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 조선의 화가들 2
박은순 지음 / 돌베개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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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족보를 보면 나의 가계도가 나와 있다. 족보를 보면서 이상한 점은 딸과 아내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으나, 딸이 시집간 집안에서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집에 족보를 보면 할머니가 시집을 오시면 할머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더 나아가 외할아버지의 이름까지 기재했다. 우리집안의 족보는 1702년 임오보(壬午譜) 숙종 때 창간된 것이고, 지금 원판은 강진군 덕정동 추원당에 보관되어 있다. 2017년 유시민 작가와 다른 학자들이 알쓸신잡 시리즈 열풍과 그리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의 재발간 및 활동으로 전남 강진과 해남 일대를 소개하게 되었다.

 

강진에 가면 다산초당이고, 해남에 가면 고산 윤선도 종택이 있다. 강진 도암면 강정리에 위치한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직접 만드신 한옥이고, 그곳에 보관된 해남윤씨 목판 족보는 고산 선생의 외손자 심단 선생이 마무리했다. 심단 선생의 아버지는 젊은 날에 요절했기에 심단 선생은 고산 선생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고산 선생이 진행하던 집안족보를 비로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추원당에 그 족보가 300년 넘게 자라잡고 있다. 그리고 심단선생은 심득경 선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심득경 선생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의 친구 겸 친구이시다. 위에 집안 족보를 이야기한 이유는 한국 국보 240<자화상>을 처음 본 것은 집에 보관된 족보에서 봤기 때문이다. <자화상>이란 작품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조선시대에서 새로운 화법이었다. 영화 <관상>에서 송강호 씨의 얼굴 포스터가 바로 저 자화상을 본 떠 만든 것이고, 기존 동양의 그림과 다르게 서양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그림에 담았다. 선비의 글과 그림은 선비의 마음과 정신이 드러난 것이다. 화려한 그림과 과도한 허례의식보단 간결하고 소박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그림에 불어 넣은 그림이 이제 한국역사 조선에서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이 남인이었고, 우리 직계할아버지와 형제분들도 인조 이후로 거의 출사하지 않았다. 그나마 출사한 것은 영조와 정조 시대 정도이다. 정약용 선생의 친구이면서 사돈인 윤서유 선생 역시 순조 이후 조정에 출사했지만, 다산 선생이 직접 묘비명을 새긴 글을 보면 여전히 남인이란 이유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참고로 윤서유 선생은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날 때 정약용 선생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관아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사림의 일원에서 시작한 집안이나, 기묘사화부터 화를 당하기 시작하여 붕당의 정쟁에서 늘 변두리에 진전하는 집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산과 공재, 그리고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세계는 당연히 송학(宋學)이라고 불리는 성리학에서 탈출하여 고학(古學)을 추구했고, 정약용 선생의 경우 고학을 추구하기 위해 다시 공맹의 학문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공자와 맹자가 2,500여년 전 사람이라고 해도, 그 시대는 지금과 달라도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견해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 비추어 봐도 다소 납득이 된다. 백성이 근간이 되는 정치,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백성에 대해 어떤 관점을 봐야 하는가?

 

예전에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성호 선생은 자신의 둘째 형님이신 이잠 선생이 숙종 때 경종을 옹호하고, 상대 당파 노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다, 숙종의 분노를 사게 되어 죽음을 당했다. 숙종이 직접 친문하여 장형을 당한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잠의 동생이 이익은 물론이고, 옥동 이서 역시 정치와 연이 닿지 않은 시골로 내려와 평생을 학문과 예술에 몰입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어느 한 개인의 고통은 다른 누군가에게 큰 동력이 되었고, 현세에 이르러 민족의 훌륭한 기록과 유물로 남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성호 이익의 학문은 그대로 정약용 선생에게 이어져 12서라고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여유당 전서> 수백권이 탄생했다. 이런 성호 선생도 사숙하던 이가 있으니 공재 윤두서 선생이다. 공재 선생이 태어날 때 고산 윤선도 선생은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증손자를 본 것을 기뻐하며, 해남윤씨 어초은공파(귤정공댁)의 장손으로 삼았다. 예나 지금이나 양자제도는 이루어졌지만, 당시 조선시대 양자제도는 많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고산 선생도 원래 장자가 아니지만, 양자로 들어갔고,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섬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소학(小學)을 필두로 실천적인 자세를 임하는 모습은 조선 중기 북인의 학맥과 유사하다. 북인이 인조반정에서 모두 몰락하자, 일부 북인들은 남인으로 유입된다. 실천적 학문이 돋보인 것은 경세에 대한 관점이고, 경세해야 될 대상에 대한 관찰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 삶 그 자체로 넘어가는 것 역시 소중하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짓는다.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해도 양반사대부들은 우리의 글을 무시했고, 한문만 사용했다.

 

한글과 한문 모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한문을 모르면 과거를 볼 수 없고, 모든 문서를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의 독점이야 말로 권력의 독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책에서 보니 고산 선생은 어부사시사를 지을 무렵, 직접 어민의 배를 타고 노를 같이 움직이고, 그물도 같이 들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백성의 삶에 들어가 그들의 애환을 노래로 담아 한글로 된 가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종손 윤두서는 글이 아닌 그림과 시로 백성의 삶을 담아내었다. 박은순 교수가 저술한 <공재 윤두서>란 책의 표지를 보면 윤두서의 자화상이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들어가는 말 부분 옆에 어느 아낙네가 낫을 들고 잠시 서 있는 모습이 나온다. 위에 윤두서의 시가 적혀 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려져 있으니, 오가는 사람이 모두 흙으로만 알고, 옥인 줄은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니, 흙인 듯이 가만히 있거라.” 백성의 삶을 관망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삶이란 형태적 요소까지 접근한다. 그림을 보면, 단순히 농사짓는 아낙네만 그린 것만 아니라 나무를 깎는 백성의 그림까지 그린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을 넘어 의학, 천문, 지리, 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고 넘었다. 고산 선생 역시 의약과 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에 능했다.

