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 - 오래된 지식의 숲,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철 지음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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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리학자, 즉 유학자들은 정치를 하고 철학을 하며, 문화와 문물을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자들이다. 양반 사대부들의 문화와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된 점에서 그들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원류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참으로 기구하다. 한국학을 들여다보면 조상들의 슬기로운 모습도 보나, 주로 마지막 순간을 놓칠 수 없다. 그것이 좋았는지 아니면 나쁜지를 평가하기란 참으로 난해하다. 무조건 좋다면 어리석은 역사를 되풀이하고, 무조건 나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 시작된 부류란 말인가?

 

양반이 중심이 된 사족사회, 그러나 양반 그 자체를 연구하지 않으면 조선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조선의 주요한 기록은 대부분 양반 중심 지식계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고, 한글로 된 기록은 드물다. 한자를 사용하기란 어렵다. 일반 백성은 한자어를 몰라 지식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가 없다. 언어의 기능에서 문자를 아는 것, 즉 지식을 독점하는 것은 권력을 독점하는 것과 같다. 사대부의 독과점한 지식이 결국 우리가 아는 조선의 모습을 복원한다.

 

양반 중심이던 기록문화라고 해도, 그 중에서도 일반적인 사회상을 담은 자들도 더러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이며,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같은 경우 해양문학으로 가치가 높다. 게다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기록한 내용들은 조선후기 민중의 현실을 잘 알려주는 사료가 되어주었다. 양반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혹은 어떤 이야기들을 모은 것을 사설(僿說) 내지 유설(類說)이라 한다.

 

조선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표서적으로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도 있으나, 그 이전에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있다. 이수광이란 이름을 사람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모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봉유설>이란 책은 교과서 어느 한 단락에 있을 법한 책이므로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이수광은 전주이씨로 태종대왕 아들 경녕군 비의 후손이다. 본래 왕 내지 왕자의 후손은 일정한 직위를 주고, 과거를 보지 못하나, 그 세대가 지나면 다시금 볼 수 있다. 이수광은 명재이나, 다른 인물에 의해 그 명성이 상당히 가려진 인물이다.

 

이수광은 명종 후반에 태어나 인조가 집권 후 정묘호란을 맞이한 해에 사망했다. 명종은 중종부터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이 심했고, 특히나 명종의 어머니 문정황후는 정사에 깊이 관여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선조에 이르자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 겹친다. 조선의 명유들이 가장 많이 집결한 시기는 아마 중종 기묘사화 전후와 선조 임진왜란 전후일 것이다. 조광조와 신진사림들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 이후로 훈구세력이 집권하다 중종 말부터 사림이 기용되나 여전히 외척이 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선조가 보위에 오르자, 사림조차 동서 양당으로 나누어지고, 기축옥사 이후로 동인이 북인과 남인이 갈려졌다. 이수광의 이름이 가려진 이유는 우선 동고 이준경이 동인의 거두였고, 이준경의 뜻을 이은 오리 이원익은 남인의 명재상이었으며, 남인 신료에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수광 역시 시와 문학에 능했고, 글을 잘 적어 중국에서도 인정받는다. 이런 이수광이 한국역사 즉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른 것은 바로 <지봉유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실학자를 떠오른다면 먼저 다산 정약용,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으며, 그 이전에 성호 이익이 있을 것이다. 성호 이익은 남인에 속하며, 그의 형 옥동 이서는 동국진체를 만들어내던 서예가이고, 이익과 이서의 친구로 공재 윤두서가 있었다. 공재 윤두서의 아내는 이수광의 증손녀이다. 당파에서 신권을 중시하는 서인과 달리 왕권을 중시하는 남인이기에 전주이씨 사대부들은 남인계열 사족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당연하다. 대표적인 사건은 숙종 시기 김우명의 무고이다. 김우명은 서인계열이고, 김우명이 제거하고자 한 사람은 복창군, 복평군, 복성군으로 인평대군의 아들, 인조의 손자이다.

 

이들은 숙종에게 종숙(5촌 당숙)이며, 학문이 높은 왕족이고, 청렴하고 업무도 잘 보고 하여 큰일을 잘 맡았다. 문제는 이들은 남인과 친했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아버지 김우명의 무고를 덮고 싶어, 신하와 회의하고 있던 숙종에게 찾아가서 아버지를 살려달라 하여 결국 숙종은 아버지의 사촌들을 귀양 보내고 사약까지 내렸다. 이 일로 남인과 소론계열 유학자들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숙종 사후까지 손가락질을 하였다. 조선의 정치역사에서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남인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바로 이로하다.

 

물론 <지봉유설>에서도 과거의 문제를 지적했다. <성호사설>에서도 가장 필요한 인간 중에 하나가 과거로 소일거리를 하는 양반이고, 이들은 옳은 정신으로 벼슬을 하는 게 아니라 대필 내지 뇌물로 자리를 얻고, 자신이 투자한 것만큼 이상으로 백성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점이다. 이수광은 매우 청빈한 선비였고, 국가를 걱정하는 관료였다.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 이순신과 유성룡만 기억하나, 이수광도 외교문제로 명나라에 가고, 왜적과 싸우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갔다.

 

게다가 과거 억울한 일이 있던 자들의 한을 기록도 했다. 예전에 어떤 귀여운 여자아이가 주인 배게 속에 시체의 손을 넣게 하여 주인을 병에 걸리게 하게 했다. 조선시대 무고로 상대 진영의 관료를 반역죄로 죽이면, 그 집안의 남자들은 귀양지로 가거나 혹은 참수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공신의 재산이 되었다. 명종 을사사화로 화를 당한 유관은 평소 밑에 사람에게 자애롭고, 부정부패 고관에게 비판적으로 대했다. 그것이 화가 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때 유관의 식솔이 억울하게 종살이 하게 되자, 유관의 여종이 주인을 위해 복수하여 원수 집안의 식솔 8명을 죽게 만들었다.

 

물론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지만, 그 기상을 고귀하게 여겼다. 책에서는 1970년대 아파트 재건축 여종의 무덤을 이장하여 유관의 묘와 같이 합장했다고 한다. 21세기는 민주주의 국가이나, 조상에 대한 예의는 조선의 얼이 남아있다. 피를 나누지 않으나, 의를 보여준 그 어린 여종은 문화유씨 문중에서 500년 동안 제사상을 받은 것이다. 인간의 귀천을 다루는 것은 태어난 신분보다는 그()가 보여준 인생의 관록이라 볼 것이다. <지봉유설>에 이런 야사만 아니라 임진왜란 시기에 고난을 겪은 백성의 고통을 기록했다.

