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 - 요희전기 1, Novel Engine
크레파스 지음, Mx2J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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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내 노벨라이트 출판사 중에서 시드노벨과 노블엔진에서 나온 각각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여 보았다. 우선 시드노벨에서 나온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와 그리고 노블엔진에서 나온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를 말이다. 두 작품을 비교검토해보자면 기본적으로 환타지 속성 갖고 있는 경소설로서 전쟁을 소재로 사용하여 어느 특정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그 시대적 흐름에서 헤쳐 나가는 하나의 영웅서사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단지 영웅의 서사에서 영웅이란 존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영웅보다는 오히려 반영웅에 가까운 존재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의 남자주인공은 용사의 손자이고, 현시대에 용사로 인정받은 자와 대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지 마왕으로 선발된 어린 소녀에 대한 입장을 생각하여 마왕소녀와 같이 행동한다. 이번에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에서 남자주인공인 흑록은 월하에서 태어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월하를 망하게 만든 화선의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화선이 월하의 저항군을 토벌할 때 같이 참전할 정도로 이율배반적인 인물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있어야 자리에 있지 않고, 오히려 반대의 자리에 있었다. 단지 차이점은 전자는 반대의 자리로 간 것이라면, 후자는 반대의 자리에서 다시 원래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유는 모두 한 소녀 때문이었다. 그 소녀는 너무 연약하지만 강한 마음을 가진 착하고 다정한 사람인 점이다. 마왕소녀와 월하공주라는 존재는 분명히 여왕과 공주라는 지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나약한 존재다. 그에 반해 그녀들과 같이 엮이는 남자주인공은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유사한 조건으로 남자가 편을 든 세력은 상당히 미미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에도 마족은 수많은 용사들에 의해 인간계에 침략할 생각조차 못하는데, 오히려 왕과 그의 군사들은 마족들을 토벌하러 온다. 토벌로 인한 제노사이드라는 학살극은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의 화선이란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용병까지 고용하여 철저하게 월하라는 국가를 넘어 월하라는 국민조차 멸살하려고 한다. 국가가 필요한 것을 생각하면 한자어 나라 국(國)처럼 땅 안에 인간이 있고, 무기가 있다.

 

국가라는 것은 결국 영토가 필요하나, 그 영토가 영토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영토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무기는 무기로서 존재하나 무기 그 자체로서는 무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만이 무기를 다루고, 인간만이 영토의 기능하도록 할 수 있다. 결국 국가의 기본은 결국 인간이고, 민족이 있으면 비록 영토가 당장 상실해도 다시 건립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혹은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에 의해 점령당한 프랑스도 역시 그렇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영토를 다른 누군가에게 박탈당해도 다시 그 나라의 국민이 있으면 국권을 찾을 수 있는 경우 나라를 세울 수 있다.

 

만약 한국인이나 프랑스인 모두 학살당한다면 그 나라는 복귀가 불가능하고, 또한 국가를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국가의 가치인 헌법이다. 헌법은 국가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상징이고, 현대 세계에서 민주주의국가에서 헌법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국가는 그저 독재국가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이번에 읽은 라이트노벨인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은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화선이나 월하나 둘 다 왕족이 통치하고 있으며, 왕족이 곧 국가 그 자체라는 군주정이 운영되고 있다. 군주가 있는 월하와 화선, 거기에 왕인 군주가 사라지면 그 나라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므로, 국가 그 자체가 국민의 것이라는 하나의 상징이라면, 군주정의 모든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왕이 없어지면 그 나라의 상징이 모두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 화선은 어떻게든 월하의 공주인 월영을 제거하고, 월영을 제거한 뒤에는 월영의 동생인 월린을 죽이려 한 것이다. 작품의 저자는 분명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작품에서 보이는 세계관은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와 같고, 기술력은 22세기 정도 되어 보인다.

 

융(戎)이란 병기의 특징을 보면 전자동 시스템에다가 조종사의 능력과 감정에 따라 자신의 기능을 올릴 수 있는 점과 게다가 레이저 광선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동력 에너지를 전자 광선으로 전환하여 병기로서 상용화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술력이다. 그래서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은 과거시대의 정치적 체계와 미래의 기술력, 그리고 의상은 서양과 동양의 혼합물이다. 의상에서 머리장식이나 옷감을 보면 분명 동양이나 오버니삭스의 착용이나 여자가슴이 아슬아슬하게 가릴 정도의 복장은 분명 한국의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크로스오버 내지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세계관을 생각해봐도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월하라는 국가의 정치적 체계가 그렇다. 우선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의 스토리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인상이 깊지 않아도 다소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는 이유는 한국의 고전적인 요소를 상당히 반영했다는 점이다. 라이트노벨만을 전문적으로 읽는 독자는 아니나, 이 정도 내용이면 최근 국내에서 나오는 문학소설조차 잘 다루지 않는 한국의 전통성을 다루었다.

 

시대적 배경이 삼국시대 이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정일치 사회라는 점이다. 군주는 하나의 왕으로서 통치자를 맡으나 또 한편으로 종교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제정일치의 군주는 왕이면서도 제사장이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월하라는 국가는 제정일치의 국가사회다. 한국의 제정일치 사회는 삼국시대 이전에 대부분 존재했다. 삼국시대에 초반에는 샤머니즘이란 무속신앙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으나, 지방호족 내지 신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들조차도 하늘의 자손 내지 신의 후예라는 상징성을 부여했기에 추후에 삼국시대는 불교를 정치적인 요건으로 반입한다.

