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농장 SE
존 할라스, 조이 벳첼러 / 블루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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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부터 1940년대의 유럽은 파시스트의 태동기였다. 당시의 나치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이 모든 분쟁과 억압에는 독재자란 이름이 항상 끼여 있었다. 이에 대한 비극인가? 1936년 프랑코는 스페인 자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특히 피카소의 명작 중에 하나인 <게로니카>가 바로 프랑크의 독재정치로 말미암아 발생한 잔혹한 살인극을 초현실주의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런 프랑코에 대항하여 세계 각지의 지식인들이나 혁명가들이 스페인이 모였다. 거기에는 영국 문학가인 조지 오웰이 있었고,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자전적 소설을 만들었다. 전쟁에 대한 심각한 공포와 실재적 상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쟁의 참혹함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새겨주었다.

 

그런 조지 오웰이 전쟁 중 부상을 입은 후에 다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서적들이 있으나 특히 <1984>와 <동물농장>은 20세기 문학에서 권장도서로 여길 만큼 좋은 작품이다. <1984>는 미래의 감시국가에 대한 암울함, <동물농장>은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를 다룬 풍자극이다. 전자는 매우 리얼리티한 공포를 내세운다면 후자는 우화로 통해 만든 이야기다. <동물농장>은 1942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1984>는 1948년에 완성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는 어느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것은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인 스탈린이다.

 

스탈린의 폭정은 1930년대부터 신경제개발정책으로 쿨라크의 재산과 식량을 빼앗고, 당시 동아시아의 독립운동가나 이민족들을 강제이주 및 살해한다. 이때 암울한 이야기 중에 하나가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과 동시에 <동물농장>이었다. 어느 쪽이든 암울한 이야기를 다룬 것은 분명하나 <동물농장>은 다른 작품에 비해 재미와 위트를 많이 넣었다. 이것은 곧 히트하여 미국과 한국 등에 퍼지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 이른다. 그 이유는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을 강도높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 진정 비판하는데 있어서 어느 인물에 대한 동정심을 조지 오웰은 보여준다. <1984>에서 골드슈타인으로 안경 낀 마른 남자로 하얀 염소수염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인물은 <동물농장>에서 작은 돼지인 스노볼로 나온다. 그는 러시아혁명에서 레닌 옆에서 직접 지휘하던 레온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에 새롭게 러시아혁명사에서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레닌 사후 소비에트연방의 권력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비극적 혁명사는 1917년 러시아혁명만 아니라 1789년 프랑스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당통이 죽고, 로베스피에르마저 죽자 프랑스혁명은 모조리 끝이 났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에서 혁명이 끝이 났다라고 선언하듯이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일어난 구체제 봉건사회에 대한 반발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압제정치의 새로운 형태로 발생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나, 그것은 그 혁명에 대한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혁명 이후 개혁적인 부분이 문제였다. 두 혁명은 왕정의 압정과 국민들의 가난과 굶주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상부적인 압력이 하부적인 구조를 망쳤고, 다시 하부적인 구조가 상부의 결정방향에 큰 위기를 만든 것처럼 실패한 혁명이야기에서 <동물농장>은 여러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다.

 

존 할라스는 바로 자기 고국인 영국 문학가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다. 제작에서 셀 애니메이션 기법에 런닝타임 70분 정도로서 실사영상으로 만든 영화 <동물농장>보다 시간적 제약이 큰 것이 아쉬웠다. 대신 애니메이션은 표현주의 미학에 따라 보여주므로, 소설의 문자에서 읽히던 부분들을 영상과 소리로 표현하여 다양한 재미와 묘미를 맛볼 수 있었다. 간단한 스토리는 어느 목장에서 주인이 계속하여 제대로 가축들에게 밥을 주지 않고 술만 마셔서 결국 이에 항거하여 농장이 동물에 의해 소유되나 스노볼이 쫓겨나고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살인적인 압제가 되는 것이 주요 메인이다.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관점들을 보면 소설은 화자인 작가가 3인칭으로 관찰하고, 영화는 캐쉬라는 개를 통해 그 개의 눈을 보는 것처럼 3인칭 구조로 했으며, 애니메이션은 당나귀의 시선에서 작품을 정리한다. 물론 카메라 앵글에 따라 비추어지는 대상물은 차이가 나겠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것은 농장의 주인이던 러시아황제 차르를 몰아내는 것과 그 결과 내전과 다른 국가의 내정간섭 등이 같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부분은 작은 돼지 스노볼이 민주주의적 공산국가를 만들려고 하다 나폴레옹이 공권력을 휘둘려 그를 제거한 것이었다.

 

덕분에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시작되고, 한국에서 <동물농장>이 번역되어 널리 퍼진 이유도 바로 스탈린이 집권이고, 그 스탈린은 공산국가를 위장한 관료주의적 전체주의국가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산국가라는 것은 곧 독재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정치철학적 사전용어와 달리 일반론적 사전용어로 되어버려 한국에서 적대적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째든 작품에서 나폴레옹이 사냥개를 이용해 스노볼을 제거할 때 영화와 소설은 그가 죽지 않은 것으로 나오고, 대신 그가 차르왕족과 독일 나치와 손을 잡아 농장을 위협하는 치명적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게 도망치기 북유럽과 프랑스, 그리고 남미로 망명하여 결국 스탈린 보낸 자객인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살해된다. 그런 실화를 다룬 영화로 <트로츠키 암살사건>이란 작품에서 멕시코 어느 마을에서 트로츠키가 피켈에 잔인하게 살해되는 모습을 연출한다. 이때 트로츠키를 살해한 라몬을 맡은 배우는 프랑스 영화배우 알랭 드롱이었다. 알랭 드롱의 젊은 시절의 모습에서 그의 매력과 동시에 스탈린에게 사주 받아 트로츠키를 살해하는 과정을 아주 심적으로 고뇌하는 자객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라몬에게 살해당하는 트로츠키를 맡은 배우는 영국의 명배우 리처트 버튼이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살해된 시점은 추방된 이후 10년 이상 지난 것이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바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냥개들이 스노볼을 무참하게 잡아먹는 것으로 살해된다. 애니메이션이 영화 최초 작품이란 점과 어린이 이상이란 점에서 매우 잔혹한 사건을 이렇게 우화적으로 만든 존 할라스 감독의 실력에 놀라울 뿐이다. 스노볼 추방 이후 뒤 이야기는 거의 비슷하다. 나폴레옹과 그의 일당들이 농장주인의 착취에 반기를 든 동물에게 더 심한 폭정을 기울인 점이다. 달걀을 외부 상인에게 팔고, 닭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많은 동물들을 상해한다. 게다가 든든한 일꾼인 큰 말 복서가 다치자 말고기로 만드는 사람에게 팔아버린다.

