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철학자들의 서 -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숭고한 철학적 죽음의 연대기
사이먼 크리칠리 지음, 김대연 옮김 / 이마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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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그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들의 육신은 이미 다 분해되어 자연계에 돌아갈 망정 그들의 영혼 즉 그들이 생각하고자 하는 정신적 세계는 죽지 않고 계속 읽히고 읽혀 세속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그렇게 위대한 사상을 지닌 철학자이거만, 막상 그들도 연약한 신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들이라고 천년 만년 살 수 있는 불사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짧은 인간의 삶이기에 그들의 행적은 매우 빛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철학을 하고자 함은 인간은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데 죽었다니? 조금 아이러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늪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이라는 깊은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죽음은 아주 무섭기도 하나 한편으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죽음은 과연 축복인가? 혹은 최고의 저주인가? 물론 그건 보는 시선에 관점 그리고 어느 개인이 살아온 형태에 따라 다르다.

가령 철학자의 죽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고 여겨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쳐 줄 수 있는 당대 석학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쳐 주기는 커녕 그들의 무지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역으로 그들의 무지를 논파한다.

사실 사람이란 존재는 어느 권력을 가지거나 혹은 특정한 신분을 얻게 되면 자신의 프라이드에 집착하게 되는 마련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자신의 철학을 관철하려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갔거만 역으로 소피스트들로 하여금 화를 이어 독배를 들고 자신의 인생을 마감한다.

죽음이란 고통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이 도시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길 원했으나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철학적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래서 진정한 철학자들은 죽음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그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진정한 진리를 찾지 못함이 무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보는 나라는 인간 역시 죽음은 무서운 모양이다. 책을 볼때마다 왠지 허무하게 혹은 웅대하게 조금 아쉽게 죽어간 이들을 보며 이들의 업적은 위대한 이들의 삶은 왠지 아쉽기만한 공허감이 온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동기는 1990년대 어느 프랑스 작은 농장 마을 오두막에서 어떤 남자의 죽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권총자살을 한 후에 파란만장한 인생의 막을 내렸다. 그는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및 상황주의자인 기 드보르이었다. 기 드보르는 이른바 Society of the spectacle이란 서적을 적은 사람으로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의 업적이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소 너무 급진적이고 반발적이나 그가 적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근현대사회에서 보이는 인간 소외와 대중들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 방관자로 그저 구경만 하는 제3자가 되는 것을 고발하였다.우습게도 그는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길 거부했으나, 그가 죽은 후에 스펙타클의 사회는 여러나라에서 이래저래 팔리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내가 인상깊다고 하기는 그렇고 조금 뭐랄까 숙연해지는 죽음이 있었다. 그것은 임마누엘 칸트다. 인간의 제일 오류라고 생각하는 건 이야기 하는 본인 자신의 실질적인 양심과 도덕, 책임, 이성적인 자기성찰 없이 남만 보는 인간들이 많다. 겉으로는 위대한 말을 누구나 뱉을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그렇게 실질적으로 언행일치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이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의 죽음은 정말 검소하고 작은 소리이나 위엄있어 보였다.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하인이 그에게 음식을 숟가락으로 떠주는데, 칸트가 "이만하면 충분하다"란 말과 함께 영원한 잠을 잔 것이다. 칸트라는 사람이 비록 과묵하고 사색적이나 너무 과묵한 마지막 단어다. 그런 칸트인만큼 자신의 하루일상과 상대방과의 약속마저 철저하게 이행하였다.

어째보면 샌님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자기 자신부터 수행하여 글을 적는 언행일치되는 철학자인듯 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실리지 않은 우리나라의 철학자도 생각해 보았다. 난 개인적 한국에서는 18~19세기 남인으로 중심된 성호학파 철학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성호 이익 선생은 오래 장수했으나 너무 가난하여 말년에 병으로 허덕이며 돌아가셨고, 성호의 후손이 되는 이가환 선생과 이승훈은 신유사옥으로 죽고, 성호학파 최고의 학자인 정약용의 형제들도 편히 죽지 못했다.

특히 정약용의 형님 2분 중에 정약전은 흑산도에 귀양가서 병으로 죽고,  정약종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순교하였다. 그리고 정약용 누나의 제사에 온 광암 이벽은 천주교 귀의 후에 아버지 이부만 자살로 자신도 충격으로 인해 운명한다. 게다가 1791년 진산사건의 윤지충은 정약용의 이종사촌이다.

나는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다산 정약용의 주변을 돌아보면 얌전하게 운명한 분이 없다. 그들은 조선의 유학자이면서 천주교를 연구한 신학자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신분이 사대부라 벼슬에 나가거나 학문을 후세에게 알린 사람이 많다.