 

외국인의 모습과 복장, 그리고 그들의 언어도 기록하고, 식물과 동물, 지리까지 다양하게 기록했다. 다소 유학자란 신분이 있기에 한계성은 있지만, 남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까지 기록하여 전수한 것이다. 그런 업적이 있기에 녹우당 공재 윤두서에게 그 영향이 미쳤고, 실학자 대부분이 권력에서 박탈된 남인계열인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향촌 사족들은 그 지역의 주인이 되어 호령을 하고, 지방에 내려온 현감이나 현령조차 감히 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방의 향반들은 권력에 물러나 향촌에서 성리학만 잡는 게 아니라 의학, 복서, 천문, 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실학을 연구하면 벼슬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라 실생활을 풍족하게 만든다. 윤두서의 조상인 윤선도 역시 의학을 잘 알아 집안에 약방을 따로 만들어 약을 처방해준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잡학(雜學)이란 언제나 천대받고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직업에 따라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일들이 종종 보이는 세상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위에서 펜이나 잡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실태는 여전하다. 공자가 말한 선비 사족들은 농사를 짓는 자를 위해 그 소임을 당하는 자들이다.

 

물론 지금은 상사농공(商士農工)이다. 정경유착이 있기에 많은 국민들이 매일 땀 흘리며 살아가도 삶이 힘들 수밖에 없다. <지봉유설>의 중요한 점은 한국천주교회사와 연계성이다. 한국은 외국의 신부가 들어오지 않고 자생적으로 천주교의 문화유산이 뿌리내린 곳이다. 자연스레 들어올 수 있던 이유는 천주교가 서학으로 불리며, 과학기술적 요소 즉 실학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중국에 들어온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가 그 발원점이다. 최초로 천주실의를 연구한 학자는 성호 이익이고, 그가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점에서 남인 성호학파 급진파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최초로 조선에서 <천주실의>란 책이 소개된 것은 어디인가? 바로 <지봉유설>이다. 천주실의에 대한 자세한 검토내용은 없으나. 천주실의란 도서가 있고, 그것이 서구에서 왔다는 점을 알리는 것으로 <지봉유설>은 신문물에 대한 안내도서가 되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인간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화한다. 자신의 삶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게 아니나, 권력을 가진 자에게 현상유지가 목표인 점에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는 것은 기존 체계의 근원을 흔들 수 있는 위협이 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국가정치 기반을 흔들지는 않으나, 조선 지식인에게 새로운 파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자신의 세계이나, 우물을 벗어나면 이 우물의 수원이 저 산에서 내려온 지하수인 점을 깨닫고, 더 나아가 저 산에서 내려온 물은 자기 우물만 아니라 여러 우물에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자기 안의 세계를 넓게 확장하여 찾아갔지만, 막상 현실의 세계는 한계였다. 그래도 적어도 우리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자료들이다.

 

21세기 한국은 조선은 아니나, 여전히 조선의 역사는 지리적으로 남아있다. 서울이 수도인 것은 한양이 수도였고, 지리에서도 지하철명 역시 조선의 지리에서 그대로 이어간다. 경부고속도로가 추풍령을 넘어가나, 사실 추풍령 고개는 영남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걸어가던 자리이다. 지리도 그러하고 음식은 더욱 그렇다. 한국인이 즐겨먹는 술로 소주와 막걸리가 있다. 이 역시 오래된 우리의 문화에서 비록 되었고 조선의 음식이다. 그 기원과 흐름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세계화와 탈근대시대의 세계문화에서 더 이상 우리는 서양의 것에 의존할 수 없다. 이야기 거리와 전통적인 가치는 결국 새로운 상품과 문화자산이 된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문화유산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눈을 돌린 것들이 참 많다. 그런 것들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나, 거기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기 보다는 그저 이런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은 유교가 오면 조선의 유교가 아니라, 공자의 유학이 되고, 불교가 오면 조선의 불교가 아니라 석가의 조선이 된다. <지봉유설>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생각이 들어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들고 와서 다시 보여주면 의미가 없다. 거기서 새롭게 각색해야 새로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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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탈핵 - 대한민국 모든 시민들을 위한 탈핵 교과서, 2014 올해의 환경책 / 『한겨레』가 뽑은 '2013 올해의 책' / 『시사IN』선정 '2013 올해의 책'
김익중 지음 / 한티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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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에너지 부족으로 옥수수를 이용하여 천연에너지를 만들면 어떨까 라는 담론이 있었다. 자연에서 나오는 식물을 이용하여 오염물질이 아닌 천연연료라면 괜찮은 방법론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거대한 모순이 있었다. 옥수수를 키우려면 기본적으로 넓은 부지가 필요하고, 땅이 좁은 나라에서 불가능하다. 더 문제는 옥수수가 많이 수확되어야 하나, 보통 옥수수가 병충해나 기상이변에 모두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옥수수의 수확을 늘리기 위한 GMO 즉 생물유전자 변이된 종자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유전자가 변이된 식물은 단순히 작물 스스로가 아니라 주변 토양에 영향을 주고, 토양 내 미생물에서 토양생태계, 그리고 지하수까지 영향을 준다.

 

농지가 있는 부지는 항상 물을 대어주어야 하므로, 대부분 소하천 내지 개울가 근처에 있다. 하천 규모가 클 경우 수해로 인한 피해가 있을 수 있기에 배수문제와 급수문제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지하수의 레벨은 근처 하천에도 영향을 준다. GMO작물은 생태계에 큰 영향을 주고, 게다가 잘 사라지지 않는다. 옥수수를 이용한 연료는 무리수가 강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옥수수를 재배하기 위해선 노동력이 필요하다. 최근 노동력은 인간의 노동력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재배한다. 기계를 사용하면 연료가 소모되고, 장비가 많고 가동시간이 길수록 연료소비는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면 에너지를 어떤 대안을 내세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어려운 숙제이고, 난해한 질문이다. 20세기 후반으로 오자 한국에서 이 문제는 화두가 되었다. 산업화시대 검은 하늘과 더러운 하천은 산업화의 상징이다. 하지만 환경오염으로 국민들은 병이 들고, 환경법의 시초인 공해방지법이 제정된 것이다. 산업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물류운송을 위한 운송수단인 자동차와 기차, 선박이기도 하나, 그보다 상품생산에 필요한 에너지 전기였다. 전기를 생산하는 방법은 댐을 이용한 수력이 있지만, 대부분 석탄과 석유를 연소하는 화력발전이었다. 화력발전의 문제는 대기오염물질을 발생시키고, 대기 중 비산먼지, , 질산 및 황산 산화물이 부유하고, 비가 오면 산성비가 되어 지면에 내린다.

 

산성비는 호수와 토양에 유입되면 수생태계 및 토양생태계의 pH(수소이온농도)를 저하시켜 생물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한다.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화력발전의 대기오염저감시설을 설치도 한계가 있고, 에너지 수급을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여기서 1980년대 핵발전소 설립이 추진되고,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골치가 아픈 월성, 고리 발전소의 사연은 국가적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탈핵>을 읽으면서 이 책의 발간이 조금 더 늦었다면 좋겠다고 여겼다.

 

책에서 경주의 지반이 매우 약하고, 지반이 약한 곳에는 지하수 유입과 빗물의 침투가 심하여 토목구조물의 안정성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경주에도 핵발전소가 위치한 것도 있지만, 최근 1년간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은 핵발전소 안전에 큰 경각성을 주었다. 2010년대 올라오면서 세계적으로 가장 큰 재난은 일본 후쿠시마 발전소의 폭발이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지진과 해일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이며, 지진이 일어나면 화산폭발이나 쓰나미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지진 규모가 강진 규모에 이르면 아무리 견고한 구조물도 문제가 발생되고, 때에 따라서 붕괴 내지 파손이 발생된다.

