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혈의 오펀스> 이것은 <건담>인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건담>이란 작품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개인적인 취향이 메카 장르 보단 일상물이나 개그 쪽을 더 선호한다. 그런다고 해도 전쟁물이나 로봇이 나오는 메카 장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메카가 나온다는 것은 전쟁이 필수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문명에서 전쟁은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은 영원한 이야기들이다. 최초의 문학과 서사라고 불리는 신화,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그리스신화에서 처음 알게 되는 인물은 제우스와 그의 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시인 호메로스의 의해 만들어진 <일리아스>이다. 트로이전쟁에서 영웅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에서 신인 아테네와 아폴론의 손짓이 전사들의 운명을 가른다.
<일리아스>의 거대한 분량의 서사시(詩)가 신화이면서도 전쟁을 노래하는 비극이기도 하고 영웅을 찬양하기 찬미가이기도 한다. 영웅의 등장은 언제나 위기와 갈등의 최고조에 등장하고, 그의 활약은 거대한 세력 안에서 이루어져 하나의 역사와 신화를 창조한다. 이렇게 거대한 세계와 이념 안에서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고, 거기서 등장하는 영웅의 활약을 노래하는 것이 그리스신화의 비극 시들이다. 영웅의 죽음은 자기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때 가장 강한 모습일 때의 자신을 남기고 떠난다.
이런 점을 <건담>에 비유하는 이유는 사실 건담이 미래공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이기에 SF 장르이기도 하나, 고대 그리스신화와 비교하여 그 기본적 명제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퍼스트건담>부터 주인공 파일럿은 우연의 사건으로 건담 프레임에 탑승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장을 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로 레이의 같은 경우는 살기 위해 건담에 탑승했다면, <역습의 샤아>에서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탑승한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전투 병기에 탑승했던지 그가 움직이는 의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보단 자신이 원하지 않은 거대한 조류에 의해 움직인다.
<건담>이란 작품은 이른바 거대서사(巨大敍事, Master Narrative)라는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건담>이란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대표적인 거대서사의 작품이다. 관념적인 이념 안에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에 도취하여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집단주의가 전쟁의 시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많은 <건담> 시리즈에서 그런 요소를 지닌 것과 아닌 것도 있다. 더블Z 같은 경우 자신의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오로지 건담 프레임에 탑승하는 조종사도 있듯이, 각자가 원하는 목표와 방향성이란 무한대이다. 그렇지만, <건담>은 조종사가 자의든 타의든 그 거대한 물결을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조종사는 아직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다.
<Thunder Bolt>의 경우 장교로 임관한 조종사가 나오나, 사실 그가 파일럿으로 활약해도 결국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지구연방군과 지온군의 대립)에서 빛을 내는 장기말 같은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2016년 1분기에 종료된 <철혈의 오펀스>는 기존 <건담>과는 상당히 이질감이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 거대서사라는 거대한 틀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대서사라는 거대한 틀을 부수기 위해 진행되는 작품이다. 그런다고 거대한 서사 밖이나 그것을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사소한 작은 이야기(小敍事, Small Narrative)는 아니다.
그 거대한 세력과 이념에 대항하는 다른 방식의 거대서사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철혈의 오펀스>에서 건담 프레임을 탑승하는 미카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살인기계처럼 철화단 리더 올가의 명령이나 의지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단지 자기들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담>의 작품세계를 본다면 관념적인 요소, 즉 상위기관이나 국가적 대립, 세력 간의 갈등권력자들의 이기심들이 인간을 운명의 시험장에 보낸다면 <철혈의 오펀스>는 거기에 휘말리는 인간들이 저항하는 이야기다.
2. 마주침의 철학
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건담> 그리고 <케이온>에 대한 글을 보다, 조금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 등장한 철학자와 그의 이론을 최근에 내가 독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출처 말고 다른 곳에서 그 글이 나올 때는 많이 웃었다. 그 사상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 철학자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면서도 거기서 철학을 교육했던 사람이다. 20세기 철학과 사상은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하다 나치정권 이후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프랑스로 바뀌었다.
21세기 철학이나 사상, 심지어 문화나 예술에서 프랑스가 최고로 된 것은 전쟁과 많은 연관이 있다. <건담>을 알려면 우선 전쟁의 비극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인간은 계몽주의(프랑스대혁명 정신)적 가치관인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의지보단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인 세계, 그리고 현재 살아가는 경제적, 환경적, 물질적 조건들이 어떤 식으로 정치나 사회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여기게 되었다. 19~20세기는 그야말로 전쟁과 혁명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자국의 국민과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착취했고, 전쟁은 많은 물자와 인명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전쟁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 유명한 사례로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일어난 볼셰비키혁명이다. 러시아 소비에트가 차르체제와 케렌스키 정권 붕괴 후 최초로 사회주의국가 설립 선언을 했다. 당시 혁명가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소비에트연방은 마르크스의 실험이 최초로 시행될 수 있었던 나라였다. 시행된 게 아니라 시행될 수 있다는 말은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적인 조건, 즉 물질적으로 하부에서 일어난 조건에 의해 상부의 체계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소비에트가 독재정치로 바뀌었고, 스탈린의 독재는 많은 이들을 충격을 몰아갔다.
