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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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를 본 후 사람들은 광해군에 대한 호감도가 많이 올라갔을 것이나, 사실 광해군이 보여준 선정은 진짜 광해군이 아니라 하선이란 불리는 놀기 좋아하고 재주 많은 사내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광해군이 보여준 장점과 단점은 분명 존재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려낸 박시백 화백이 말하길 자신이 좋아하는 조선임금 중에 광해군도 포함되어 있으며, 게다가 광해군이 조선임금 중에서 그나마 밥값을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실 광해군에 대한 논점은 역사학이나 일반 대중, 혹은 인터넷 공간에서 분분하다. 그러나 현실은 광해군에 유리한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에서 유교사상이 아직 내려있다. 하지만 공자의 유학보단 주자의 성리학에 의해 만들어진 유학이 강하다. 공자의 수사학적인 관점보단 주자학의 성리학적 멘탈리즘은 새로운 학문을 펼치기보단 꼰대주의적 방향으로 틀기도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가? 그것은 향교에 배향된 유학자들의 위패를 보면 알 수 있다. 고려와 고려이전 시대는 둘째치더라도 조선의 인물을 보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김인후, 이황, 이이, 조헌,

성혼,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로 조광조까지 사림시대를 열어간 시대의 인물이다.

 

특히 조광조 선생의 기묘사화는 연산군 시대의 갑자사화와 다른 성격이다. 성리학의 세력이 중앙권력자인 훈구세력과 지방산림에 포진된 신생선비들의 대립에서 일어난 것이 기묘사화라면, 갑자사화는 연산군 시대의 폭정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조광조 이후는 조금 다르다. 명종이 죽고, 그의 종실인 하선군을 선조로 옹립한다. 선조는 당대 명재상 동고 이준경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고, 명종 때의 부패한 정치를 해결하려 했지만, 선조 역시 기축옥사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선조 시대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고, 서인은 추후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다.

 

동인과 서인의 분류에서 중요한 것은 동인에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서인에서 율곡학파로 이어지고, 동인은 퇴계학파가 남인이 되고 북인은 남명학파가 중심으로 올라간다. 이황과 이이를 제외한 후대의 성리학자를 보면 대부분 서인계통이다. 조헌과 성혼은 율곡 이이과 가까운 사이이고, 김장생, 김집 역시 조헌과 성혼의 뒤를 이은 서인의 영수이다. 더구나 이들은 광해군의 실정을 주도한 인조반정의 대표적 인물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노론의 대표적 인물이고, 박세채 역시 송시열과 혈족관계에 있는 점에서 조선의 유산인 향교의 반 이상의 서인계 인물이란 점이다.

 

향교의 인물에서 유학에 지대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보면, 차라리 의병장 조헌보단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더 뛰어난 인물이고, 사상적 실학적 유학적 유산으로 보자면 송시열보단 백호 윤휴 쪽이 더 많은 서적을 남겼다. 조선실록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드러난 인물은 우암 송시열이다. 분명한 사실은 뛰어난 유학자이나, 그의 학문은 부드러움이 없었다. 광해군 시대에 처음 시작은 선혜지법은 대동법으로 이어지나, 산림의 거두였던 송시열은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대동법을 반대했다. 대동법은 농민의 부담을 줄기위한 도량화 작업이나, 그가 반대한 이유는 노론의 대부분은 농가의 대지주였던 점이다.

 

대신 한양 중심에 있던 한당(漢黨)이란 불리는 서인계열은 대동법을 찬성했고, 김육이란 분은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걸은 서인계 유학자이다. 광해군과 서인들의 대립은 이렇게 복잡하게 시작된다. 당쟁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광해군이란 그저 중립노선 외교주의자 또는 잔혹한 폐모살제를 저지른 인물에 불과하다. 한명기 교수가 저술한 <광해군>2000년 초판이 나왔고, 20182판이 새로 나왔다. 그동안 반양장본을 나오다 아주 깔끔한 하드커버가 씌워진 도서로 제작되었다. 게다가 책을 사면(물론 5만 이상 소비해야 하나) 광해(光海)라는 한자가 찍한 머그컵까지 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고,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다. 그때나 지금의 특징은 당시에 북한의 권력자 김정일이 있었으나, 이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도 세월의 부침에 따라 세상을 떠나고,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위원장으로 있다. 단순히 북한과 한국의 대립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시 외교적 정쟁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이 상당한 입김이 작용했다. 최근에 일본의 입김은 줄어들었다. G2에서 중국의 변화와 거기에 드러난 트럼프 정권은 새로운 권력구도를 만들어내었다.

 

중국을 두고 공산국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나, 사실 그 속내는 상당히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도래했고, 중국은 사회주의적 노선보다 자본주의 노선에 가깝다. 사회주의란 단지 모택동이 중공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건국헤게모니에 불과하다. 중국의 개방화는 세계의 분쟁이 이념의 문제에서 점차 경제적으로 변모했다. 명분과 실리에서 실리로 가게 되면서 세계의 시장구도는 변모했다. 중국의 물품수입을 제대로 하지 않은 한국이 이제 중국에서 많은 물품을 수입하고, 공장도 세우고 사업도 연다. 이제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식량과 공업품이 우리 일상을 덮는다.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쟁에 뛰어들면서 북한은 20세기 중후반처럼 이데올로기만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최근 외교적인 모습이 불과 2년과 다르게 변모하는 것은 세계적인 강대국들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대략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광해군의 이름이 다시 불려나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조선은 생각보다 평화로우면서도 아주 참혹했다. 한 국가가 600년이나 지속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며, 전쟁을 그래 겪고도 왕조가 존재하는 것조차 어렵다. 중국의 역사에서 큰 전쟁에 타격을 입으면 그 국가는 망한다. 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도 살아났다.