 

지진이 중간 정도여도 집이 허물어지고, 건물은 파손된다. 일본 관동대지진 시기 많은 주택이 무너지고 화재가 일어난다. 보통 지진에도 화재가 위험하나, 핵발전소 인근은 더욱 위험하다. 지진의 1차적 사고는 바로 지각변동에 의한 구조물의 파손이나. 2차적으로 두려운 것은 지하에 매설된 가스, 수도, 전기의 손상이다. 일정한 유체유량을 지닌 이런 설비들은 어디서 중재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뿜어 나온다. 전기에 의한 스파크에서 가스가 포진되어 있다면 화재사고로 이어진다. 주유소나 가스충전소의 위험도 그러하나, 더 심각한 곳은 원자력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핵발전소이다.

 

후쿠시마 발전소에 대한 교훈은 핵폭발이 주는 위험을 알려주고, 20세기 최악의 핵발전소 사고인 체르노빌보다 심각했다. 일본의 후쿠시마 인근에 위치한 바다는 방사능으로 오염되고, 하다못해 주변에 위치한 지역도 방사능이 넘쳐나고 있다. 일본 수도 동경에 방사능 수치가 일반적인 지역과 비교하여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핵발전소가 위치한 곳은 대부분 중앙도심지보다 지역에 위치한 농촌 내지 어촌이다. 냉각수를 구하기 위해 바닷물을 이용하는 점에서 해안가에 더 많은 핵발전소가 있다.

 

국내 핵발전소는 바다를 끼고 있지만, 핵발전소 인근지역은 어촌만이 아니라 내륙으로 들어가면 농촌이 나온다. 그 말은 무엇이냐? 핵발전소가 문제가 생기면 그 지역만이 아니라 주변지역에 방사능이 퍼져가고, 시골지역이 인구밀도가 적다고 해서 무시할 사안이 아니란 점이다. 한국의 NIMBY 현상에서 가장 한심한 것은 중앙도심지가 아닌 다른 지역에 위험한 시설이 설치되어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심각한 문제는 사고에 의한 피해지역 설정만 아니라 식량의 문제이다.

 

자신과 멀리 있는 곳에 혐오시설이 생기면 당장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이나, 대부분 핵발전소가 농어촌이 위치함 해안가이란 점이고, 그곳에 나온 농수산품이 우리 밥상으로 올라간다는 점이다. <한국탈핵>에서 일본 후쿠시마 발전소 사고에 따른 일본 수산물 수입문제를 거론한 것도 있지만 국내 핵발전소에서 문제가 생기면 우리도 그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더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최근 부산 기장에 사는 친구에게 기장 고리발전소 주변에 사는 어민들에게 핵가스 중독이 있다고 들었다. 발전소에서 나오는 수증기에 핵이 들어있고, 발전소 주변 지역과 해역에 분포하여 어민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반해 사무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기장 해수담수화로 방사능 문제를 이야기했지만, 해수를 수증기로 만들어 물로 사용하는 것보다, 기장앞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의 방사능오염치가 더 높은 게 아니냐는 말이다. 환경학적으로 생물농축에 대한 분석에서 상위포식계층에 갈수록 독성물질의 포함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독성물질이 오염된 멸치 100마리보단 농어 1마리가 더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연 고리 주변의 어민이 위험한가? 라는 토론은 그런 식으로 어물쩔하게 넘어갔다.

 

이래저래 들으면 무서운 말이나, 적어도 <한국탈핵>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한국수력원자력공단에서 감춘 내용을 보면 사무실에서 나온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암이다. 세포 내지 유전자 변이는 정상세포를 비정상세포로 만들고, 비정상세포가 증식하면 암으로 변이되어 각종 증세로 인명을 잃게 한다. 책에서 방사능으로 인한 암 발생 확률을 보니 핵발전소 인근 주민에게 높았다. 정부와 공단이 가해자지만, 한편으로 조사관이니, 정부가 어떤 세력이냐에 따라 핵발전소에 대한 정보와 안전대책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핵피아란 단어가 있다. 핵발전소와 관계되어 이권을 지닌 단체나 조직, 세력을 두고 한 말이다. 핵발전소는 핵발전 내지 원자력, 방사능 같은 위험물질을 다루고 있고, 게다가 이런 위험한 성분을 다루는 기술이나 연구단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반사람이 어떻게 핵발전을 다루고, 그 원리를 이해하는가? 제한적 정보와 제한적 접근이므로 대규모 자본과 핵발전 이론을 아는 일부 세력만 잡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아니면 해외에 있는 연구자와 기업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핵발전소만 아니라 공항이나 항만 같은 국가시설은 보안이 필요한 시설이다. 일반 국민에게 공개되지 않으니, 핵발전소와 관련된 카르텔의 입장에 좌우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대학교 전공으로 환경공학을 수학했는데, 핵발전에 대한 환경공학 전공에서는 국내 에너지 40% 정도이고, 대기오염을 만들지 않은 청정에너지기도 하나, 체르노빌 원전사고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기술했다. 다른 영역에서 대기오염과 관련된 서적에서 미국지하철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사망자 중에 수천명이 폐질환으로 사망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지하철 내 라돈가스가 폐에 침투하기 때문이라 했다. 라돈은 방사능 물질이다.

 

라돈이 아닌 세슘이나 스트론튬 등 물질이 나온다. 핵발전이나 핵폭발에서 발생되는 방사능물질은 200가지가 넘는다고 하니, 매우 두려운 재앙이다. 문제는 핵발전소가 세계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나, 한국은 아직도 계속 늘리려 하고, 30년 제한년도를 넘기고 계속 연장하려 하는 점이다. 후쿠시마발전소의 폭발이 지진문제도 있지만, 사용연한이 계속 넘긴 점도 있다. 결국 핵발전소가 많이 설치되고, 그 사용연한이 늘어갈수록 핵발전소 사고확률은 증가하고, 그에 따른 피해는 심해지는 것이다.

 

후쿠시마발전소 사고 시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했으나, 없는 것은 아니다. 미미하지만 비가 온 날과 그렇지 않은 날, 계절에 따라 방사능 수치가 달랐던 것이다. 한국풍향기상에서 대부분 서에서 동으로 간다. 중국의 황사가 계속 오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하지만 동측에서 서측으로 오지 말란 법도 없다. 대기기상은 일정하지 않다. 계절과 태풍, 기온 등 다양한 인자에 따라 공기의 순환이 바뀌기 때문이다. 자연 중에도 방사능이 존재하나, 사실 우리는 그 이상의 방사능을 일상에서 접한다. 매년 내지 2년마다 건강검진을 받을 때 흉부 X-선이나, CT촬영, 조영술 촬영은 많은 방사능을 피폭하게 한다.