 

<동물농장>의 처음 이상적 가치는 이미 실종된 지 옛날이고, 모든 동물들에게 가혹한 노동과 폭력, 가난과 추위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동물농장>을 보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한 점은 분명하다. 본래 레닌과 트로츠키가 목표한 것은 연속적인 혁명이고, 비슷한 개념으로 본다면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가 공화국의 연설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가치에 따라 자유란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주어져야 자유가 비로소 도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을 생각할 때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로 주창하여 결국 관료주의적 전체주의의 결정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그것도 어린이들도 본다는 점에서 상당히 연출력에서 심혈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돋보인 점은 대사가 영국어로 해도 중간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나온 점과 작품 내에서 소리가 없는 것보다 항상 소리가 존재한다. 동물들이 움직이거나 혹은 율동에 맞추어 일을 하거나 농장에서 동물과 인간들의 결투 역시 그렇다. 적절한 박자와 음악적 흐름은 작품 r속의 캐릭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미키마우싱을 충실히 실현한 것이다.

 

당시 제작년도 1954년이란 점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한 연출력이 아닐 수가 없다. 기술의 발전, 컴퓨터그래픽의 도입은 애니메이션 자체에 큰 발전을 준다고 하지만, 그 기법적인 연출력과 상상력은 지금 다시 봐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작품의 비평적인 관찰에서는 본래 소설에서 나폴레옹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나치와 맺는다. 그러면서 돼지와 인간이 서로 누가 돼지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나폴레옹과 그 주변 카르텔들이 원래 농장 주인이던 술주정뱅이 같이 보인다.

 

그리고 복서의 친구인 당나귀가 그들의 행동에 참지 못해 다시 동물농장은 분노의 혁명이 일어나고 작품은 마감한다. 1954년은 한국전쟁이 1953년 휴전 뒤이기 때문에 냉전의 공포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다. 아마 존 할라스의 작품에서는 소비에트연방의 주인인 스탈린 정권에 대해 러시아 사람들이 다시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다시 일어나서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기를 바란 것이 보인 듯했다. 이에 반해 실사영화에서는 동물농장이 다른 동물의 저항보단 스스로 망했다는 점이 다르나, 조지 오웰의 가진 스탈린에 대한 증오심은 어떻게든 과정을 떠나 결론적으로 완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게 무참하게 살해된 트로츠키는 제이슨 바커라는 철학자가 만든 영화 <marx reload>에서 포스트 중앙에 나온다.

 

그 뒤로는 아주 낯익은 인물인 슬라보예 지젝이 보이고 말이다. <동물농장>에서 실제적인 모티브는 스탈린이 펼친 독재와 폭력이었으나, 그것을 알게 해주고 비판해주게 한 것은 바로 트로츠키였다. 소설 <1984>에서 오세아니아에 큰 적이고, 빅 브라더와 본래 면식이 있던 자는 스탈린의 정적인 트로츠키다. 그의 서적인 <배반당한 혁명>은 스탈린이 반드시 독재정치로 통해 폭력과 압제를 누리는 것과 동시에 권력욕을 위해 나치와 손잡는 것을 1936년에 예언하고, 그것은 적중했다. 역사란 참으로 오묘하다. 단순히 소설 같은 것이 결국 역사적 사실이고, 혹은 역사적 현실로 변해가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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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2
강풀 글 그림 / 재미주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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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이 돌아가신 노무현 前 대통령 추모를 위해 3년 동안 티에 들어가는 캐릭터를 그려 넣었다. 2012년 올해는 어느 초로의 늙은이가 검정 고무신에 노란 밀짚모자를 쓰고 뒤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노무현 前 대통령의 다룬 다른 웹툰인 노공이산을 보면서 <순정만화>에 대한 이야기가 겹치는 부분이 보였다. 경상도 남자라는 특유의 거친 말투와 행동에 당시 그의 아내와 결혼 전에 재미난 일화가 있다. 군대 입영 전에 그녀를 불러내어 이야기하던 모습이 인상 깊다.

 

 

그녀 : 공부하면 공부나 열심히 할 일이지 사람은 와 불러내노?

 

그 : 집을 지으려면 기둥이나 대들보도 필요하지만 서까래나 장식물들도 필요한 거 아이가?

 

그녀 : 그럼 여자는 서까래나 장식물 같은 사람이란 말이가?

 

아차 하고 그는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 후회하나 이미 지나간 말은 담을 수 없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실수 일까나? 아니면 당시 남자들의 스타일이라고 할까나, 그는 그렇게 제대하고 나서 그녀가 생각나서 공부가 되지 않았다. 장난이 심한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장난을 친다고 할까나? 나무 뒤에 숨어서 그녀가 책을 가슴에 품고 지나갈 때, 개구리 한 마리를 던져 그녀를 매우 놀라게 한다. 아마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아주 대수롭지 않게 그녀 주변을 서성인다. 어느 날 짜증이 머리까지 올라온 그녀가 그에게 말은 건다.

 

 

그녀 : 이런 장난 좀 고마하면 안돼?

 

그 : 크크크... 재미없드나? 나 책 쫌 빌리도

 

그녀 : 우짠 일이고? 법전 아니면 쳐다도 안보는 니가!

 

그 : 내도 톨스토이 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알고!

 

그녀 : ?

 

그 : 니가 아는 건 내도 알고 싶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낮에는 서로 공부와 일을 밤에는 밤하늘에 별을 보면 논길을 손잡고 걷는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그녀 : 빌려간 책을 베개 삼아 잠만 잔거 아니가?

 

그 : 내도 <안나 카레리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고 억수록 감동받을 줄 안다! 내는 뭐 법전으로 맹근 밥 묵고, 먹는 물도 유죄 무죄 따져 가... 무신 사랑을 법적으로 하는 줄 아나!

 

그녀 : 호호호

 

 

뒤에 달리는 이야기해설은 감동이 온다. “밤하늘이 쏟아질듯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날, 벼이삭에 매달린 이슬에 달빛이 떨어지면 들판 가득 은구슬을 뿌린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사이 논길을 따라 걸었다. 2년 동안 커피 한 잔 값 들이는 일 없이 맨입으로 연애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론 지금은 도시화 된 곳에 이런 소박하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래도 뭔가 모르게 무언가를 이끄는 매력은 충만하다. 이런 밤하늘에 별을 보면서 산책하는 소박한 이야기가 강풀의 <순정만화>에도 녹아있다. 강풀도 모두 잠이 들 때 홀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그를 그리워하듯 말이다. 어째든 <순정만화> 하권으로 가면 그들의 단순한 사랑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행복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거울이 되어 새로운 자화상을 비추어준다. 지나간 날에 대한 회상과 반성, 그리고 성장과 미래에서 말이다.