 

작품은 불교 유래 전의 한국시대라는 점이고,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 천주교 유입되더라도 여전히 한국은 무속신앙적인 요소가 남아있다. 단지 불교, 유교 등이 기존 토속신앙과 융합되어 다른 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요소들이 국내 라이트노벨에 잘 등장하지 않았다. 예전에 만화책으로 나온 <사신전>에서 환웅(작품에서 “한”)이 호랑이족을 물리치는 내용이 나왔는데, 모티브로 따져본다면 환웅이 배달국을 만들면서 호랑이와 곰을 인간으로 변화하기 위해 동굴에서 근신하도록 했는데, 호랑이는 도망치고 곰은 남았다. 그런다고 실제로 곰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본다면 환웅은 우사, 운사, 풍백 등과 같은 농경문화를 주관하는 신하를 데리고 있는 점에서 호랑이는 육식이고, 곰은 잡식이므로 농경사회의 주요 식량인 쌀을 먹을 수 있는지 또는 없는지 로서 연합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우리가 보는 환타지세계의 전쟁물을 생각하면, 일상적으로 서양문화 유입으로 보는 것은 낯설지는 않으나, 정서적으로 이질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환타지 장르는 현실이 아닌 비현실이란 환상에 의해 진행되는 이야기나, 그 근원은 인간의 현실성을 기반으로 한다. 단지 일상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으로 통한 이성적인 영역이므로 평소 인지할 수 없지만, 분명 인간에게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 어디인가 숨어있는 깊은 심연의 공간이 존재하고, 그 세계는 결코 드러내지 못할 욕망이 살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단순히 인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조성되므로 욕망은 때로는 부러움과 질투, 시기, 억압과 해방이란 다양한 형태로 신화로서 태어난다. 환타지 장르를 보면 대부분 인간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존재는 현대에 있는 인간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살았던 인간도 상상으로 존재했던 존재다. 즉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관념에서는 그것이 반드시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한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물질적으로 존재해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된다.

 

모순적인 인간의 인식에서 존재성을 스스로 결정하기도 한다.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문구처럼 말이다. 작품은 그런 한국적 전통적인 문화적 요소들은 사용한다. 용병의 체계에서 갑을병정부터 이름도 흑록, 유하, 월린, 가람, 백경이란 한자어 내지 순수한글이 사용된다.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명사가 한자어를 차용하기에 대부분 한국어 한자로 된 명사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단지 여기서 가람이란 강(江)이라는 하천을 의미한다.

 

물론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와 더불어 동양적인 사상도 나온다. 동양철학까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주자학의 요소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는데, 퇴계 이황의 주리론과 율곡 이이의 주기론이 조선유학의 양대로 나오고, 조선 후기 당파구분에서 주리론은 남인으로 주기론은 노론으로 이어진다. 이(理)라는 것은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인간이 순행할 수 있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작품에서 백경이 만든 융을 탄 10명에서 8명은 모두 폐인이 되거나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지만 신이와 흑록은 무사했다. 8명의 사고자들은 모두 정상인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신이는 월영이 죽은 후로부터 정신이 죽었고, 흑록은 아버지가 죽고 나라가 망하며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서 정신이 죽었다. 흑록은 작품을 볼 때마다 삶의 의지나 목표가 없으며, 유하가 아무리 설득해도 마치 전쟁터에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일상에서 삶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나,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에서는 삶에 대한 의지를 찾는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관계다. 이때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찾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던 흑록에게 월영이 죽은 후 신이의 반응과 그리고 월린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문제는 백경이 만든 융이라는 거대한 병기는 의지가 살아있는 인간을 망쳐도 의지가 없는 인간은 망치지 못한다. 아무 의지도 없고 삶의 이유도 찾지 못한 흑록이 갑자기 월린을 지키는 이유는 자신에 의해 망가진 신이와 그 신이가 동경하던 월영의 이름을 지키려던 월린이 있어서이다. 월린은 겉보기에는 매우 몸매가 좋고, 머릿결은 마치 비단 같으며,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사용하는 마음 여린 소녀다. 하지만 그 여린 마음은 이미 상처받을 만큼 받았으며, 억지로 자신의 게슈탈트(쉽게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 그리고 심리)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월린은 월영이 죽었는지 혹은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실종되었는지 운명의 그날에 월영이 없어졌기에 자신이 월영이 만든 저항군을 조직하여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고, 사실은 언니의 죽음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무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날 언니인 월영을 죽게 만든 제공자인 흑록이 등장하고, 그는 월하의 백성이었으나 화선의 용병이 되어 앞에 등장한 것이다. 흑록의 등장에서 흑록이 월하와 화선에서 무엇을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이야기의 흐름은 결국 흑록이 월하의 기사가 되어 월린을 돕는 것이나, 한편으로 그는 월린의 제일 가까운 사람이고, 또한 그는 남자로서 월린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월린을 만나기 전에 화선의 용병시절 같이 활동한 유하라는 관제사다. 그녀는 본래 화선 왕족의 공주이나, 항상 암살의 위험을 받았으며, 용병으로 활동한 점에서 왕실 내에서 상당히 심한 배척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술에 취한 어느 날 흑록에게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서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왕족이면서 왕실을 뒤집어 놓는 혁명 내지 쿠데타를 일으킬 심산인 것이다.

