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 대한민국 네티즌이 열광한 KBS 화제의 칼럼!
박종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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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방송국에서 한국경제를 다룬 박종훈 기자의 컬럼이 <대담한 경제>라는 책으로 나왔다. 본래 경제학 전공출신 전문기자인 점에서 그의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는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일반적인 사람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다. 도서모임에서 한 번 소개받은 서적으로 내용이 어느 정도 전문성을 높게 다룰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일반대중을 위한 책으로 보편적이고 쉬운 문체로 작성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인이 보기엔 좋을지 모르나, 깊이 경제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책이 말하고 있는 초점이나 대상이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의 설명으로 진행된 점에서 심도 있게 들어갈 수 없는 점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책에서 경제학을 다룬 점에서 기억나는 이름은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 그리고 슘페터이다. 둘 다 경제학자인 점에서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저술 시기는 영국에서 중상주의를 강조하던 시기다. 그런데 지금 경영학자 중에서 중상주의를 표방하는 자도 많으며, 국가정부와 대기업의 행동을 보면 신자유주의라고 하나, 막상 그것은 중상주의에 가깝다.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낡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지금의 국가정책은 애덤 스미스가 그 당시 매우 낡아 빠졌다는 중상주의와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다. 과연 어느 것부터 우선적으로 낡아빠진 정책인가?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본다. 시카고대학, 이른바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하고 매우 관련된 대학교, 시카고학파가 존재할 정도로 시카고대학은 미국 경제학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연관이 있다. 20세기 아니 21세기에도 하이에크와 밀턴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통화의 정책과 정부의 관여성에서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는 것, 즉 시장자유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의 “보이지 않은 손”과 다른 “보이고 싶은 않은 손”이 되고 말았지만, 적어도 신자유주의는 최소한 시장조율에서 소비자를 바보로 취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소비자와 생산자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자본과의 관계성은 다변적이면서 한편으로 단순하다.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상은 제각각이나 모두들 경제적인 경영적인 마인드는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에 대한 서로의 관점에서 변수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대상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현실적 조건이다. 중상주의가 문제인 점은 국가와 대상인 간의 정경유착 관계가 물가를 좌우하고,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킨다. 심지어 별 것 아닌 제도조차 건축양식과 의복문화까지 바꾸니 경제라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벗어나려도 벗어날 수 없는 필수불가결적인 존재다. 다시금 애덤 스미스를 논하고 싶은 것은 경제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경제부분 기자가 말한 것처럼 경제의 필수는 돈만 버는 것만큼 돈이 현실에서 돌고 도는 게 중요하다. 즉 필요한 물건이 제대로 돌아가게 해야 경제가 사는 것이다.

 

중상주의 한계, 잡 집어내듯이 최근 우리나라는 무역흑자를 맞이했다고 한다. 외화관계에서 수출이 수입을 초과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수출입 관계에서 수출의 증대가 아니라 단지 수입이 적게 된 것이었다. 스미스는 수입이란 것을 지나치게 의존하면 문제지만, 수입하지 않아도 문제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필요한 재화를 구할 수 없을 경우 생활의 질이 하락되고, 현재 그 삶의 질이 낮아짐에 따라 사람들이 수입물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결국 경제적으로 성장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다.

 

나도 언제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주변에도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도 버거워 하는 것이 부동산 문제다. 국내는 부동산이 주요 시장이 되었고, 부동산으로 들어가는 국가세금과 국민의 경제력, 토목건설공사로 많은 국가세금이 나라를 갉아먹고 있다. 왜 국내 경제가 어려운가? 그것은 경제라는 것은 생산을 하면 소비가 되어야 하고, 소비가 되려면 임금이 필요하다. 임금을 받아야 하나 취업이 잘 안 되고, 하더라도 비정규직이 되어 임금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여 기계의 도입은 많은 임금노동자를 거리로 내몬다. 그런다고 공장기계나 도구를 부수는 과거의 행태는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된다면 새로운 가치관을 맞이하고, 거기에 대한 대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바둑시합에서 구글에서 나온 알파고 컴퓨터가 바둑9단 선수를 5전 4승으로 이긴 적이 있었다. 뉴스에서 나온 말이 알파고의 기능이 상용화 되면 지구의 일자리가 반 정도가 사라진다. 인간 생활 진보를 위한 도구가 오히려 인간을 삼키는 도구로 도래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던 일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응책은 새로운 변화를 맞춘 기술이 필요하고, 거기에 많은 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최근 제사를 지내러 시골에 가면서 작은아버지하고 우연히 정수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수기는 기본적으로 막여과라는 섬세한 여재를 이용하여 이물질을 제거한다. 내가 다니는 사무실의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는 도중, 정수기를 살펴보니 정수기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우는 집수통 바닥이 붉은 색을 띠었다. 원인은 아마 물속에 있는 산화철일 가능성이 높다. 수도관이 알루미늄이나 콘크리트도 사용되나 과거에 주철관 같은 쇠를 사용했다. 물의 화학반응은 쇠를 산화시키므로 정수기의 기능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작은아버지는 정수기 교체에서 미국 것을 사용했는데, 과거의 물맛과 다르고, 그 물이 고급 커피숍에도 사용될 정도로 좋은 물건이라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생각하면 물에 대한 설비기능, 환경적인 관점에서 결국 장비의 수준은 신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국내 정수기업체가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라 만드는 흉내 내기가 가능해도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내는 창조성은 없다. 창조경제를 외치나, 창조적인 것은 과연 그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1세기에 도래하기 전에 이미 20세기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맞이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서 문제는 대량생산의 기능은 증강하는 반면 대량소비의 기능은 감소한다. 인간이 하루식사 량이 정해져있고, 옷을 입을 수 있는 개수도 한계다. 그런데 웃기게도 먹고사는 것이 걱정인 21세기가 되었다. 생각하면 간단하다. 좋은 먹거리와 좋은 옷을 사야할 돈이 쓸데없는 곳에 사용되거나 또는 억지로 돈을 꼴아 박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 원하고 조장했는가? 국민들은 정부 책임론을 말하나, 막상 그런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다. 심심하면 일어나는 것이 우리 집 앞에 왜 고층 아파트를 세우는지 혹은 왜 우리 동네 주변 산업단지나 대규모 공단이 오는가에서 그것을 만드는 민간업체의 무책임도 있지만, 그것을 허락해주는 정부의 기능도 있다.