 

박학다식하면서 옛것을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많이 보급하는 방식, 실학자들의 사상은 이렇게 맥을 이어간다. 게다가 공재 선생의 아내가 되는 분은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 선생의 종손녀이시다. 지봉유설에 관한 서적을 읽으니 단순히 시문놀이나 하던 양반사대부의 허위의식을 지나 다양한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지리와 민족, 식물과 동물 등까지 말이다. 조선시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이다. 그러나 고학을 넘어보며, 현실을 생각하며,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면서 역사관도 새롭게 등장했다. 조선의 역사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조선의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식이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도래하면서 헬조선이란 신종단어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맥락이지만, 한편으로 사대주의 발상조차도 조선시대에서 이어진 맥락이다. 민주주의 역사는 20세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래해도, 민주주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민본주의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리뷰를 적는 본인도 한국의 현실에 대해 상당히 회의감을 품고 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지는 이유는 조선시대부터 이미 헬조선화 시키는 부류에 대항하는 지식인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이 비록 역사 앞에서 좌절한 채 사라졌지만, 그들의 의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도 제대로 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주국가 주인이라고 하나, 사실 재력이란 권력 앞에 너무 약한 자들이다. 이런 나쁜 마인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단어에서 결국 상업(商業)이 제일 앞으로 가고, 사인(士人)들이란 정치가들이 재벌가와 손을 잡으며, 결국 농사짓는 사람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착취를 당하게 되는 구조로 되었다. 공돌이 공순이란 단어가 있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가난한 직장인들은 현대판 노예인 것이다. 노예에 대한 처우를 보면 조선시대 역시 슬프기 그지없다.

 

공재의 기록에 보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노비를 재물로 본다. 채찍질하고, 포학하게 대하여 소나 말보다 못하게 대한다. 저 소와 말도 그 임무를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할까 봐 잔인하게 상처를 내거나 얼고 굶주리게 하지 않는다. 오직 노비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우려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얼고 굶주리게 하여,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이로니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반성하고, 또한 자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어느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암으로 죽었는데도 여전히 현실의 벽은 막혀있다. 수많은 건설노동자 매주 죽어나가는데도 안전관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이 기업들의 책임과 잘못에 있는데도 오히려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민본주의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이렇다. 공재 윤두서는 노비를 매입할 때 재미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어느 누군가 노비를 구매했는데, 알고 보니 한 가족이었다. 노비로 태어난 것도 억울하고 가족까지 떨어지게 만드는 것 역시 잔혹했다. 어느 노비에게 합법적인 절차를 수행하여 면천시켜주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누군가 자신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 아랫사람에게 욕설을 마구 내뱉으며 하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공재 공은 하인들에게 말을 걸 때 웃으면서 대했다고 한다. 그런 성품은 당연히 그림으로 드러나고, 억지스러운 화법보단 있는 그 자체에 대한 사실성으로 드러난 것이다. <유화백마도>를 보면 하얀 말의 근육 하나하나까지 묘사했고, 친구 심득경이 사망하자, 그의 초상화를 그려 심득경의 가족에게 전할 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그려 넣었다.

 

권력의 횡포에서 관직을 포기하고, 은둔의 생활을 지향했으며,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가진 점이 곧 근기남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나에게 우리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고산 윤선도 선생의 고조부이신 어초은 윤효정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초은공은 내 직계 할아버지의 막내 동생 분이었다. 백성들이 흉년이 되어 나라에 세금을 내지 못해 관아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의 사재를 털어 옥문에 갇힌 백성을 집으로 보내게 한 점을 말이다. 3번이나 했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재물이 백성을 위해 사용되었는가?

 

조선시대 실제 양반의 수는 1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성을 보면 모두 양반의 가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중요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이고, 누구의 위에 있어서도 아래에 있어서도 안 되는 주권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국가라고 해도 민본주의적 근간은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집안은 당쟁의 시기 몰락한 양반이라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은 많지 않다. 어느 집안에 정승이 몇 명이고, 판서와 참판이 몇 수십 명인 것보다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을 아껴준 것이 더욱 훌륭한 것이다.

 

현재도 당시도 정치가의 책무란 무엇을 생각하면 국가를 위해 살아가야 했고, 조선시대라면 왕도정치를 실행해야 했다. 그러나 왕도정치보단 권력만 지향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백호 윤휴를 찾아보면 그는 양반도 농민처럼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노론에 막혀 버렸고, 경신환국에서 죽음을 당한다. 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가진 자가 너무 가지게 하면 안 되고, 백성들이 어느 정도 먹고살만해도 부국강병의 초석이 된다고 본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미술사학자적인 관점으로 제작되었으나, 공재 윤두서의 인간을 모르면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백호 윤휴는 고산 윤선도와 친했고, 윤휴와 인척이 되는 미수 허목은 윤선도의 묘비명을 지어주었다. 성호 이익의 가족은 공재 윤두서 집안과 친척관계이니 그들의 관계성을 보지 않으면 작품을 알 수 없고, 그 작품성에 선비정신이 담겨있으니 당연히 역사적 맥락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선비화가로 그가 남긴 작품은 국가의 국가와 보물이 되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새로운 화풍과 조선시대의 역사적 유물로서 현세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저자 박은순 교수가 확실하게 밝힌 것처럼 시대에 좌절한 그였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자신의 뜻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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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2-31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에도 족보가 있었습니다. 노란 족보를 아버님이 신주단지 모시듯 했는데
이사가 잦다 보니 분실했네요. 족보 보는 맛도 재미있을 텐데 말입니다.
만애비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려..

만화애니비평 2017-12-31 14:08   좋아요 0 | URL
족보를 보면서 생각이 드는건, 2000년 되기전 한국의 것들은 낡고 유치한 것이 되고, 이제는 다른 식으로 가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가 이상히 흘러가는구나 하고 생각됩니다.