 

주인공 연우를 보면 그는 고3시절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어 아무도 없이 혼자 고독 속에 자신을 버렸다. 친구 규철이가 우연히 장례식장에 준 담배, 그는 담배만 피우던 사람이고, 예전에 살던 집에 있으면 부모님 생각에 괴로워 홀로 아파트 5층에 왔으나, 그가 어디에 있든지 외로움을 버릴 수 없었다. 그저 담배만 피우다 새벽의 아침을 맞이한다. 그런 그에게 마음을 나눈 수영은 예쁘장한 여고생이나 뭔가 삐뚤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저항적이고 남들에게 거친 말투를 사용한다. 수영은 본래 아버지가 있었으나 그 아버지가 사실 어머니와 이혼했다는 점, 그리고 새 아빠와 새 오빠가 왔다는 점이다.

 

수영은 연우에게 그날 자기에게 떠나간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아주 외롭고 쓸쓸하고 처량하며 차마 따라갈 수 없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아버지였다. 연우에게 그런 모습이 보인 이유는 연우에게 그 외로움이란 짐을 평생 가지고 살았으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남자의 고뇌였다. 이 책에서 아마 내가 가장 남자로서 공감 간 부분이다. 한국에선 남자들은 꼰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뒤돌아서면 자신의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것이고,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수영이 왜 그날 아버지는 뒤도 안보고 그냥 갔는가에서 규철이 하경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날 때의 그 모습과 동일하다.

 

꼰대 같은 한국남자들의 이면성이 그들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수영의 어긋난 삶의 모습과 연우의 처량한 모습에선 외로움과 그리움이란 뿌리 깊은 상처가 내려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순정만화>에선 그냥 순정만화가 아니라 인간의 성장에도 관심을 둔다. 특히 하경이의 경우 수영이처럼 그 쓸쓸한 뒷모습을 규철이에게 발견한다. 규철은 회사에서 강제 퇴사하여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회사에도 입사원서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간다. 그래서 내일에 대한 자신이 없기에 오히려 하경이를 아끼는 마음에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다. 남자에게는 그런 심리가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직접적인 것은 아니나 간접적인 경험에서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규철은 하경이에게 자신의 눈물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꼰대 같은 행동을 한다. 그때 하경이에게 강숙이가 불쑥 나타났다. 규철의 행동에 허무해하던 하경은 고등학생인 강숙과 같이 맥주 마시는 도중, 강숙의 행동에 크게 웃는다. 슬프나 강숙의 행동에 그저 크게 웃은 것이다. 강숙은 그런 크게 웃던 하경이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다시 행복한 미소와 웃음을 말이다. 그렇게 하경에게 상처를 준 규철은 알고 보면 누구보다 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남자들이 좌절을 하여 스스로를 버린다는 것은 최고이면서 최악의 선택이다. 나 때문에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겠어! 라는 책임의식, 그런 좌절의식에 그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붕어빵 가게 아주머니가 보여준 삶의 의지에 감동받는다. 가게가 거리순찰을 하던 공무원에게 모두 박살나지만, 아주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삶의 의지에서 규철은 거기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붕어빵을 파는 가게 옆에 그는 넥타이와 목도리를 팔고 있던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자신에게 새로운 희망과 사랑은 찾아오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전부 희망만이 좋은 일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강숙이가 하경이에게 선물한 목도리를 규철의 가게에서 파니 말이다. 거리의 상인과 그 상인의 옛날 연인이던 하경의 마주침, 그리고 그것을 보는 강숙과 붕어빵 가게 아주머니, 이들의 마주침에서 알 수 없는 슬픔, 우울, 허무함이 교차한다. 다시 시작하려고 한 그 계기의 순간에서 위기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강풀은 그것만이 끝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강풀의 웹툰 <순정만화> 시리즈는 뒤에도 계속 나온 것으로 안다. 그 중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영화로 만들어져 매우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들었다.

 

작지만 뭔가 마음 속 깊은 곳에 감동을 주는 강풀 작가, 그가 바라보는 감동이란 거대한 서사물이나 비극적인 사건을 추구하지 않는다. 물론 최근에 개봉한 그의 작품인 <26년>은 매우 거대한 역사적 순간과 비극적 사건으로 풀어놓은 한 맺힌 이야기지만, 그 이외에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일상에 머물러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스쳐갈 지 모른다. <순정만화>의 주인공은 순정만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오늘 여기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우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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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1 강풀 순정만화 1
강풀 글 그림 / 재미주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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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 이번에 영화에서 개봉된 <26년>으로 처음 작품을 접해보았다. 물론 그의 이름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학회에 세미나를 들을 때 그때 같이 가시던 디자인학부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시는 한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당시 작년 초였던가? 국내 만화, 애니메이션 시장의 열악한 환경에 따른 회생방법으로 한참 웹툰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진두적인 작가가 강풀이었다. 강풀의 웹툰으로 영화 및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희망적인 의견을 당시 그 교수님이 나에게 하셨다. 한국 만화의 침체에서 웹툰의 인터넷에서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은 국내 만화, 애니메이션 문화에 큰 바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바람의 선두를 어디인지 나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강풀의 히트작이면서 지금은 연극까지 하고 있는 작품, <순정만화>를 읽어보기로 했다. <순정만화>라고 하여 보통 순정만화라고 하면 로맨스가 들어간 편이나 그 로맨스에는 왠지 모르게 너무 낭만성을 추구하는 바람에 현실에 대한 배제가 너무 격리되어 있는 한계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남자는 왕자나 재벌, 여자는 무명의 회사원이나 아르바이트생으로 말이다. 현실에서 과연 그것이 얼마나 일어날 확률이 있는가에서 현실적 접근이 불가하고, 오히려 더 몽상에 가까운 것이 현실처럼 다가오길 바라는 신화와 같았다.

 

물론 강풀의 <순정만화>는 실제 인물이 존재하거나 또는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일어나면 좋겠다는 하나의 시라는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란 말에서 이 웹툰을 모운 만화가 철학의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까지는 아니나, 적어도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철학적 요소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우리 일상생활에 희망이 있는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지, 아니면 언제까지 우리는 과거에 매여 자신의 모습을 자학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내가 과연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 전부가 아니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려는가? 라는 질문이 온다.

 

어렵지 않게 충실하게 마음으로 다가오는 강풀의 웹툰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감정의 애수를 느끼게 한다. 예술에 대한 부분에서 미적 감각은 철학보다 더 보편적인 것이 칸트의 말이다. 말은 어려워도 우리 일상적으로 미,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대부분 보편적인 부분이 많다. 하지만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일상 속에서 볼 수 없기에 우리는 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말을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story-teller인 동시에 story-hearer이기 때문이다. 소통에서 듣고 말하기는 서로간의 마음을 전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런 점을 바로 강풀의 <순정만화>에서 추구한 것이라 본다. 그런 점에서 단행본 상권을 보면 사람들의 인연은 아주 사소한 계기라는 것이다. 아니 사소한 일상의 반복과 반복으로 인한 다져짐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그 일상의 반복과 반복에서 그 반복의 순간만 우리는 누적해가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인가 하나의 계기가 필요한 것 같다. 갇혀진 내 마음 속에 답답함과 소심한 용기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 등등까지 말이다. 1화부터 인상 깊은 것은 어느 여고생 수영의 입에서 나온 욕이다. 아침 지각할까봐 기분이 영 내키지 않은 상태에서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멈추고 만다.