 

방사능은 피부로 닿는 것보다 신체 내에서 작용하는 것이 위험하다. 단순히 어느 제품에 방사능이 관리수치 이하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사능 피복수치의 총량단위의 검토가 필요하다. 1일 식단이 600g이라 하나, 사실 물과 음료까지 생각하면 3~6까지 이른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문제에 대한 연구 기초자료도 없다. 원자력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원자력의 노출도가 높을수록 암에 걸릴 확률도 높다. 특히 어린아이와 여성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임신중인 여성에게 장애를 가진 태아가 나오거나 유산될 확률이 높다. 여성은 특히나 갑상선암이 위협적인데, 호르몬 작용과 관련하여 유전자 변이의 문제가 생사의 여부까지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에 대한 환상과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은 핵발전소 건설과 운영이 일부 특수집단의 이해관계이라면 우리는 이에 대한 다른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최근 태양열발전이 두각 되고 있다. 태양열발전을 하면 많은 토지를 소모한 것은 분명하나, 핵발전소 사고처리에 들어가는 금액이나 혹은 핵방사능 폐기물처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핵폐기물을 처리하려면 고준위 처리해야 하나, 한국의 지역이 넓은 것도 아니고, 최근 지진현상을 봐도 지질학적으로 안정하지 못하다. 지하수처리도 쉽지 않다. 단지 쉬운 길만 선택하면 어려운 뒤처리가 남은 것이다.

 

태양열발전이 되면 각 가정이나 주변 생활에 보급되어야 하기에 보편적인 시설이 된다. 그러면 일부 특정계층에게 이익이 가는 게 아니라 공공성을 띄게 된다. 산업화규모에서 어떤 특정계층에게 시장이 열린 게 아니라 수많은 산업체를 요구한다. 전기도 가정에서 생산하게 되므로 한국수력원자력공단의 전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에너지권력이 분산되면 분명 누군가는 손해 본다는 심리가 작용한다. 책에서도 좋은 사례를 보여주었지만, 태양열 발전을 하려면 강도와 재질을 고려하여 설치하면 충분하다. 고속도로 방음벽 안쪽은 몰라도 외부는 문제가 없고, 건물 옥상이나 창문 역시 가능하다.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서 많은 연료가 소모되고, 이에 따른 열과 대기오염물질 발생은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최근 전기자동차의 보급에서 자동차 연료로 들어가는 전기충전소의 보급에서도 문제가 있다. 전기는 무공해지만,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은 공해가 발생된다. 사람들은 다들 환경이 소중하다 말은 하지만, 자신이 사는 집주변에 맑은 공기와 깨끗한 생수만 즐기면 그만이다. 더 멀리 있는 지역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핵발전소에 발생되는 전기를 송전탑으로 전달하려면 많은 건설비와 관리비가 필요하다.

 

대도시 인근에 핵발전소가 위치하면 전기를 안전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지만, 자신이 사는 생활지에 거부하는 심리에서 이중적 잣대가 드러난다. 이 책을 보면서 예전에 핵발전소 인근에 사는 주민이 후쿠시마발전소의 사고가 터지기 전에 방문했다고 한다. 일본의 핵발전소에서 지역주민에게 지원하는 예산이 한국의 10배 정도라는 말을 듣고 한국 주민들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부산 기장군 장안에 위치한 고리에 핵발전소가 있기에 기장주민은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인명사고가 일어난다.

 

핵발전소 건설이 한국에너지정책에 당장 이득은 볼 수 있겠지만, 장기적인 환경안전에서는 치명적인 독이다. 안전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사고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토대에서 발생된다. 사람들이 심하게 착각하는 점은 핵발전소가 주변에 있어도 피해가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방사능 역시 생물농축에 따라 수십 년 뒤에 발현되고, 그것은 자신들의 후손에게 일어나는 점이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피폭 같은 사고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의 피해가 3대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핵방사능의 피폭만 아니라 베트남전쟁 당시 고엽제 후유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으며, 하다못해 그들의 자손까지 건강에 큰 문제를 주었다.

 

핵발전소에 대한 인식을 고려해야 하는 점은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을 위해 폐기물들을 마구 남발하면서 그 책임을 후대에게 돌리고 모른 척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또한 우리가 앞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야 한다. 암이란 질병은 참으로 무섭다. 암은 외부에 침투하는 질병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암을 발견하기도 어렵고, 발견해도 치료가 어려우며, 치료 후에도 재발 내지 전이되어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깊은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다. 핵발전소를 모두 없애는 것도 아니고, 점차적으로 감소시키며,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기술을 발전 및 보급이 중요하다. 환경을 위해서라도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니라면 가족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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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8-15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인들에게 강추강추 또 강추하는 책 중 한권이네요^^

만화애니비평 2017-08-16 09:02   좋아요 0 | URL
조금 더 보완하여 재발간하면 좋겠다는 생각인 책입니다
 
오리 이원익 그는 누구인가 - 개정판 오리 이원익 그는 누구인가
함규진.이병서 지음 / 녹우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위기의 순간은 언제인가? 연산군의 폭정, 조선의 몰락도 있겠지만, 조선의 몰락에서 그 기원은 임진왜란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후기로 넘어가는 과정은 임진왜란과 그리고 뒤에 일어날 병자호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진왜란 이후에는 정치적 갈등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심각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넘어가면서 붕당정치의 최악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의 붕당의 폐단은 있었지만, 그 전초는 광해군 시대를 중심으로 선조부터가 문제일 것이다.

 

선조가 임금이 된 계기는 명종이 승하할 때, 그의 후사가 없었고, 명종의 아내 인현황후는 그다지 힘이 없었다. 사실 인현황후보다 명종의 어머니 대비마마인 문정황후가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의 왕권을 위해서 신권을 견제하고, 신권을 동맹을 삼기 위해 양반 사대부 집안과 혼인하나, 이것이 문제이다. 사실 여자들은 조선시대에 정치에 관여해서 안 된다. 지금도 여자가 정치하면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자가 정치를 하면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왕비가 정치적인 입지가 너무 커지면 인척관계에 있는 척신들이 지나친 횡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조선 마지막 임금 고종황제께서 정치적 입지가 없던 이유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의 관계이다.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되었고, 친일파가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팔아먹었기에 명성황후의 인상은 긍정적이나, 사료를 조금 더 들어가보면 아니다. 명성황후가 지나친 정치개입은 민씨 일가에게 큰 부와 권력을 주었고, 부정부패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왕비 본인도 흥청망청 재물을 소모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옛날에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치적 구조에서 드러나는 현실이었다.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이니 그런 걱정은 없다. 지금은 어리석은 남자나 여자가 정치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혼돈에 빠진다. 당시는 인척간의 관계성이 결국 왕권 약화만 아니라 부정부패로 이어지고, 그 모든 폐단은 백성의 삶을 깊게 파고들었다. 백성의 운명은 오로지 현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만이 아니다. 대비와 중전의 인품 역시 크게 작용했다. 정치적으로 선조시기에 중전이 누구의 딸이냐에 따라 정치적 입지가 바뀌었다.