 

하지만 유하는 월하의 포로가 되었다가, 화선의 공격을 막는 대가로 월린의 주인이 되기로 한다. 다시 화선의 왕실로 갈 수 없는 입장이 된 셈이다. 결론적으로 화선과 월하의 공주가 서로 같은 편이 되었고, 저항군은 소수의 군력이나 결국 월하를 화선으로부터 독립하여 군주국가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며, 최후에는 그것을 방해하는 화선이라는 국가. 그 국가 자체의 상징인 화선의 왕족을 제압할 수밖에 없다. 월린이 처음부터 타격이 된 이유는 마지막 왕족이고, 월하의 모든 백성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상징이었다.

 

흑록에겐 그런 상징성을 가진 자가 2명이 있었다. 월린과 유하, 유하는 처음부터 흑록이 무슨 이유로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도 오로지 흑록을 위해 활동했으며, 월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남자는 흑록이란 점과 흑록의 아버지가 월하의 장군으로 활약하다가 패배한 전쟁에서 전사한 점에서 애증적인 관계가 놓여있다. 월하의 왕족이 패배하여 흑록의 아버지는 죽고 흑록은 비참하게 살아야했고, 흑록의 활약으로 월영은 월린으로부터 떠났다. 삶에 대한 의지가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자신의 목적이 없어지는 것은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시체와 같다.

 

그래서 제목은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처럼 달의 공주는 월하의 공주인 월린이고, 죽지 않는 병기는 바로 흑록을 말할 것이다. 죽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물리적인 공격을 직접적으로 받으면 흑록은 사망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란 개념은 물리적인 개념보단 백경이 만든 융을 탑승 때의 흑록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범상치 않은 검정색 융을 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융은 살아있는 자가 어떤 의지를 품으면 그 의지로서 에너지로 기동하여 결국에 탑승자를 시체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살아있는 시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지 않는 병기라는 것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이다.

 

죽어있는데, 이제부터 죽지 않기 위해 죽은 자가 타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이유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은 월린을 위해서 말이다. 작품은 그렇게 서막을 알리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이 작품 역시 신화적인 요건을 잘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으나 주인공이 어느 누군가 혹은 선택하지 못해도 그럴 가능성은 있다. 참고도서로 계명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직 중인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을 참고하면 영화라는 것이 영상이라도 기본적으로 문학과 같은 문자서사와 같이 서사적인 요소를 갖춘 것으로 본다.

 

여기서 프로프에 의해 정리된 것에서 이야기의 31가지 기능 중에 1번과 31번이 인상이 깊다. 1번은 “가족 중에 한 명이 집에서 멀어진다.”와 31번 “영웅은 결혼하여 왕좌에 오른다.”이다. 흑록은 가족의 죽음으로 월하에서 떨어져 화선으로 온 점과 그를 좋아하는 유하, 유하가 라이벌로 여기는 월린의 삼각관계적인 구조에서 둘 다 공주라는 점이고, 누구를 택하던지 주인공은 왕좌에 오르게 된다. 월린은 마지막 왕족이고, 유하는 배척받은 외톨이 공주다. 물론 다른 선택지점 내지 그런 연애적인 요소는 미완으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행이 단순히 전쟁이라면 제목에서 달의 공주가 처음 나올 이유는 없다.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이란 제목처럼 월린과 흑록의 이름보단 하나의 칭호로 드러나기에 두 사람의 상징이 드러났기에 로맨스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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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 데이즈 4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중2병 데이즈 4권>은 지금 일어나는 일보단 지금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던 시리즈였다. 전에도 예상을 했지만, 흑련의 어머니가 조직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연오의 선배인 자오, 그리고 그 자오의 선대의 갈까마귀왕이란 사실을 인지했으나, 그것을 완전히 인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이란 모든 것이 현재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그 현재라는 존재적 구성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시간적 축척이 필요하다. 인간이 가진 물질적, 정신적, 심리적 조건과 재산들은 모두 과거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현재 자신이 어느 것을 소유한다고 하여 방금 1분 1초 만에 갑자기 태어나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1분 1초가 수 없이 쌓이고 쌓여 구성해온 하나의 시간의 축척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시간에 의해 형성된 자신이 결국 앞으로도 이루어질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순간적으로 바꾸는 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버리거나 혹은 그 이상의 반란을 일으켜야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혁명(revolution)이란 단어는 evolution에서 r의 단어가 붙은 것이다. 진화와 혁명에서 진화는 단지 그 자체적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혁명은 앞에 나가는 것을 위해 모조리 뒤엎는 것이다.