 

그 옆에는 5층에 사는 소심한 샐러리맨인 연우가 소심하게 수영의 행동에 눈빛만 본다. 그런데 예쁘장하게 생긴 수영의 입에서 “아이 씨빨 조땐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얼어버린다. 조금 인상이 날카로워 보인 여고생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침묵의 엘리베이터는 결국 1층으로 내려가나, 연우는 거기서 수영의 위압에 주눅이 든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멍하니 수영과 같이 내려가다가 자신의 넥타이가 수영의 넥타이 색과 비슷한 것을 보고 똑같다고 하는데, 수영을 그 모습을 보고 그냥 무심히 보자, 연우는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후다다 거리며 도망친다.

 

그런 바보 같은 모습에 수영은 비웃으면서 한편으로 호기심이 생긴다. 그런 도중 수영은 아침에 넥타이를 매지 않아 연우의 넥타이를 달라고 한다. 연우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수영에게 넥타이를 주는데, 나처럼 끈 넥타이를 맬 줄 몰라, 지퍼 넥타이를 꺼내려다 자기 얼굴에 걸리는 모습이 나온다. 거짓 없는 연우의 행동, 그리고 그 연우가 보여준 호의에 수영은 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넥타이를 준다. 이렇게 조금씩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고, 한편 다른 쪽에선 고등학생 강숙과 캐리어우먼인 하경의 관계가 보인다. 하경은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는 차가운 도시의 여자다.

 

그녀가 담배에 입에 물고 라이터가 없자 옆에서 누군가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여준다. 아무리 봐도 결코 어울리지 못할 그들, 그래도 강숙은 상관없다. 언제나 하경에게 달려가고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 한다. 자신에게 반응이 오지 않아도 그저 달려가는 강숙, 그의 마음은 오직 1가지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았다. 그러나 하경은 허무한 자신의 심정을 달랠 길이 없어 그저 묵묵부답이다. 자신 때문에 상처 입을까 하는 심정에 강숙을 차갑게 대하나, 한편으로 그의 간절함이 그녀의 일상을 더욱 혼란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샐러리 쑥맥 회사원과 여고생, 그리고 화가를 꿈꾸는 고등학교 남학생과 커리어우먼, 이들의 관계는 왠지 모르게 현실에서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인데도 각자의 마음을 전해주기 위해 살아간다. 특히 연우와 수영의 모습은 작고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자신보다 12살이 어린 수영에게 마치 동등한 인간으로 존대해주는 연우와 그런 연우에게 솔직한 심정을 전하는 수영은 일상적으로 흔한 존재일 것 같은 사람이나 뭔가 특별해 보인다. 낭만적인 것은 겉으로 보기엔 웅장하고 비장할 것 같으나 막상 그 안에 갇힌 자는 고뇌의 순간이다. 따라서 낭만주의적 연애는 자기가 할 수 없기에 타인으로 대리만족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낭만적 사랑이 현실적으로 매우 일상적으로 소소하게 잔잔하게 그리고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연우와 수영의 이야기는 흘러간다. 이에 반해 강숙과 하경은 성난 폭폭 위에 떨어지는 나뭇가지처럼 매우 험난해 보인다. 하경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으면서도 괜찮다고 하는 강숙은 아직 철없어 보이나 보통 남자들이라면 한 번 정도 꿈꾸고 싶거나 혹은 직접 해봤을 캐릭터다. 단지 강숙처럼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면 좀 더 낭만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현실은 마음 먹은대로 쉽지 않다. 그 가능성은 모든 것에 대한 바침과 동시에 포기다. 자신을 불태움으로 그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런 4사람 사이에 다른 풋풋함이 나온다. 길거리에서 넥타이와 목도리를 파는 규철, 그 옆에는 포장마차에서 붕어빵과 간식거리를 파는 아줌마가 있었다. 왠지 소박한 거리의 장사꾼들, 우리 일사에서 흔히 보는 서민적 모습이다. 우리가 항상 기대하고 보는 순정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동화 속 왕자나 공주가 대부분이다. 현대생활에서는 화려한 백화점과 고급승용차, 아니면 외국의 고급스러움을 추구한다. 왜 우리는 진실한 낭만을 그런 곳에서 찾을 생각만 하는 것인가? 작은 것에 대해, 혹은 일상적인 것에 대해, 그것이 좁다면 도서관의 책들 사이에도 좋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소중한 이야기와 인연을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으로 욕망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진실한 낭만은 자기에게 오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않다. 그런 물리적인 환경보다는 자신이 가진 마음의 틈새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 필요하다. 마음의 틈새라고 하면 무엇인가 간절한 마음으로 인해 그것이 나도 모르게 넘칠 수 있는가이다.

그 마음이 넘치지 못해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을 나나 주변에서 보는 일들이다. 12월 추운 겨울, 내가 사는 곳에는 눈이 그다지 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금방 녹아 버려 눈송이가 어느새 빗줄기와 물줄기로 바뀌어 생명을 담아갈 하천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날에 눈이 오지 않는다고 편의점에서 눈 스프레이를 뿌리는 연우의 순수한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변화할 주체는 나라는 존재임을 생각해본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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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쇠퇴했습니다 6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곽형준 옮김, 토베 스나호 그림 / 서울문화사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human monument 계획이 여전히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6권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3권에서 나온 부분은 전기에 대한 부분이다. 전기는 우리 인류가 반드시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모든 현대의 원동력은 에너지다. 그 에너지 중심 속에 전기가 있기에 가능한 점이다. 그러나 전기라는 것은 과학적인 산물이고 매우 합리적이고, 이론적이며, 수치화가 가능한 하나다. 문제는 요정은 과학적인 산물이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비이론적이며, 수치화가 전혀 계측되지 않은 존재다.