족보는 소중하나, 족보로 모든 것을 결정지으면 안되고, 족보를 보면 한가족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 역사로 통한 과거의 기록이기도 하니, 참으로 오묘한 이치가 다가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과거에 살던 자는 과거라면, 내 자신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집에서 아버지가 족보를 소중히 대한 것은 가진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올 한해 다 지나갔습니다. 내년에 MB가 구속되는 좋은 새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곰곰발님도 감기 조심하고 좋은 새해를 보내세요~

2017-12-31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31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7-12-3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두서 자화상은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해남윤씨 종택, 윤선도 무덤, 고산 사당을 두루 둘러봤던 기억이 새롭네요. 고산의 무덤이 워낙에 천하명당에 자리잡고 있어서 해남윤씨가 고산 사후 400년 가까이 굳건하다는 설명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산사당 안내판에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신 경위가 나와 자세히 있던데, 고산 사후 56년이나 지난 영조 3년(1727년) 때더군요. 제가 태어난 고향 마을에도 종갓집 뒷편에 선조가 내린 사액 현판이 걸려 있고,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조상의 위패를 모셔 두고 아직까지도 집안 어른들이 해마다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답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자랄 때만 하더라도 그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가끔씩 공부했던 듯한데, 이제는 까마득한 옛추억일 뿐이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1 20:00   좋아요 0 | URL
고산공의 무덤까지 못가고, 고산의 고조부인 어초은공은 녹우당 뒤편 가까운 산기슭에 모셔져있습니다. 어초은공과 고산공은 불천위의 제사를 받들게 된 분이나. 개인적으로 진도 굴포마을 주민들이 고산공을 기리는 제사가 뜻이 깊다고 봅니다. 자신의 조상도 아니나. 가난한 백성을 위해 간척지를 메워 농지를 나누어준 것이 진실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봅니다. 요새 조선시대 운운하면 촌스러워 하는 분이 많으나. 그분들이 해외에 가서 유명 문화유산을 보고 좋다고 여길 때 참으로 한심스러워 보입니다. 이런 문화적 유산이나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이나 별로 다를게 없는데 말이죠.

겨울호랑이 2017-12-31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 2017년 한 해동안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부탁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1 19:57   좋아요 1 | URL
아 요새 유성룡선생에 대한 책을 보는데 기축옥사 당시 이발과 이길 형제의 죽음, 그리고 그 노모분이 압슬형으로 참혹하게 죽어 원성이 높자, 호남의 안방준이 정철의 혐의를 유성룡에게 덮어씌우는 내용이 있어서 이 덧글을 보자말자 놀랐습니다.

이발의 어머님은 귤정공 윤구의 따님인데, 윤구 선생의 동생으로 행당공 윤복이란 분이 계십니다. 저 유명한 다산초당의 주인 윤단의 선조입니다. 윤복 선생은 자재분을 퇴계선생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게 합니다.

남인에서 유성룡이 퇴계선생의 수제자인데, 어찌 동문수학하던 사촌누이의 아들 학우가 친구의 어머니를 팔아먹겠습니까? 아무튼 이책도 재미있어 보이니 조만간 서평이 올라갈겁니다.

겨울호랑이 2018-01-01 20:10   좋아요 1 | URL
^^: . 역사를 보면, 광산 이씨 가문과 해남 윤씨 가문이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깝게는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지만요. ㅋ 조선 역사와 관련한 만화애니비평님의 글은 좋은 자극이 되어 항상 기대가 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1-01 20:13   좋아요 1 | URL
아하하하 그런 것이라니...
겨울님이 광주 주변에 사는 것으로 아는데
광주에 문중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래서 518 당시
많은 분들이 희생당하기도 했죠....
아마 호랑이님 어머니도 어초은공의 후손인듯 하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8-01-01 20:20   좋아요 0 | URL
^^: 저는 지금 용인에 살고 있지요. 다만 부모님께서는 강진에 사셨구요. 제게는 해남윤씨 가문이 외가쪽이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외할머니 산소를 강진군 도암면에 쓰셨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여쭤봐야겠네요^^: 만화애니비평님께서는 참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2018-01-01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1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8-01-0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만화애니비평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2 10:5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감사합니다.
올해 좋은 일이 항상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언제 카스피님과 가족분들이 건강하시기 바라겠습니다.
 
호남 절의록 호남문화 연구총서 13
김동수 지음 / 경인문화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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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 순절한 분에게 물론 감사의 마음을 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감사의 의미를 담아야 할 대상은 그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후세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가령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 같은 경우 조선시대 후기에 그렇게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러나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으면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해 나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같은 시대에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조선 명재상 중 하나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선생은 2사람 모두 친분이 있었다.

 

퇴계 선생이 먼저 1570년에 타계하시고, 그 뒤에 남명 선생이 2년 후 타계하신다. 남명 선생이 돌아가기 전 퇴계 선생과 일전에 1번도 만나지 못해도 같은 경상권에 사는 학자로서 그의 뒤에 따라가겠다고 하신 일화가 유명하다. 성호 선생은 그 내용을 사설에 담았다. 문제는 남명 조식이란 인물이 조선 성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그렇게 큰 대접을 받지 못했고, 서원에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배향되어도 남명 선생은 배향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남명은 조선시대 분당정치사에서 북인의 학문적 스승이었다. 그의 학문은 단지 하나만 말한다.

