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PASS サイコパス OFFICIAL PROFILING (單行本)
サイコパス製作委員會 지음 / 角川書店(角川グル-プパブリッシング)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1.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알아보는 전체적인 서사적 형식

애니메이션 <psycho-pass>는 플롯의 구성이 매우 탄탄한 작품이다. 보통 추리나 범죄 장르와 같은 경우 범인의 존재를 드러나지 않으나 이 작품에서 범인을 처음부터 드러내고, 그 범죄자로 통해 숨어있는 범죄를 우리는 알게 해준다. 플롯의 구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서적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위한 36가지 극적플롯>에서 “구출/탈출, 복수를 부르는 범죄, 도망/추적, 희생자, 대담한 시도, 납치, 수수께끼, 광기, 이상을 위한 자기희생, 혈연을 위한 자기희생,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에 해당될 것이다.

 

주요 갈등과 사건의 전개에서 범죄가 등장하는 점에서 감시관과 집행관 등의 추격자, 그리고 추격자를 피하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은 계속하여 살인과 테러를 일으킨다. 그런 과정에서 범인의 살인동기에서 그는 치명적으로 사회에 위협을 가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그리고 범인인 마키시마, 추격하는 신야의 추리과정은 작가와 감독의 시나리오 설정에서 매우 탁월한 요소를 보여준다. 두 사람의 추격전에서 시빌라 시스템의 요원들과 같이 행동하면서 시빌라시스템의 본질과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나면서 작품은 마키시마와 신야의 이분법적인 추격과정에서 새로운 문제점을 열게 된다.

 

2. 마키시마의 책으로 통해보는 <psycho-pass>

<psycho-pass>를 보면 상당히 내용전개가 쉽지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지 누군가 공격당하여 위기에 처해있고, 누군가 범인을 잡기 위해 분발하는 모습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의미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중간을 보면 상당히 전문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나오며, 실제로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서적들도 거론된다. 우선 마키시마가 실종된 어느 고교생에게 건네준 도서로 시작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뉴로맨서>, <심야 플러스원>, <1984>가 있다.

 

이중에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책으로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러너>라는 작품의 원작이 된 소설로 미래SF소설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작품이고, 마지막에 등장한 <1984>는 실제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소설이고,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중에서 <1984>의 경우에는 영국 문학작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저술한 서적으로 당시 소비에트연방이 스탈린에 의해 강철통치를 하고 있을 때이다. <1984>에서 주인공 스미스는 오세아니아라는 나라에서 빅브라더에 대한 의문과 골드스타인에 대한 의문점을 시작한다.

 

골드스타인은 본래 빅 브라더과 같이 오세아니아를 만들었으나, 그가 빅 브라더과 오세아니아를 배신하고, 추후에 그가 만든 그 책은 오세아니아를 위협하는 매우 무서운 책이다. 오세아니아 행정기구에 사무원들이 모이면 매일 골드스타인의 영상을 보여주어 야유를 퍼붓게 하고, 심지어는 물건들을 화면으로 던지게 한다. 그런데 이 오세아니아 대륙의 특징은 화면을 관람하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영상을 상영하는 자도 관람하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84>를 보면 스미스가 뛰어난 외모와 몸매를 가진 어느 여성과 몰래 밀회하면서 오세아니아의 규율을 어긴 점과 사상에 위배되는 말과 행동, 심지어 그 여성과 성행위를 하는 사생활까지 모두 감시한다.

 

그리고 스미스는 오브라이언이란 고급관료에게 심문을 받은 후에 아주 심한 고문을 받아 머리가 다 빠지고, 살이 뼈와 붙을 정도로 학대당한다. 심문과정에서 스미스는 질문을 받는다. “2에 2를 더하면 얼마인가?”, 이에 대하여 스미스는 “2에 2를 더하면 4입니다.”라고 한다. 만약 그런 대답을 하면 고문과 함께 이런 단어가 나온다. “틀렸소. 2 더하기 2는 5이오.”라고 말이다. 결국 스미스는 풀려나고 몸과 육체가 망가진 상태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상태에서 4가 아닌 5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1984>와 <psycho-pass>는 무엇과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3. 감시와 처벌

<psycho-pass>의 주된 내용에서 시빌라 시스템을 돌아보자. 시빌라 시스템은 범죄예방과 동시에 범죄가 일어나면 신속하게 처리하여 대응할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특징은 각종 CCTV를 비롯한 영상기록장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동이 가능하다. 이들이 감시하지 못하는 곳은 전파가 닿지 않은 산속이나 혹은 깊은 지하일 것이다. 감시를 하는 점에서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선 <psycho-pass>에서 psycho-pass는 인간의 심리적인 안정지수이다. 이들의 심리조건들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거나 혹은 극단적인 충격을 받거나 또는 위험에 처해지는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6~8화에서 마키시마에 의해 살인과 악취미인 시신조각을 하는 리카코에 대한 부분이다. 리카코의 아버지는 매우 유명한 예술가였고, 그는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기에 리카코 역시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비관적인 삶을 영위한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예술이나 예능에서 인간의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 즉 미학적으로 통해 본다면 "예술을 삶을 광학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이들이라면 분명 일반인들이 보는 시선에서 사물을 보지 않는다.

 

가령 중세유럽 고전주의시기에 실물의 화상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은 상상의 존재인 신과 천사, 그리고 악마 등의 정령적인 존재를 그림에 넣는다. 상상의 존재를 직접 보기보단 그렇게 성스러운 교회나 상징을 보고 그려 넣었을 것이다. 또한 19세기부터 인상주의, 추상주의, 20세기의 초현실주의 등과 같은 미술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세계는 인간의 심리가 안정되기보단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온다. 예술의 탄생에서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추의 세계로부터 나오는 그로테스크로부터 보이지 않은 새로운 세계가 나온다.

 

미술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그의 그림은 도저히 현실성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비현실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예술로 승화했다. <게르니카>, <아비뇽의 여인들>, <한국에서의 학살> 등과 같은 작품은 전쟁에서 희생당하는 힘없는 자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보단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그렸다. 결국 예술인들은 일반인들과 같은 인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시빌라 시스템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기에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킨다.

 

즉 안정지수가 불안하므로 치료 및 격리를 시킴으로서 사회구성원들에게 접촉을 금지하는 셈이다. 접촉하는 기회가 줄어들면 결국 시빌라 시스템은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 내지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다. “이성도 감정 중에 하나”라는 말과 함께 이성의 영역에서만 인간은 존재할 수 없고, 감정에서도 이성이 태어날 수 있다. 작품에서 신야는 매우 침착하고 일처리가 확실하다. 그의 철저한 사고방식에 아카네 감시관은 많은 감명을 받지만, 사실 신야의 행동에는 감정에 의해 기반 되어 있다. 자신이 감시관 시절 데리고 있던 집행관이 아주 처참하게 살해당하여 마키시마에 대한 분노라는 감정이 그를 매우 냉정한 이성을 가지도록 했다.

 

그 이후 신야는 감시관에서 집행관으로 내려가고, 아카네의 감시 아래 행동한다. 시빌라 시스템의 감정에서 신야의 분노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신야의 분노는 매우 정당하고 옳은 것이다. 하지만 시빌라 시스템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 이유는 신야의 분노란 부당한 것에 대한 의문과 불만이고, 그 의문과 불만은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범인은 범죄를 저지른 상태에서도 psycho-pass가 정상수치였다는 점이다. 옳지 못한 부당한 행동을 해도 psycho-pass가 정상이라면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가 분명하고, 그것이 문제가 있다면 시빌라 시스템에 의한 통치체계가 옳지 못한 것으로 연결된다.

 

작품에서 마키시마가 계속 테러를 일으키는 이유는 psycho-pass의 불합리적인 것에 대한 고발이었다. 사람들이 불안에 떨게 되어 psycho-pass가 상당히 높게 치솟으면 시빌라 시스템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거리에 많은 시민들이 항의나 폭동을 일으키면 그들을 바로 제거하여야 하는가? 만약 제거로 인한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경우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이 시빌라 시스템은 유지될 수 있는가?