 

대신 민중의 삶은 헐벗고 고통이었다. 전쟁의 피해는 곧 민중의 삶을 그대로 반영된다. 고대의 전쟁은 창과 칼이나 현재는 미사일과 첨단무기이다. 한사람이 한사람씩 죽이는 게 아니라 한사람이 수만 수십만의 인간을 죽일 수 있다. 광해군이 가진 장점이란 바로 그런 시기에 어떻게 하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다. 전쟁을 하려면 많은 장정이 필요하고, 임진왜란 후 인구가 반 정도 사라진 현실에서 수많은 장정을 내보내면 국가적으로 손실이고, 거기에 필요한 군수물자는 백성의 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장정들이 타국에서 죽으면 그 가족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광해군 시대 삼하전투 희생자들의 부모는 다 임진왜란 당시 아비규환의 고통을 겪었다. 광해군 역시 자신도 피란의 고통을 당하고, 명나라 장수 앞에서 수모를 겪으며, 분조를 지휘하며 목숨을 잃을 뻔했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백성을 보며 그가 느낀 조선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성을 짓는데 정신이 팔리고, 개똥이란 궁녀에게 속임을 당해 왕위를 잃는다. 내정에 제대로 돌보지 못함은 실수였고, 남인과 서인을 제대로 다독이지 못한 것도 실수이다.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처럼 임진왜란 당시 같이 고통을 나누던 원로대신을 제대로 지켜주지 않음도 실수다.

 

권력의 정점에서 권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함은 책임이 크다. 그러나 이후는 그보다 못했다. 광해군 이후 밥값을 제대로 했던 임금은 누구인가? 생각하면 정조 이름을 빼면 그다지 나오기가 어렵다. 인조는 병자호란에서 임금의 자질을 이미 절실히 보여줬고, 폐모살제란 명분에서 인조 역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소현세자와 그 가족을 박대했고, 종실에서 반역의 기미가 보이면 그 역시 숙청했다. 숙종 때 이르러 삼복의 옥사는 가까운 집안 아저씨조차 사약을 내리는 비정한 임금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당쟁에 의한 무고와 정치적 전략이었다. 여전히 백성에 대한 학대는 심했고, 백골난징과 황구첨정은 계속 나온 말이다.

 

광해군이 그렇게 무능했고, 성을 짓는 공사에 예산을 탕진했다면, 인조는 모문룡에 바친 것은 조선 전체예산의 30% 이상이라면 차라리 성을 짓는데 돈을 투자하는 게 나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행위를 문제 삼아 뒤집은 결과가 그 이상으로 되지 못했다면 의미 없는 행위일 것이다.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주인공은 인조반정 당시 아버지가 반정세력에 의해 참수되는 장면을 본다. 그로부터 14년 후 어른이 된 주인공은 병자호란을 겪고 자신의 여동생과 매제가 청국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구하기 위해 싸운다.

 

이때 조선의 관군은 해결사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여진족에게 사냥대상에 불과하며, 조선민중은 포로로 끌려갔을 뿐이다. 병자호란이란 거대한 서사에서 이 영화는 병자호란의 정치적 색깔보단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쟁하던 남매와 소꿉친구를 보여준다. 물론 인조반정이 실패한 정치였다는 것은 영화 전체를 보면 알겠지만, 조선이란 국가의 운명도 중요하나 그보다는 나와 내 주변의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가 내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결국 내가 지킬 수밖에 없는 점이다.

 

조선의 향교에 배향된 인물은 병자호란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이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을 본 사람도 있다. 게다가 북벌을 주장하면서 말로만 그래하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인물도 있다. 청나라의 위세를 알면서도 내부적으로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청나라는 이중적인 잣대가 적용된다. 청나라에게 분명히 패배했지만, 조선은 청나라에게 패배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청나라 사신이 오면 은을 상당히 제공하고, 온갖 거드름에 비위를 맞추며, 청나라 편에서 통역사를 맡은 자는 과거 천인이었지만, 조선에서는 당상관보다 더 높은 권세를 보여줬다.

향교에서 임진왜란 전후의 인물로 조헌과 성혼이 있으나, 사실 임진왜란에서 더 높은 활약과 학문적으로 더 뛰어난 인물로 서애 유성룡이 있다. 향교에 퇴계 이황 이후로 남인계열 학자는 없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들은 역적 내지 사문난적, 천주학쟁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그 이전에 기축옥사에서 곤재 정개청이나 삼봉 최영경 등 같은 명유도 죽임을 당한다. 사실 퇴계와 남명 아래 수학 받은 유학자 중에 상당한 학문을 가진 자도 있었고, 연구자료도 남긴 것도 많다. 그러한데도 여전히 향교의 배향은 현재도 그러하다. 조선의 유학을 두고 세계 유학학회에서는 조선의 정약용을 빼놓지 않는다.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분명 명유는 존재하나, 향교는 그 명맥이 끊긴 점이다. 서인의 정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왕실과 혼인하고, 지방산림의 거대한 유학자를 올려 중앙집권에서 왕을 압력하고, 지방에서도 중앙으로 입김을 작용하여 권력의 카르텔을 완성했다. 광해군은 기축옥사가 일어날 때 일개 왕자였고,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가 반정에 의해 실각하자 여진족에 의해 조선이 치욕을 당했다. 그러나 당쟁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선조는 기축옥사로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세자거취로 서인을 견제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남인을 활용하면서도 끝이 나자 남인 대신 북인(이산해)을 불렀다.