문제는 사대부라는 것은 언제든지 정치에 올라가서 정사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당쟁싸움에 휘말려 죽게 되거나 혹은 귀양가거나 혹은 벼슬조차 하지 못하게 아예 길을 막아 버린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위에 설명한 성호 이익선생이다. 성호 이익은 아버지가 귀양갈 때 나오신 분이고, 성호 이익의 큰형님은 당파싸움에 의해 매질로 죽었다. 그래도 조선시대 최고 석학인 성호선생은 나왔다. 그런 만큼 조선시대의 철학자들은 그래 순탄하지 않음에도 명저가 나온 것을 보면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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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는 29가지 방법 - 통념을 전복하는 철학적 수다
미셸 엘트샤니노프 외 지음, 김모세 외 옮김, 이현우 해설 / 살림Friends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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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책을 보고 생각하는 소감은 "잘난척하는 건 철학자가 아닌 철학척인양 하는 사람들이다." 우습게도 그런 잘난척하는 가식적인 인간은 정말 철학자도 아니면서 자신이 철학에 대해 깊이 아는 것처럼 하는 일반적인 대중들일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런 글을 적고 있는 본인도 그런 한 사람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애석하나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단지 문제는 그것을 알고 가는가?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가서 마치 자기는 아닌듯 하는 착각에 빠지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그 철학자가 주장하거나 내세우는 의견이나 학설 혹은 여러가지 상황을 주제로 만약 어느 곳에 가서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라는 것이다.

현대사회든 기존 근대사회든 혹은 그 이전의 오래전 시대든 인간은 자신들의 사고와 상식을 최고의 진리로 보았다. 특히 (잘 이해가지도 느끼기에도 부담스러운) 임마누엘 칸트가 지적한 듯이 인간은 상식이라는 것에 빠저 일종의 교조주의적인 태도로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는 그런 극히 평범하나 자신이 평범하면서도 마치 대단한 사람인양하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그들의 가식을 농담조로 놀리기에 충분한 책인듯 하다. 은근슬쩍 사람들이 모인 식사자리나 파티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이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재치있게 놀려 먹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인듯 하다.

하지만 그런 책의 목적인 것처럼 보여도 그 철학자들의 생각이나 행동, 그리고 여러가지 면으로 통해 우리가 기존에 잘못된 생각이나 인식자체에 대해 콕하고 쏘우기는 좋다. 그런 잘못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말돌로기 농담으로 돌리나 사실 그 말돌리기 뒤에 있는 유명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이야기 혹은 업적까지 이 책에서 담고 있다.

나에겐 그저 잘난척하는 철학자(인양 하는 대부분의 사람)를 구워삶아 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 삶아보는 과정에서 나오는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워 보인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철학자가 등장한듯 하다. 이름은 엠마누엘 레바나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가 평판이 어떤지는 잘은 모르나 이 책에서 그가 말하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얼굴에서 그러한 타자의 형상을 본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윤리로서 환대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 타자의 시작점은 타자와 그 타자를 바라보는 인간 즉 자신이란 존재다. 그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의 필요에 의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존재가 레비나스의 1인 '나'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제 아무리 철학이 어쩌고 저쩌고 좋다.

나는 그렇게 철학이 깊지 못하며 잘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신이 입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인간성 자체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다. 그렇지 못한 인간이 스스로 위대함인양 위선떨면 이 책 이름 그대로 "잘난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아"야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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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대화록
플라톤 지음 / 집문당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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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사실 자신이 직접 글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의 업적과 학문적인 부분은 자신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위대한 철학자인지 아닌지는 소크라테스 본인의 기록이 아닌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전수되었다니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플라톤이라는 위대한 철학자로 인해 그의 위대한 사상을 오늘날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의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저술했기에 소크라테스의 대화들은 소크라테스만의 이야기가 아닌 플라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특히 대화체로 정해져 만든 플라톤의 국가정체는 플라톤이 주인공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이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의 서적에 등장하는 대화체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조금 소크라테스가 과연 얼마나 위대한 사상가라는 것을 직접 알기란 어려워 보이나 적어도 플라톤이란 학자가 그토록 열정적인 글을 남긴 것을 확인한 이상 위대한 사상가요 철학가임은 분명하다.

소크라테스는 정말 내가 생각하기에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그리고 그 사랑을 이성으로 해결한 나머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절에 소크라테스는 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다. 그런데 그 결과에서 소크라테스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현명한게 사실 속으로 무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당대 유명한 학자, 사상가, 정치인 등이었다. 하지만 이름있는 사람들을 만난 만큼 그들에겐 권력이 있었고 그 권력 뒤에는 자신들의 프라이드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자신들만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협소한 이성과 판단에 심하게 실망한다. 이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로부터 생명을 위협다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광장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고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 소중하고 타인을 사랑하기에 마지막까지 숭고함을 잃지 않았다.