 

학문의 기본적 원리와 배울 덕목은 이미 선현들이 모두 남겨주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을 넘어 실천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북인의 활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볼 수 있다. 의병군에서 최초로 발의한 인물은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이다. 그분은 남명 선생 수재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제자이고, 남명 조식 선생의 손녀와 결혼했다. 곽재우의 거병은 남해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동시에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북인들의 활약은 대부분 경상권이다. 경상우도와 좌도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이 분포했고, 초기 경상도 학자들은 2사람에게 학문을 배웠으나 점차 2사람에게서 제자들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남명 조식 선생에게 정인홍, 곽재우, 김우옹, 최영경 같은 학자들이 있었고, 퇴계 이황 선생에게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이들의 제자인 이억기 장군 같은 인물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과 관군 모두 왜적에 항거했지만, 한편으로 당쟁의 소용돌이에도 같이 있었다. 외부의 적인 왜군과 내부의 적인 당쟁이 있었다.

 

이런 관점을 내가 제시하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호남절의록>이란 도서가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 서적이란 사실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번역하신 사학과 학자들도 인정했지만, <호남절의록>이 작성된 시기는 정조시대이고, 정조는 영조의 세손이다. 영조는 경종의 동생이나, 사실 경종이 죽은 후 등극된 임금이다. 당시 경종은 대다수의 소론과 일부 남인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고, 영조는 노론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경종 사후 영조가 오르자 소론의 영수인 김일경 등이 과거 영조에게 한 행동과 노론4대신을 죽인 죄로 죽임을 당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노론대신이 경종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일로 참살되었는데, 영조는 자신의 형보다 자신을 지지한 대신에게 편중했다. 권력을 부자와 형제조차 냉정하다. 영조 집권 당시 일어난 난이 이인좌의 반란이다. 이인좌는 경종의 죽음에 불만을 품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1618년 사르후 전투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올라가있다. 정묘년과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일은 한국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은 상처이다. 인조 임금은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받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절차를 수행했다.

 

당시 사료를 보면 인조의 행동에 사대부들이 실망을 하여 효종까지 출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인조는 광해군 실각 이후 등극된 임금이다. 그는 서인의 반정을 중심으로 움직인 존재이다. 그가 올라간 순간 청나라의 습격을 받고, 인조반정 다음해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괄의 난과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조선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패배한 이유는 과거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고, 백성을 진정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리학의 틀에서 명나라를 절대적 존재로 보는 사대주의가 나라를 버렸다.

 

물론 <호남절의록>18세기말 성리학의 관점에서 적은 도서이다. 정조는 상당히 우수한 군주이나, 그 역시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에 있다고 하나,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을 거친 후 강대국이 되었고, 청나라는 19세 중반 영국과의 아편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는다. 조선은 그러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성리학적 관점 조선왕조의 시대라면 당연히 <호남절의록>은 절대적 가치를 내세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을 천천히 읽은 국사를 생각하면 나라가 망한 이유가 다시금 보인다.

 

국가를 위해 희생된 순국자는 칭송받아야 할 것이나, 이 책에 적힌 이름은 대부분 양반 사대부 집안이다. 그들은 명나라와 조선임금만 생각하지 조선에 살고 있는 백성에 눈을 두지 않았다. 광해군이란 인물을 두고 참으로 재미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바라보면 광해군의 분조활동에 의해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창궐하고, <호남절의록>에서 세자의 분조역할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으나, 광해군의 분조활동을 드러내는 것보다 광해군 집권시기 혼주(昏主) 내지 폐주(廢主)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강홍립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정묘호란 시기 조선을 밟아대는 존재로 여겼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화의에서 강홍립의 역할이 컸고, 그가 없었다면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조선왕실 역시 큰 피해를 봐야 했다. 다급한 상황에 이르러 강홍립이 중재한 사실은 빼놓고, 오히려 그를 나라를 배신한 역도로 몰아넣었다. <호남절의록>은 광해군 시대의 부정, 북인세력의 부정이 강력히 깔려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 정여립과 단지 친하거나 글을 나누었거나, 그와 인척이거나 또는 의심가는 인물들이 모조리 화를 당했다.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이며, 상당히 학문이 높은 최영경이란 선비는 송강 정철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외에도 아무 죄 없는 학자들이 정여립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으니 그 원한이 골수에 새겨져버렸다. 남인과 북인은 원래 동인이었으나, 북인에게 기축옥사는 친구와 친척, 동문수학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이었다. 우습게도 송강 정철도 왕세자 문제를 선조에게 언급하는 바람에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호남절의록>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서적에서 <선조실록>을 보면 왜적이 침탈해 전국이 지옥처럼 변하는데, 임금을 명을 받은 송강 정철은 어서 달려오지 않고, 기생을 끌어안고 술을 마시며 시조나 읊어대었다. 송강 정철의 국문학적 가치는 높지만, 그가 해온 행동들을 보면 결코 의로운 인물은 아니다. 서인들이 만든 기축옥사로부터 인조반정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은 지난날의 과오이다. 문제는 그 과오를 정당히 밝히는 게 아니라 억지로 가면을 씌우게 만든 책이 <호남절의록>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시작으로 앞에 잠시 1555년 을묘왜변을 언급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뒤에 바로 오는 게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 평정이다. 이들의 난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못했고, 막을 수 없어 도망친 후 그 죄를 모조리 광해군에게 이전했다. 명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청나라와 외교정책을 펼친 점, 1609년 광해군이 왕으로 오르자 제일 먼저 한 것이 일본과 국교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만일 일본과 앙금을 남긴 채 계속 지닌다면 왜적과 호란 사이에 더욱 난감한 상황이다. 전쟁이 나면 제일 고생하는 부류는 여인네와 백성들이다. 여인네들은 체력적 한계로 도망치지 못하고, 싸우지도 못한다.