 

4. 시빌라 시스템과 <인간불평등기원론>

<psycho-pass>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등장하는 편이 나온다. 5화 중에서 아카네는 마사오카의 대화에서 마사오카는 아카네에게 책 한권을 소개한다. “그래, 그 사람의 저작인 <인간불평등기원론>”, <인간불평등기원론>이란 도서는 1753년 프랑스에서 기거하던 장 자크 루소가 저술한 도서로 근대사상부터 시작하여 현대사상까지 꾸준히 읽히고 전해오는 도서이다. 이 책을 두고 마사오카는 왜 그렇게 아카네에게 강조했는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전개되는 불합리한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우선 마사오카는 젊은 시절에 매우 우수한 형사였고, 그의 경력은 시빌라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에 큰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형사들은 범죄자를 잡기 위해선 범죄자가 아니지만 범죄자의 생각을 해야 하고, 그것으로 통한 추리 및 직감으로 통해 검거 및 예방을 한다. 하지만 범죄자들의 범죄에 대한 구상은 당연히 시빌라 시스템의 psycho-pass에 감지가 되므로 모두 검거 및 예방이 가능하다. 문제는 시빌라 시스템의 도입과 함께 기존의 경찰체계가 어떻게 되는가이다. 시빌라 시스템을 운영하는 공안국의 요원들은 매우 턱없이 부족한 인원으로 활동한다.

 

기존의 상당한 규모의 경찰병력들은 모두 불필요하게 되었고, 그 이상의 업무를 공안요원들이 부담을 지게 된 것이다. 도미네이터의 사용허가권의 승인과 허가로 통해 범죄자를 즉결심판하나, 1화에서 범죄자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 젊은 여성의 psycho-pass 갑작스러운 위험수치는 현장의 요원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psycho-pass 지수가 아무리 위험한 생각과 행동을 하더라도 검색되지 않고, 심각한 현장을 목격하고 멀쩡한 경우 공안업무에 대한 큰 차질이 빚어진다.

 

마키시마는 아카네의 친구를 납치하여 아카네가 보는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아카네는 도미네이터를 마키시마에게 겨냥해도 psycho-pass가 안정지수고, 친구가 바로 죽는 순간까지 아무 것도 못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타격을 주는 무기가 주어져도 아카네는 망설임 끝에 결국 친구를 잃게 된다. 그런 심각한 상황이 벌여져도 아카네의 psycho-pass는 최고의 안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에 반해 마사오카는 평생 형사일로 자신의 아들인 기노자와 사이가 틀어졌고, 집행관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게다가 집행관 중에 카가리는 나이가 겨우 5살 때 psycho-pass에서 경고등급을 받아 관리대상이 되어야 했다.

 

솔직하게 5살이 사회적으로 위험해질 수 있는 불안요소로 지정될 수 있는가? 카가리의 낙인은 너무 부당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마사오카가 왜 아카네에게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이야기했냐는 점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인간에 대한 불평등을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선천적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불평등이다. 후천적인 불평등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생기는 불평등인 반면 선천적인 불평등은 신체적 조건, 남녀성별, 나이 등과 같은 생물학적인 요소다.

 

그렇다면 <psycho-pass>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은 선천적인 요소에서 생기는 것이고, 후천적인 불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은 정해져있고, 현실에서 사법고시를 합격하여 검사정도의 직급을 발령받은 아케는 겨우 나이가 20세 정도의 아가씨다. 그녀가 감시관으로 지정된 이유는 어릴 때부터 psycho-pass가 너무 안정되어 이미 출세가 보장되었으며, 특별한 노력에 의해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아카네의 친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A등급이 아닌 C등급에 머물렀고, 자신의 등급에 따라 직장이 정해지고 사회적 지위가 정해져있다.

 

5. 시빌라 시스템과 사회체계

이런 현실에서 시빌라 시스템이 주어지는 국가체계는 매우 독특하다. 모든 국민들은 농업을 비롯한 1차 산업을 직접적인 활동보다는 자동으로 식량을 재배 및 수확하는 시스템이 있으며, 다른 나라와 교류를 거의 하지 않는 정치체계이다. 덕분에 아카네가 살아가는 사회구조에서 빈곤이나 경제적 문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시빌라 시스템의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에 의해 반영된 정치사회제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에게 행복이란 조건을 내걸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이 적용되므로 시빌라 시스템은 최후에 마키시마와 아카네에 의해 정체가 탄로 나도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시빌라 시스템을 대행할 수 있는 체계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카네는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시빌라 시스템이 정지된다면? 만약 시빌라 시스템이 대중에게 공개된다면? 그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카네 역시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특권을 부여받은 관료 중에 하나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전산정보 시스템에 의해 처리되는 체계가 아니라 마키시마와 같이 매우 특이한 인간들의 뇌들이 모인 괴이하고도 비정상적인 집단이 만든 체계이다. 단지 이 체계는 보통 사람에 비하여 두뇌기능이 매우 우월하며,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탐지되는 psycho-pass가 변동이 없으므로 이들이 무엇을 저지르든 모든 것은 정당하다.

 

마키시마가 살인사건을 만들고도 집행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이기도 하면서 시빌라 시스템을 구성하는 다수의 뇌들이 자신들의 선천적인 조건을 하나의 선택받은 인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일반적인 생물학적 조건에 의해 사는 게 아니라 반영구적으로 뇌를 보존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연산하여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인간을 지배하려 한다. <1984>의 조지 오웰이 저술한 <동물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나, 어느 동물은 더 평등하다”고 한다. 결국 인간의 평등이란 자신들의 지배 아래 평등한 것이고, 자신들의 평등은 이들을 지배할 수 있는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시빌라 시스템이 운영되는 세계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들이 법이고 정의이다. 그러므로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라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믿어져야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감시와 처벌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완벽한 시스템이란 전제가 달성되기 위해 완벽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psycho-pass로 통해 범죄의 예방과 처리이며, 마키시마와 같은 인물을 포섭하여 자기와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더욱 더 연산능력이 탁월해지고, 다양한 판단력이 생기므로 감시와 통제라는 기능이 훨씬 상승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의 텔레스크린의 기능은 바로 빅 브라더의 실존여부를 떠나 빅 브라더라는 하나의 상징성을 부정하는 존재에 대해 응징의 처벌을 가한다. <psycho-pass>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그런 빅 브라더의 유령이 숨어 있는 세계이다. 문제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알 수 없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인 마키시마 같은 인물에 한하여서이다. 그의 죄는 아주 무겁고 심각하나, 그의 범죄자체에 대한 여부에서 그에게 살해당한 개인으로서는 매우 억울하고 비참한 일이나, 그의 행동에 의한 사회적인 요소에서는 테러리스트로서의 불법행위와 더불어 하나의 전환점이기도 한 것이다.

 

6. 역사는 2번 반복된다.

마키시마의 테러와 더불어 정보수집에서 컴퓨터가 아닌 일반 도서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정보는 디지털 정보에 의해서 운영되나, 그래도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도 운영된다. 학교에는 선생이, 식량은 농부와 어부, 지식은 책에서 말이다. 마키시마가 책을 읽는 점에서 그는 인간의 삶의 형태가 디지털 정보체계가 감시되어 운영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움직이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 점이다. 가령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분은 도미네이터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리볼버식의 권총으로 집행되는 것이고, 더 넘어서 인간의 가치는 태어나면서 psycho-pass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역량에 의해 결정되는 점이다.

 

카가리의 경우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아도 관리대상이어야 하는 부당함과 불안한 심리와 정신세계가 아름다운 예술로 표현될 수 있는데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게다가 자신의 노력도 의지도 관계없이 결정되는 인생이란 정말 재미없는 삶이란 점이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것을 인식할 수 없고,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의 테러는 미학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신야의 손에 의해 사살되지만, <psycho-pass>의 세계관에서 지배자인 시빌라 시스템이란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마키시마의 테러는 불발에 끝나고, 마키시마의 테러를 막은 신야는 범죄자로 수배된다. 시발라 시스템에서 마키시마라는 위험인물은 사라지게 되나, 대신 신야라는 새로운 위험인물이 생겼다. 시발라 시스템에 의해 기존의 체계가 사라지는 비극에서 마키시마의 반격을 막은 시점에서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를 드러나지 못하게 되어 <psycho-pass>의 작품관은 시빌라 시스템에게 2번의 승리를 주게 되는 소극을 연출하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이런 문장이 존재했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소극)으로” 말이다.