 

그렇기에 그들의 비합리야 말로 진실로 합리로 이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비합리적 상황에서 비합리적 행동이 오히려 합리적 결과로 이어진다. 다소 변증법적인 논리에서 찬, 반, 합이라고 하여 부정의 부정은 긍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요정이다. 그런 반면에 요정이 아닌 인간에 처해진 상황은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다. 왜냐 하고 물어보면 인류는 쇠퇴하기 때문이다. 이번 6권은 그런 변증법의 양 갈래의 모순적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human monument 계획에 대해 6권에서는 인류가 항상 소원한 것 중에 하나인 하늘에 대한 동경이다. 이 부분에서 주인공의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악우들이 매우 흥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초로를 지나 언제 병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백발의 남성들은 이미 자신의 얼굴의 주름과 눈 같이 하얀 머리카락도 잊을 듯 모두 열기에 가득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과 그 날고 싶은 도구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막무가내로 재미삼아 도구를 만드는 요정보다 괴이해 보였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를 읽어보면 다소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상당히 장난꾸러기 기질을 가지고 있다. 5권에서 마을이 RPG게임 세상으로 되자 자신의 지하창고에 보관된 무기를 보여주는데, 그 도구들이 고대 로마부터 시작하여 중세유럽에서 사용한 무기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문제는 아무도 그 도구를 다루지 못한 점이다. 영국에서 쓰던 거대한 검 클레이모어, 유럽 귀족기사들이 사용한 20㎏가 되는 갑옷 모조품, 매우 길고 무거운 창들은 전쟁이라는 인류문명을 가질 수도 없는 마을주민에게 하나의 불가침적인 영역이었다.

 

그것을 보고도 태연한 박사 할아버지, 생각해보면 조수를 만날 때에도 로마 전차대가 이끄는 마차를 타는 것도 모자라 투구까지 착용한 점에서 그의 취미는 아이들의 전쟁놀이를 극대화로 즐기는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린 많은 총들은 총이 더 이상 무기고에 보관하여 살인기계가 아니라 장식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전쟁이 인류의 정치적 수단 중에서 가장 물리적인 행위이기에 국가조차 사라진 상황에서 전쟁은 그저 꿈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human monument 계획을 보면 문명의 부활까지는 힘들겠지만, 재현 내지 모방이란 미학적 가치는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는 것이란 점이다. 인류가 문명이 왜 쇠퇴했겠는가? 에너지의 고갈과 거대한 동물들의 소멸은 생존의 조건을 끊임없이 저하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문을 읽으면 잘 나온다. 귀여운 쌍둥이 동생을 데리고 온 한 청년이 자신이 가지고 온 비행기를 싣고 오기 위해 오다가 길가에서 매우 곤란한 상황을 맞이한다. 자동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대부분 자동차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휘발유, 경유, 천연가스 등으로 결국 석유에너지다.

 

요새같이 전기자동차가 나온다고 하나, 그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조건을 무엇인가? 결국 전기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고, 그 전환 전의 에너지가 오염물질을 가중하고 있다면 전기자동차의 효능은 그저 거짓에 불과한 점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화물차의 에너지 원동력이 태양광이고, 태양광의 차집에 한계가 있어서 기상에 따라 차가 움직이고, 하다못해 고속주행도 불가능하다. 에너지가 없다는 것은 문명사회의 원동력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인간은 날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깃털로 몸을 이루거나 동력을 인력으로 대체하거나 많은 방법이 있다. 이들의 항공기술수준을 봐서는 라이트형제가 항공기를 이제 만들던 20세기 당시와 그 후와 같다. 이와 달리 요정은 이상한 식물을 달아보니 공중을 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양력을 생산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물리적 법칙이나 에너지의 공급과 전달은 불명확하다. 불가능한 것이 불가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들의 특징이니 주인공에게는 항상 트러블과 함께 트러블해결사까지 된다.

 

요정과 만나는 것이 지독한 일을 당하지만, 죽지 않는 행운도 누린다고 하니 가역적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이번 행사의 마스터를 보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주 신랄하게 보여주다. 왜 주인공은 요정들에 휘둘리기 거부하면서 휘두를 수밖에 없는 걸까? 변증법적인 상황을 부정하려고 하는 인간들의 행동이다. 물론 그 부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나 그 말로는 끔찍하다. 마스터가 주인공을 보면서 행사의 모든 안전과 관련 문서행정을 담당하라고 한다.

 

좋은 말과 편안 일들은 위에서 다 하고 말이다. 그래도 주인공은 일이란 자신의 소임을 다 완료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경악이었다. 바다 절벽에서 항공기를 날려도 아래 바다가 있기에 충격을 완충할 수 있다고 해도 거기는 암초지대였다. 암초에 사람이 떨어진다면 거의 사망루트 확정이다. 게다가 상어들의 등에 장착된 뾰족한 그 무엇이 보인다. 배도 구멍이 나있고, 의료품도 다 쓸모없다. 주인공에게 합리적인 업무와 함께 비합리적 상황이 놓여있다. 결국 부정(과도한 업무)의 부정(상황의 위기)으로서 긍정을 찾는 것은 요정의 비합리성이다.

 

요정들의 도구는 기가 막힌다. 바위를 곤약으로 만드는데, 그 딱딱한 게 물컹물컹하게 변하여 물리적, 화학적 반응이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상어에게 빔을 쏘니 모두 도망친다. 그런다고 모두 끝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여자주인공에게 조금 매력을 느낀다. 존댓말을 말하면서 기품 있는 행동도 그러하나 매우 냉소적인 태도와 속이 다소 구렁이기질이 있다는 자체에 큰 매력을 느낀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고양이처럼 낯이 심하고,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매우 부담을 느낀다. 빗자루 머리까지 달고 있으니 그녀의 외관과 내관의 모습은 상당히 개성적이란 사실이다.

 

냉소적이기에 현실에 온갖 상황에서 요정들과 함께 하는 점에서 아이러니의 묘미를 제대로 내뿜기 때문이다. 안전담당이라고 하여 바다안전만이 아니라 항공기체 상태도 의심된다. 요정들에게 부탁하여 항공기 안전을 점검하는데, 괴도 루팡과 같은 모자와 얼굴을 가리는 가면, 그리고 망토,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신발, 마취총 등등은 코믹한 상황을 아주 잘 묘사한다. 특히나 프랑스 기사인 슈발리에가 들고 있을법한 사브르를 들고 그 기체의 안전에 위험요소가 되는 요소를 제거한 후에 손가락을 자신의 얼굴 옆에 대고 피스하면서 해결하는 장면은 인상 깊다.

 

주인공 개인적으로 그런 포즈는 자신의 의지하고 상관없다고 여기나, 요정이 만든 도구보단 주인공 내면에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쾌감이라 여긴다. 왜냐고 물어보면 대회가 끝난 후에 모든 서류로 며칠을 고생하면 다 해결하면서 주인공은 변장하지 않을 채 얼굴 옆에 손가락을 피스로서 포즈를 취한 후 해결이라 한다. 이래저래 항공기마다 안전장치를 한 후에 대회에 막상 보니 자신이 한 행동에 항공기체 능력을 향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죽음의 위기를 제거한 것이었다. 대신 마지막에 요정의 식물을 잘못 설치한 쌍둥이의 형은 하늘높이 올라가자, 주인공은 여기에 자신의 할아버지가 만든 인력으로 움직이는 비행기를 타고 출격한다.