죽은 앞에서도 자신에 대해, 고소자에 대해, 마지막으로 관중에 대해 인간의 가치와 진실성을 토로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한 이 곳에서 죽음을 과감하게 받아 들였다. 단순히 법이 악법이라 곧이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던 이 그리스 시민이란 이름을 사랑했었기 때문이다. 

차후 파이돈, 크리톤에서 보면 그는 죽음을 비켜 도망칠 수 있었으나 도망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다. 죽음은 그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단지 삶과 동시에 함께하는 시간적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육체는 멸하더라도 아름다운을 사랑하는 마음 즉 이성은 영원불멸하여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는 친구와 동료들은 그런 소크라테스의 웅장하고 진실함에 눈물을 흘린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당부하나 그런 마지막 모습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에겐 이성이란 아주 소중했다. 올바르고 진실한 이성이야 말로 순수한 영혼을 가져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사회와 고대 그리스 사회는 다르나 적어도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인간의 미, 그리고 정신적인 가치가 육체적인 행위로 통해 실천으로 옮겨 진실할 것을 생각하는 그는 인류의 영원한 철학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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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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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쟝 보드리야르 교수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다. 우선 이 보드리야르 교수를 알게 된 동기를 말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오타쿠라고 하면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등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지 못하다고 여기는 문화를 탐닉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런 존재에 속하는 내가 이 쟝 보드리야르 교수를 알고 이 시뮬라시옹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상당한 아이러니이다. 현실에 살아 있는 존재에게 얽매여 거기에 빠져 있는 인간이 보드리야르와 시뮬라시옹을 안다는 것은 솔직히 연결 구도가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시뮬라시옹을 읽어보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 잣대로 어떻게 나라는 인간을 재어 볼 것인가? 물론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어디가서 이 책을 읽었으니 내가 당신보다 우월해라는 그런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

단지 이 책을 보고 난뒤로 진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혹은 잘못 알아서 이상한 독단으로 빠지지 않은지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남들에 대해 편견과 오만으로 자기 자신의 이성적 판단이 옳은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분명 이 책의 내용은 인용된다.

우선 내가 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시옹이 동사형이니 그 전의 단어인 시뮬라크르를 알게 된 것은 2008년 겨울 무렵이다. 당시 대학원 공학논문을 준비 중에 우연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검색했는데, 우연치 않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논문이 나왔고, 그 중에서 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를 가지고 적은 논문이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시뮬라시옹이란 단어를 알았고 2009년에 그 저자가 보드리야르란 사실을 알았다. 2010년 처음으로 시뮬라시옹이란 책을 읽어 보았고, 그 책이 상당히 난해하다는 것조차도 알았다. 내가 듣기로는 시뮬라시옹이란 도서도 보드리야르의 서적치고는 난이도가 낮은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보드리야르의 사상이 얼마나 난해할까? 어째든 나는 이 보드리야르로 통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는 학문, 철학, 사상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 후기구조주의에 속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는 무엇을 말할까? 솔직히 다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로 이루어진 미디어가 얼마나 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가이다.

참고로 나는 애니메이션 오타쿠이다. 그런데 나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이  TV에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사람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TV를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가상이라도 하나의 실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반면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것이 가상이나 하나의 현실로 착각하는 사람은 전자보다 적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할 뿐 현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최불암 아저씨하면 떠오른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전원일기"이다. 그리고 최불암의 원래명인 최영일씨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고 전원일기의 열풍으로 당선되었으나 그는 전원일기의 최불암이 아니라 단지 국회의원 최영일씨로 농업 관련 정책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최영일씨의 사본인 최불암씨의 전원일기가 TV 영상으로 통해 국민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바로 TV영상에 등장하는 전원일기 김회장은 최영일씨가 아니나 사람들은 최영일의 존재를 전원일기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더 가상세계에 현실을 제대로 못보고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는 원래의 사건이나 상황보다는 그 당시의 일들을 카메라로 녹화하여 복제된 영상과 소리에 더욱 대중들이 의존한다. 그 의존으로 인해 중간에 미디어에 대한 권력행사 및 왜곡, 그리고 누락은 대중으로 하여금 어긋난 정보를 주고, 그것이 바르지 못한다면 이상한 현상으로 발달된다.