 

백성들은 억지로 군사로 징병되고, 어리석은 지휘관의 명령에 목숨을 잃게 된다. 목숨을 잃기 위해 군에 입영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 입영한 것이다. 60세까지 군역을 해야 하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군적에 오르고, 이미 백골이 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군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폐단이 이미 17세기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시대의 기득권은 서인이었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상 속에서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적들의 칼과 창 앞에서 베어지는데도 망상만 꾸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금 다른 양상이다. 이 당시 의병들은 각기 출현했으나, 병자호란은 조금 다르다. 의병이 창궐해도 전국적으로 큰 성황을 이루지 못했다. 백성들은 알았다. 혼주 광해군을 내쫓아도 사실 인조 역시 별반 차이가 없었고, 광해군이 억지로 올린 토목공사도 인조에서 멈추게 아니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전주에 있는 태조 이성계 초상을 모신 경기전은 광해군 시대에 재건된 건축물이다. 전쟁 속에서 궁궐이 없어져 대군의 집에서 조회를 해야했던 선조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와 관련하여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와 손자를 죽게 만들고, 자신의 조카 역시 반역자들이 옹립하자 사약을 내린다.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광해군과 아들손자를 죽이고 조카까지 죽인 인조에서 왜 이리 다른 양상이 보이는가? 광해군의 어머니는 생모도 아닌 아버지의 계비로서 자신보다 어렵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친자식을 죽게 만든다. 이런 정치적 사건을 전후맥락을 따져 보면 <호남절의록>의 목적은 진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희생된 순국자를 위한 기록인가? 책을 읽어가면서 인조부터 시작하여 계속 이루어진 서인(노론)들의 정권통치를 정당화하는 문맥으로 이어진다.

 

책 초반에 동래부사 송상현을 너무 뛰워준 것부터 문제였다. 왜적이 3시간만에 동래읍성을 함락했는데, 그는 자신의 첩을 피신하게 했다고 하나, 사실 성안에 수많은 백성들은 도망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모조리 학살당했다. 경상권 최전선 성문이 단시간에 무너진 것은 일본군이 강한 것도 있지만, 전쟁의 기록에서 본 것처럼 화포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것이다. 화포를 이용하면 장거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성 아래보다 성위에서 발사하는 대포는 더 멀리 나가고, 성 아래서 발사하는 대포는 성 위로 오르기가 어렵다. 조총은 화약의 양과 탄환의 무게가 대포보다 못하기에 사정거리로 따지자면 대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연합군이 승리한 이유는 일본군보다 더 강력한 장거리용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들에게 대포를 이용하여 적진을 공격하고, 평소 훈련을 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무너질 수 없다. 단지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로 충신으로 올린 그 자체가 한심한 자태이다.

 

무기가 정비되지 않았거나 군사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휘관의 무능과 실책이다. 문관이 무관의 병법이나 지휘방법조차 모르고 그 자리에 앉는다면 적들에게 이로움만 주는 꼴이다. 만일 죽기를 각오하고 혼자 장렬히 전사하면 모르지만, 성안의 병졸과 백성들은 말이 다르다. 그들이 죽어도 어떤 기록도 남지 않고, 보상과 영광조차 없다. 그들은 목적은 전쟁에서 어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다. 이미 곡식을 탐내는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조정에서 이들에 대한 구휼정책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적이란 그저 왜만이 아니라 조선이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왕이 몽진하여 북으로 갈 때 백성들은 궁궐을 태우고, 양반 사대부집안을 불태우며, 일부 상인들은 왜적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민심은 왜 천심인가? <호남절의록>에서 민심의 향방을 묻는 글은 없다. 번역하신 분도 공신록에 대한 설명문을 언급할 때 역사적 사실을 전후맥락에 맞게 적어내었다. 하지만 책 자체가 당시 조선시대 한문서적을 한글로 번역했기에 역사적 평론을 거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말 나라를 사랑해서 죽은 사람이 만일 수 백 년 뒤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의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나, 절의를 지키기 전에 그런 상황을 막는 것 역시 중요하다.

 

광해군를 어리석은 임금이라 했지만, 막상 정묘·병자호란 당시 공신을 보면 광해군 시절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에 나간 인물이 많았다. 이미 광해군은 청나라의 불온함 움직임을 보고 거기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확충하고 훈련을 시켰고, 불천지 원수인 왜국에 주문하여 무기까지 수입한다. 항일전쟁사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독립전쟁사라면 임진왜란의 역사정신을 따라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조선이 이미 없어졌기에 다시 고국을 되찾고, 자유를 향한 분투는 순국자의 진정한 애국정신이다. 그런 애국자들은 병자호란의 인조와 서인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선독립을 위해서라면 중공과 소련, 미국과 유럽연합국이라도 손잡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발적 의지는 무참히 깨져 광복 아닌 광복을 맞이했으나, 21세기 우리 대한민국에서 다행히도 그들의 죽음과 공로를 기억해주고 있다. <호남절의록>에서 예로부터 전라도 지역은 의병도 많았지만, 그 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점령당하지 않은 영토이다. 게다가 전라도는 곡창지대라 많은 식량이 나오며, 전라도를 잃은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과 같다. 한편으로 곡창지대만큼 많은 수탈과 억압을 당한 지역이다. 농민이 쌀을 추수해도 대부분 나라와 권력자가 빼앗아 가버린다.

 

의병의 역사가 있는 만큼 동학운동사도 있고, 민족의 독립운동과 저항정신, 심지어 518의 민주화 투쟁도 있다. 21세기 <호남절의록>을 읽으면서 호남은 저항의 지역이기도 하나, 그만큼 아픔과 시련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인 현세대에서 백성을 하늘로 봐야 할 그들이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지배이데올로기만 만들기 바쁜 것을 <호남절의록>이란 도서로 확인했다. 물론 기억하고 칭송해야 할 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 진의를 다시 파악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전쟁에서 의병은 필요 없다. 의병이 되기 전에 이미 국가전산자료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다.