 

즉 붕당정치에서 임금의 옆에 어느 정치세력이 붙는가에서 상대 세력이 몰살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임금에게 충성하는 신하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충성할 수 있는 신하는 외척관계보다 종실의 후손이 유리했다. 종친에는 대군과 군에 따라 작위가 3대 내지 4대까지 내려가고, 그 이후에는 일반 사대부와 같은 입장이 된다. 그래도 왕가의 성씨인 전주이씨가 남아있고, 전주이씨 문무백관은 그나마 신권과 왕권 사이에서 왕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가 후사가 없고, 군주의 형제도 없으면 방계의 후손으로 임금으로 올린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나, 정조와 순조, 순조의 아들이 죽자, 사도세자의 다른 후손인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임금으로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이렇다. 조선의 왕족, 전주이씨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뽑으라면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 계신다. 세종대왕이 보여준 업적은 한글 훈민정음 창시와 과학의 발전이고, 정조대왕은 조선 최고의 문무를 겸비한 군주이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은 무관이었고, 그 뒤의 임금 중에 그나마 무예가 뛰어난 임금은 세조, 효종과 헌종,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전주이씨는 임금과 왕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란 드라마를 보면 충무공 이순신 옆에 정성을 다해 보좌하는 이억기 수사가 나온다. 이억기 수사 역시 전주이씨 집안 출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전주이씨 문중 인물로 오리 이원익이 있다. 이원익은 태종임금의 아들 중 하나인 익녕군의 후손이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서적을 보다가 함명기 교수의 서적을 보면서 이원익이란 이름을 보았고, 그가 종친이기 때문에 선조가 상당히 의존했다는 글을 보았다. 이원익은 성균관 유생에서 학문을 수행하다 당시 정승인 동고 이준경을 만난 후 이준경의 영향을 받아 실천적 유교를 실행했다.

 

한국 정승 중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황희, 유성룡, 채제공을 많이 알 것이다. 황희는 세종대왕과 유성룡은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의 친구이고, 채제공은 영조와 정조를 모신 명신이다. 하지만 이준경과 이원익을 잘 모른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많이 없고, 태평성대 시기도 아닌 난세의 세기에 다른 인물에 가려진 정승이다. 이원익과 같은 경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문신 유성룡과 거의 동급으로 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오리, 이원익은 그는 누구인가>에서 숨겨진 명정승 이원익이 나온다. 이원익은 조선 역사에서 영의정을 가장 많이 한 신료 중에 하나이다.

 

그의 정치적 스승인 이준경의 초년은 사화와 관계되어 힘든 삶을 살았지만, 이원익이 몸이 약할 뿐이지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는 중종과 명종 시기 왕권이 약화되고, 신료들은 정치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재산을 불려갔다. 재산이 관계되면 정치권력이 모이고, 게다가 관직의 수는 한정적인데 계속 사람들이 오고갔으며, 동인과 서인이 구분되면서 피를 부르는 바람이 서서히 오고 있었다. 이원익은 동인과 서인 중에 동인계통이었다. 그가 이준경에게 큰 가르침을 받은 것도 있지만, 개혁적인 성향도 있었다.

 

임진왜란 전 기축옥사로 많은 동인 계열 선비가 죽고 상했다. 이 계기로 서인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쪽이 북인, 복수보단 조금 가라앉히고 정국을 주도하자는 부류가 남인이었다. 남인 쪽에 이순신과 유성룡이 있었고, 북인에는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과 이산해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원익은 남인이도 피를 피로 씻는 정치적 쟁략보단 정국운영이 중요했다. 초급 문관일 때는 사소한 일에도 집중하며, 하급관리의 일도 배웠다. 더 나아가 목민관이 될 그 지역의 문제를 알고 제도적으로 수정했다.

 

민심을 잘 어루 만져주고, 성품도 온화하며, 게다가 청렴하고 검소하여 뭇 백성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다. 이원익은 조선이 군주의 나라인 것을 아나, 그래도 조선의 군주는 만 백성의 어버이기에 어버이는 자녀를 사랑하며 돌보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이런 성품은 전쟁이 일어나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백성들은 전쟁이 나자 도망치기 바쁜 선조임금과 고관들을 비난했다. 다른 문관들이 먼저 길을 떠나면 백성들은 야유를 보내나, 이원익이 오자 모두 공손히 받아들인 것이다. 평소 행실이 위급상황을 타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원익이 전쟁에서 가장 활약한 점은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것보다 전쟁에서 필요한 정치적 조율이다. 무관이 전쟁이 나가면 식량과 보급, 명군의 외교 등이 어려웠다. 게다가 전쟁이 나면 민심이 크게 동요하니, 다른 것을 몰라도 민심을 안정시키는 게 가장 급선무이다. 무관 중 문예가 깊은 자는 그나마 침착하나, 성질이 포악한 무장은 앞뒤 안보고 적진에 돌격하여 군졸을 죽고 다치게 만들었다. 조금 화가 나면 곤장을 치거나, 자기 말이 군율이기에 부하나 백성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참형에 처하기도 한다.

 

이원익이 가장 잘 한 정치적 행위는 이순신의 보호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아낀 것은 분명하고, 그의 백의종군에서 사형을 면하게 하려 한 것도 사실이나, 유성룡보다 이원익이 더욱 더 이순신을 구원하려 했다. 책을 보면 느낀 것이나 유성룡은 이원익보다 성품이 더 강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름 이성적이고 냉철하고, 이원익 만큼 여유가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징비록>을 보면 그의 성품이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의 논리정연하나 유성룡보다 포용력이 높았다.

 

남에게 싫은 말을 하는 편이 아니고, 게다가 선조의 신임을 무척 받고 있었다. <오리, 이원익은 그는 누구인가>를 읽기 전 이원익의 인물을 잘 알겠지만, 다소 아쉬운 것은 이 책에서 선조는 나름 괜찮은 임금으로 나온다. 이에 반해 광해군은 문제가 많은 왕으로 묘사된다. 선조는 초기에 이황을 스승을 모시고, 조선왕조역사에서 가장 많은 명신을 거느린 군주이다. 신하 중에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이준경의 종족인 이항복도 있었다. 율곡 이이도 등장하니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을 이룬 것도 이때이다.

 

그러나 임금은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기축옥사를 정철에게 맡겨 피바람을 불게 만들고, 정철이 지나친 옥사를 만들어 사람들이 죽고 다치자,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번에 이산해와 동조하여 정철 무리를 숙청한다. 직계가 아닌 방계승위가 문제였고, 명종시기에 해결되지 못한 권력의 모순이 계속 이어졌으니, 정치권은 말 한 마디에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변방의 무장을 이해해주기 보다는 정치권력에서 생각했고, 의병이 북인, 근왕병은 남인 쪽이 많아 그쪽 세력이 강해지자 서인인 원균을 삼군통제사로 올리나 결국 왜군에게 패배한다.