 

그런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고, 그것을 용인한 것도 국민이다. 부동산 경제에 대한 문제는 금리인하 후 무리한 대출로 집에 대한 과다한 가격으로 집이 없는 사람들이나 혹은 집을 빚을 내서 구매한 사람들은 대출이자 원금으로 고생한다. 그런데도 빚으로 구매한 집값이 오르기를 바란다. 집값으로 서민들은 고민하면서도 차액을 남기려고 하니, 결국 집 말고 다른 곳에 사용될 돈이 적어진다. 돈이 없으니 결혼하기도 부담스럽고, 아이를 낳아 길러주는 것은 거의 각오해야 할 수준이다. 한국 인구에서 재생산될 수 있는 인구, 즉 여성 1인당 출산비가 1.1 조금 넘는다. 여성 1명이 아이 1명을 조금 넘게 낳고, 문제는 그 아이들조차 모두 100% 무사히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는 18세기 이전부터 문제라고 지적했고, 스파르타가 용감해도 인구감소로 모두 멸망했다. 그 원인은 빈부격차이고, 빈부격차는 재생산이란 경제적 시스템을 파괴한다. 새로운 노동인구의 생성은 새로운 시장경제의 원천이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인재다.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시대까지 인구가 급속히 폭발하다 이제 그 당시 인구가 노년화로 되어 노동력을 상실 후, 집에서 연금을 받아야 하나, 점점 이들을 부양할 젊은 계층들이 감소되면서 한국사회는 침하하고 있다. 문제는 이 중요한 안건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본다고 해도 그 객관성이 공공의 영역으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이익에서인지 혹은 집단적 이권에서 보는 지에서 큰 갈림길이 나누어진다.

 

한국사회의 경제는 단순히 한국만의 입장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흐름과 더불어 기존 한국 사회의 변화가 복잡다양하게 얽혀 움직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 대안을 어떻게 찾을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비롯되는지를 알려면,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가 단순히 기록물의 누적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전쟁, 외교,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종훈 기자의 <대담한 경제>는 기본적으로 외국의 역사적 문헌에서 경제적 문제를 찾아내어 현실의 한국사회와 대조한다.

 

누군가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생각할지 모르나, 민주주의 개념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철학적 사상도 없이 일반적인 국가권력 계몽주의는 단지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세뇌시킬 뿐이다. 특히 경제는 그렇다. 어떤 이권이나 이익이라도 그 최종적 형태는 경제적 조건으로 드러난다. 말로만 청년실업, 노년빈곤, 출생률 저하, 내수침체를 말하나 그 기초는 어디서부터인가? 최근 담배와 술 가격이 올랐다.

 

한국의 세금출처에서 간접세가 절대적이다. 술과 담배 가격이 올랐다는 것은 세금이 부족하고, 세금이 부족한 이유는 원래 거두어야 세수가 구멍이 나서 대신 메운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대담할지 모르겠다. 어째든 작가는 마지막 말에 희망은 있다고 보나, 희망은 여전히 죽어나가고 있으니 어찌 <대담한 경제>가 아닐 수가 있을까? 물론 저자도 언급하듯이 사토리 세대, 일본의 청년층들의 뭐든지 포기하기(마음이 편하지?)는 당장 불만이 보이지 않은 나라가 불능이 되는 지름길이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 마음은 당장 편할지라도 모순의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단지 현실도피라는 마약을 과다하게 섭취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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