 

무기도 조총같이 수십m만 가는 게 아니라 수 천까지 날아가는 미사일이 날아온다. 물론 전쟁나면 탁월한 지휘관 내지 용사가 탄생하겠지만, 지금 무기는 과거처럼 검술과 궁술로 좌우되는 게 아니라 무기의 성능에 따라 달라지니 전쟁은 될 수 있으며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억지로 죽음의 길을 선택해야 할 이유도 없다. 명예가 전부이던 과거 조선이나, 그 명예를 위해 억지로 전쟁에 끌려가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그 희생을 만든 자들은 반정을 만들고, 그 이상의 조선인들을 죽게 만들었다. 역사란 반성을 해야 한다.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는 혼자서 삼궤구고두례 절차를 수행해야 했지만, 일제에 의해 망한 조선은 국민 모두가 삼궤구고두례보다 더한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것을 두고 공신목록을 기록했다면, 이런 행위를 지금에 와서 계속하거나 용인한다면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그런 <호남절의록>이라 책 내용을 다 읽으면 비장미를 억지로 밀어붙인 것이 왠지 안타깝고 한심스럽다. 하지만 이런 책이 있어야 후대에 알려지고 우리가 과거의 일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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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07 08:56   좋아요 0 | URL
어느순간 제 글이 헬조선의 기원을 찾아가는 블로그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 백성을 위한 양반들은 바른말을 하다 의금부에 끌려가서 맞아죽고
또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끔찍한 보복에 집안이 몰락합니다.

앵반이란 존재가 행정가 및 사상가로서 백성의 삶을 돌봐야 하는데
그리고 문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헤 학문을 해야 하는데 시문놀이만 추구했죠.

돌이켜보면 남인계열 학자들이 조선후기에 성리학 외에 의학, 복서, 지리학
수리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는데, 다 농사에 도움이 되고 주변 지여에 살아가는
백성의 삶을 유지하게 되는 방편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성호사설을 읽으면서 성호 이익선생이 길을 가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느 늙은거지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면서 제발 죽여달라고 외치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다 떨어진 옷에 추운 겨울에 비참한 몰골을 하는
그 모습을 생각할 때면 성호선생은 눈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까지 조선은 그야말로 완벽한 헬조선이었죠.
하다못해 이익 선생의 아버지 이하진도 바른 말 하다 귀양가서 죽고
형인 이잠은 바른 말을 하다 장살당해 죽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역사이고 그런 역사를 만든자들이 책임의식 없이 성리학에 의한 영웅주의만 외치니....

yamoo 2017-12-07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난 이후 조선 조정이 한 행태를 보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남인이 상대적으로 부국강병을 위주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많이 시행하려고 한 듯합니다. 노론 세상이 되니 헬조선이 된 듯....그러고보니 헬조선의 계보의 중조는 아마도 노론 일당 체제가 득세한 조선 후기가 아닌가 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08 20:16   좋아요 0 | URL
항교에 가면 제일 먼저 할일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향대상에서 제외하는 겁니다. 백성들이 배고픔에 절규할 때 대동법을 시행햐라 하는데, 이때 김육이 제안하자 같은 서인 그리고 노론의 창시자인 우암 송시열이 반대합니다. 산당 즉 재야에서 활동하는 사대부들이 농민을 보살펴주지 못할 망정 계속 착취하는 형국에서 헬조선의 역사는 다시금 불국토로 만듭니다.
 
본투리드 방석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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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이것 사용하고 있는데, 엉덩이가 너무 푹신해서 좋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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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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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평창 올림픽이 개최된다. 올림픽 마스코트가 백호와 반달곰을 기반으로 제작된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를 보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단방에 생각한 것이 있었다. 곰과 호랑이는 한국인의 국조 단군신화에 나오는 존재이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시작이고, 한국의 역사와 신화의 시작이다. 단군신화가 없다면 한국인이란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올림픽 역시 호돌이와 반달곰 캐릭터가 등장했다. 한국에서 단군신화를 결코 놓칠 수 없는 이유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단군신화의 중요성은 단순히 국제행사의 마스코트로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은 하나의 민족이지만, 국가는 2개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전신은 고종황제께서 반포하신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따온 말이고, 한국(韓國)은 고대 우리의 국가인 삼한(三韓)의 한()을 가지고 온 것이다.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가? 한국이란 국가는 우리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우리는 남한(南韓)이라고 말하고, 저 위에 있는 정권은 북한(北韓)이라고 한다. 반대로 북한은 자신을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을 두고 북조선(北朝鮮)이라 하고, 우리를 보고 남조선(南朝鮮)이라 한다.

 

단어를 본다면 북한은 조선을 우리는 한국을 인용하는 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 조선, 조선이란 국가가 단군조선을 계승한 점을 생각하면 국가의 이름에 아주 깊은 뜻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쟁이나 전투에서 다른 국가와 민족보다는 같은 국가 내에서 같은 민족끼리가 더 잔인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부른다. 신화에서도 그리스비극 오이디푸스왕과 아가멤논왕의 가족이야기는 비극을 넘어 인간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같은 종족이기에 같은 형제이기에 갈등은 더욱 무섭다.

 

집안에서도 마을에서도 친하게 지낸 사람끼리 다투면 그 화가 더 심해진다.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을수록 증오와 복수는 깊어지는 게 인간이 가진 딜레마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4주년이 되고, 광복절은 61주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일제로부터의 광복과 한국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조선총독부에 의해 징용에 끌려간 청년들, 위안부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의 영혼은 안식을 찾지 못했다. 이들의 영혼을 위로받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독립국가라 말할 수 없고, 한국이 통일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韓國戰爭)은 종전(終戰)이 아닌 휴전(休戰)이다. 최근 북한 핵문제나 휴전선 귀순병사 사건을 보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지난날의 슬픔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 조선을 잊는 것은 분단 이전의 한국을 버리는 것이고, 일제와 전쟁을 피해 멀리 외국 타향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고려인들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이 모든 비극의 씨앗은 그 당시 살아간 이들만 아니라 이들의 후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후예들은 아직도 우리라는 사실을 가끔 우리들은 망각한다.

