼 옭아맨다. IRA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공화주의였다. 공화주의란 인간이 생명의 위기나 고통에 고통 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지 않은가? 공화국이란 자신들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할 최종목표다. 아일랜드 죄수들이 선택한 것은 삶의 의지가 없는 평온함이 아니라 큰 위기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를 자유를 원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의 죽음으로 큰 여론을 형성해도 정치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미래를 위한 길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이의 곁을 떠나고 싶을까?

 

하지만 그 아이가 살아갈 미래가 비참하고 노예와 같은 삶이라면 그들은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다면 삶의 목표와 희망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Hunger>는 매우 불편하고 끔찍한 영화다.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영화 <Hunger> 감독은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식을 시도한 아일랜드 죄수 한 명이 가톨릭 신부님을 모시고, 대화를 나누는 롱 테이크(Long take)이다. 영화 카메라에서 일정한 화면을 맞추고 거기서 계속 쇼트(화면의 전환) 없이 계속 촬영하는 모습이 대략 15분 정도 아닐까 싶었다(그 모든 대사를 외웠고 완벽하게 소화했으니!). IRA 요원은 단식투쟁을 하기 앞서 신부님에게 자신의 결의를 밝힌다. 신부님은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한다. 결국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IRA 요원은 자신이 그렇게 죽어도 그 일을 할 것이라 말한다. 어린 시절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자신이 모든 책을 졌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말이다.

 

우리는 가끔 이길 수도 없는 거대한 운명의 적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다.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아니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을 알면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은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가라고 하면서 뒤에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뒤쫓는 부류가 많다. 개인적으로 타인의 고통과 약자의 슬픔을 알아주지 않은 자들이 사회의 정의나 국가의 정치를 논하는 것만큼 가식적이고 멍청한 인간이 없다고 여긴다. 과연 그들은 이때까지 진심으로 자신의 이기심과 편안함을 버리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짊으려 했을까?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희생을 만들게 했는지 우리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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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2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 놓은 책 <슬픈 아일랜드>를 빨리 읽어보고 싶게 하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3-21 21:50   좋아요 0 | URL
하하
여러모로 제가 다이제스터 님의 책소화를 촉진하는 모양입니다..ㅎㅎ

yureka01 2016-03-2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의 역사를 보면 저항의 역사가 참 치열했구나 싶어요..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