 

혁명이란 말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피지배계급이 무너뜨리는 행위로서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혁명일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반드시 그런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다. 혁명은 자기만의 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연오가 처음 기관에서 린을 데리고 세상으로 나온 것과, 한아가 임무를 수행하다가 흑련을 발견할 때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혁명적인 삶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생활을 깨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간부로서 명성을 날리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처럼 살아갈 것인가? 아니라면 조직과 기관하고 아무 상관없이 자기 자신은 오직 스스로 행동하기를 살아갈 것인가? 인간이란 어려운 존재다. 단순히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그것도 아직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는 중2병(물론 그들 나름 세계는 아니겠지만)들을 소재로 만들었으나, 여기에는 엄청난 숨은 의미가 있다. 작가인 김월희 씨의 작품 중에서 <세계 최고의 여동생님>을 읽은 후에 <중2병 데이즈>를 읽었지만, 라이트노벨이란 재미위주의 스토리텔링 안에도 그 어떤 담론이나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이번 편에서도 작가는 은근 어려운 말과 단어를 꺼내 놓는다. Meta-physics, 형이상학(形而上學)이란 단어를 언급했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도서제목이고, 거기에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요소를 탐구한다. 물리학인 자연과학을 의미하는 physics에서 meta라는 것을 어두에 붙임으로서 우리가 눈으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영혼이란 것도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던 플라톤이,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만들면서 철학을 연구했다. 그런데 인간에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있고, 육체는 소멸하나 영혼은 영원하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그런 후에 질료라는 단어를 제시하여 어떤 이데아로서 추구하는 형상 내지 사물에서 그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리적 도구(그러니깐 조각품을 만들기 위한 나무, 돌, 금속 등등)를 언급한 점이다. 린이 연오와 같이 임무를 맡으면서 심한 부상을 입자, 연오는 자신의 영혼의 일부를 린에게 부여한다. 원래 2사람은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니었고(아니 원래 인간이었는데, 개조되었는지도 모른다.), 연오의 몸은 기계로 된 골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에게 혼이 있다는 점이다. 혼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이고, 그것이 정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늘 의문이나, 우리(모두는 아니지만)는 신의 존재성을 있다고 믿는 관념적인 종교관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연오와 린에게 자신이 존재하는 삶이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육체는 소멸하나 영혼은 살아있다. 린에게 연오의 혼이 이식되자, 린의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단지 린이 연오에게 많은 애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을 인지했다. 그들은 친남매가 아닌데도, 린은 연오의 친남매처럼 느꼈고, 가족의 인연이란 육체적인 동질성인가? 아니면 영혼의 공유성인가?

 

중요한 점은 연오가 자신이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삶을 인지할 수 있게 된 동기는 린의 등장이다. 그녀는 아직 어리고, 세상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호위에 죽음을 면치 못할 부당함에 연오는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켰다. 만약 그런 계기가 없다면 계속 마술사킬러로 활동하다가 자기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조직기관 내의 임무일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행복할까? 형이상학이란 단어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읽다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그 인간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연오는 자신의 조직에서 갈까마귀왕으로서 매우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염없는 허무함과 공허감에 시달렸다. 그것은 연오 이전에 자오가 그랬으며, 자오 이전의 한아도 그렇다. 그래서 그들이 거기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시간의 축척만이 해결되지 않았다. evolution처럼 연오와 자오 역시 모두 진화했다. 신체적 능력과 경험이 없을 때에는 모두 초짜였으나, 어느 순간 킬러로서 진화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진화라는 시간적 축척에는 삶의 의미가 없었다. 다시 진화의 진화라는 반복에서 revolution이 되어야 했다.

 

그게 바로 연오의 고교데뷔이고, 한아는 기관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만약 연오가 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 한아가 흑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흑련과 한아의 만남은 최악의 사건이었고, 연오와 린의 만남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흑련은 한아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고, 린은 연오의 방패막이로 죽을 뻔했다. 죽음이란 극단적 상황에서 이들이 찾은 길은 죽음과 삶은 같이 붙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삶이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위기에서 삶을 찾거나 또는 삶을 주는 것이야 말로 이들이 택한 새로운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 택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바뀌어도 그 상황 자체가 좋아지거나 조금 더 희망적이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연오는 한아의 말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온다. 잿빛 투성이 세상,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자신이 발버둥을 쳐도 계속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그런 곳, 그렇지만 흑련에 대해 연오는 “언제까지고 세상이 반짝거릴 거란 믿음을 잃지 않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그 녀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게만 느껴졌다.”라고 생각한다.

 

찾을 수 없는 세계, 그리고 결코 닿을 수가 없던 세계, 예전에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라는 작품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 작품의 여자주인공은 경력이 오래된 영화배우이다. 작품 시작시점이 이미 머리에는 흰머리로 가득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져있지만, 왠지 모르게 우아한 기품과 따뜻한 분위기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은 배우였다. 그 배우는 자신의 첫사랑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결국 그 첫사랑은 형사에게 추적당하다가 결국 운명을 달리한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비보를 접하고도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를 향해 찾아가는 자신을 더 사랑했다고 말이다. 닿지 않은 것에 대해 하염없이 찾아가는 것은 왠지 슬프고 허무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닿지도 못한 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비효율적인 형태이며, 결국 그것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 물론 <중2병 데이즈 4권>에서는 그렇다고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아가 살해했던 흑련의 친부모가 고급마술사 아버지와 평범한 여성이란 점에서 그녀가 흑련에게 저지른 죄악은 흑련을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의 과거라는 시간에서 숨길 수 없다.