 

예전에 형과 집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 집안은 일본제국주의에 많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큰형님과 동생분이 징용에 끌려가고, 해방 후 돌아오신 할아버지의 큰형님은 그만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본래 집안이 양반가문이나, 몰락한 남인의 후예이기에 그 여파로 할아버지는 한자를 제대로 읽지 못한 농부였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자유주의는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기 밤이면 늘 시골집 근처에 있는 저수지 들풀 사이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게다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아무 관련도 없는데도 빨갱이로 몰린 누명도 있었다고 했다. 비록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이 살아온 인생은 순탄치 못한 굴레의 연속이었다. 징용에 끌려갈 뻔했으나, 스스로 몸을 자해하여 운 좋게 징용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가족의 비극적 시나리오에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을 읽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도서로 가장 잘 읽은 서적은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 김태우 박사의 <폭격>이었다. 한국전쟁사를 일방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기밀해제문서를 다각적으로 정리하여 만든 도서이다.

 

전쟁은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후맥락을 관찰해야 하고, 특히나 그 시대에 전쟁 당사국이 아닌 주변 국가의 정치군사적 갈등도 확인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시기적으로 잘 정리하고 풀이한 도서는 박태균 교수님의 서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한국전쟁에 가려진 분노와 역사적 관점은 브루스 커밍스와 김태우 박사의 책이다. 김태우 박사의 책에서 북한이 패배한 전쟁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사실 북한은 상당한 피해를 받고 모든 것이 사라진 전쟁이라 말한다. 이에 반해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이기지도 못하고, 압록강에서 후퇴하여 패배한 전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승패가 나누지 못한 패배한 전쟁이라 말한다.

 

전쟁은 패배하지 않아도 패배라고 말하는 이유는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고, 그들이 저지른 행동들이 결코 떳떳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노근리 사건을 대두되고 있는데, 노근리 학살과 관련하여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한국인이 300만명이 사망하고, 그 중 반 이상이 민간인이다.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미군도 그러하나 왜 자국민끼리 그럴까?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중공군의 개입보다 한국인끼리의 혈전에 많은 생각을 보여준다.

 

전쟁의 시작은 1950년이 아니라 1932년부터란 점이다.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이 설립된 시기, 만주군관학교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장교로 임관하고, 그 중 일부는 유명한 대한민국 육군 장군이 되었다. 대한민국 초기 육군 장군과 육군사관학교는 친일세력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들과 더불어 경찰과 관료조직은 친일파들이 메우게 되었다. 이들은 자국민에 대한 탄압이 무척 잔혹했고, 항일독립투사에 대한 탄압도 지독했다. 민간인 학살에서 보여준 만행은 이가 떨리는 정도이다.

 

어느 친일파 장교출신 육군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 소년을 산에 끌고 와서 10명 중 9명은 일본도로 목을 베고, 나머지 1명에게 죽은 9명의 머리를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군부와 경찰에 대한 불신과 문제점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등장하고,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중에 가장 많이 몸담은 단체가 대종교이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 신자였다. 대종교 신자가 해방 후 서울에 오니 당시 자신을 지독하게 고문한 일본순사가 한국경찰이 되어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김원봉 대장도 해방직후 일제시대 순사를 했던 친일파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북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친일파와 친일파에게 불만을 가진 한국인의 대립이 이미 1930년대부터 존재했고, 쥐잡이작전은 육군사관학교에 가장 인기 높은 전략이다. 그런데 그 작전의 기원은 일본군이 하일유격대를 처치하기 위해 고안한 고도의 전략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은 대부분 중국 및 러시아 일대에서 활약했고, 사회주의 노선 항일투쟁가들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활동했다. 중국내전에서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소비에트연방, 그리고 미국의 파워게임에서 시작되었으나, 이미 그 전초는 한국인 내부에 있었다는 점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미국인이나, 은근히 한국사회와 역사, 게다가 문학과 신화 등 전반적인 한국문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갈등은 당시 전쟁만이 아니라 21세기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의 서문에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책을 바친다고 적었다. 반정부 인사, 평화중재자, 정치가로 활동한 그를 말이다. 지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호남에 태어났고, 한국전쟁 전에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빨갱이란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하지만 브루스 커밍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몸담은 곳은 공산주의 세력과 무관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닌 각종 인민위원회는 자생적 조직이라 말했다.

 

그런 증거는 미군의 문서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미군은 한국의 자체조직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이들을 공산주의와 같은 세력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학살사건은 제주도의 4·3사건이고,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아무런 통신장비도 없었기에 공산세력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미군과 서북청년단은 경찰세력으로 편입하여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 아직도 제주도는 4·3사건의 비극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당시 몇 만명의 주민들이 살해당했고, 몇 만명의 주민은 일본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은 아직도 일본에 있다고 한다.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에게 화가 미친다. 빨갱이라고 지목된 남자의 아내 여동생, 누나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윤간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희생자의 성기 안에 수류탄을 넣었다고 한다.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잔인함이란 인간으로 해서 안 될 경계선을 넘은 것이다. 3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총에 맞아 울고 있으니, 총에 달린 검으로 그 아이의 목을 베기도 했다. 당시 8살 소년은 자신의 여동생이 억울하게 죽어간 모습을 보았다. 평생의 상처가 되어 부모의 이름조차 말하지 못하다, 드디어 21세기 (진정한 의미로) 민주주의 정부가 도래하면서 당시의 비극을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미국은 한국에 대해 더 심각하게 대했다. 지금은 우방국가라고 하지만, 당시 한국전쟁 전후는 일본의 전진 군사국가, 일본의 전후경제 복구를 위한 체계로 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공장을 맡은 일본은 경제적으로 급성장을 했다. 미군에 의해 항복한 전범들은 일부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들의 후손 대부분이 일본의 총리와 의원직을 차지하고 있다. 아베 신조를 비롯한 자민당 의원은 대부분 우익정치가 내지 군인들의 후손이다. 미국에게 가장 치욕을 당한 그들이 이제는 태평양 국가 중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한국인들은 미국의 최고 우방은 한국이라 여기나, 사실은 일본이다. 동북아시아 미군기지 중 가장 핵심 전략은 일본 오키나와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 괌은 미국의 영토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영토가 아닌 미군의 군사력은 일본에 많이 포진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내전이고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된 전쟁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보여준 잔인성과 비극은 이미 뿌리내린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나 북한군과 아무 관계없어도 단지 북한군의 의복을 세탁을 해준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살해당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 내지 사상 따위는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며, 오로지 원하는 것은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량이었다. 이런 민간인들의 속성을 모르는 미군과 주변 강대국, 일제강점기 때부터 싹이 튼 원한과 공포는 광기의 도가니로 몰았다. 한국전쟁이 세계전쟁사 특히 항공전쟁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중요한 점은 세계 2차 대전보다 한국전쟁에서 폭격기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활약했고, 폭격기는 각종 군사시설 및 산업시설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이게 만들었다.