 

시간의 진행에 따라 사라지는 인간과 새로 충원되는 인간이 생기면서 우리는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보나,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우선 아카네 감시관이 처음 발령 부임 하던 날과 아카네의 후임이 새로 부임 하는 날의 모습이 겹치는 점이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며, 다시 반복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한다. 또한 다시 반복되는 새로운 역사란 마사오카와 기노자의 관계다. 2사람은 원래 부자관계이나 1명은 집행관으로 1명은 감시관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마키시마를 마지막으로 추적할 때 기노자는 함정에 걸려 팔이 철근에 깔린다. 마사오카는 마키시마를 체포하려 했으나, 마키시마는 폭탄을 기노자에게 던지고, 마사오카는 기노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이때 죽어가던 마사오카를 기노자가 품에 안으면서 “아버지!”라고 외친다. 그러나 마사오카는 안경이 벗어진 기노자의 눈빛을 보며 “예전에 내가 활약했던 그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기노자는 마사오카의 아들이란 점을 거부하여 안경을 쓰고 머리모양을 다르게 하나, 추후에 마사오카의 얼굴과 비슷하게 나온다.

 

게다가 마사오카가 팔 1쪽이 인조라는 점에서 팔을 잃은 기노자 역시 인조 팔을 착용하여 집행관으로 활동한다. 그런 점에서 <psycho-pass>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부자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기노자가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추모하여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른바 아들은 아버지에 의한 거세공포를 느끼고 이에 대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거나 혹은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한다. 혹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도저히 아버지를 칠 수 없는 경우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나, 기노자의 경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를 추모한다.

 

그래서 역사는 2번 반복되었다. 마사오카와 기노자의 모습에서 말이다. 마사오카는 자신과 완벽하게 닮았다는 기노자의 모습을 보고 매우 흐뭇하게 웃으면서 죽는다. 그의 죽음은 그에게 단 1번의 죽음을 가진 인간의 삶에선 비극이었으나, 마사오카와 기노자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희극이란 플롯이었다. 다시 공안요원으로 활동하는 기노자는 아카네와 함께 공안요원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아카네는 어떨까?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를 모른 채 시빌라 시스템을 신뢰했다. 하지만 시빌라 시스템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빌라 시스템의 유지에서 <psycho-pass> 2기에서 신야와 아카네가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를 해결할지 못할지는 알 수 없다. 단지 해결할 수 없다면 다시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소극의 모습만 보여줄 것이다.

 

7. <psycho-pass>와 현실세계

<psycho-pass>란 작품은 매우 획기적인 작품이다. 작품세계관이 감시라는 하나의 체계적인 도구가 시빌라 시스템이란 뒤에 숨은 절대적인 지배자들의 권력을 합리화 시키는 체계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어떠한가? 2013년 한국에서 영화 <감시자>라는 작품이 있었다. 상당히 카메라의 무빙워크 불안하고 어지러워 상당한 긴박함을 보여주고, 실제 CCTV가 지나가는 행인이나 범인들을 확인하여 경찰들이 검거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CCTV라는 감시 장치의 영상이 관객의 눈이 되는 경찰들에게 관찰되지 않을 시에 그 상황이란 매우 불안하고 초조하다.

 

즉 감시라는 체계가 하나의 안전을 보장하고, 하나의 정당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감시라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하루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CCTV에 의해 촬영당하고, 심지어 카드를 이용하거나 결제하는 것조차도 모든 정보가 노출된다. 개인정보의 유출은 결국 개인의 사생활의 영역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범죄의 안전에서 하나의 증거와 예방 역시 감시라는 체제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아이러니한 인간의 선택지점에서 <psycho-pass>의 선택지점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의 관점을 손에 들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적어도 1번은 마키시마의 관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아주 끔찍하겠지만, 적어도 그런 감시라는 현상이 우리 주변에 항상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근로자가 계속 쉬지도 않고 일을 하는지 확인이 가능한 CCTV는 원형일망 감시탑인 판옵티콘은 전체적으로 감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내가 일하는 업종과 유사한 업체에서는 사장이 직원이 지금을 무엇하고 있는지 CCTV로 통해 다 감시한다는 소문만 들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어서 잠시 한 눈을 팔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잠시 다른 용무를 볼 수 있다. 그것을 감시하여 하나하나 모두를 감시한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다.

 

또한 우리는 아파트와 같이 집단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건축물에 살고 있다. 하다못해 옆 아파트 내지 건물에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감시당할 수도 있다. 점점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조건에 의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생활이 축소되고 있다. <psycho-pass>에서는 이미 그런 사생활조차도 하나의 감시가 이루어지고, 때에 따라서는 개인의 존재가 사회로부터 소멸된다. 도미네이터라는 강력한 처벌도구는 개인의 생물학적인 존재만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도 소멸시킨다.

 

마사오카가 아카네에게 질문하면서 거론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이외에도 그의 저서 중에 하나인 <사회계약론> 제1편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사회질서는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그렇다고 이 권리가 자연히 생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약속에 근거한다. 그 약속의 성질을 아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시빌라 시스템은 사회계약에 의해 조성된 사회체계인가? 오히려 그것은 더더욱 심한 쇠사슬에 묶이게 하고, 시빌라 시스템의 뇌들은 대중들의 권리보단 자신들의 권리를 기초가 되는 것이 신성한 권리라고 여긴다.

 

어떻게 본다면 시빌라 시스템에 등장하는 뇌들은 그저 애니메이션이란 <psycho-pass>에 나오는 숨은 권력자들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충분히 시발라 시스템과 같은 보이지 않은 권력자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감시라는 체계는 감시자라는 존재가 감시당하는 사람 앞에 나오거나 들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조건이다. <psycho-pass>라는 작품은 하나의 허구의 세계를 만든 작품이란 점은 분명하나, 그 허구라는 세계가 창조하기 위해서는 현실이란 세계에 의해 조성된 하나의 모방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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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소년 공주님 3 - Novel Engine
모베 지음, 모브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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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절대소년 공주님> 3번째 순서를 보고 난 후에 생각이 든 점은 국내에서 이른바 TS물 즉 남성과 여성이 섹슈얼리티(생물학적으로 성) 내지 젠더(사회적인 성)의 바꿔지는 이야기는 그래 흔하지 않다. 과거 한국 만화책인 <아드레날린>에서 흡혈귀에게 피를 빼앗긴 남자들은 모두 여자로 몸이 바뀌는 것을 생각하면 남녀의 역할을 바꾼다는 그런 흔한 소재는 아니다. 물론 일본과 같이 만화시장 규모가 거대한 곳이라면 TS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거리와 소재들이 흘러나온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 최근 <금지소년>처럼 남자고등학생이 카페의 미소녀 종업원으로 나오는 소재는 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절대소년 공주님> 이외에도 국내 라이트노벨에서도 남자학생들이 여장을 하고 학교로 가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보면 성적인 역할에서 생물학적인 요소보다 사회적인 요소가 더 가중되는 느낌이다. 그런 성적담론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느끼는 남녀관계에서 예전에는 남성들이 강한 우위와 권력을 가진 반면 최근에 남자와 여자의 대립보단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계층이 분리되는 점이다. 결국 남자라든지 여자라든지에 의해 구별되기보단 현재 어느 상황에 놓여있는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원래 공주이던 이소레비안은 본인의 신분이 공주이고, 게다가 성별은 여성이고도 불구하고 자신의 강력한 힘과 성안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구속감로부터 해방을 맛보기 위해 남장을 하여 용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셰트라는 용사가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자신을 대신하여 공주역할이 필요했고, 그 덕분에 레빈은 공주의상을 하여 영문도 모른 채 혼인식에 갔고, 거기에서 납치되어 마왕성으로 끌려갔다. 자신이 그동안 남자인데도 여자옷을 입고, 여자의 말과 행동을 하며,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그 와중에도 마왕은 계속 용사 아셰트만 찾게 있었고, 매우 복잡한 상황 속에 또 다른 변수로 제국의 군대가 마왕국에 쳐들어왔다. 당초에 이소레비안 공주가 결혼해야할 제국의 왕자, 르엔이 찾아온 것이다. 르엔은 제국의 군부대에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장교였고, 자산의 신부인 이소레비안 공주를 찾으러 온 것이다. 문제는 이소레비안 공주를 찾아오기 전에 조우한 용사일행에서 르엔이 만난 용사는 진짜 용사 아셰트인 이소레비안 공주가 아니라 레빈이었고, 진짜 공주는 다시 이소레비안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제국의 군대가 오면 마왕국의 사람들과 제국의 군인들은 많이 죽고 다치게 될 것이고, 레빈과 친분이 있는 리세를 비롯한 마왕국 안에 사람들도 큰 위해를 받을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빈은 마왕국의 리세, 빈유, 마왕과 싸운다. 하지만 레빈의 싸움에 대한 능력은 거의 Level 0, 등급으로 따지면 Level 99 풀인 마왕과 싸우는 것은 무리다. 아니 그 이전에 리세나 빈유도 역시 막강한 힘을 가졌다. 레빈은 자신이 용사 아셰트가 아니라 마왕궁에 갇힌 이소레비안 공주의 대리라고 밝혔다.