 

그래도 흑련에 대한 애정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보일 새로운 빛을 만들려 했다. 전에도 <중2병 데이즈> 시리즈를 리뷰하면서 인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언제인지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괴로움을 맛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적인 조건에서 그것을 눈치 채기도 어렵고, 아니라면 너무 그런 자신들의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려 떠오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결부지어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자신의 길은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중2병 데이즈 4권>에서는 그런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이야기해준다. 잿빛으로 가득한 세상에 그냥 그렇게 우리는 세월이 흘러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일까? <중2병 데이즈>에서는 우리의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거기에다가 연오가 처음 고교생활의 꿈을 준 <두근두근 스쿨 라이프>라는 왠지 미소녀 연애를 소재로 한 만화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참고로 작품 내에서도 그 만화책의 작가가 “정작 고등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 하지만 환상에 다다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연오가 자오를 존경하고 좋아했으나, 막상 자오를 뛰어넘어 갈까마귀왕으로 되는 것과 자오가 한아를 존경하고 좋아했으나, 막상 한아를 뛰어넘어 갈까마귀왕으로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인간이란 자신의 목적이 정해져 있어 어느 순간 되어버리면 자신의 목적이 없다.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 행복인지 아니라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그 길이 행복인지 어느 것이 정답일까 생각하기 어렵다. 적어도 연오나 자오나 그들이 동경한 자가 되기 전에 그들을 향하여 힘겹게 살아간 것은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했을 뿐이지 그것은 단 한 번의 과정이다. 두 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 처음 도시로 나와 추운 아파트에서 연오가 린과 서로 안아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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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1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1. 마왕과 용사에 대한 서사

마왕(魔王)과 용사(勇士)에 대한 서사적인 요소는 우리 인류의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마왕이란 거대한 힘을 가진 자와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는 용사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용사라는 존재로 통해 마왕을 물리쳐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을 부여한다. 용사라는 존재는 단순히 용기를 지니 자가 아니라 상당한 능력을 가진 존재다. 그의 존재적 가치는 모든 인류가 합하여도 이겨낼 수 없는 마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나 마왕과 용자의 관계에서 왜 계속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것일까? 우선적으로 내가 생각했지만,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에서도 마왕과 용사는 어느 한 세계를 패권을 다투는 존재다.

 

그들 중에서 마왕은 오래된 자고, 용사는 새로 나오는 자다. 마왕을 쓰러지면 그 세계의 패권은 용자에게 주어지게 된다. 용사가 주어지는 특권 중에는 왕이 되거나, 혹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종교적인 경외감을 받거나 또는 미인을 얻게 된다. 용사의 과업에 대한 성취는 하나의 서사로서 과업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한 숙제가 부여되었고, 단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위기와 극복이란 플롯이 배치함으로써 재미를 준다. 따라서 용사가 이미 마왕을 퇴치해야 하는 조건일 때 이미 극은 마왕은 죽거나 패배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마왕의 존재란 과연 용사에게 무조건 쓰러져야 하는 조연인가? 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마왕과 용사에게 등장하는가? 기본적으로 마왕은 40~50대의 남성이고, 용사는 10~20대의 남성이다. 즉 나이를 비교해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가 적당하다. 아버지가 가진 권력이 결국 아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되면 아들은 2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아버지의 권위 아래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는가? 인류학의 명저 중에 하나인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이나 혹은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이란 서적을 읽다보면 조금 다른 관점이 생긴다.

 

특히 <황금가지>에서 어느 남자가 나무 아래 칼을 잡고 살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지른다. 그는 결코 미치지 않았다. 그가 미친 듯이 발악하는 이유는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부족이나 무리의 우두머리고, 그에게 달려드는 자는 젊고 혈기가 왕성한 젊은 사람이다. 만약 그 자리에서 결투가 일어나서 우두머리가 승리하면 그는 오늘 목숨을 부지하여 권력을 유지하였음을 증명하고, 대신 패배를 하면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죽인 젊은 사람은 그 무리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어 언젠가 새로운 도전자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

 

마왕과 용사는 결국 새로운 권력자가 기존의 권력자에게 대항하여 생기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피하거나 혹은 새로운 승리자의 관점을 맞춘 것이라 볼 수 있다. 역사는 사실성과 객관성이 필요로 하겠지만, 적어도 역사가 기록되는 순간은 사실성과 객관성보다는 승리자의 초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최후의 왕국이던 조선에서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자이나, 이에 반해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고려의 무신이며 위화도 회군의 주역이던 이성계에 의해 망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왕의 존립과 기존의 왕이 사라지는 순간, <황금가지>에서 보인 기존 우두머리의 몰락과 새로운 우두머리의 탄생은 마왕과 용사라는 구조를 대입하면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라이트노벨에서 신화와 <황금가지>에 대한 요소를 대입하는 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일단 라이트노벨은 기본적으로 경소설이라고 하고, 만화책과 소설의 중간이라고 한다. 소설이 문학에서 나온 것이므로, 최초의 문학은 인간이 아닌 인간의 욕망의 대리인으로 내세운 신화(神話)라고 한다. 신화에 나온 신은 인간이 현실에서 드러내지 못한 욕망과 억압 그리고 숨어있는 무의식적인 요소를 내민다. 그런 점에서 용사와 마왕의 관계에서 마왕의 존재가 결코 좋지 않은 점은 여실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그리스신화를 들여다보면, 신과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우스의 가계에서, 제우스의 할아버지격인 우라노스는 자신의 아들인 크로노스에게 당하고,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들인 제우스에게 당한다.