문제는 소비에트연방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들어서 그들의 나라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21세기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나라에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고, 독일정부 같은 경우 마르크스의 도서가 유네스코 세계인류 문화유산에 등재됨과 동시에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정리하고 있다. 20세기 프랑스에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여전히 많았고, 우리가 그토록 저주하는 그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찬양하는 천재화가 피카소도 있다. 문제는 소비에트연방의 행보 때문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순에 빠졌고, 이때 새롭게 이론을 전개한 사람이 루이 알튀세르이다.
그의 저서 중에 <철학에 대하여>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이 되었고, 여기에 다시 새로운 유물론적인 가치관(아니면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을 대립시켜 새로운 방향을 나오게 한다는 우발적인 유물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이론을 그대로 <건담>과 <철혈의 오펀스>로 대치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철혈의 오펀스>에서 철화단은 어떤 철학이나 사상 그리고 이상에 대한 집착은 없다. 단지 그들이 시작하고 끝을 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의지이다.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사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자유와 평등적 가치관이 시작된다.
3. 갈라르호른의 모순
갈라르호른은 지구방위와 우주평화를 핑계로 아주 오랫동안 많은 권력과 이권을 누리고 있었다. 갈라르호른에게도 건담프레임이 존재했고, 아리아식이 본래 철화단의 소년병이 아니라 갈라르호른의 기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이 건담을 이야기할 때는 지구평화가 위기에 빠지고,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등장하는 공포의 기체라고 말한다. 갈라르호른은 건담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이고, 역사를 가진 무장집단이다. 그런데 <철혈의 오펀스>에서 오히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여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 명제를 망각했다. 화성을 침공할 때 소년병들이 무참하게 죽은 점, 권력 투쟁, 쿠델리아의 지구 행에서 보인 행위들은 테러에 가까운 만행이었다.
화성 인근에 위치한 갈라르호른 조종사가 지구에 왔을 때, 지구 조종사들은 화성 조종사가 지구출생이 아니란 점에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장면도 나온다. 갈라르호른의 역사가 오히려 갈라르호른이 시작했던 이상을 반대로 가게 되었고, 여기서부터 마주침이 발생된다. 지구의 평화라는 이념, 안위라는 슬로건은 오히려 평화를 파괴하고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지구 근처에 위치한 인공 콜로니에서 노동자들은 쿠델리아와 철화단을 보고 그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위해 도우러 온 조력자로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들이 그런 무장봉기를 하려고 했던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라고, 죽을 때까지 자신들은 여전히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하고, 그 장소는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했다.
이때 이들의 봉기를 뒤에서 조종하고, 오히려 이들을 반국가세력 내지 테러조직으로 내몰게 만들어 모조리 몰살당하는 비극을 보여준다. 결국 <철혈의 오펀스>는 거대한 세력 간의 다툼이란 거대서사의 일반적인 흐름을 벗어나 거대한 세력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몸부림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떤 전쟁이나 혁명, 큰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은 운명적으로 일어나는 것보단 본래부터 일어날 수 있던 에너지가 잠재되었을 뿐이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기 위한 도화선의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았을 뿐이다.
4. 철화단의 운명
철화단은 운명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진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함과 배고픔에 시달렸고,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빠져 나온 자들도 많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란 오로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정한 세계다. 갈라르호른의 침공에서 우연히 얻은 건담 발바토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담은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는 공포의 병기이다. 하지만 건담 발바토스 프레임은 갈라르호른이 가지고 있던 기체보다 성능이 뒤쳐진(제작년도가 상당히 오래된) 기체이다. 갈라르호른이 가지고 있는 다른 건담 프레임보다 더 건담의 원초적 요건을 갖춘 셈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쥐새끼들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이때 바로 쿠델리아가 등장하고, 쿠델리아는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어중간한 정보에서 쿠델리아는 지금의 현실을 바꾸자는 이상이 생긴다. 쿠델리아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이유, 그녀가 혁명의 소녀가 되어야 했던 점은 그녀가 철화단의 소년병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소년병들은 자신의 살 길을 원했지만, 그 길을 어떻게 찾아가야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오로지 올가의 명령에 따르고, 올가는 자신들의 고용주 쿠델리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철화단을 결국 현실에서 갖은 박해와 억압을 당하는 피지배계층이고, 쿠델리아는 자신이 원래 지배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향하는 이상주의자인 것이다. 그녀가 가진 이상은 분명 인간의 윤리적 가치로 본다면 옳은 것은 분명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델리아의 아버지는 자신을 갈라르호른에게 팔아넘기려 했고, 친구라고 믿었던 후미탄은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자의 첩자였다.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고, 그녀는 자신이 몰랐던 잔혹한 현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분노의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한 의미로써 철보다 더 강한 마음을 가진 혁명의 소녀로 탄생한다.