 

그 덕분에 리세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용사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마왕 역시 레빈의 책략에 그대로 넘어가준다. 운 좋게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르엔에게 포로로 잡힌 레빈은 우연히 넬의 유도에 따라 목욕하는 곳에 가다가 르엔의 정체를 발견하고, 그 덕분에 상황은 급변한다. 사실 르엔도 이소레비안 공주가 용사처럼 행동하듯이 겉과 속이 다른 것이었다. 용사가 되어 자유롭게 방랑하고픈 이소레비안, 암살과 모략 그리고 정치적 숙청이 끊이지 않는 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르엔에서 둘은 뭔가 다르나 상당히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태자이던 르엔은 세상 그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나, 자신의 알몸과 같이 있었던 레빈에게만 달랐다. 레빈이 가난한 평민이든 용사의 대리이든 상관없었다. 단지 레빈이 옆에만 있어주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곱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넬, 레빈을 처음부터 납치하여 갖은 고통과 골탕을 주던 넬이 알고 보니 레빈에게 가장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작품 중간에 만약 레빈이 르엔을 따라 제국으로 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작품에서 레빈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소레비안 공주는 계속 자유롭게 살아가고, 마왕국의 사람들은 제국의 의해 살해당하지 않으며, 자신은 가난한 평민에서 한 나라의 권력을 움직일 수 있는 정점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으로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주어진 상황이 항상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며, 심지어 목숨도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에 빠진 레빈이나 너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좋다면, 그것이 이익이 된다 치더라도 과연 만족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나 레빈은 언제나 힘이 없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것이 정말 유리하다고 하지만, 뭔가 납득되지 않아도 그 어떤 것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가장 문제인 마왕과 이소레비안의 공주가 등장했다. 넬이 레빈을 고국으로 데려가는 도중에 공주는 다시 용사로 돌아간 것이다. 르엔과 이소레비안 공주로 모습을 한 레빈의 결혼식장에 사라진 원래 공주는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남편을 데리고 말이다. 남편은 다름 아닌 마왕, 보통 공주님 안기는 남자가 여자에게 해주는 것이 상식이나, 여기서는 신부의 의상은 입은 공주가 마왕을 자기 손으로 안아주는 모습이 나온다.

 

전투력은 마왕은 높았고, 마왕은 원래 용사가 레빈이 아닌 이소레비안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에 왕국과 제국의 적인 마왕이 결혼식에 나타나 공주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단지 이 자리에서 축복의 박수를 치는 사람은 리세와 빈유, 그리고 용사와 같이 모험을 즐긴 일행이었다. 어떻게 보면 실속이 넘치는 겉보기 좋은 결혼식보단 오히려 엉망진창이나 자신들이 재미있는 세계를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세상에는 이런 말이 존재한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소극)으로” 말이다. 작품 마지막 결과에서 용사 페티쉬에 걸린 마왕, 그런 마왕과 재미있는 일상을 보내려는 이소레비안 공주, 아끼고 싶은 만큼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넬은 다시 레빈으로 하여금 또 다시 모험(?)을 시작하라고 한다. 문제는 전에는 절대소년에서 ㄴ를 제외한 소녀야 했으나, 지금은 왕자 앞에 여를 붙여 여왕행세다. 처음 공주행세는 비극이라도 뒤에 찾아올 여왕행세는 희(극(소극)이다. 그러나 레빈에게 선택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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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3 - Novel Engine
정진교 지음, 라티세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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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3권을 보는 순간, 아직까지 이 라이트노벨의 엔딩은 약간 먼 것 같고, 어느 정도 연재가 계속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신인류의 종류에서 8가지로 기억하고 있는데, 베히모스 무예, 하멜룬 신아, 위그드라실 청연, 키메라 휘정까지 나왔는데 이제 드디어 다른 신인류 엔젤 안나, 제우스 수연이 등장했다. 보통 라이트노벨을 보게 되면 대부분은 아니나 주요 소비계층이 남성인 점을 고려하여 보통 등장하는 여자등장인물들은 남자 주인공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구조를 가진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그런 경쟁하고 구도를 가지고 있으나, 작품에서 보이는 그것 자체가 주요한 포인트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제와 해소다.

 

단지 문제의 발단에서 그 토대에 대한 부분으로 전개되어가는 것보단 엉뚱하게 흘러가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다. 분명 문학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패턴적인 클리셰가 없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 작품은 그런 클리셰를 너무 우려먹지 않는다. 물론 작품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와 겹치는 다른 이야기가 있지만,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자주인공부터 상당히 바보이기도 하나, 그의 입장이 구인류라는 점이다. 신인류의 등장에서 보통 작품에서 세상을 구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편은 신인류에 가깝다.

 

그들이 가지는 특별한 힘으로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고, 곤란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신인류들이 민폐 당사자란 점이고, 그들의 문제를 뒤처리를 하는 사람이 민수다. 라이트노벨에서 시점은 민수의 눈에 보여주나, 실제 흐름에서 민수는 휘말리는 사람이고, 의도하지 않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사실 1권부터 생각하면 민수의 어머니는 멀리 외국에서 근무하고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멀리 외국으로 전근을 가셨다. 전근의 의미에서 타국에서 이용되는 신인류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신의 임무가 신인류에 대한 보호와 지원에서 매우 헌신적이다.

 

문제는 민수의 아버지가 헌신적이면 헌신적일수록 아들인 민수는 비참한 생활을 감당해야 한다. 무예와 어릴 적부터 친구라고 하나, 무예의 강한 힘과 무서운 살기에 모두 접근하기를 꺼려하고, 오직 민수와 지내게 된다. 민수는 무예로 인해 주변에 친구를 사귀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물론 학교에서 웃고 떠들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같이 집에 가고, 서로 집에 찾아가며, 어려운 일이 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친구관계는 아예 맺을 수가 없었다. 그런 민수에게 집이 사라진 점에서 신인류만 모우는 학급에 간 것은 무리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민수의 운명이다.

 

그 운명의 고리에서 민수는 다양한 신인류 미소녀 사이에 끼여 마치 노비처럼 생활을 한다. 이미 무예가 민수라는 이름만 부르면, 민수는 당연히 뭐가 필요한지 알고 찾아가서 해결해주고, 다른 사람마저 가능하다. 그런 덕분에 민수에게 붙은 별명은 매국노다. 딱히 민수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나, 세상의 편견이란 신인류라는 당사자 이외에도 그들과 단지 가깝게 지내는 사람까지 같이 몰아가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3권을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한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 학교에 신인류가 올 때 난리도 아니었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순간에 새로운 사건이 터지는 것이 서사의 기본이다.

 

서사에서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에서 결말은 또 다른 발단이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결말이 결국 위기와 갈등의 해소라면, 만약 갈등과 위기가 없다면 이야기가 계속 이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2권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비인류인 뱀파이어가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뱀파이어가 3권에서 새로운 갈등과 위기를 주는 인물로 나올 것이란 단서는 우린 이미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3권에서 보이는 뱀파이어가 주는 위기와 갈등은 무엇인가?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과 같은 생각과 혹은 같은 패턴인 사람을 만났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삶의 목표 그리고 그것을 같이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할 것이다. 그런다고 모든 것이 같으면 좋은 일이 아니다. 뱀파이어 공주인 니제르가 올 때, 이미 갈등은 시작되었다. 신아가 말을 한다. 니제르는 자기와 동류인 존재라고 말이다. 같은 존재가 한 곳에 있게 되면 서로 적이 되거나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전 중에 고전인 삼국지에서 군웅할거시대에 나타난 인물로 유비, 조조, 손권 등이 있다.