 

말기에는 대북파 대신 소북파 유영경을 신임하다 세상을 떠났다. 선조가 저지른 붕당의 피는 광해군 시대에 대북파의 독주로 이어지고, 결국 서인에 의해 폐위된다. 광해군의 정치사는 단순히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구도가 외부의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점이다. 국내 정치에서 현재 대통령이 촛불에 의해 태어났지만, 최근에 촛불을 배신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광해군의 역사적 현실을 봤을 때, 광해군은 권력의 구도에 의해 정치권력을 추구하던 그들의 명분에 맞게 돌아갔기 때문에 성공했지만, 지금은 국민이 정치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이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게 아니다.

 

물론 그 당시 외부의 조건, 내정의 여건, 이미 그 현실을 만들어낸 토대에 의해 움직인다. 선택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선택이란 몇 가지 갈림길만 두고, 그 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높은 언덕뿐이다. 언덕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어느 길이 답이라 말할 수 없지만, 답을 정해놓기 보단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결국 과거의 길을 다시금 밟아볼 수밖에 없다. 과거처럼 정권에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멋대로 감옥에 잡아와 장형으로 죽게 만들고, 가족들과 친구, 그 친구의 가족조차 잡아 죽일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오던 사람들을 역사책에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구루시마군을 울돌목에서 격파할 때, 자신의 수하 안위 장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위가 물러서면 군령에 의해 참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안위는 살아가기 힘든 여건에 있다. 안위의 삼촌뻘 되는 사람이 기축옥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정여립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위가 임진왜라에서 공을 세워도 추후 정묘호란이 일어날 때 기용하지 않는다. 그가 정여립의 조카라는 사실이다. 기축옥사가 1589년이고, 정묘호란이 1627년이다.

 

당장이라도 조선이 망할 위기인데도 당쟁의 관계성을 따진다. 광해군시절의 중요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광해군 시대에 이순신의 사당이 제대로 생겨났고, 유성룡의 병산서원의 액자가 내려졌으며, 원균의 가족이 받던 녹봉을 중지했다는 점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원균의 가족에게 다시 곡식이 녹봉으로 내려졌다. 선조가 공신목록에서 1위 이순신의 옆자리에 원균과 권율을 올리는 것은 다소 과도한 처사이다. 차라리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순신 옆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아니면 진주성의 김시민 장군 정도면 말이다.

 

광해군은 위에 거론한 인물과 동시대에 살아간 인간이다. 권력의 최고점에도 있지만,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던 인물이다. 시대는 변화 하고, 전쟁의 상흔은 남아있다. 한국 역시 한국전쟁의 상처가 70년이 지나지 않았다. 전쟁의 비극, 배고픈 시대, 암울한 정치, 권력에 의해 숙청되는 지식인과 정치인, 외교적 갈등 등을 보면 400년 전에 혼란하던 광해군의 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향교와 관련하여 전주 경기전에 놀러간 적이 있다. 신혼여행 이후 데이트스냅을 찍으며 경기전과 전주향교를 거닐었다.

 

경기전을 재건한 인물이 광해군이고, 광해군이 폐위된 후 숙종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그곳에 모신다. 전주이씨 문중을 매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제사를 지낸다. 과거 조선시대의 의복을 입고, 한자어로 된 축문을 읽는 그들이 우리에겐 과거의 유산일까? 아니면 현재의 새로운 관광자원일까? 적어도 그들이 전주이씨 문중이면서도 과거의 광해군이란 먼 조상친척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복거리에 많은 여성들이 개량한복을 입고 셀카를 찍거나 아니면 추억을 기념할만한 인생사진을 남긴다. 이러나저러나 광해군은 문제가 많은 임금이나 밥값은 제대로 한 임금은 분명하다. 전주의 한복거리를 거닐며 수많은 인파가 즐거운 얼굴로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다.

 

광해군, 그도 사실은 한복거리처럼 수많은 한국인, 조선인의 후예들이 즐거운 삶을 살기를 바랐을까? 광해군이 다른 왕자와 같은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반찬이 뭐냐고 물었을 때 다른 왕자와 달리 지혜로운 답을 내놓았다. 소금이라 답을 했다. 소금이 있어야 음식의 맛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과 지금까지 지위와 계급, 부와 빈을 막론하고 한국과 동양에서 쌀과 소금은 모두가 공통으로 먹는 음식이다. 소금은 왕자인 본인도 물론이고, 길가의 봇짐장수조차 먹는 음식이다. 전쟁의 아픔과 당쟁의 피로는 스스로를 결국 몰아갔다. 그가 남긴 업적과 실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호불호가 갈린다. 하지만 적어도 100년 전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라면, 그가 남긴 업적이 우리에게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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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6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6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8-11-26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리뷰입니다.잘 읽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11-28 10: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덧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일에 쫓긴지라..ㅎㅎ
 
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나 아렌트를 말한다면 대부분 사람은 아이히만을 생각할 것이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다. 그가 무고하게 죽인 유대인 수는 차마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나치 전쟁범인들이 국제재판소에 판결을 받고, 그들은 그 죗값에 따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21세기 우리 인류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로 남아있다. 바로 그 아이히만에 대한 연구를 독특하게 진행한 사람이 한나 아렌트다. 유대인 여성인 이 학자는 20세기 중반 최고의 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아래 수학 받고 추후 카를 야스퍼스 아래서 학문을 지도받는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20세기 관념철학 즉 형이상학자로선 최고의 학자이다. 그러나 그가 나치와의 관계성에서 다소 문제가 있으나, 그래도 하이데거의 명성은 21세기에도 <존재와 시간>을 통해 충분히 그 가치를 드러낸다. 하이데거는 19세기 학문에서 관념론과 더불어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를 읽으면 니체가 조금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연구함으로써 인류 악에 대한 기원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20세기 철학사상 도서 중에 상당히 우수한 서적으로 뽑혔다. 하지만 모든 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이번에 내가 처음 읽은 <인간의 조건>은 바로 그러하다. 내용은 다소 난해하면서도 또한 일률적이지 않은 흐름을 가진다. 게다가 마지막은 다소 의외의 내용이 전개된다. <인간의 조건>이란 말처럼, 인간이란 무엇이고, 그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위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이 옳은지를 탐구하기보단 그저 인간이란 존재는 노동, 작업, 행위라는 3단계로 구분하여 여기서 가장 좋은 것은 행위, 가장 아래는 노동으로 치부했다. 물론 노동이란 힘든 일이다.