 

이때 요정이 준 아이템을 획득 후 올라가서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 상황과 방법으로 구출하는데, 그 과정이 당황스럽다. 요정들이 스스로 항공기 부품이 되어 거대한 괴물비행기를 만든 것이다. 문제는 물리적 에너지는 주인공이 계속 발로 페달을 밟는 점이다. 요정은 물리적인 법칙은 어긋나게 해도 물리 그 에너지 자체를 만들 수 없다. 과자를 좋아하면서 과자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정확한 무게를 계측할 수 없고, 시간도 정확히 계측하지 못한다. 오로지 순간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래서 결국 비합리가 합리로 교체되는 점이다. 물론 합리적 사고로 도전하려한 인간들은 자신의 합리성이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부정이 긍정으로 변하여 대회는 무사히 마쳤으나, 그 이면에는 주인공이 생고생한 점에서 전체적인 상황은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멸망하는 길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에너지의 공급이고, 지식의 전달이다. 과거의 기술들이 소멸하고, 그 전수까지 사라지는 마당에 human monument 계획을 하는 것은 무모함의 도전임이다.

 

그런 도전도 마치고 주인공이 평온한 일상을 머무는데, 다시 다른 사건이 터졌다. Y라는 학사 악우가 다시 온 것이다. 그녀는 3년이나 되는 수당을 모두 자동차에 투자한다. 주인공은 그런 Y를 보면서 바보가 있다고 한다. 과연 바보의 행동인지 이번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요정들의 서브컬쳐는 Y와 Y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가속화되는 광기였다. 기본적으로 Y는 BL물의 열렬한 포로였다. 학사 내의 도서관에서 BL소설을 모두 점령하고, 헤르만 헤세와 같은 대문호의 <지와 사랑>까지 접수한 그녀에게 BL의 공포는 다시 쿠스노기 마을을 점령한다.

 

그녀는 마을 내 사람이 살지 않은 저택에서 시디데이터를 복원하여 BL문화를 전파하여 마을 처녀들을 모두 섭렵한 것도 모자라 전 세계에 있는 소녀들과 처녀들의 잠과 마음까지 빼앗아버렸다. 일을 할 수 없고, 잠도 오지 않아 그 간절함에 편지에 담아 찾아온 Y에게 온갖 욕망과 알 수 없는 광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문화는 전파되면 끊임없이 변질되고 재생산되어 결국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한다. 모든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하듯이 Y의 행위에 전 세계적 소녀들의 BL축제가 열리게 된다. 왜 여성들이 BL에 집착하는가? 아니라면 조수와 친한 주인공에게 이성애자라고 말하며 토라진 Y와 같은 여성의 모순인가?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다시 거대한 욕망을 분출한다.

 

Y의 계획이 성공한 점에서 문화는 끊임없이 재생산이 가능해야 한다. 먼저 만드는 사람, 그것을 보고 전파하고 전달하는 사람, 그 문화가 전파되기 위한 도로교통과 같은 이동수단, 그리고 그것을 보고 다시 창작을 하는 사람에서 재생산의 반복은 쿠스노기 마을에 거대한 BL행사장 즉 동류행사를 만들어버렸다. 만 명이 훌쩍 넘은 곳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제일 중요한 수단이 돈으로 책을 구입하지 않고, 무료배부에서 문화라는 공간은 자본력의 차이에서 수용력을 한계성을 부여하나, 그곳에선 오로지 책의 권수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런 행사에서 요정들도 궁금해 한 것이다. 어느 날 수상한 책이 책상에 있고, 주인공은 그것을 펼치는 순간 빛이 나오며 책에 갇혔다. 그곳에는 조수와 Y가 있었고, 이 책은 자신들이 만화책이 갇혀진 공간임을 알았다. 만화책에서 주인공들이 되어 배역을 돌아가면 맡는데, 순위에서 다른 동류지와 비교되어 순위가 변동한다. 그러면서 우연히 발견한 요정들이 꼴찌가 되어 연재중지가 되면 심한 꼴을 당한다고 한다.

 

결국 그 꼴을 당하고, 마지막에 요정들이 벌칙으로 가업의 일을 잇는다고 한다. 만화가는 어떻게 보면 꿈을 그리고 환상을 만들려는 존재다. 그들의 현실에 대한 부담은 가업을 잇는 것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일을 하니 상관없으나, 어찌 보면 메르헨 세계에서 보이는 현실적 감각은 매우 탁월하다. 꿈을 가지고 도전한 인간들이 실패하면 가업을 잇는 것만큼 현실적 처신이 없을 수가 없다. 물론 그 가업 역시 어느 정도 기반이 있어야 하나, 주인공이 사는 세계는 직업과 직무가 세분화된 곳이 아니다. 대부분 농촌에서 밭을 일구고 축산물을 키우며, 강가에서 어업을 하는 1차 산업구조다. 기껏 특이한 직업이야 마을에서 의사나 주인공이나 그녀의 할아버지 정도다.

 

메르헨 속에 펼쳐지는 라이트노벨이라고 해도 상당히 문명사회에 대한 아찔한 부분과 상류와 하류계급에 보이는 모습을 코믹하게 담는다. 게다가 문화라는 매체에서 계속 재생산되는 점과 꿈을 노리는 직업에 실패하면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벌칙은 매우 현실적이다. 단지 그것이 일어나는 상황이 매우 비현실적인 입장에 비합리적 방법으로 해결하기에 합리적으로 만사가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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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쇠퇴했습니다 5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야마사키 토오루 그림, 곽형준 옮김 / 서울문화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5권은 매우 개인적인 주인공의 일화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마을에서 국제연합기구 요원이며, 만물박사로 통하는 할아버지 아래서 자란다. 주인공이 기억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다지 지금의 할아버지와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주인공이 특별한 일을 벌이지 않을 정도면 그렇게 간섭하거나 또는 혼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머나 먼 과거 시절의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엄한 분이었다. 조금만 실수를 저지르면 머리에 주먹을 날리며, 아침식사시간에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굶어야 했다. 통행시간도 6시 이전이란 절대적 규칙으로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자유라는 단어 대신 통제와 억압이란 세상아래 자란 것이다.

 

덕분에 말이 없고, 감수성이 무척이나 예민하며,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상당히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성격이 되었다. 사람이란 존재는 태어나면서 천성을 지니고 나오나, 막상 성장하면서 주변 성장요건들이 계속 따르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경우 부모님의 부재, 할아버지와 삶, 할머니도 없기에 무척이나 건조하고 딱딱한 어린 시절인 것이다.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용모나 혹은 별명을 보면 ‘빗자루 머리’라고 한다. 빗자루 머리로 된 원인은 그녀의 머리를 누가 다듬어 줄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가 없기에 마음 편한 존재가 없었고, 그 성격이 계속 유지되자 마을 안에 친구조차 없었다. 주인공은 학사에 입학 전까지 외톨이였다. 10살 정도까지 그런 인생을 살다보니 학사에 온 주인공은 다른 누구와도 사이를 좋게 할 생각을 없었다. 아니 하고 싶었으나 굳게 닫은 그녀의 마음에 그 누구를 허락한다는 자체가 무리였다. 인간에게 어린 시절의 충격이나 스트레스가 결국 성장하면서 성인이 된 시점에도 큰 부담을 일으킨다. 이번 편에서는 그런 부분이 많이 돋보인다.