 

이들은 서로 군주로서 최고의 자질을 가졌고, 조조와 유비는 전장을 서로 누비며 그 위세를 떨쳤다. 물론 한나라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관인 유비와 혁명적인 가치관을 지닌 조조의 대립에서 누가 더 우위에 두는가에서 어려운 난점을 가진다. 두 사람은 모두 황건적과 십상시를 해결한 인물이나 결국 서로는 같이 양존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 니제르와 신아가 양존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외모부터 시작하여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이다. 니제르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에서 찾아온 뱀파이어고, 신아의 어머니는 백인으로 둘 다 노란머리에 귀여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니제르는 가면 속에 가려진 게임폐인이지만, 학교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인사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인물로 나온다. 신아는 학교에서 최고의 인기인이 되기 위해 매우 신경을 기울이는 부류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바로 충돌이고, 신경전이 발생되는 것이다. 게다가 처음에 비인류인 니제르를 모두가 꺼려했으나, 사람관계에서 처세술이 뛰어난 니제르 덕분에 오히려 신인류인 무예, 청연, 휘정, 그리고 설영이까지도 니제르의 학교생활과 기숙사생활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피곤해지는 것은 누구인가? 결국 민수가 되고, 학교 안에서 요조숙녀인 니제르는 기숙사에 들어가는 순간 게임에 빠진 게임폐인이 되고 만다. 게임덕분에 잠을 잘 수 없는 신아는 계속 니제르와 실랑이를 펼치고, 그런 사이에 눈칫밥도 없고 남 좋은 일만 죽어라 하는 민수가 나와 이야기를 한다. 신아와 같은 방을 쓰자고, 아니면 게임하지 못하여 취미생활이 사람의 피를 빠는 니제르에게 민수가 피를 주겠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말리지 못하는 여자동급생으로 상황은 꼬이고, 결과적은 문제는 해결되나 민수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진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는 기본적으로 하렘요소가 있다고 하나 하렘계열로 보이기에 매우 부적절한 것은 남자주인공인 민수가 너무 당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재미이기도 하며, 작품에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도 민수로 통해 보여준다. 니제르의 등장과 더불어 또 다른 신인류인 제우스 수연과 엔젤인 안나의 등장에서 말이다. 솔직히 엔젤 안나 플레이어의 등장에서 최근에 국내에 공연을 하러 온 외국 뮤지션 Radio gaga라는 팀이 생각난다.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하나, 국내에 공연을 할 때 어느 종교단체에 의해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엔젤 플레이어의 등장과 그녀의 공연을 하기 전과 그리고 공연 당일의 사건은 진짜 현실에서 이런 신인류 사람들이 존재하면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리란 보장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가령 제일 유명한 것이 17~18세기 유럽의 마녀사냥이다. 마녀라는 존재는 실제의 존재가 있어서 마녀가 아니라 사람들의 광기와 불안한 심리적 요소를 타인에게 전가하여 그것을 하나의 주술적인 고문과 처형으로 통해 해소하는 극단적인 정치수단이다. 죄 없는 사람을 불러 고문하는데, 그 장면은 매우 끔찍하고 잔인하여 다시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당 사실을 기록한 사람의 고뇌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안나 역시 그런 마녀가 아니나 마녀로서 낙인찍힐 가능성은 높다. 공연준비로 민수가 있는 학교 기숙사에 올 때 학교 주변에 사람들이 와서 항의를 하고, 심지어는 공연 당일에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다. 그런 일을 당하는 이유는 안나의 속성은 엔젤이란 점이다. 엔젤하면 우리는 천사를 생각하고, 천사가 가진 상징으로서 크고 아름다운 하얀 날개다. 그런 날개를 신적 영적 존재인 천사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신인류로 확인된 안나에게 붙은 것이 작품 내에서 말하는 갈등과 위기의 소재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서 상당히 따가운 말이 나온다.

 

안나의 위기를 구출한 민수와 민수일행에게 안나가 그렇게 심한 일을 당해도 참는 이유를 묻자, 안나는 자신의 행동이 곧 신인류의 얼굴이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차별이란 단어를 좋지 못한 가치관으로 알고 있어도 실제 그 차별을 실제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이나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 차별이란 부당한 행위를 하나의 정의로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광신도 단체들은 자신들이 폭력으로 통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매우 옳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광기가 하나의 맹목적인 가치관과 이상이 되는 순간 폭력은 하나의 미학이 되고, 그런 폭력의 미학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해 우리는 파시스트라고 부른다. 파시스트란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고, 내 자신이나 혹은 옆에 있는 사람조차도 파시스트로 전환되기가 쉽다. 인간의 불안과 초조, 그리고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이 스스로 폭력을 하나의 미학으로 치부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서 가장 문제되는 갈등은 차별이다. 차별의 존재에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성립되나, 그것은 실제적으로 알아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조건도 필요 없이 단순히 육안으로 소문으로 확인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것은 단순히 차별을 넘어 삶의 정체성까지 흔들어댈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민수와 무예는 어릴 때부터 매우 가까이 지낸 친구고, 그 둘의 가족끼리도 잘 지내는 사이다. 오죽하면 민수의 아버지는 무예를 배려하기 위해 무예와 민수를 같은 아파트에 살게 하고, 민수가 어릴 적에 무예의 집에 놀러가는 것도 모자라 같이 낮잠을 잘 정도로 신뢰하는 사이다. 민수가 무예와 지내면서 무예의 아버지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는데, 무예에 대한 무예의 아버지가 보이는 오지랖은 이미 보통 사람들이 가질 상식에서 멀어진지 옛날이다. 하지만 만약 신인류가 태어나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미움을 받거나 외면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 아무리 라이트노벨이 웃고 즐기는 오락성 소설이라고 하나, 상당히 그런 의미부여는 매우 신선했다. 사실 신아와 휘정도 부모님과 사이좋게 지내며 살고 싶지만, 부모와 살면서도 그들은 부모라는 틀을 지나 그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조우하게 된다. 가족이란 작은 사회도 존재하나, 가족을 나오면 학교나 이웃이란 사회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받는 그들의 입장은 어떠한가? 작품을 보면 휘정이 여자에게 과도할 정도로 달라붙는데, 그것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사귀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서 특별하게 되고 싶어도 결국 모두처럼 평범하게 눈에 튀지 않고 같이 묻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신인류의 입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특별한 존재이지만, 사회에서는 특이한 존재로 되고, 모두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와 미지의 존재다. 따라서 신아 역시 친구가 없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고,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여 조종하는 능력에 은근히 이때까지 차별을 당한 보상심리가 담겨 있을 것이다. 결국 우월한 능력을 가진 것은 분명하나, 그 속성에 의해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차별되어 열등의식이 하나의 열등적 우월의식으로 변모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수의 존재는 아주 신선한 것이다. 안나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민수의 뺨에 뽀뽀를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안나는 민수를 무예나 신아처럼 좋아하기보다는 그저 감사의 답례 정도다. 그녀가 처음 기숙사에 와서 제멋대로 군 이유는 민수가 처음 안나를 보는 순간 신인류라는 존재를 두고 본 게 아니라 미국인이라는 것을 두고 본 것이다. 어설픈 영어실력으로 “헤, 헬로? 마, 마이 네임 이즈 주민수! 하, 하우 돌드 아 유? 아인 파인 땡큐..”를 안나에게 한 순간 안나는 민수가 신인류와 구인류의 차별하지 않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만약 신인류의 특이조건으로 안나를 대했다면 안나는 자신이 차별당하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물론 구인류들이 신인류 엔젤 안나에게 팬의 감정이나 혹은 미지의 존재로 여겼다면 민수는 호된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호된 고통이 있기에 무예와 신아는 질투의 펀치와 킥을 날리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 자리를 메우는 민수의 처지는 매우 안타깝다. 민수가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집이 사라진 것도 있지만, 어린 시절 무예와의 추어곧 그렇다. 무예와 보낸 시간이 하나의 생활 그 자체가 되었고, 신인류라는 이유로 무예가 당한 것을 다른 신인류 동급생에게 당하도록 원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비인류의 등장에서 민수는 그들은 똑같이 대해준다. 자신들이 가지지 않은 신기한 능력이나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보통사람이라면 모두 경계했을 것이다. 인간은 너무 지나친 자극을 주면 신경이 무디게 된다고 하던가? 민수의 상황을 보면 분명히 그의 신경은 매우 둔해져 있고, 그 이유로 계속 고생을 하고 무예에게 강렬한 타격이 찾아온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나?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처럼 신인류인 그녀에게 친구는 신인류 동급생과 민수와 설영이고, 민수 역시 친구들이란 신인류 그녀와 설영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재밌게 전재하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조금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어째든 신인류 안나와 수연을 돌아가도 비인류 니제르는 아직도 머물고,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 다행히도 니제르는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다른 신인류 여학생으로부터 라이벌의식을 두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한국에 남아있다는 전제 아래 4권에서 새로운 갈등과 재미를 주는 인자임은 분명하다. 전체적으로 읽어본 소감으로 등장인물 중에서 소청연의 역할비중이 매우 작다. 조용히 물마시면서 일광욕을 취하는 위그드라실은 오로지 따스한 햇살과 자연의 위대한 숨결이다. 물론 안나구출작전에서 상당한 활약을 보여줘도 작품 수면 위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3권에서 가장 기억나는 인물과 사건을 선택하자면 아마 니제르의 등장이고, 니제르가 학교에 온 것과 동시에 신아와의 갈등이라고 생각한다.게다가 니제르를 도와주기 위해 민수가 병원신세까지 졌다. 그런 인물적인 속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은 바로 3권 표지에 그려진 일러스트에 나온 니제르와 신아의 모습이다. 거기다가 칼라 일러스트 4페이지에서 니제르가 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본문에 흑백 일러스트 반이 니제르였으니, 글을 적는 작가와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분의 정성이 확실히 전해져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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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1458 2020-06-15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정이 대단하시네 진짜 정석이 있네요
 