 

그리고 크로노스와 제우스는 아들이 중에서 맏형이 아니라 막내였다. 막내가 아버지를 물리친 이유는 아버지가 자신의 패권을 자식에게 양보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죽도록 만들었다. 우라노스의 경우 자신의 아내인 가이아와 막내아들 크로노스에게, 크로노스는 자신의 어머니인 가이아와 막내아들 제우스에게 권좌를 빼앗긴다. 가이아의 경우 지구의 대지를 가리키는 여신으로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남근을 벨 때, 가이아가 준 것이다. 즉 가이아는 자연의 흐름이고 인간은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남성의 존립성에서 권력을 다투는 것은 문명의 세계가 자연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문명도 자연의 흐름에 따라야 하는 점이다.

 

마왕과 용사의 이야기는 결국 새로운 세계를 제패하려는 젊은 사람의 영웅담이다. 그리고 그 영웅담은 신화적인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아버지를 대신 아버지를 차지하려는 아들, 하지만 차지하더라도 기존의 남은 사람들은 계속 남아있어야 하므로, 용사에게 항상 마왕이란 아버지를 응징할 수 있는 명제가 필요했다. 라이트노벨에도 마왕과 용사의 대립은 최근까지 계속 나오는 주제이다. 그렇다면 마왕과 용사의 관계가 지금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마왕과 용사는 반드시 둘 다 남자이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마왕과 용사는 모두 남자인 것이 20세기 전까지의 흐름이었다. 마왕이 여자로 변하고, 용사도 심지어 여자로 되어 나온 점은 그래 오래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만약 여자와 여자라면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드러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다면,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드러낸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마왕과 용사가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이런 요소가 해체되어버렸다. 라이트노벨 내지 만화 등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마왕용자 마오유우>, <알바 뛰는 마왕>,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를 살펴보면 기존의 마왕과 용사관계가 전혀 다르다.

 

이들의 용사와 마왕에서 2사람 모두 젊다는 것과 2사람 다 같은 성별이 아니다. 오히려 <마왕용자 마오유우>와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는 용사와 마왕이 적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연모하고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기존의 관념에서 절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관점이 바로 마왕과 용사가 서로 동맹하거나 화합을 하는 것을 지나 연애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런 발상은 다양한 관점이 있으나, 용사와 마왕의 관계가 어느 한쪽은 일방적으로 승리를 하고 다른 한쪽은 무조건 패배해야 한다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그런 설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던 시절부터 있었으며, 특히 중세유럽의 경우 십자군과 같이 기독교(가톨릭)문화와 이슬람문화의 충돌이 있었기에 신의 가호를 받은 용사, 그리고 그것에 반대되는 자들은 응징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한 용사에 대한 이야기는 20세기 까지 이어져 왔으며, 개인적으로 마왕과 용사의 이분법적인 관계가 해체된 것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다. 용사가 가는 마왕의 영지는 위험이 천만하고, 정보가 전혀 없는 미지의 세계다.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는 용사가 바로 세계를 구한다는 점이다. 용사가 검이란 것은 하나의 상징이며, 검은 다르게 해석하면 남근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을 단순히 신체적 조직보다는 사회적 권력으로 볼 수 있다. 남근이 검이라고 보는 점에서 검은 결국 무기이고, 무력을 가진 존재로 볼 수 있다. 강력한 무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용사, 그렇다면 용사나 마왕이 하나가 여자라면 어떻게 되는가? 서로 충돌하게 되면서 이성으로 보게 된다는 조건이 성립된다.

 

3.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는 마왕은 장수족인 인간형 마왕인 루리는 이제 막 마왕의 직함을 받은 존재이고, 용사로 새로 직함을 받은 린은 여자인데도 용사가 된 사람이다. 이때까지 48회까지의 용사들은 모두 남자로 뽑혔다. 이제 새로 등장한 용사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엘렉트라 콤플렉스처럼 어머니와 딸의 적대관계는 형성되어야 하는 것인가? 문제는 이제 마왕이 된 루리나 용사가 된 린은 서로 자신의 권위를 위해 싸우기가 애매모호한 조건이었다.

 