 

아렌트가 적은 글을 보자면 노동은 고대 그리스로 올라간다. 그리스 사회 즉 polis, 폴리스 국가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그리스의 최고의 사상가를 뽑으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서구철학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사회는 인간사회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노예제도 있었던 사회이다. 그리스의 민주정이 있다고 하나, 여성과 아동, 이방인 그리고 노예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사적은 영역, 즉 가정의 노동과 생계를 위한 노동을 일구어야 했다.

 

사적인 영역에서 실행하는 노동이란 그저 단순하고 평범한 일이다. 인간으로써 나은 삶을 추구하기보단 그저 그 삶에 안주하여 만족하고 살아가는 부류일 수도 있었다. 그 다음에 나온 인물들이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드는 존재이다. 인간의 문명은 그저 발달된 게 아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정복을 했고, 정복의 대상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까지 이어진다. 도시의 개발은 더 많은 자연을 파괴해야 했고, 자연의 파괴로 인한 자원이 부족할 때, 서로가 가진 잉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을 한다.

 

인류의 투쟁은 전쟁이란 극단적으로 실행되는 정치행위로 변모되었고, 정치적 투쟁은 더 나아가 정치제도의 정책안을 수립하는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전쟁과 관련하여 아렌트가 다소 놓친 부분은 폴리스 국가에서 주인이던 자들은 모두 군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군인이기에 무기를 가질 수 있었고, 무기를 가질 수 있기에 무술을 연마하고 체력을 키울 수 있었다. 플라톤은 정치적으로 현인이기도 하지만, 권투와 레슬링을 전문으로 하던 체육인이기도 하다. 전쟁의 승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의 세련도가 있지만, 그 무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전사가 필요했다.

 

폴리스 국가에서 폴리스 그 자체를 두고 아렌트는 그것이 하나의 국가라고 했다. 국가의 존재성에서 토지개념이 있어야 하나, 무기를 들고 있는 시민이야말로 폴리스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접 전쟁을 수행하고, 전쟁과 관련하여 정치와 사회시스템이 움직이므로 공론의 장에서 당연히 행위의 당사자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고대의 전쟁과 근대의 전쟁은 다르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실수한 점은 바로 그것이다. 폴리스 국가에서 공적영역에서 자신들의 다원화적인 가치를 주장하던 이들은 지배자들이다.

 

지배자들이 전쟁을 수행했고,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죽으면 그들만의 종교관념 안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영웅의 최후처럼 비교된다. 노예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누릴 기회는 없다. 왕과 귀족이 직접 병사를 지휘하고 앞서는 시대, 그러나 아렌트가 살던 시절은 왕과 같은 최고 지휘관은 전장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후방에 위치한 전투지휘소에 지휘한다. 그것도 상당한 안전과 보안 속에 말이다. 고대의 전쟁은 지배자들의 권력을 스스로 보여줄 수 있지만, 근대로 이르러 전쟁은 피지배자들을 죽음을 내몰아 권력자와 경영인들이 이득을 취한다.

 

전쟁을 선포한 자들은 총을 들지 않지만, 전쟁 실행 가부결정권이 없는 청년들은 죽음의 땅으로 향한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바로 이런 점을 간과했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은 단순히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노동자에 불과하다. 보초를 서고, 총을 잡고 돌격하며, 떨어지는 폭탄에 두려워 땅에 얼굴을 파묻는다. 전쟁에서 공론의 장은 통용되지 않는다. 물론 전쟁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삶은 늘 전쟁과 같은 상태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국민들은 누군가에게 고용된 노동자이거나 직원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살던 시절은 아주 복잡하고 난해한 시대이다. 세계대전이 2번 일어나고, 나치에 의해 망명을 선택한 그녀가, 전쟁이란 불확실적인 삶에서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 그녀는 엘리트이고, 매우 똑똑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도 똑똑하고 상류사회의 인간이다. 그녀는 결코 하류사회를 겪지 않은 사람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미국은 대공황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세계도 역시 불황으로 인한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공황에 대해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과잉생산으로 인해 물량이 남아 더 이상 시장을 개척할 수 없을 경우 공황이 일어난다고 했다.

 

공항으로 물가는 치솟고, 일자리 고용은 저하된다. 전쟁과 관련하여 공항의 관계성은 중요하다. 억지로 만들어진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농촌에서 작물재배가 지나칠 정도로 풍년이면 농작물은 땅에 그냥 버린다. 상품의 수요가 소비의 비율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농산물은 그나마 다른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비료와 가축사료, 가공식품 등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나온 물건은 다르다. 농장이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빚만 없다면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공장은 다르다. 생산품을 팔지 못하고 노동자의 임금과 더불어 공장운영비조차 감당이 불가하다.