중2병 데이즈 3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중2병 데이즈 3권>을 다 읽는 순간 이 책은 나름 실존주의적 혹은 개인에 대한 성찰을 위핸 만든 도서인 듯하다. 철없는 여동생 린, 흑련, 붕어빵에 빠진 슈, 바보 뱀파이어 루나를 아무리 살펴봐도 제 정신이 아니다. 그나마 제 정신보다는 그저 평범하게 삶을 살고 그냥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고 싶은 연오만이 한숨을 내쉬며 독백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러나 중2병 아이들에게 아니 진실로 중2병은 아니나 비현실적인 인생을 살아온 주변 인물에 의해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그렇다면 연오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이 작품 3권에서 연오는 자신의 선배에 대한 추억을 넘어 현실에서 마주치는 모습이 나온다. 갈까마귀왕이란 아명을 얻기 전에 그 아명을 지닌 남자, 조직에서 가장 무섭고 잔인하며 모든 것을 넘어선 남자 자오, 그는 사실 연오와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아니 연오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 연오는 자오의 복제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생명에겐 처음부터 의미가 있었는가? 살아있는 인간보단 억지로 만들어진 기계인간처럼 이들에게 평범한 삶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조직의 명령에 따라 마술사를 찾아 죽이고 죽여 그들의 눈에 모조리 시체로 되어 있을 때까지 미친 듯이 피스톨의 방아쇠를 당기고 장전한다.

 

여기서 선대 갈까마귀왕인 자오는 어느 순간 회의감을 느낀다. 연오를 두고 했던 말들, 뭔가 알 수 없으나 쓸쓸한 눈으로 미소 짓는 그 얼굴을 연오에게 살짝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연오와 자오는 둘만의 전투를 시작하고, 연오에게 패배한 자오는 자취를 감춘 채 사라진다. 그런 자오가 사라지고, 연오는 조직의 넘버원이 된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 연오는 그저 자오의 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가는 순간 한 없이 가슴속으로 허무함이 뒤따랐다. 과연 나는 이때까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하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느 한 서글픈 정치인이 저술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제목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숙제가 남아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의문과 숙제도 따른다. 산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의미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그 유한성에 따라 시간이 존재한다. 인간에게 시간이 없는 것이라면 무한의 정지된 시간이다. 시간적 존재가 되지 않기에 육체적으로 움직임도 없고, 정신적으로 생각을 할 수 없다. 그저 멈추어버린 우주공간의 진공일 뿐이다.

 

그래서 연오가 선택한 것은 린을 데리고 나와 조직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을 나오기 위해 조직의 일원과 마찰이 있었고, 생사를 넘어 평범한 남고생과 여중생이 되었다. 물론 전자는 현실을 적응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적응은 빠르게 되었으나 브라더 콤플렉스로 오빠라면 모든 것을 망각하고 달려드는 강박관념자다. 연오의 일상은 무엇일까? 평범하게 중2병 환자로 소문나서 학교에 가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고, 심지어 유튜브 영상 조회 10만을 거뜬히 넘은 인터넷 스타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스타가 되면 생계현황이 좋아져야 하나 오히려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식사 때마다 편의점에서 김밥, 라면, 햄버그로 때우다 점심 때 학생식당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연오에게 현실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인가? 그의 일상은 불과 몇 개월만 하더라도 양손에 잡고 있는 총자루에서 불을 내뿜으며 상대방의 생명을 태워버렸다. 그저 죽음을 주기만을 위해 태어난 킬링 머신, 그 킬링 머신이란 이름이 결국 자신의 일상이었다. 그가 선택한 일상은 진실한 일상인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상을 버리고 새로운 비일상을 선택해야 했다. 그런 몸부림이야 말로 연오가 눈부시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였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는 나에 의해 살아간다는 개인에 대한 성찰과 실존적인 자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과다 포장하여 억지로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던 만큼 자신이 인간이라고 느낄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길을 걷고, 이야기를 나누어 작은 것이라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자신이 작은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는가? 빛나는 순간은 늘 거대한 무엇을 손에 넣어야 빛이 나는 것인가? 물론 개인마다 차이점은 있다. 하지만 연오는 그 빛남을 알지를 못하나 손에 넣었다.

 

옆에 중2병 환자들처럼 이상한 녀석이나, 그래도 같이 웃으며 싸우고 같이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늘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는 것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오의 모습은 살인귀 갈까마귀왕 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성적 논리만 존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 불과하다. 마음의 감성이 들어가는 순간 삶을 진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 연오에 대해 자오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자오는 연오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랑을 할 수 있냐고 말이다.

 

자신 이외에 타인이고, 그것도 인간과 인간이 아닌 남자와 여자로서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냐고 말이다. 연오는 당시 살인귀가 되기 위한 시기였기에 그런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오로지 조직에서 실력 있는 인간 청소기가 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연오가 어느덧 사랑이란 달콤하고도 위험한 덫에 걸린다. 린이 조직에 같이 있을 때 연오에게 접근한 여자에 대해 처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 접근하는 여자는 마술사 조직에 속해있는 주술사들, 그 주술사들은 미인계로 조직의 남성을 유혹한다. 린은 유혹하려는 여자가 나오는 순간 모두 자신의 손에서 나오는 무기로 토막토막을 내었다.

 

오빠만 찾는 지독한 중2병 브라더 콤플렉스라도 일단은 일류 살인기계였다. 그러나 이번에 연오가 당한 것은 린은 눈치 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 채는 것이 불가능했다. 연오가 빠진 유혹의 덫은 마술사가 마술을 부린 것이 아니라 마술사가 여자로서 마술을 부린 것이다. 조직의 적인 마리가 이상하게도 연오의 선배인 자오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마리는 학교 안에서 최고의 미인에다가 성격도 운동도 학업도 뛰어난 미소녀다. 그런 미소녀가 연오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연오의 삶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없이 하늘을 날아가기 위해 날개 짓만 반복하는 작은 새처럼 보잘 것 없이 보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정말 빛이 나는 것이다. 마리는 그저 자신을 숨기고 맞추어 살아간다면 연오는 숨기지 못한 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점에서 마리와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피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 연오의 삶, 하지만 자오에겐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오와 자오는 분명 전쟁이 끝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쟁이 끝나는 것만을 생각하고 살인만 했지, 그 이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마술사 조직과의 전쟁도 끝난 상황에서 전쟁의 회귀는 불가능했다. 평화가 온 것이다. 손에 피 냄새가 나지 않고, 억지로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연오는 그것에 대한 생각에서 자오를 따라가지 않았다. 만약 살인기계로 태어난 자신들이 더 이상 살인기계로서 활동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복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을 때 행복해진다고 했다. 자신에게 있어야 할 공간, 아니 있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오는 스스로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살아왔던 그 공간과 흔적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조직이 없어지면 자신의 살아온 흔적이 무의미해지는 것이고, 자신이 싸우던 전장이 사라지면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의미다.

 

마치 그것은 전쟁터에서 지겨울 정도로 총탄을 피해 상대진영의 병사에게 총을 발사하고, 칼을 찌르는 군인처럼 전쟁을 끝난다고 해서 전쟁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전쟁에서는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저 골칫거리라면 그 평화 뒤에 오는 세상을 파괴하고 싶을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것을 부정한다는 것을 부정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인 논리에서 자신의 일상이 곧 타인에게 비일상이야 하듯이 자신이 살아갈 공간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일 것이다.

 

그것은 지배계급에 대해 피지배계급이 전복을 시도하는 혁명이 아니라 그저 힘이 있는 자들이 자기만의 세상을 가지고 싶어 하는 쿠데타다. 연오의 삶은 혁명과 쿠데타도 없이 그저 자신의 길만 찾아간다. 연오는 병기로서 지배세력이나 현실생활에서는 피지배계급에 가깝다. 학교에서 중2병으로 소문나고 맨날 동생과 주변 중2병 소녀들에게 휘둘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란 존재에 대하여 중2병 소녀들은 사람으로서 대해주었지 연오를 살인기계로서 대해주지 않았다.