마왕의 외모는 겉보기에 8~9살 정도의 어린아이, 물론 기본적으로 마족이란 점에서 보통 인간보다 강한 육체적 조건이나, 용사나 용사의 동료, 심지어 대회에 나간 후보자에 비해 열등하게 약하다. 루리가 처음 마왕성을 나와 인간계로 온 이유는 자신의 세력들이 너무 약하고, 마족 중에서도 자신의 위치가 약한 편이란 점이다. 마왕의 선택은 강력한 힘에 의해서 결정되나, 오히려 제일 약한 사람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용사는 린이란 개인적 조건으로 본다면 전혀 두려워할 수 없고, 단지 린보다는 마왕이란 정치적인 권좌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의 주인공이면서도 독특한 길을 선택한 론을 살펴보자. 론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도전한 용사대회 48회 우승자이며, 40년 전의 마왕을 죽인 최강의 용사다. 게다가 당시 용사와 동료들은 너무 강한 힘을 지녔기 때문에 마왕군은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소멸했다. 론이 나올 쯤에는 마왕군은 세력이 이미 쇠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론이 살고 있는 대륙에 인간세력이 30%, 마족세력 10%, 둘 다 속하지 않은 몬스터들이 60%이다. 이미 마족의 세력은 쇠약하여 더 이상 인간에게 대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론이 린과 같이 마왕성을 찾아갈 때 마왕성처럼 보인 돔을 찾아 주변에 이종족이 있는지 확일 할 때 반경 7㎢ 내외로 이종적이 검출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마족의 세력은 쇠퇴한 것이고, 마왕이라고 여기던 문지기마저 용사일행에게 처치된다. 그러면 48회 용사의 손자인 론은 자신이 목표로 하던 용사와 마왕처단이 처음부터 엇갈린 길이었고, 심지어 자진하여 마왕의 간부로 등록되기를 선택했다. 앞선 용사의 후손에 강한 힘을 가진 론이 인간이 아닌 루리를 선택한 이유에서 이미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는 공식처럼 여긴 용사와 마왕이야기가 아닌 점을 명백하게 해준다.

 

론이 억지로 마왕이 된 루리를 도와준 이유는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내지 상식 또는 도덕에 대한 절대적인 관념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족은 무조건 나쁜 종족이고 토벌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오히려 마족이 나쁜 존재로 알았지만, 실제로 알고 보니 아니라는 점이다. 루리는 남에게 겁을 주거나 위협하기는커녕 눈물이 많은 어린아이였고, 자신이 좋아하는 루나라는 언니를 감싸기 위해 대신 마왕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너무 어린 육체에 힘까지 약했기 때문에 인간세계의 왕에게 평화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결국 상대방이 어느 것에 묶여 있는 것보다 상대방 그 자체로서 대하였기에 론과 루리는 친구가 된 것이다. 용사를 꿈꾸던 론이 살던 세계는 왕과 귀족이 존재하는 봉건주의 국가이고, 그 세계에서 왕은 48회 용사인 론의 할아버지와 동료였으며, 그 업적으로 통해 왕이라는 직함과 권력을 손에 넣었다. 용사의 동료라는 점에서 왕은 상당히 국민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었으며, 왕의 명령 아래 마족토벌과 마왕처단은 모든 국민들을 하나로 모우는 명제였다. 그리고 용사를 뽑는 대회는 그 나라의 매우 성대한 축제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왕은 인간세계에서 최고의 적이고, 마왕을 잡는 행사가 왕과 귀족들의 지배계급으로서 위치하는 것이 하나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의례와 같다.

 

결국 왕과 귀족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용사대회로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용사의 후손이 마왕을 돕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용사후보자인 론은 요사가 아니게 되나, 다른 관점으로 용사가 되어야 했다. 이데올로기로 통해 적용되는 사회의 도덕관념은 어느 대상이나 행위에 대해 윤리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도덕관념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도덕관념은 실제 그것이 잘 되었는지 혹은 못 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는 것으로 잘 되었었거나 못 되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론이 그 도덕관념에 의해 충실하게 반응했다면 마왕소녀인 루리는 이미 론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칼은 루리의 목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루리의 목을 향하여 오는 것에 대해 반격하는 것이다. 칼이란 것은 강력한 무력을 의미한다. 세상의 적인 마왕대신 세상을 적으로 돌린 론의 모습에서 언젠가 론의 최후의 적은 할아버지의 동료이던 왕이란 점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론의 가계와 그리고 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정치사회적인 요소로 통해 론과 할아버지의 관계를 보면 분명 용사는 40년에 1번을 뽑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40년마다 1번인가? 물론 40년에 1번 나온 용사는 그 마왕에 대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용사가 40년에 1번이란 점은 론의 입장에서 분명한 의미를 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용사이던 론의 할아버지가 론에게만 용사교육을 시켰지만, 론의 아버지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주변에 이런 말을 듣는다. “손자와 할아버지는 친구가 되어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고 말이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은 아니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권좌를 놓고 다투어야 한다. 론의 아버지가 용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평범한 포도밭의 농부로 살던 이유는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아들이었기에 48회 용사이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 아버지를 평범한 인물로 길러야 했다.

 

만약 아버지가 용사교육을 받는다면 론의 할아버지는 론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자리에 대해 압박을 받을 것이고, 또한 론이 론의 아버지가 용사로 되었다면, 자신이 굳이 먼 길을 떠나 용사대회에 참가할 이유는 없다. 보통 용사들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없거나, 있어도 살해당하거나 은퇴하거나 또는 행방이 묘연한 경우가 많다. 아버지가 지나치게 명성이 높으면 아들인 용사는 활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40년의 용사대회의 개최란 바로 할아버지-아버지-아들이란 3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용사탄생의 딜레마가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 왜 인간들은 마왕을 제거하고 마족을 토벌하려는 것일까?