 

전쟁의 효용성이란 바로 묵은 상품들을 처분하기 좋은 기회이다. 상품의 처분은 기업가에게 큰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다시 경제 활성화를 누린다. 단지 조건은 전쟁터가 본국만 아니면 된다. 전쟁특구의 사례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연합군의 군수 공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공론의 장과 관련하여 전쟁이나 금융에 대한 제재에서 반드시 국민경제나 세계평화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다원화를 통해 인간의 가치관을 많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렌트는 비참한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노동계급을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정표 따위는 주지 않았다. 폴리스 국가의 플라톤과 페리클레스 같은 인물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렌트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찬동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을 지배한다는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경제적, 사회적 구조가 결국 하나의 현상으로 이어지고, 그 현상에 대한 대안이 상부 정치구조로 이어지는 점이다. 요새 쉽게 생각하면 대한민국 인구 재생산비율이 1.0 정도로 내려가자 정부가 출산제도를 보완해가는 것과 같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영역은 사적인 영역, 사적 노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시대의 어머니 여성들이 겪은 노동이 그랬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육아를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과 같이 동조해가는 시대다. 아버지에게 주어진 출산휴가는 하루 이틀 정도가 이제 육아휴직이란 제도가 생겼다. 물론 제대로 사용하기란 아직 시기상조일지 모르나 그런 개념조차 없었다. 사회적 변화는 즉 사적영역의 인간이 살아가는 그 삶에서 시작된다. 그들의 삶이 이기심이라 보기는 어렵다. 사적 영역의 추구는 인간의 본질성에 가장 부합된다.

 

인간의 정체성에서 나는 왜 살아가는 가에서 그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한다면 스스로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건다면 호숫가의 수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반해 결국 호수에 빠져죽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자신보단 남에게 전가해야만 새로운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아렌트도 정체성의 본질을 찾기 위해 다산성을 주장했지만, 공론세계의 다산성은 다원화적인 인간이 표상이겠지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은 국한된다. 행위의 주체자로서 아렌트가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를 지지할 수 있는 노동이 필요하고, 그 노동을 실행시킬 수 있는 도구나 기술이 필요했다.

 

지구를 떠나 인간을 살 수 없지만, 거만한 엘리트와 지식인은 그 지구위에서 살고 있다 해도 자신이 머무는 집과 자신이 여유롭게 누리는 커피 한잔은 모두 그 노동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깊이 보지 않는다. 최근에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란 책을 보면 다른 모습을 보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집을 건축하지 않고, 임금을 받고 타인의 집을 건축하고 있으나, 그 노동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산물이 비록 자신에게 소외되더라도 그 순간만큼 자신은 그 어떤 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점이다.

 

아렌트의 발상과 자크 랑시에르의 발상은 이렇게나 다를 것이다. 공적영역을 추구하더라도 사적영역은 없으면 불가하다. 물론 사적영역의 노동을 아렌트는 인정하나, 그 사적영역조차 새로운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 결여된 셈이다. 책을 읽으면 아렌트의 지식과 해박은 인정하나, 그녀가 가진 가치관에 동조할 수 없다. 칸트의 철학은 정말 어렵다. 칸트가 가장 탐독했던 책 중에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 있다.

 

아렌트도 루소의 행위를 말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로사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을 만들어내는데 그 일조를 한 업적을 말이다. 하지만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 반계몽주의적 인간이었다. 루소의 <고백>을 읽으면, 그가 청소년시절 길을 떠나는 과정에서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이동했다. 어느 농가에 가니 농부가 질이 낮은 빵과 음료를 주었다. 루소는 그것을 받아들고 허겁지겁 먹자, 농부는 비로소 자신이 숨겨든 소시지와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부잣집 권력자들이 농민을 착취하다보니, 루소 역시 그런 사람인 것으로 의심했다.

 

루소가 가진 사상이 인민주권사상이고, 그가 정치적 공론에서 주장한 영역은 <사회계약론>에서 보여준다. 플라톤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한 루소지만, 그의 사상은 지배자의 사상에서 피지배자를 위한 사상으로 전도시킨다. <사회계약론>은 원래 <에밀> 이후 나온 책이다. <에밀>에서 루소는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나온 것처럼 계몽주의적 사상가로 보여주지 않는다. 순박한 농부의 세계에 파묻혀 지식을 습득하여 공적영역에 나가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하며,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린다.

 

그러나 감정이란 고귀한 인간의 마음은 타인에 대한 애정을 가지며, 남을 돕는 이유는 내가 타인보다 우월하기보단 인간을 돕는 게 바로 인간의 도리이고, 그 감정을 느끼는 게 인간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리나, 막상 어렵지도 않다. 길가다 아이가 넘어져 피를 흘리며 울고 있으면,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서로 몰려와 아이의 상처를 돌봐주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누가 가르쳐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은 위대한 것처럼 보이나, 때로는 질박하고 야만스럽기도 하다. 시장바닥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강인한 성격을 가진다.

 

막노동을 한 사람은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욕도 많이 한다. 그런다고 그들 모두가 타인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는 공론의 사회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는 시장바닥에도 더 숭고한 정신이 드러난다. 지식인이라면 인간의 조건을 두고 공적영역의 고대 그리스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에게 향해야 한다. 아렌트트의 철학은 그런 점이 너무 부족해 보인다. 스스로 학문을 깨우치며 더 높은 이상으로 향하는 것도 좋다. 그런 점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고 의지이다. 더구나 그 의지를 행위로 옮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들의 바램이지, 지식인의 공적영역이 아니다. 아렌트의 사고방식은 현대적 민주주의제도와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종교적인 영역까지 끌고 내려와 그것이 하나의 구원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오만하다. 아렌트는 서구사회의 철학자이다. 그의 눈에는 동양이나 비서구권에 대한 사유는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의해 그 사상과 사유가 변모된다. 어느 인기애니메이션에 나온 말처럼 인간은 지구의 중력에 의해 움직일지 모르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 현상을 하나의 과정으로 봐야 더 높은 세계로 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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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3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뒷북소녀 2018-10-23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렌트가 아이히만 덕분에 과대평가 됐다는 평을 들은 적 있는데, 이 리뷰를 보니 그 평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10-23 13:16   좋아요 0 | URL
저번 주말 책나루 모임에서 몽당각하를 모신 그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도 일부 서평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이데거 인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2차대전에 유대인 학자란 점에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말하기에 정말 좋은 학자이다보니 과분한 평을 들은 학자가 아닌가 합니다.
책을 보니 사족이 너무 많습니다.