 

그런 비일상 같은 일상이 자오에 의해 파괴당할 위기에 처한다. 연오는 날카롭게 살기를 띠고 있는 자오에게 이길 수 없었다. 자오가 가진 각오와 허무함에서 연오의 결심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의 목숨이 자오의 손가락에 의해 결정될 때,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것은 흑련의 정신없는 중2병적인 말투다. 중2병에 의해 살아가는 엉뚱함에서 결국 자신이 살아갈 공간이다. 일상과 비일상이란 2가지 선택지에서 한 가지만 아니라 2가지 모두 속하거나 혹은 속하지 못한 것이 연오다. 오히려 2가지 선택을 모두 가져간다는 3분법적인 선택도 있으나 물론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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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Q (30p 화보집) - 디지팩 + 화보집 + 아웃박스 + 띠지
안노 히데아키 감독, 하야시바라 메구미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다. 위대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만들고 그것을 비극 시로 만든 것은 소포클레스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보면 마치 이번 이카리 신지의 앞에서 나타나게 된다. 독일 사회경제학자 마르크스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하여 “역사적 사건은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말을 남긴다. 그 의미는 바로 신지가 저지른 그 비극의 씨앗이 이미 한 번은 비극으로 나타났는데, 한 번은 희극으로 끝이 난다로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를 보면서 내가 판단한 내용은 ‘You Can (not) Advance’라는 명제에서 신지가 과연 성장했는가? 혹은 하지 않았는가? 라는 변증법적인 질문이다. 이와 반대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는 ‘You are (not) alone’에서 결국 신지의 결말은 alone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Advance로 보였으나 그것이 결국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You Can not Advance’라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바로 신지에 의한 서드 임펙트의 시행이다.

  

 

미사토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레이가 사도에게 잡혀먹어 중간에서 고민하던 신지에게 자신의 길을 가라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신지에 대한 경멸의 눈빛을 감추지 못해 증오가 표출된 정도이다. 그것은 미사토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까지 신지와 레이, 그리고 초호기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이다. 신지에게 초호기를 비롯하여 에바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에바 자체가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의 몸과 영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에바와 달리 유일하게 초호기만 조종석이 LCL 용액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에바 시리즈는 LCL용액이 아니라 뇌파와 에바하고 연결하여 신경조직을 연결한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부터 시작하여 <신극장판 에반게리온>까지 사이버펑크 장르 유효성은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신지가 서드 임팩트의 원인과 결과이다. 신지와 초호기의 비밀을 아는 자는 이카리 사령관, 후유츠키 부사령관 그리고 리츠코 박사일 것이다. 그러나 서드 임팩트가 일어난 후 14년이 지나자 리츠코는 이카리 사령관을 떠나 Wille의 미사토와 합류한다. 즉, 리츠코 박사는 초호기와 신지의 비밀을 알았다고 해도 이카리 사령관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도 나오는 장면이고,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온 장면 중에서 레이가 영호기 테스트 중에 폭주를 일으키는 소동에서 리츠코 박사는 이카리 사령관이 레이를 소중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질투감을 느끼는 부분이 나온다. 심지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자기 어머니인 레이코에 대한 질투심과 그것에 대한 모방심리 내지 보복심리로서 이카리 사령관과 리츠코는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런 리츠코가 미사토의 Wille에 갔다는 사실은 기존의 에반게리온에 대한 관념을 모두 흔드는 것과 같다. 

 

신지가 우선 에바 초호기를 타고 레이를 구하는 순간 서드 임팩트로 이어지는 것은 결국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이카리 사령관과 후유츠키 부사령관이었다. 신지가 신으로 가는 것에서 레이라는 존재가 왜 나타나는가? 라는 의문에서 바로 고대 그리스 위대인 시인인 호메로스와 그리고 위대한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신화를 되돌릴 수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에게 버림받고, 추후 다른 나라의 왕의 양자로 들어가 신탁에서 아버지를 죽인다고 듣기에 자신을 양자로 받아주던 나라에서 떠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남자들과 시비가 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남자들의 일행 모두 때려죽인다. 그런 후에 테베이란 나라에서 심한 재앙에 걸렸는데, 몸은 사자 머리는 인간인 스핑크스가 인간을 괴롭혀서 만약 스핑크스의 재앙을 막는 자에게 테베의 왕과 더불어 이오카스테라는 미모의 여왕과 결혼해준다는 엄청난 조건이 따랐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 스핑크스를 처단하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놓는다. 게다가 지혜롭고 용감한 오이디푸스는 덕까지 겸비하여 정치적으로 매우 우수한 왕이었다.

 

 

어느 날 테베이란 국가가 자꾸 재앙이 걸리고, 흉년까지 겹치어 백성들이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이때 신탁을 받은 결과 어느 누군가가 천륜을 어기어 신이 노여움을 샀다고 한다. 만약 그 천륜을 어긴 자로 하여금 죗값을 받지 않으면 그 저주는 영원히 이어지게 되어 추후 테베이란 왕국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오이디푸스 왕은 그 저주의 원인을 찾다가 그 원흉이 바로 자신이란 사실을 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일행은 아버지 라이오스와 호위병이고, 여왕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탄로 나자 여왕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칼로 찔러 맹인이 되다가 영웅 테세우스의 인도 아래 숨을 거둔다. 하지만 저주는 남아 오이디푸스의 아들 2명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죽고, 그 여동생인 안티고네 역시 오빠의 시체를 장을 치르려다 죽게 된다. 신지의 죄는 바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윤리인 근친상간이란 죄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문명에는 자연적인 흐름을 거슬려 그것을 파괴하는 것에서 문화는 시작된다. 자연의 존재를 문화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 문명을 만든 주체적 에너지다.

 

 

그런데 그 노동이란 것은 현재 국가경제체계처럼 자본주의체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농경사회라도 존재했다. 농경사회는 중앙집권화를 이룬 왕권을 중시한 구체제적인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임금과 아버지는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임금과 아버지의 옆에 있는 어머니 내지 여왕을 노리는 것은 무서운 죄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지가 저지른 죄가 바로 근친상간의 시도라는 점이다. 아야나미 레이가 어머니의 분신조차 몰랐으나, 그래도 2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이끌린다. 신지의 초호기 탑승도 그러하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이카리 사령관이 다른 인간들은 에바초호기에 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LCL이란 용액이 어머니의 양수라는 점에서 신지는 에바 초호기가 곧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에바의 에너지원은 물론 코어의 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무한대로 이끌어내는 것은 에바와 조종사와의 싱크로 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 초호기 S2기관을 가진 이유는 에바초호기와의 싱크로가 400%이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도 필요 이상의 싱크로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생존본능 내지 투쟁본능과 같은 무의식적인 기질이 결국 에바초호기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지가 에바초호기와 높은 싱크로를 보여주어도 그것은 자궁 안에 있는 아들일 뿐이지 레이처럼 물리적인 육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신지가 레이에게 손을 뻗어 직접적인 성적 행위가 없더라도 여성의 육체를 지닌 어머니의 클론인 레이를 원했다는 것이다. 레이와 신지가 비로소 손을 잡아 하나가 되려는 순간 카오루가 보낸 롱기누스의 창에 의해 서드 임팩트가 불완전하게 끝이 난다.하지만 적어도 중요한 점은 신지가 하던 것은 인간이 문명사회에 의해 진행되어온 근친상간 발상을 무의식적으로 시도한 것과 인간의 욕망이 신화로서 구전되어도 그 신화적인 욕망을 하나의 사실로 만드는 순간, 신화는 현실의 터부에서 벗어나는 계율을 파괴한 것이다.

 

 

그래서 신지는 꿈의 세계에서 인정되는 신화를 현실에서 실재로 반영하려는 것이 곧 신화의 파괴, 질서의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그 질서의 파괴로 인해 기존 세계관은 파괴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오이디푸스왕과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관계가 결국 테베의 붕괴로 이어지려 했다. 신지의 그런 행위가 결국 14년 후에 깨어날 때 미사토를 비롯한 전 NERV 요원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미사토가 신지에 대해 증오를 하더라도 그 증오가 반드시 신지를 세상에서 말살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애증이 담긴 눈빛이었다. 신지의 목에 폭탄을 달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는데, 미사토는 새로운 복제 레이가 조종하는 “아담스의 그릇”에게 구출당한 신지를 그대로 보낸다.