 

한국인은 대부분 흰색옷을 입으니 그들은 민간인인 것을 알아도 흰색만 보이면 무조건 폭탄을 투하했다. 민간인들에게 대피할 것을 권유해도 떠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다.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집안의 조상이 산에 있기에 쉽게 고향을 버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만주군관학교 출신 친일파장교들이 수행한 독립군 토벌작전도 포함되어 있다. 간도나 만주의 조선인들은 몰래 독립군에게 식량과 군자금을 지원하는 지원세력이었다. 그곳 출신 청년들은 독립군의 용사가 되어 일제에 항거했다.

 

조선의 민간인을 친일파 조선인들이 무참하게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그들이 이승만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한국전쟁까지 이어졌다. 제주도 4·3사건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대부분 희생자의 친척들이었다. 이들의 증오와 복수심은 지금도 제주도의 한으로 남아있고, 이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더 심한 억압과 폭력을 가한 것이다. 제주도만큼 심하게 압박을 받은 곳은 전라도지역이다. 전라도는 동학운동 시절 가장 착취를 많이 당한 지역이고, 외세가 가장 많이 초토화시킨 지역이다. 청일전쟁에서 전라도 지역이 많은 타격을 받았고, 일제강점기 시대에 가장 많은 곡식을 수탈당했다(왜 군산시가 항구도시로 성장했을 수 있는가?).

 

전라도 지역사람들이 폭압을 당한만큼 그들 역시 저항을 많이 했다. 그래서 제주도처럼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빚은 곳이었다. 지금 전라도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기보단 타 지역과 갈등을 빚고 있다. 518의 비극에서 아직도 빨갱이로 낙인이 찍히고 있는 그들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한국전쟁 전후의 한국사를 보면 항상 피해자가 악마나 마녀 내지 적으로 간주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나, 단지 그것은 살아남은 하나의 국가나 사회적 합의체이지 그 사회 내의 존재들이라면, 결국 역사적 진실은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을 보면서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가 다시금 떠오른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그것은 하나의 진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어느 관점에 따라 사실과 왜곡으로 변모된다. 20세기 한국에서 광주는 불온세력이 포진한 지역이라면, 21세기 현재 광주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킨 곳이다.

 

서평을 보자면 한국전쟁 전후로 민간인 학살을 한국인과 미군만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북한군 역시 민간인을 학살했다. 문제는 민간인학살을 하던 전범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 죄를 건들면 아직도 이데올로기적인 마녀사냥을 구가한다. 당시 한국전쟁의 전환점은 미군의 군사력이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시에도 국방력을 그렇게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군사력이다. 한국전쟁을 기해 미국은 방위산업체의 확대되고, 지금 미국의 방산업계는 세계 최고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있어서 2차 세계대전처럼 파시스트에게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계 패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다.

 

그 전쟁은 베트남전쟁도 이어지고, 냉전체계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 상원위원인 메카시가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메카시즘은 미국정치와 사회를 숙청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그 시기 한국은 공산진영과 전쟁을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에 언급했지만, 더 자세한 것은 <폭격>이란 도서에 나와 있는데, 미군은 유색인종인 동양인을 상당히 무시했다. 일본 상공에 폭격을 하나 한국의 농촌을 폭격하는 심정이었다. 한국인도 그들에게 하나의 gook(동양인을 멸시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학살하고도 이기지 못한 전쟁, 게다가 민간인학살까지 저지른 일들이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잊어진 전쟁이 되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디어가 참 많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에게 베트남 그 자체가 적이나, 한국은 적이 아니라 반쪽자리 우방국이다. 압록강까지 올라가 흥남부두에서 쫓기듯 내려온 그들에게 한국이란 인상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두고 변증법적인 논리로 보자면, 한국전쟁 이전 일제치하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린 친일파와 그들과 대치한 민중의 갈등에서(방안에 가득 찬 메탄가스),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 정체세력이 총(라이터)을 발사한 것이다.

 

1950년보단 못하나, 아직도 그 메탄가스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부유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정치적 세력으로 표출되며, 정당간의 대립은 한국전쟁과 그 이전에 존재했던 과거의 그늘에서 나오고 있다. 저자의 놀라운 관찰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나올 때의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아버지는 사회주의 단체와 연계되어 있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란 점에서 그가 실제 전쟁에서 한국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과거를 가지고 색깔론을 상대편 후보가 펼쳤다. 그 시대가 한국전쟁이 끝난 지 54년이 넘어도 그런 말이 나왔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계속 우리 사회에 남아있다면 한국전쟁의 불씨는 꺼질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북한과의 대화를 해야 하나, 한국사회의 갈등은 국내외적으로 정치, 군사, 외교에 큰 갈등을 야기한다. 전 정권의 정부는 일제가 저지른 위안부 문제와 징용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려 했다. 당시 자국민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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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4-14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봤습니다. 저도 이 책 읽어봐야 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8-04-14 21:14   좋아요 0 | URL
아이고 칭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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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형님께 드리니 정말 좋아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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