 

죽기 일보 직전인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키다 결국 이순신은 유성룡의 탄핵 날에 순국한다.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로 인한 스트레스와 정실부인이 아닌 서자 차남 출신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북인의 편에서 정국을 운영하던 광해로선 주변 신료들과 마찰이 심했다. 이 책에서 광해군이 다소 평가가 절하되나, 한명기 교수 서적을 보면 광해보다 인조가 더 문제라고 서술한다. 광해군의 정치적 입지를 반대한 무리가 인조반정을 일으키고도 광해군의 정치구도에서 더 나아가지도 못한 것도 모자라, 실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이원익의 활약이 보이는 것은 여기서이다. 대동법을 김육이 했다고 하나, 사실 이원익이 먼저 준비했고, 중종반정으로 모든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을 때 이원익이 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모두 안도했다고 한다. 다른 신하는 몰라도 이원익 하나를 보고 모두 안심했다는 점에서 이원익의 인품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이 형님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려 할 때 모두 찬성하고 있을 때 이원익만 반대했고,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모두 죽이려 할 때 이원익만 반대했다. 광해군의 실각이 무능 내지 부패라고 하나, 막상 인조가 입권하자 인조의 무능함이 더 심각했다.

 

이원익의 특성은 필요할 일이 있으면 직접 몸소 나서고,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훌륭한 선비들은 나라의 문제가 발생되면 해결하려 하기보다 자연의 세계에서 처사로 지내기 원했다. 물론 중앙정부에 권력자들은 바른 말을 하던 자를 꼽게 볼 리가 없고, 정치적 실리보단 명분으로 권력을 사유화하기 바쁘니 조선의 운명은 청나라에 밟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원익은 조선의 문제점을 알았지만, 제대로 바꿀 수 없었다. 시대와 흐름은 결국 권력자들의 이기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원익의 외손자 허목 미수는 매우 뛰어난 학자이나, 처사적 삶을 살았고, 추후 예송문제로 활약했으나, 선비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원했다. 그러나 이원익의 공적은 후대에도 전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나 정조대왕도 이원익의 공덕을 기렸다. 정조대왕 시절 채제공이란 명정승이 있어도, 이원익이 옆에 없음을 아쉬워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오리, 이원익은 그는 누구인가> 작가는 함규진과 이병서이다. 이병서 작가는 이원익의 직계후손이라 하는데, 그의 서문을 저술할 때 녹우당에서 작성했다고 나온다. 녹우당은 해남군 연동리에 위치한 고산 윤선도의 고택이다. 윤선도 역시 이원익 같은 남인 계통이고, 허목은 남인의 영수에 고산 윤선도와 친했다. 윤선도의 고모할머니는 기축옥사에 장형을 당해 억울하게 죽었다. 당시 기축옥사 때 동암 이발의 어머니가 윤선도의 고모할머니였고, 윤선도는 기축옥사 때 억울하게 죽은 정여립을 비롯한 선비들의 신원을 회복하려 했다. 윤선도보다 먼저 이 일을 시작한 인물이 이원익이다.

 

이원익이 하던 일을 윤선도, 그리고 이원익의 외손 허목이 이어갔다. 윤선도가 운명을 하자 허목은 윤선도의 묘비문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전주이씨 문중 사람이 전주이씨 고택이나 사적보다 왜 해남윤씨 고택에서 서문을 적을까 하는 생각하면 역사란 지나간 것의 이야기라고 해도 여전히 당시 사람들의 의지는 우리에게 남아있다. 지금도 보면 실제 정책적으로 실행해야 할 안건이 당론에 막혀 일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원익은 상대편이라도 정책적으로 옳으면 실행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원익 추진하고 하는 정책을 입안하면 상대편이 동의해 준 것이다. 이원익은 백성을 중심으로 정치를 한 인물이다. 물론 임금인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를 보필하더라도 오직 백성의 입장을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 다들 백성들의 입장보다 자기의 안위만 챙겼지만, 결국 백성의 입장을 생각했기에 전쟁 중이나 복구 중이라도 정국이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꼭 배워야 할 자세는 타협의 정치보단 국민을 위한 정치이다. 정치를 하기 위해 타협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위해 타협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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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신명
이용두 지음 / 책과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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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때이다. 아버지는 집안에 기묘사화를 당한 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를 알아보니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조광조 선생의 문하로서 한양태학(漢陽太學), 성균관에서 학문을 수행하는 진사였다. 집안의 족보를 찾아보니 과연 조정암(趙靜庵) 종유(從遊)라는 글이 있었다. 족보에서 같이 딸려 나온 묘비명이나 기타 사료를 찾아보니 그분의 묘비명이 있었다. 어려운 한자어를 한글로 번역(그래도 명사는 한자이다)한 문장을 읽었다. 본래 진사로 성균관에 학문을 수행하다 기묘사화 때 스승을 잃고, 그분 역시 화를 당했다고 한다.

 

이때 화를 당한 사람 중에 그분의 재종조부(할아버지 사촌동생), 탄수 이연경 등 다양한 학자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화를 당한 것과 조정암 선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낙향했다. 고형에서 학문을 전파하고, 가까운 문우들과 학문을 논하면 말년을 보냈다. 그때 같이 학문을 논하던 인물 중에 탄수 이연경 선생이 있었다. 이연경 선생은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로 화를 당하신 분이다. 그분의 할아버지가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사약을 내리려 간 집행참관자로 간 게 화의 근원이었다.

 

연산군은 이연경 선생의 할아버지 이세좌를 사약을 내리게 한 후 시체를 갈기갈기 찢는 것도 모자라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이세좌의 아들들, 이연경 선생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 모두 참수형을 당하여 그 머리를 효수하도록 해다. 집안이 화를 당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이연경 선생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자신도 제주도로 유배로 가야했다. 조선의 유배에서 한양에서 가까운 거리면 죄가 가볍겠지만, 멀리 남으로 진도, 기장, 해남과 북으로 함경도로 떠나면 그 죄가 엄중한 것이다. 가까운 것이라도 강화도 역시 죄가 무거운 죄인이 간다.

 

인조반정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가는 이유 역시 그 죄가 깊다.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높은 형이고, 유배지에 있는 죄인은 언제 금부도사가 찾아와 사약을 내릴지 모르는 형국이다. 이연경이 운이 좋은 건 금부도사가 제주도로 가서 형을 집행해야 하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 배를 띄울 수 없는 상황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으로 이연경 선생은 다시 고향 충주로 가고, 그리고 이연경 선생의 사촌형제 역시 다시 고향으로 해배되었다. 이연경 선생의 사촌동생 중 이준경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갑자사화로 처형되고, 이준경과 그 형 이윤경 역시 어린 나이에 유배 살이를 해야 했다. 조선의 형은 참으로 무섭다. 조선이 문장과 예의의 나라라고 하나, 백성들은 늘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렸고, 사대부들 중 권력을 잡지 못하거나 혹은 백성의 편에서 권력에 항거하면 그 화가 온 가족을 도륙 내었다. 이준경은 그저 폐비윤씨의 사형집행을 한 할아버지의 과거 일로 어린나이부터 힘든 삶을 사니 얼마나 힘들 것인가? 죄인이 되는 가족에서 남자들은 너무 어리면 유배를 보낸 후 일정 나이가 되면 사약을 보내거나 혹은 다시 압송하여 참형에 처한다. 여자들은 관가의 노비가 되어 손발이 퉁퉁 부을 때까지 일을 한다.