2018-10-23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10-23 15: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배 위에서 혼자 크레인작업하다 바람과 선체의 기울임으로 크레인바가 아버지 무릎을 타격되자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아버지는 그뒤로 걸음걸이가 불편해졌으나, 만일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출혈과다로 쇼크사했을 것이다. 노동자의 노동현실에서 골든타임은 생존의기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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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연휴에 개봉된 영화는 참 특이한 작품이 나왔다. 대한민국 과거시대면 대부분 조선시대를 그린다. 그렇지 않으면 삼국시대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번에는 고구려 역사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고구려 역사에 대해 생각하면 좀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최근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역사 재조명에 대해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보통 과거 조선이나 그 이전의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개국과정, 임진왜란, 병자호란 또는 의병들 이야기가 나온다. 전쟁을 넘어 전투나 혹은 격전 등을 일제강점기시대 항일투쟁 열사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개봉한 <안시성>을 조금 다른 성격이다.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 나는 이미 안시성 전투를 알고 있고, 양만춘이란 인물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낯선 인물일 것이다. 안시성 전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꾼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끝이 아니다. 역대 한국 역사영화에서 자국 내 개국, 내전, 쿠데타, 반정, 암살 등이 등장하는 내분을 제외하여 타 국가와 적대관계가 놓인 정도는 역시 중국과 일본이다. 특히나 일본은 임진왜란을 시작하여 항일운동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다. 중국과 전쟁하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고대 중국과 전쟁하면서 우리가 제대로 이긴 전쟁은 고려시대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몽골족의 지배에서 명나라로 교체될 때 명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았고, 이후 청나라 여진족들이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다.

 

지금 중국은 공산국가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나, 그 이념의 토대는 공산주의보단 오히려 과거 고대에서 내려온 중화민족, 한족(漢族)의 세력을 생각한다. <광해군>이란 역사연구서적을 작성한 한명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과거 임진왜란이라 불리는 대참사를 두고 일본은 풍태합 조선역(豊太閤朝鮮役)” 내지 분로쿠 케이초의 역(文祿慶長)”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중국은 무엇이냐? 그들은 항일원조(抗日援朝)”라고 부른다. 일본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왔다는 뜻은 아직도 임진왜란을 보는 중국과 일본은 피해자이면서 승리의 주역인 조선은 제3자인 것처럼 꾸민다.

 

중국의 주석 모택동(毛澤東)은 자신의 성이 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한 것이 있었다. 인조 초반 그리고 인조반정 이전에 중국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란 장수가 있었다. 후금 청나라에 계속 열세이던 명나라가 운 좋게 모문룡이 1번 청나라에게 이긴 적이 있었다. 후금은 여진족이고, 명나라는 한족이다. 한족이 결국 청나라에게 멸망해도 중국은 한족의 실세들이 장악한다. 나머지 민족은 변방의 존재이다. 결국 한족과의 관계에서 모택동은 자신의 성인 로 통해 모문룡을 거론한다. 모문룡은 조선 인조정권 시절 많은 패악질을 한 장수이다.

 

아직까지 광해군이 패주 내지 폭군으로 불리고, 궁궐공사에 투입된 금액이 엄청나다 하지만, 모문룡에게 빼앗긴 은과 국가예산은 조선 전체의 1/3 정도까지 이른다고 한다. 모문룡이란 존재가 조선에게 가장 큰 인물로 된 이유는 조선은 반정국가이고, 명나라 장수를 통해 임금 자리를 명나라에게 책봉 받아야 한다. 인조라는 존재는 그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은 용군(庸君)에 불과했다. 그 이후 그가 선택한 미래는 병자호란이란 역풍으로 도래한다. 조선의 역사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관계에서 타격은 둘 다 만만치 않으나, 병자호란에 대한 부분은 아주 미묘하다.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가 개입 후 조선은 승전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패전국가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승리와 패배에서 타격이 큰 것은 병자호란이다. 그런데 오히려 임진왜란에 대하여 현재 한국인들은 더 큰 감정을 주입한다. 임진왜란 이후 을사늑약에 따른 조선의 몰락,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조선 민중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통치는 300년이 넘었다. 청나라에 대한 미묘한 부분은 청나라에 패배한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나, 청나라 세력에는 고개를 숙인다. 이중적 심리는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도부가 지려는 것을 회피하려고 한 점이다.

 


조선이 설립하여 중국 명나라에 대한 외교 이후 청나라까지 이어졌을 때 북방진출에 대한 꿈은 없었다. 단지 효종에 이르러 북벌론을 거론했지만, 이 역시 허무하다. 청나라를 치고 이후 다시 명나라 왕조를 복귀한다는 생각이다. 자주적 조선은 없었다. 청나라가 계속 동북아시아 패권자로 군림하면서 점차 사대부들의 의식도 바뀌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고대사에 대한 연구도 조금씩 개선되었다. 고대사와 단군에 대한 정신은 조선이 몰락하면서 더욱 빛이 났다.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내지 대종교 신자들이 고대의 조선을 역사속으로 다시 불러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 고려시대에 저술된 서적이다. 고려는 아시아에서 강대국이 아니다. 고구려를 이어받아 고려라고 명칭하나, 그들의 모습에 고구려는 없었다. 고구려는 요동반도를 호령했고, 고려는 압록강 위로 나가지도 못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가 존재했지만, 결국 요동반도로 넘어가지 못했다. 한국역사에서 요동반도에 머문 조선인과 그렇지 못한 조선인에서 요동반도에서 머문 조선인의 역사가 길었다. 고조선을 필두로 고구려는 대륙민족의 기상을 보여준 셈이다.