 

학교에 오자말자 같은 반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게다가 키도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컸기에 어서 빨리 여기서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반에서 톱을 누렸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단체 활동까지 기피했다. 그런 그녀에게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은 끊임없이 장난질을 걸었다. 왕따는 기본이고 교과서에 오물을 페이지마다 발랐다. 여기에 우연히 다가온 꽈배기머리소녀, 그녀는 독일인이라고 되어있다. 특별히 이름을 소개하지 않은 라이트노벨의 특수성에서 그저 꽈배기머리소녀는 이상하게도 주인공에게 달라붙는다.

 

주인공은 그녀의 행동에 너무 부담스럽고, 반에서 위치가 있어서 1년 만에 3학년으로 월반한다. 학사 내에는 같은 반이라고 해도 쉽게 과정을 마치지 못해 한 과정에 몇 년 동안 있는 자도 있고, 나이는 6~7세부터 20대도 존재하니, 3학년이 된 주인공은 안정된 생활을 했다. 문제는 여기부터이다. 그녀 역시 외로움을 느끼고, 괴롭고, 쓸쓸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달리던 교정 아래 동물의 뼈가 가득한 곳에 달려가면서 주인공은 울면서 친구가 필요하다며 외치고, 이때 요정이 그 소원을 들어준다.

 

그 요정은 우연히 학교 뒤에 있는 산에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로부터 주인공이 구출해준 요정이다. 그 요정은 마법 같은 것을 부리고 사라지며, 대신 책 한권이 그녀에게 들려져 있었다. 3학년으로 오면서 주인공에게 새로운 트러블이 생겼다. 그것은 꽈배기머리소녀가 어린 나이에 월반했다. 월반하면서 1학년 시절에 주인공이 나이 많은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이제는 꽈배기머리소녀가 어린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다. 인간이란 어느 한 특수한 조직이나 단체에서 누군가 특정외부적인 조건을 가질 경우 그 대상을 괴롭히는 본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보는 나이, 성별, 지역, 학력, 취미까지도 말이다.

 

인간에게 순수하게 타인에 대한 관용성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인가? 꽈배기머리소녀는 3학년이 되자 호된 꼴을 당한다. 특히 치마가 빼앗겨서 엉망으로 된 것은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인간에게 죄가 있는 자란 정말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보단 약하거나 자신들의 무리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극단적 배타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주인공의 괴로운 나날과 꽈배기머리소녀의 고통이다. 그런데 이 꽈배기머리소녀에게 조금 친절을 베푼 주인공에게 꽈배기머리소녀는 언니라고 부르게 해달라고 한다. 아니 심지어 엄마라는 말도 한다. 그것은 뒤에 있던 일화로 보면 알겠지만, 이 소녀는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5권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인간의 이중성이다. 꽈배기머리소녀와 친해진 후 주인공은 들장미회란 동경의 대상 서클에 가입되고, 꽈배기머리소녀는 주인공의 공작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된다. 문제는 그 서클에 있는 선배들은 모두 친절한 것 같은데, 주인공에게 상당히 부담이 오는 것이다. 남과 친하지 못하기에 그저 적당히 맞추어가는 생활 속에 이때 악우 Y의 친분이 쌓인다. Y는 들판의 은색여우처럼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오로라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 Y도 들장미에 있던 사람이고, 그녀는 요정의 다과회를 찾기 위해 분발했다는 점이다.

 

원래 들장미회도 요정들의 다과회를 찾기 위한 자리였으나, 결국 원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소녀들의 수다회로 변했다. 거기에 홍차와 간식은 일품이었다. 지명이나 습관성 내지 문화성 혹은 주인공이 홍차를 주로 찾는 점에서 이 작품의 배경은 아마 유럽 쪽이고 영국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홍차는 영국인들이 주로 애용하기 때문이다. 꽈배기머리소녀가 독일인이란 점에서 유럽권이란 설정은 높다. 대신 그런 연유는 요정에 대한 점이다. 요정이란 존재는 서양에 존재하던 정령이기 때문이다.

 

그 요정을 찾기 위해 존재했으나 실제적으로 이루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세월을 보내던 주인공에게 Y의 등장은 새로운 기획이었다. 왜냐하면 Y는 인간이 가진 어두움을 보여주었다. 들장미회에서 장미선배는 지독한 강박증 환자였다. 그녀는 겉으로는 미소를 보내지만 알고 보면 자신이 마음에 들지 행동을 한 대상에 대해 매일같이 노트에 기록했다. 그 중에 주인공의 행동들이 많으니 평소 남에게 조심성 있고, 꺼리는 소녀마저 top list로 올릴 정도면 엄청난 예민한 사람이었다. 마녀선배는 소녀들의 머리카락을 모아 그것을 정리하여 간직하던 사람이다. 아무리 봐도 페티시즘이 지나쳐 도착증세가 극으로 간 사람이었다. 그 밑에 4학년인 AB선배는 옷을 대충 입고 술을 마시고, 온갖 지저분한 이야기로 나누었다.

 

그리고 문제의 주인공의 방, 주인공의 방에는 꽈배기머리소녀가 혼자 있는데, 그녀는 주인공과 비슷한 인형을 의자에 앉히고 엄마 아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신은 언니가 좋은데 왜 오지 않으냐고 혼자 우울하게 있다가 그 인형에게 뜨거운 스프를 쏟고 거기에 혀를 핧는 것도 모자라 칼로 여기저기 쑤신다. 아주 잔인한 목소리로 슬피 외치며 말이다. 그 소녀는 상대방에 애정이 지나쳐서 지나친 사랑은 곧 그 만큼의 마음만큼 분노와 증오로 바뀌는 애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아마 그녀는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없기에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주인공은 그 누구와 마음을 나누기가 싫었다. 인격이란 주변 환경조건이 중요하다. 특히나 외부와 단절된 학교라는 밀폐성은 그 사람에게 극단적 행위를 발생하게 하는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이 책에선 아주 낯익은 이름이 나온다. 그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Y가 꽈배기머리소녀가 자기 자신의 이성으로 억제하지 못한 행동에서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란 말에 주인공은 들장미 사람들의 말을 주화등마처럼 떠올린다. 어린아이는 무조건 착하지 않다는 점과 오히려 그런 어린 아이들이므로 더욱 더 악랄한 짓을 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프로이트적인 학문적 이론을 늘어놓기에 주인공이 본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악마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등치하여 요정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있다는 점이다.