그녀는 화성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구와 지구 밖의 다른 콜로니의 사람까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많은 목숨이 자신에게 맡겨지고, 자신은 절망의 고통이란 이름을 가슴에 품고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했다. <건담>에서 쿠델리아의 영향으로 전투 장면보단 그녀의 발언과 정치적 행위에 상당한 시간에 할애되었다. 또한 쿠델리아와 철화단의 움직임이 단순히 그들만의 의지뿐만 아니라 뒤에서 이권을 노리는 자들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갈라르호른은 부패했고, 그들은 세계 정치와 경제 이권에 많은 부분을 간섭했다. 갈라르호른의 배제는 단순히 인간불평등을 해소하는 길만이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보이지 않았던 손’까지도 움직인다.
어떤 큰 사건들은 누군가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을 움직이게 되는 계기는 잠재된 에너지와 토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쿠델리아의 지구잠입은 어느 마카나이의 정치적 이익, 상회들의 경영이익, 갈라르호른의 부패, 화성인들과 사회적 약자의 분노가 충만한 상태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도착한 것이다. 물론 쿠델리아가 움직이는 것 역시 그 임계점의 도달에서 본 잔혹한 현실을 각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대한 세계에 그녀는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갈라르호른 입장에서 쿠델리아는 지구평화를 방해하고, 세계를 혼란으로 빠뜨리려고 하는 최악의 인물이고, 그들은 쿠델리아의 철화단, 심지어 무장봉기(무기를 일부러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내주고, 거기에 때맞추어 토벌했던)를 하던 노동자까지 평화를 파괴하는 대상으로 봤다. 평화라는 것은 누군가의 입장, 누군가의 권력, 누군가의 이익에 의해 판도가 바뀐다. 만약 쿠델리아가 뒤에서 방송회선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면 쿠델리아와 철화단은 완벽한 테러리스트로 몰릴 뻔했다. 이미 갈라르호른은 언론까지 장악한 점에서 부패의 깊이가 매우 심각했다.
5. 탈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인 철화단과 쿠델리아
철화단의 소년병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한 고아와 노예였다. 그들은 폭력과 억압에 의해 강제로 노역과 전투를 해야 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현재 목숨을 바라보고 산다. 그들에게 내일이란 미래란 있을까? 인간에게 미래와 내일 그리고 희망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살아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철혈의 오펀스> 후반으로 갈수록 철화단은 마치 광기에 젖은 짐승처럼 전장을 누빈다. 아직 사춘기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소년이 무기를 잡고, 적을 향하여 투쟁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때까지 자신들은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도구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생물학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에서 어떤 이상이나 이념에 구애되지 않았다. 단지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1기 엔딩곡 ‘오펀스의 눈물’을 보면 매우 슬픈 멜로디와 반주가 들린다. 평화로운 넓은 들판에 건담 발바토스가 철화단 멤버들과 평화롭게 앉아있다. 살상병기가 평화의 상징이란 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들의 살 곳을 찾기 위해서는 현실의 부조리와 투쟁할 수밖에 없는 충돌이 일어난다.
갈라르호른이 말하는 질서와 평화라는 이데올리기, 갈라르호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철화단, 그래서 철화단은 탈 이데올로기적인 모습으로 갈라르호른과 충돌한다. 문제는 여기서 쿠델리아는 탈 이데올로기화된 철화단의 이데올로기로 된다. 쿠델리아의 연설은 철화단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만 아니라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대변해준다. 철화단이 갈라르호른을 거부하여 저항해도 결국은 자신들이 살아간 사회라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 커뮤니티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길, 이상과 이념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쉽지 않고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철혈의 오펀스> 오프닝에서 쿠델리아가 심각하게 망가진 건담 발바토스의 모습을 보고 있다. 1기 마지막에서 건담 발바토스는 자신의 부하를 견디지 못해 심하게 파손되고, 조종사 미카는 눈 하나를 잃고 팔 하나가 정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이 철화단이란 이름으로 영원히 꽃이 지지 않은 강한 철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오직 그 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탈 이데올리기의 한계점은 저항의 시작이 되나, 한 번 튀어나간 이상 다시 선로를 찾지 못하면 증오의 광기로 얼룩져 결국 마지막에 파멸하고 만다. 부조리한 거대서사에 대항하나, 결국 자신들 역시 거대서사라는 사회로 들어오게 된다. 단지 그곳에서 갈라르호른처럼 부패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갈라르호른처럼 자신만의 역사에 갇히지 않은 채 자신들의 처음 모습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스스로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