자신은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사실 그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그저 가상의 세계로 접한 하나의 현상을 현실보다 더 현실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시뮬라크르는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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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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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조주의를 알게 된 계기는 애니메이션을 연구하면서이다. 그때 처음으로 애니메이션 연구도서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석사학위 논문으로 이 작품에서는 애니메이션을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즉 기존의 상식과 틀을 깨고 인간 그 자체를 연구하고 고찰하는 새로운 학문이었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게 됨과 동시에 나의 인생은 그저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는 향유자가 아니라 만화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연구 텍스트로 삼는 리뷰어 및 칼럼니스트의 길로 접어 들었다.

물론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라는 신분이지만 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접한 학문과 사상은 이미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바로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은 인문사회, 정치, 철학, 건축, 경제, 예술 등 수많은 분야에 많은 전환점을 일으킨 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을 공부하면서 이 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파가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학파도 원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내가 먼저 제일 알게 된 학자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에서 장 보드르야르와 자크 데리다였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자크 데리다 해체론은 미디어와 기존 관념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여 비판한 도서이다 현재 내가 직업 읽어본 서적으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지만, 자크 데리다의 해체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관한 논문에 계속 언급되어 우리가 기존 관념에 사로잡힌 것과 그것에 반대되어 다른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였다. 독일에서 생긴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도 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런 기존 관념과 틀을 깨고 다른 틀로서 견주어 볼 수 있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해 나는 과연 우리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사회적인 통념으로 사로잡혔는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모순과 왜곡이 발생한지를 성찰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읽었을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소개하고 누가 그 사상을 제대로 연구한지를 알 수 있게 해준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나에게 조금 더 넓은 시야와 어떻게 다시 공부해야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되면서 나는 철학과 인문사회를 2010년 초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대해 깊이 공부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후기구조주의가 있기 전에는 (전기)구조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구조주의는 프랑스 인류문화학 및 신화학자로 저명한 레비 스트로스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부터 시작하여 세계 모든 학문의 원류가 된 사상이었다. 그런 점에 후기구조주의가 성립되기 전에 존재하였던 구조주의를 알고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지 그 학문적 배경과 흐름을 살펴볼 수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란 학문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단 누가 어느 사람이 있고 무슨 말과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 책은 구조주의 학자 4인을 소개함으로써 우리가 구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게 하는 구조주의 입문서이다. 그래서 구조주의학자 4인방으로 구조주의 창시자인 레비 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자크 라캉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말 그대로 신화학과 문화인류학자이고,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문학적인 연구를 위대하게 이룩한 사람이며, 미셸 푸코는 역사학자이지만 계보학으로 통해 권력이 인간에게 행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폭력에 대해 폭로를 하였으며, 자크 라캉은 인간의 정신과 심리를 연구하는 것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구조주의 4인방에 대한 이야기와 학문적인 성향을 보여주면서 이 책에서는 구조주의 이전에 있었던 구조주의 뿌리까지도 설명하였다. 인간은 정해진 틀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주변을 바라보게 해주었던 칼 마르크스, 인간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우선이란 것을 알려주던 지그문트 프로이트, 모든 인간은 기존 틀에만 얽매혔다면서 대중들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던 프리드리히 니체를 소개했다. 그리고 구조주의학의 근본적인 것을 성립하게 해준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학까지 소개하여 구조주의 시초와 흐름까지 보여주었다.

물론 구조주의에 대해 그리고 그 학자에 대한 사상과 연구자료를 하나하나 읽어본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그들의 서적과 연구를 독자에게 어렵지 않게 정보를 제공하여 독자로 하여금 구조주의를 알려고 하는 것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준다. 개이적으로 내가 가장 흥미로운 구조주의학자는 미셸 푸코였다. 권력과 기존 고정관념이 얼마나 큰 죄악으로 인간을 괴롭혀 왔는지 그것이 아직도 이어져서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 넣는지 말이다.

사회적 약자인 애니메이션오타쿠로 미셸 푸코의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고 인상이 깊었다. 인간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안주하려는 성향으로 우리와 다른 집단과 인간을 소외시키거나 혹은 추방시키게 한다. 인간들이란 집단이 결국 자신들을 광기로 얼룩진 괴물로 변하여 괴물이 아닌 괴물을 만들어 억지로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광기어린 희생은 과거에도 계속 되었으며 앞으로도 이어진다. 전에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이런 스펙타클한 연출로 인해 대중들은 자신의 존재를 찾기보단 어느 조장된 이미지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런 스펙타클을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가상으로 만들어진 시뮬라크르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미셸 푸코는 구조주의학자이지만 한편으로 후기구조주의학자이기도 하다. 그렇게 구조주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오만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일으킨 것이다. 과연 나는 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 들일까? 인간은 언제나 사고하며 행동하는 이성적인 존재다.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이성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외와 냉대를 일으킬 수 있는 독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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