 

학교가 폐교되었을 때 우연히 자기를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을 만난 주인공은 요정에 대해 물어본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모른다고 한다. 요정을 보고 달려들어 요정해부를 원한 악동이 이제는 어엿한 남학생이 되어 예의도 바르고 학교생활에도 충실하게 한다. 흔히 말해 중2병을 꾸준히 행동하다가 이제 그 나이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회와의 약속이고 한편으로 사회 안에서 아랫사람들이 규율처럼 행동해야하는 통제다. 그들은 사회의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 보면 어른의 존재에 가고 있다는 점이다.

 

어른의 존재가 되면 될수록 들장미회에서 가면을 쓴 선배들의 모습인가? 그런 점에서 Y는 주인공을 테스트한 이유가 나온다. 겉으로 좋은 척하는 인간보다 뭔가 남과 구분 지을 수 있는 요소나 속물적 근성이 있는 편이 좋다고 한다. 주인공은 남들하고 사이를 꺼려하며 상당히 냉소적이며, 타인에 대해 차가운 이미지가 오히려 남들에게 거짓이나 뒤에서 음모를 꾸밀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겉모습에 치중하면 할수록 뒤의 감춰진 속은 더욱 지저분한 것이 인간의 특징일 수 있다.

 

그렇게 주인공은 인간의 이율배반적, 트라우마에 갇힌 자들의 모습을 보며 졸업한다. 그녀의 졸업은 학교가 폐쇄가 결정되고, 그 이전에 마녀선배와 장미선배는 졸업했다는 점과 AB선배는 사정에 있어 도중에 하차한 점이다. 모두의 졸업식이 되자 학교 안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무리 냉소적이고 혹은 변태적이고 속과 겉이 같던 혹은 다르던지 그 자리에선 마음은 같았다. 인간은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두의 마음이 같은 것일까? 혐오하거나 애증의 관계라도 헤어지면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 그마저도 그리워할 추억이니 말이다. 주인공에게 추억이란 2가지,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혼난 것과 학사 안에서의 갖가지 기억이다. 그런 과거의 꿈을 꾸던 주인공에게 Y가 찾아오고 예전의 이야기와 앨범, 그리고 주인공이 혼자 외로울 때 유일하게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듣던 RYOBO를 들고 온다.

 

이제 기능조차 하지 않은 이 로봇, 그러나 주인공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와중에 요정들이 다시 돌아와 이 로봇 안에는 예전에 주인공이 만난 요정이 있었고, 그 요정 덕분에 주인공은 친구를 만들었다. 마치 메르헨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엔딩으로 이어지나, 그 메르헨 속에는 강력한 억압과 폭력적인 인간의 신화가 숨어 있었다. 억압에 대한 해방욕망, 그리고 그 수단은 타인에 대한 괴롭힘과 검은 마음, 언제나 인간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주인공은 냉소적이고 속물적이나 그 누구보다 요정과 마주했다. 그녀의 마음은 아주 검은 어둠이 숨 쉬고(조수의 인격과 성격이 다 그런 연유) 있었지만, 요정을 믿는 강력한 마음으로 마을에 돌아와서 그들과 지낸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자신이 본 그 무의식 세계는 무엇인가? 잠이 든 주인공은 꿈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모습으로 그 요정을 만난다. 친구를 만들었나? 질문에 그렇다고 하고 요정에게 외롭지 않아? 라는 질문에 요정은 웃으면서 천객만래라고 답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깨닫는 것이 있으니 이때까지 들장미회와 Y와 계속 찾아다닌 요정의 다도회는 그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에 있었고, 그 마음은 요정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 대신 요정은 정령으로서 요정이 아닌 인류로서 요정이 특징이다. 주인공은 참고로 종교가 없다는 점이다.

 

그녀는 학사의 개인지도교수로 교장을 선택했다. 교장은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매우 친분이 있었고, 인류학 전공자에 요정이란 인류신학에 속한 분야다. 오늘날의 인류학에서 신학은 직접적으로 대하는 것보다는 신화학이란 분야를 인류학에서 다룬다. 신화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소통하는 대화이고, 그 민족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주인공이 1권에서 문화인류학자로 나온 것이다. 인류학자에게 프로이트란 존재는 소중하다. 원시적이라고 판단하는 존재일수록 자신들의 행동에 더욱 과학적인 행동이 있다는 점이다. 강력한 이데아보단 그들의 삶에서 만들어놓은 삶의 체계가 그런 점이다.

 

주인공의 종교여부는 5권 후반부에 나온다. 문화연구센터이면서 주인공과 할아버지의 사무소는 요정들이 이래저래 온 바람에 알 수 없는 도구로 가득하다. 이때 과거 요정들이 만든 도구 중에 게임기가 버그를 일으켜서 마을 전체를 게임 속의 세상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Dot 이미지로 다음은 2D 이미지로 그 다음은 3D 이미지로 말이다. 픽셀의 여부는 플레이어의 지능 즉 CPU의 성능에 따라 제어가 가능했다. 현실성과 부조리가 오고가는 사이에 게임이 게임으로 되지 못할 판국이니 인간이 게임을 하고 있는지 혹은 게임이 인간을 조종하는지 의문이 든다.

 

단지 이번 일화에서 주요 포인트는 주인공이 믿었던 조수에 대해서다. 게임에선 위기에 빠진 공주가 오히려 악당이었으나, 그녀의 지능이 낮기에 지능이 높은 마법사인 주인공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게임과 그 게임에 대한 수치화된 컨피그 메뉴를 조수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우습게 되었다. 마을에서 자꾸 연애 붐이 일어나고 심지어 부부가 이혼한다. 할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손녀에게 증손자를 보고 싶다는 요구까지 한다. 이때 조수가 나타나 주인공에게 어떤 이벤트를 요구하자 갑자기 효과음이 나오고, 다시 또 대화가 나오자 효과음 소리가 나오자, 주인공은 조수에게 보관을 부탁한 컨피그 메뉴를 다시 찾아보자, 게임 설정은 당초의 몬스터헌터 쪽이 아니라 미소녀 게임 흔히 연애시뮬레이션으로 바뀐 것이다.

 

이 상황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쪽이 오히려 애니메이션 그림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연애 붐에 빠진 원인은 아마 상대방에 대한 성적인 매력을 느낀 것과 그들의 결과가 베이비붐을 일으킨 점이다. 인류가 쇠퇴한 실정에서 인구감소는 인류의 멸망을 예상하게 조건이다. 그 조건이 조금씩 해결이 되면 국가연합단체 일원으로 기뻐해야할 일이나 요정들의 장난스러운 도구와 조수의 대담한 행동은 어떻게 볼 지이다. 참고로 조수의 성격은 주인공이 만들어놓은 성격이다. 아마 마음 한편에 대담한 마음을 지닌 자신의 인격이 조수에게 큰 전환점을 줬다는 것은 생각해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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