 

이준경의 어머니 역시 그렇다. 이준경이란 인물은 이렇게 갑자사화에서 화를 보다, 다시 기묘사화에서 화를 당한다. 그 본인은 당하지 않으나, 이준경의 사촌형인 이연경은 조광조 선생과 엄청 친한 사이고, 이준경 역시 조광조 선생에게 큰 가르침을 받는다. 이준경은 당대의 학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하고 친한 학우였다. 그러나 2사람 모두 조정암 선생과 비교하여 더 높지 않다고 여겼다. 이런 이준경에게 내가 눈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묘사화 시 화를 당한 나의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살고 있을 때 이준경이 나의 할아버지의 재주를 너무 아까워하여 무관직 어모장군에 천거했다.

 

몇 년 전 시골에 내려가 파() 시조의 제사를 준비하던 작은아버지가 신위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참봉공, 통정공, 부사공, 만호공, 어모장군공, 훈련원정공 등등이 보였다. 어모장군에 임관된 할아버지가 바로 성균관 진사로 학문을 수행한 분이다. 문과 대과에서 진사로 계신 분이 무관직을 맡은 것은 의외이다. 문무를 모두 겸비했다고 하나, 문예로 출사한 분이 무예로 임관했다. 이준경이 그때 천거한 인물을 보니 족보에 구수담이란 인물이 있었다. 구수담은 당시 권력자를 비판한 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기묘사화를 당한 분이 다시 기용되어도 기묘사화를 일으킨 자들은 무덤에 있지만, 기묘사하와 같은 참극을 일으킬 수 있는 권력자들을 여전했다. 이준경이란 인물은 바로 그런 탐관오리와 권력자 사이에서 국가의 업무를 돌보던 실천적 사대부였다. 이준경이란 인물이 또 다시 집안 족보에 나온 것은 본 적이 있는데,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분의 작은아버지는 본래 만호(萬戶)라는 무관을 지낸 분이 있다. 1555년 왜적이 을묘왜변을 일으켜 전남 해남, 영암, 강진 등을 약탈하며 전주성까지 위협한 큰 전쟁이었다.

 

선조시기 임진왜란을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하나, 사실 임진왜란의 전초는 을묘왜변이었다. 을묘왜변 이준경과 그의 형 이윤경은 전주성과 영암성을 지키며 왜적을 소탕했다. 이때 집안 족보를 보니 만호를 지냈던 분은 이준경에게 을묘왜변 시 도움을 주었고, 이준경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나는 이준경이란 인물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읽은 <청풍신명>은 이준경의 삶을 소설로 만든 책이다. 내용을 읽으면 다소 도교적 발상이 함유되어 있고, 조광조의 학문을 이은 이준경에게 유학의 기본이 중시되겠지만, 소설의 감인지 아니면 당대 사료를 보고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이준경이 해오던 일들이 엄청났고, 파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준경은 갑자사화, 기묘사화를 직접 겪었고, 명종 때 을사사화로 조카를 잃었다. 권력에 저항하기보단 권력을 지닌 자를 어떤 계기로 통해 물리쳐서 위기를 넘어섰다. 이준경의 실수는 아니나 이준경이 가장 잘한 일이 엉뚱하게 된 것은 명종의 임종 시기였다. 명종은 후사가 없고, 그의 아내 인현황후는 선조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때 척신 이양이 계속 압력을 넣자, 이준경은 이양에게 직접 내의관에 가서 환약을 가져오라 하고, 이때 왕에게 후사를 정하라 하자 왕은 왕비에게 눈빛을 보낸다.

 

왕비는 그 입으로 선조를 호명하자, 이준경은 큰소리로 따라 부르고, 승정원의 관리에서 기 이름을 기록하게 한다. 어려운 시기를 위기에서 기회로 만들고, 주변에 인물이 있으면 거론하여 그를 기용하거나 추천한다. 이준경이 추천인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리영감 이원익이다. 조선 정승 중에서 가장 오래한 사람 중에 황희와 더불어 올라간 사람이 이원익이다. 전주이씨 출신인 이원익은 왕가의 후예지만, 왕보다 백성을 더 사랑했다. 이원익이 알아본 인물로 충무공 이순신이 있다.

 

소설을 보면 방진이란 보성군수가 나오는데, 활을 명수였다. 방진에게 외동딸이 있는데, 그딸을 이순신과 부부의 연을 맺으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문장력이 뛰어났지만, 매우 가난한 선비였다. 만약 방진 군수와 그 딸을 맞이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일본에게 조선을 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청풍신명>은 그런 이준경을 삶을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그린 책이다. 우리 선조들 중에 위대한 인물은 모두 어려운 시절을 겪어도 거기서 좌절하지 않은 것은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느낀 바는 진정 백성을 사랑하던 관리들은 백성의 삶에 녹아들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이준경이 지방의 목민관이 되었을 때 가난과 재난에 지친 백성을 위해 구휼활동을 하는데, 다른 지역의 목민관이 자신의 딸에게 병자를 위해 간호하게 하거나, 물을 길어 백성들을 돌보게 한 점이다. 이준경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명을 내려 그 여성을 돕게 하도록 하고, 나중에 혼인도 올린다. 이준경의 사무처리는 뭐든지 딱 잘라버리는 게 아니다. 나도 성격이 조금 급하고 섣부른 판단을 잘하는 편이라 잘 느낀다.

 

변방의 오랑캐가 계속 조선군민을 괴롭히자, 이준경은 그들을 토벌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오히려 인정을 베풀어 조선의 백성과 계속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칼로 계속 그들을 베면, 그들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계속 국경을 침범하고 마을을 약탈할 것이다. 이준경의 재치는 바로 뭐든 그때 상황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무를 처리한 점이다. 한국의 정치인이 배워야 할 인물 중에 황희, 이원익, 채제공, 정약용 같은 인물도 있지만, 이준경의 활약 역시 그러하다. 문관이라도 체술을 배워 전략과 전술, 전투까지 이어가는 것은 참 중요하다.

 

사람에게 항상 필요한 점은 선견지명인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의 이익보다 앞으로 다가올 세대를 위한 주춧돌을 놓아 후손들이 계속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현재를 다시 재정비하는 일이란 어렵다. 사람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도리까지 저버리는 게 현실이다. 인간의 도리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은 허물어진다. 이준경은 인간의 도리와 더불어 명분을 중시했다. 그가 실용적 정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당장의 문제만 생각하면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난 것은 당대의 인물들이 이준경과 만난 것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그렇다고 하도, 토함 이지함(토정비결), 화재 이언적, 조선 최고의 기생 황진이도 등장한다. 임꺽정을 토벌한 남치근 등도 나온다. 중종반정 이후 중종과 명종은 기존 조선의 왕권이 신권으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왕의 무능함이 결국 신권이 우위로 가고, 선조는 신권을 이용하여 왕권을 지키기 옥사까지 일으킨다. 이준경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나, 결국 그렇게 되었다. 앞날을 보려면 현재를 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보단 그저 감정과 사당의 이익으로 움직였다.