 

리뷰 서두에 중국의 동북공정을 말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아시아 대륙의 세계에 중국만 있고, 나머지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심지어 고구려의 역사조차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 중에 하나인 것처럼 만들었다. 역사의 교육은 무섭다. 바로 고구려의 역사, 그리고 대륙의 기록이 사라진다면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북한과의 문제도 거론된다. 고구려의 영토에서 수도는 평양성이다. 현재 북한의 수도는 평양이다. 평양이란 곳은 고구려와 북한의 수도이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마르크스가 제시한 것과 상관없는 관료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분단되어 있지만, 통일한국 내지 연합국가로 이어질 경우 북한과 중국의 관계성에서 역사의 과거는 현재의 진행형으로 되어 미래까지 좌우된다.

 

역사는 과거에 존재된 것들이 현재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각인된다. 독도가 일본 영토이라고 말한다면 모두 버럭! 하고 화를 낼 것이다. 일본이 독도망언을 일삼고 있는 와중, 역사학적으로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의 문제는 영토를 넘어 영해와 영공까지 이어진다. 영해가 사라지면 어업권이 사리지고, 영공이 사라지면, 공중작전권을 상실한다. 역사를 조작하거나 새롭게 바꾸려는 것은 현재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전술이다. 영화 <안시성>을 다소 다른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시나리오 흐름이나 결말 따위는 이미 파악된 영화이다. 안시성 전투 영웅 양만춘이 있는데, 영화 <안시성>에서 안시성의 성주와 성민들이 패배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단지 그 과정과 그 전쟁에서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와 이념적인 요소가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추석은 한국 전통에서 매우 소중한 연휴이다. 물론 고부간의 갈등, 귀경차량, 제사 준비의 번거로움과 예산소요는 많은 부담이 된다. 그런데 한가위 전통은 한국인에게 무시하지 못할 역사적 행사이다. 예전에 서울 단군성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

 

국조 단군상이 외롭게 작은 방안에 모셔져 있었다. 단군성전을 참배하고, 모금함에 운영비를 모금하니, 관리하는 분이 오셔서 예전에 개최한 개천절 행사자료를 주었다. 개천절은 한국민족이 가장 중요한 날이나, 왠지 모르게 잊어진 날이나, 행사자료를 보니 고조선 시대부터 쌀농사를 수확 후에 떡을 바쳐 하늘에 올리는 일들이 몇 천 년 동안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국인은 쌀을 송편을 빚어 먹고, 설날에는 떡국을 만들어 먹는다. 오랜 역사가 이어진 음식문화에서 한국인이란 존재는 과거 몇 천 년 전이라도 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안시성>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권자로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연개소문의 아들이 권력다툼으로 결국 고구려는 망한다. 고구려는 망할지언정 고구려의 후예들은 아직도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감독과 제작진들은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한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21세기 한국이 7세기 삼국시대를 그린 것이다. 복식과 음식문화, 그리고 군수물자와 무기까지 재현하면서 말이다. 현대적으로 해석했지만, 상황적 조건은 고대국가를 묘사했다.

 

영화에서 고구려의 신녀가 고주몽의 활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고구려인 중에 없다 하며, 고구려의 신이 고구려를 버렸다고 한다. 신이란 존재, 한국의 신화를 뜯어보면 우선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해모수 신화, 가야국가, 신라왕조,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천신의 자손이 내려오거나 혹은 알에서 깨어 나온 영웅이 등장한다. 신화(神話)는 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나, 인간들의 이야기고, 한편으로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가 신화로 되고, 신화가 역사로도 된다. 안시성 전투는 역사적 사건이고, 영화 <안시성>은 역사적 전투를 신화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신녀가 말한 것처럼 고구려의 신은 없고, 주몽의 활은 당대의 영웅 당태종 이세민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에서 제시한 것처럼 양만춘은 그 활을 날릴 것이란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영화는 전쟁의 끝과 시작이 문제가 아니라, 왜 양만춘이 그 활을 날릴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태학도 수장 사물은 당나라와 전투과정에서 많은 고구려 용사들이 적의 칼에 쓰려가는 것을 봤다. 게다가 비참하게 퇴각하면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양만춘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는다. 영화에서 그는 주체적인 존재보단 그저 수동적 존재로 나오나, 양만춘을 만나면서 능동적인 인물로 변해간다.

 

처음에 태학도의 엘리트에서 점차 안시성의 성민으로 변한 것이다. 그를 그렇게 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양만춘은 반역자로 낙인찍히나, 안시성 내 양만춘은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뛰어난 지략, 넓은 도량, 죽음과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은 불굴의 장수, 그가 사물과의 대화에서 싸움에 대한 진의를 대화한다. 싸움은 이길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할 때 싸워야 한다고 말이다. 왜 우리는 투쟁을 하는가?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안시성의 병사들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뒤에는 안시성 마을이 있었고, 거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두려운 눈빛으로 안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너지면 저들은 죽음과 약탈로 쓰러지고, 안시성이 없어지면 저들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상당히 보편적이면서 와 닿는 말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다 군에 가야 하는 입장에 있다. 군에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기나긴 시간에 얻을 것도 많으나 잃은 것도 많다. 2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간단히 보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적이 내 가족에게 해를 입힌다면 목숨 걸고 총을 잡을 것이다.

 

영화 <안시성>은 영웅 양만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나, 그가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영웅성이 아니라 민중과의 삶이다. 영화에서 다소 어색한 연애장면과 설현의 어설픈 연기력, 설현이 중간에 뛰쳐나간 장면은 (내 개인적으로 설현의 연기력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감독이 일부러 혼자 자살하러 적진에 뛰어가게 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무리수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 양만춘이 등장할 때 광부의 어머니가 길을 잃자, 성주가 직접 그 할머니를 찾아 모시고 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성 안에 백성이 자식을 낳자, 직접 찾아가 선물을 한다.