 

 

일부러 멀리까지 가는 것을 보고 스위치를 눌러 굳이 신지를 죽일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신지에게 에바에 타지 말라고 권고한다. 미사토가 신지와 대립적인 관계인 NERV로 간다고 해서 미사토 자체가 신지에 대한 절대적 적대감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들은 아스카로 통해 알 수 있다. 아스카는 신지를 처음 우주에서 만날 때 “빠가 신지!”라고 한다. 정말 적이라고 여겼다면 그런 호칭을 아스카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사건에서 서드 임팩트는 비극으로 끝났으나 포스 임팩트는 희극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변증법적인 논리다.

 

 

카오루의 역할에서 만약 그가 희생이란 극적플롯이 없었다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의 개별적 역사적 사건에서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만약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End of Eva>에서의 나오코 박사와 리츠코 박사의 최후처럼 될 뿐이다. 나오코 박사는 어린 레이를 교살한 죄책감에 자살하고, 리츠코는 레이에게 질투심을 느껴 이카리 사령관 앞에서 NERV 본부를 자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카리 사령관에게 살해당한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리츠코는 미사토와 같이 있음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비극으로 피한다.

 

 

말 그대로 한 번의 비극이 두 번의 비극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작품에서 조금 특이한 점에서 인류보완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조금 나중에 다룰 부분이나, 인류가 리린이 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게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유이는 인간이 진화하여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예고편에 나오는 수많은 에바들은 결국 서드 임팩트로 통해 인류가 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진화하지 않은 것이 바로 리린이 아닐까 한다. 본래의 릴리스의 주변을 보면 수많은 에바의 유해가 있다. 그것은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서 리린의 왕은 이카리 사령관으로 나온다. 그가 한 것은 신의 죽음이다. 본래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기존 관념의 틀을 깨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해체주의 미학으로서 당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어머니와 초호기에 대한 비밀을 풀어간 것은 미사토가 추적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알게 했다면, 이번에는 후유츠키 사령관이 직접 신지에게 설명하여 그 비밀을 폭로한 것이다. 곧 작품의 진행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알게 만들어 작품 내에서 주인공에게 비밀이어야 하는 것이 이미 비밀이 아니게 만든 점이다.

 

 

그런 역할을 후유츠키가 맡고, 그것을 하게 한 것은 이카리 사령관의 인격의 불안정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신지가 NERV에 오고 난 뒤로 모든 시나리오를 관여하고 유도한다. 심지어 신지의 탈출과 더불어 카오루의 죽음까지 말이다. 카오루를 죽이게 금 유도하고, 그 카오루의 동일한 존재인 사도까지 죽이게 유도한다. 네메시스의 등장과 분더의 출동, 롱기누스 창과 더불어 한 짝의 창을 같이 뽑아야 하나, 알고 보니 롱기누스의 창만 2개만 있었다. 덕분에 신지는 그것이 어느 창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임을 부정하기 위해 혼자 뽑는 순간 카오루는 제1사도에서 제13사도 되어버린다.

  

이때 기존 작품과 다른 점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에서는 인류보완계획에 대해 죽음의 욕망이 아닌 삶의 욕망인 에로스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하여 신지가 지금의 세상이 다소 힘들어도 그래도 살만하다고 여기고, <End of Eva>에서는 모든 진화의 최종단계는 타나토스, 즉 죽음의 욕망으로 본다. 제레의 욕망은 바로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욕망이다. 하지만 이카리 사령관은 제레와 같은 시나리오를 가지기보단 유이가 가진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후유츠키와 같이 행동을 한다.

 

 

이미 죽은 유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자연의 모든 섭리, 혹은 그 섭리가 신이란 관념적 존재로 만들었다면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도구가 바로 에바 시리즈다. 에바로 통해 인간을 진화하고 신을 넘어볼 수 있는 위협성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죽이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신을 죽인 남자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신을 정말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이란 존재를 인간의 신화적 욕망에 의해 탄생했기에 그 인간이 가진 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리린의 왕이란 것에서 모든 권력적 힘이 이카리 사령관에게 있고, 그의 책략을 모두를 기만하고 속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른바 프로파간다라고 하여 군중심리나 유도로서 이카리 사령관은 자신만의 신화를 위해 모든 인물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희생되는 제물은 당연히 자신의 아들인 신지이다. 서드 임팩트와 더불어 포스 임팩트를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은 신지만 가능했다. 신화적 욕망에 의해 제물로 바치면 제의적 구조에 의해 신화는 은폐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신의 모습을 따라한 에바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은 별도의 세계관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주제는 ‘You Can (Not) Redo’이다. 이미 한 번의 비극을 겪은 신지가 다시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 결론은 다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제시될 뿐이다. 작품을 감사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신지의 손에 들린 워크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단지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기에 귀를 닫아주는 도구에 불과한 워크맨이 계속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주요한 아이템으로 나온다. 그것은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과 아들인 신지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도구다.

 

 

신지가 벌을 받은 이유와 죄를 지은 이유는 단순히 그가 오이디푸스왕이 저지른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만이 아니라, 레이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점과 같다. 신지가 왜 초호기와 싱크로가 0.00%인 이유는 바로 신지는 어머니를 따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 것이다. 마음속 깊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실생활에선 서로 꺼리는 모습이 나오나, 그 워크맨은 바로 이카리 사령관이 젊은 시절에 자주 사용한 물건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신지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물건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오로지 워크맨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야나미 레이가 워크맨을 잡고 신지와 결합하려한 점에서 신지가 아버지와 비슷한 인간이 되어 감을 보여주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도 역시 워크맨은 나온다. 워크맨을 잡던 신지는 수리 이후 계속 이용하나 에바13호기 파괴 이후 그 워크맨을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고, 그 모습을 복제 레이가 본다. 아마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나 레이가 그 워크맨을 줍는 것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레이는 완벽한 인형으로 나오나, 마지막에는 그 인형적 모습에서 탈피한다.

 

 

NERV 본부와 교신이 되지 않아 명령체계를 따르지 못하고, 그런다고 생존적인 조건에서 아스카와 신지하고 같이 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전개에서 가장 활약상이 뛰어난 인물은 미사토와 아스카다. 초반에 신지는 주인공의 역할보단 그저 보조에 불과하고, 전체 1/3에선 미사토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런 후에 신지가 탈출하여 2/3은 카오루와 관계, 최후 1/3은 NERV와 Wille의 전투로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기존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와 파>는 신지가 주인공으로 되어 신지를 바라보는 작품인물이 미사토였다면, 이번에는 미사토가 신지에게 바라보고 있음으로 나온다. 

 

그 외적으로 캐릭터를 보면 아스카의 설정이 돋보인다. 고양이귀를 상징하는 빵모자와 모자 앞면에 2개의 버튼이 달려있다. 하나는 해골무늬에 한쪽 눈을 가리는데, 그것은 자신의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 가지의 색이다. Blue, Red, White 이것은 분명 프랑스 국기를 의미한다. 실제로 그런 비슷한 문양을 프랑스에서 사용하고, 특히 1789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에서 프랑스시민이 모두 달고 다닌 마크와 유사하다. 딱히 프랑스대혁명과 아스카에게 프랑스 국기의 의미인 자유-Blue, 평등-White, 박애-Red의 요소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캐릭터에 대한 아이템은 기호학적으로 의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영상연출에서 돋보이는 것은 우선 초반의 우주에서의 신지와 초호기의 수거이다. 로켓엔진이 분사하는 모습은 여전히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처럼 매우 세심한 작업이 보인다는 점과 마치 실제 우주에서 물체가 유영하는 듯한 연출을 보이려 했다는 점이다. 기억이 또 남는 장면은 신지가 심리적 불안에 의해 괴로워하는 점에서 신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어지럽게 화상이 떨리는 부분과 신지를 중심으로 카메라의 회전으로 왼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walking-outside라고 하며,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그남자와 그여자의 사정>에서 사용한 방법이다.

 

 

또 다른 기법으로 서로 다른 화면이 겹치고 겹치게 보이는 프로몽타주 기법이다. 이것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오고, TVA 25~26회에서 신지의 얼굴에서 다른 영상이 계속 이래저래 바뀌는 모습이 나오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통해 이미지의 연출효과는 좋아졌으나 그 근본적 연출이나 혹은 시나리오에서 보이는 작품세계관은 기존 가이낙스로부터 크게 탈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든 생명의 진화는 멸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은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려면 기존의 모든 생명은 멸망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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