 

책을 보고, 사료를 보면, 이준경이란 인물은 매우 신중했다. 이준경의 삶을 따라보면 당시 당대의 학자 이황과 조식, 기대승도 나오나, 율곡 이이도 나온다. 율곡은 학문은 깊으나 성격이 너무 급하여 경솔한 행동을 했다. 이준경이 죽기 붕당의 투쟁을 걱정했고, 율곡의 행동이 붕당정쟁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했는데, 과연 붕당의 폐해는 심각했고, 기축옥사의 참혹함이란 말할 수 없었다. 이준경의 삶을 보면 언제나 고난의 연속이나, 그 고난 속에서 다른 사대부들처럼 권력을 누리거나 혹은 처사로 숨어있기보단 그 앞으로 나와 해결하려 했다. 세상이 더럽다고 피해도 그 더러움이 물러나지 않는다. 청풍신명이란 책제목처럼 맑은 바람, 올바른 마음의 형태가 신의 명령, 즉 우리의 사명이란 말처럼 이준경의 삶은 그렇게 살다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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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잠깨어 - 한시로 읽는 다산의 유배일기
정약용 지음, 정민 엮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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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에 잠이 들어 아침까지 일어나는 것도 참 행복이다. 늦은 밤까지 잠을 청해도 오지 않고, 눈을 감아 잠이 들었다고 여기다 갑자기 눈을 뜨면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도 컴컴하기만 하다. 인간의 잠자리에서 보통사람도 그러하나, 가끔 집에 우환이 있으면 어떠하랴? 한밤중에 잠을 깨면 이렇게 할 것도 없이 잡념만 무성하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상황이 제법 길지 않아도 답답한데, 만약 집에 우환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한 지경에 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

 

20177월 초반에 나는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에 위치한 다산초당에 다녀왔다. 다산초당이라고 하면 한국 대표 실학자이면서도 유학자, 그리고 민족의 등불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기거하신 곳이다. 다산초당이 문화관광지로 유명하나, 막상 가면 화려하지 않은 곳이다. 시골에 한적한 만덕산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산초당의 주인이던 윤단의 후손은 아직도 거기서 선조의 땅을 지키고 있다. 정약용 선생이 여기 유배오면서 많은 혜택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혜택을 입어도 하더라도 그런 일들은 차라리 겪지 않을 것이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인해 장기현으로 유배가고, 형님의 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다시 의금부로 끌려와서 모진 형을 받아야 했다. 백서사건에서 둘째 형인 정약전을 마지막으로 보고 그는 먼 강진 땅으로 다시 유배를 가야했다. 신유사옥에서는 셋째 형과 매형을 잃고, 자신의 친구와 동지들을 잃어야 했다. 조선사에서 천주교박해사건인 신해사옥은 단순히 가톨릭 교회사로 보는 게 아니라 조선 붕당정치에서 상대진영을 몰살시키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다.

 

장기와 강진이란 곳에 가면서 땅과 물이 몸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강진은 농촌과 어촌이 같이 있지만, 장기현은 전형적인 동해바다가 인접한 마을이다. 장독이 언제나 밀려오고 음식 맛도 맞지 않았다. 찾아온 이도 없고, 찾아갈 이도 없이 하랄 것 없이 방안에서 슬픔에 젖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간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온다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미치고 만다. 가족과 친구들이 몰살당하고, 자신 역시 고문에 지쳐 폐인이 되었다.

 

먼 길을 떠날 때 가족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으며, 늙으신 집안어른들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하는 슬픔으로 눈물을 훔친다. 유배가기 전에 떠오른 풍경에서 정약용 선생이 느낄 앞날이란 어떤 것일까? 조선시대 유배에 대해 생각하면 한양에서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죄가 크다. 게다가 유배는 사형의 아래 단계에 위치한 형벌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 앞에서 겨우 명줄만 보존했다. 게다가 천주학쟁이란 오명을 받아 시골오지로 내려가니 동네주민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괴물 1마리가 마을을 덮치는 것과 같았다.

 

슬픈 일에 힘든데, 외로운 시간은 더욱 괴롭다. 마재에 있는 집안에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니 그 슬픔 어찌 하면 좋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를 머물면서 잠들지 못해 남긴 시들을 모아 만든 <한밤중에 잠깨어>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아오면서 느낀 감정과 회한을 엿볼 수 있는 서적이다. 개인의 심정을 바라보면 그 안타까움 마음과 슬픔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사람들은 민족의 위대한 인물이라 하나, 그가 겪은 아픔과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한밤중에 잠깨어>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유배생활을 할 때 남긴 시들이다. 다산초당에 기거하게 되면서 그나마 힘든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강진에 오면서 바로 다산초당으로 가지 않았다. 사의재에 머물면서 초라한 주막에 외로움을 달랬다. 우연히 아버지 친구인 윤광택이 자신의 조카 윤시유에게 명을 내려 은근히 찾아와 위로해주었다. 강진에 머물면서 외가의 친척이 다산초당 주인이기에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하고, 도암면에서 서측으로 가면 해남군이 위치해 있다.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는 녹우당이 있고, 거긴 다산의 외갓집이다.

 

다산초당, 녹우당, 그리고 친구 겸 사돈인 윤서유의 도움으로 다산은 적막한 외로움과 슬픔에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밤중에 잠깨어>를 읽은 후 다른 시집을 읽으면 기분이 다르다. 특히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남긴 시들은 그나마 낙천적 요소를 읽을 수 있다. <한밤중에 잠깨어>는 오히려 그가 제일 힘든 시기에 남긴 글들이다. 가장 찐한 글은 집에 하인이 찾아와 물품을 전달할 때, 정약용 선생의 어린 아들이 밤을 넣어 보낸 것이다. 많은 자녀를 낳았지만, 남은 자식은 31, 그나마 막내아이조차 유배지에서 부고를 접한다.

 

먼 지역에 있으면 가장 그리운 것은 가족과 친구들이다. 나도 군대 훈련소에서 밤늦게 혼자 보초를 서면서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해도 그리운데, 18년 동안 강진에 머문 정약용 선생은 오죽할까? 자신을 아껴주던 학자군주 정조대왕, 그리고 많은 동지들까지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한탄만 더해간다. 자신이 원한 이상적 유학이란 백성들이 배고픔에 괴로워하지 않고, 세금이 무서워 가난에 찌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이 가렴주구한 관리로 인해 고통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며 다산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그냥 잠을 청해도 오지 않으니 나그네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자신의 불평을 시로 옮기는 일밖에 없다. 당시에 남긴 시조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마음이나, 후대에 내려온 이 글귀들은 아주 훌륭한 한국 문학 자취들이다. 내년 2018년이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해배되신지 200년이 된다. 다산이 떠난 지 200년이 넘은 강진을 돌아보면 여전히 다산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지키려고 한다. 그런 아픔을 겪은 다산이기에 <한밤중에 잠깨어>에서 보인 그분의 마음은 아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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