 

연개소문을 따라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평야에 전투를 하면 패배할 것이고, 그러면 안시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안시성을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내가 고구려인이기에 나와 같이 살아가는 고구려인을 지키기 위해 나는 적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영웅은 단순히 영웅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영웅주의를 넘어 민중주의에 의해 탄생한다. 신화라는 것은 보편적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 가치관이다. 고구려인이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분전한다. 피를 뿜고, 간과 뇌가 터지고, 팔과 다리가 여기저기 잘린다.

 

영화에서 전쟁은 군인만이 하는 게 아니다. 안시성의 주민들도 참여한다. 토성을 쌓을 때 그들의 전략을 저지한 것은 안시성의 백성들, 토굴꾼이었다. 곡갱이와 도끼를 잡고 지하에서 토성을 무너뜨릴 때, 그들은 죽을 것을 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웃는다. 내가 여기서 적을 막으면 내 가족들은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 라는 거대한 모습에 내가 생각하는 작은 소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민중의 삶은 숨 쉬는 곳이다.

 

고구려의 신은 과연 고구려를 버렸는가? 고구려의 신은 고주몽이 아니었다. 고주몽이란 사람이 국가설립에서 어떤 가치관을 지녔는지 알 수 없다. 단지 고구려는 한국역사에서 북쪽의 적들을 막아주던 방패였다. 한민족의 방패로써 외세에 저항하며 민족의 삶을 지켰다. 안시성의 성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고구려를 지켰다. 양만춘이 느낀 부담감은 민중의 삶을 알기 때문이다. 2차 전투 때 부상을 잊을 때 그는 망설임에 빠진다. 그의 부하는 양만춘에게 찾아와 성주가 약해지면 안 된다고 했다. 성주만을 바라보고 왔는데, 성주가 의기소침해지면 성민들 역시 희망의 끈을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은 스스로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에 조우한 것이다. 물러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고, 항복할 수 없으며, 더욱이 운명의 시련에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위기에 빠진 자신들을 누가 구원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돌파하는 것이다. 양만춘이 잡은 주몽의 활은 이세민이 눈을 찔렀다. 실제 역사에서 이세민은 양만춘의 활에 의해 부상을 당해 퇴각한다. 20만명 대군은 5천명의 군세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지략, 인덕, 무용을 가진 장수는 드물다. 게다가 운을 가진 장수는 더욱 드물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평소 지략과 무용도 있었지만, 인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덕을 가진 인물에게 운은 따를 수밖에 없다. 운을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힘이 하나로 모이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양만춘이 받은 최고의 운은 그가 안시성의 성주이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만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을 돌파할 수 없다. 사랑의 힘으로 움직일 때 가능하다. 영화는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고, 양만춘을 적대시한 연개소문도 자신이 고구려인이란 사실을 자각한다.

 

영화는 권력의 다툼에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질 때 우리는 한민족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움직이면 역경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추석연휴에 나온 <안시성>, 한국전통명절인 추석은 한민족(韓民族) 조선의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어진 문화이다. 안시성은 현재 중국에 있고, 평양성은 북한에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한국, 남한에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민족의 갈등에서 영화 <안시성>은 단순히 전쟁영화 내지 오락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단지 영화 시나리오 전개에서 빤한 전개, 무리한 설정과 연출, 아이돌 스타들의 무비등장은 영화의 완성도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다.

 

영화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을 맡은 배우 조인성은 이번 역할에 극중 메인이다. <더 킹>이란 작품에서 정우성 씨가 맡은 부패 권력 정치검사와 맞물린 역할에서 그는 주인공이지만 한편으로 스토리 전개를 소개하고 대한민국 현실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나레이터(Narrator) 역할을 맡았다. 안시성에서는 조인성 씨는 나레이터의 역할이 아니라 나레이터가 관찰하는 대상이 되었다. 카메라를 보면 알듯이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는 장면이 많고, 토성이 무너진 후 진격하는 장면에서 흙먼지가 날려 다른 사람은 모두 가려져 있지만, 조인성 씨가 선두에 나온 모습은 보여준다. 그의 역할이 <안시성>이란 영화에서 양만춘을 맡았기에 큰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현대사회를 기반으로 한 영화보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쉽지 않다.

 

시대적 흐름과 역사적 전후관계 그리고 그 상황에 처해진 인물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은 동적인 상황이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심리적 요소나 대화를 보면 동적이기보단 약간 정적이다. 침착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 성주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조인성 씨가 단독 메인 주연배우로 등장한 <안시성>에서 그는 대중의 시험을 받을 것이다. 영화배우로써 큰 인물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이다. 그래도 <역린>에서 정조보단 훨씬 나아 보인다.

 

어째든 <안시성>이란 영화는 단순히 안시성 전투만을 생각하면 안 된다. 안시성의 위치, 고구려와 당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대립, 그리고 현대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대중들이 갖는 관심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사에서 조선에 저지른 행위를 속이고, 특히 임진왜란을 분로쿠 케이초의 역(文祿慶長)”이라 부는 것은 그들이 침략의 행위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시금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는 셈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족과 세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 모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역사에 의해 부활하고,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와 더불어 인기인이 되었다. 역사란 바로 그런 것이다. 매체로 통해 전국시대 장수를 영웅화하는 점, 그리고 추후 그들이 임진왜란 당시 잔인한 살육을 행한 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안시성>이란 영화가 명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작품성을 가진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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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6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7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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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300년 통치의 노론자처럼 이용당한 군주, 문제있는 군주는 맞으나. 후에 군주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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