이미 48회의 용사와 동료들은 마족들이 다시 재결성하는 것을 매우 힘들게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주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마족에 비해 매우 짧다. 주인공인 루리는 80~90세를 살았지만, 외관은 아직 어린 소녀에다가 힘이 약한 것은 이미 밝힌 바이고, 루리와 가깝게 지내는 다른 마족도 나이가 매우 어려 보인다는 점이다. 심지어 루리의 언니인 루나조차도 200세 가까이 되는 나이지만, 루리와 매우 비슷한 외모를 지닌 점에서 아직 어린 소녀로 나오고, 론에게 선물을 주는 마족 역시 매우 어린 아이들이었다.

 

결국 48회 용사대회 이후로 마족들 중에서 전투력이 제법 높은 마족들은 모두 사망할 가능성이 높으며, 마족이 더 이상 인간에게 대결할 이유도 없으며, 특히 인간과 마족의 경계 사이 분포된 몬스터들도 마족의 밑이 아니기에 마족이 억지로 인간세계를 침범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론과 린의 일행들이 마왕성을 찾아 떠날 때 어느 작은 마을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 붉은 여우 일족이 사는 마을이 모두 폐허로 변한 것이다. 살아있는 생존자는 전혀 없고, 모두 해골이란 비참한 모습만 나타났다. 게다가 어느 해골은 어린아이 것으로 보일 정도로 왕이 보낸 군대는 매우 잔인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멸망한 이유는 과거 마왕에 협조한 것과 보통 인간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것이었다. 환영을 만들며, 다른 종족의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을 말이다. 그런다고 하여도 모두 죽일 이유는 없다. 그러면 왜 이들은 죽어야 하는가? 왕은 이미 48회 용사대회 이후 마족들의 전력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49회 용사대회를 열어 용사가 등장해도 그 용사가 마족을 쉽게 쓰러드릴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용사대회는 인류의 멸망을 결정하는 대회가 아니라 오히려 갖은 정치적 이권과 경제적 이윤이 오고가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용사가 여자이고, 상당한 미인에 화려한 의상을 입은 점으로 상인들은 어떤 전략으로 장사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며, 용사의 인벤토리 안에 담긴 물품들은 각종 스폰서가 제공한 것들이 있었다.

 

그 제품들은 겉으로 듣는 것과 달리 효용이 뛰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면 용사대회는 결국 진짜 인류를 구하기 위한 인류의 대표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구경거리로 되었을 뿐이다. 또한 용사대회는 하나의 의례이고, 국민들을 하나로 모우는 행사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마족의 토벌과 마왕의 처단만을 생각하지 그 이상에 대해 생각하지를 않았다. 그것을 알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건 서머너인 티나를 보면 알 수 있다.

 

티나는 본래 전쟁고아로 갖은 고생과 위기를 겪은 여자다. 그녀가 솔직히 건 서머너로 활동하면 자기 자신의 생계를 충분히 즐기고도 남을 수익이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도둑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도둑질을 하고, 보물사냥꾼으로 활동하는 이유는 자신처럼 어렵게 살고있는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고아들의 형편은 말도 안 되게 처우가 열악했고, 자신이 어린 시절 힘들게 살아온 것처럼 고안들의 미래에는 좀 더 좋은 세상을 살기 바란 것이다. 그녀가 훔친 보석들은 모두 고아원에 보내져 운영비로 사용되었다.

 

결국 인간세계는 마왕이 없더라도 혹은 마족이 날뛰지 않더라도 계속 인간세계에는 분쟁으로 인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 덕분에 아무 힘도 없이 고통 받는 고아들이 계속 늘어나는 점이었다. 전쟁에 의한 살해도 문제지만, 살아남는 것도 문제인 것은 역시 생계수단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 많은 전쟁고아가 발생하여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자체가 왕과 정부를 두고 생각해보면 내정이 바르지 못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티나를 가르친 스승 역시 이상한 계약서를 쓰게 하여 티나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마족만이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악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티나의 스승은 상당히 실력이 높은 건 서머너라고 한다. 그 자에게 재물을 훔쳐도 금방 재물을 쌓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분명 도둑질은 범죄이나,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티나의 개인사정과 사회구조에서 왕이 다스리는 세계란 과연 용사의 동료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활약한 용사의 동료로서 정의로운 지도자인가에서 대답은 NO로 갈 확률이 높다. 이미 붉은 여우 일족의 죽음에서 상당히 높은 영력을 갖춘 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악령이 된다고 한다.

 

악령이 되어 마족, 인간, 몬스터에게 해를 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악령이란 악적인 존재가 된 것은 정말 악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부당한 고통에 의한 증오였다. 용사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구원의 대상은 자신이 속한 인간일까? 아니면 그 이상인 것인가? 용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더 이상 용사라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용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용사가 존재하는 세계는 매우 어려운 일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용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세계가 어려운 일들이 있기보다는 어려운 일들을 계속 유지하거나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다시 정리하자면, 용사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성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이고, 그 뒤로는 갖은 이권과 이익을 나누는 부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마족을 토벌하고 마왕을 처단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하나의 정당성을 갖추기 위한 수단으로 최고의 책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기존에 살고 있는 영역을 넘어 계속 넓히려고 한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 거주지와 농경지가 필요하고, 기존의 인간세계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5. 용사와 마왕 세계에서의 자연과 문명

기본적으로 마왕이 살고 있는 곳은 미지의 세계이며, 그곳에는 누가 있고, 어떤 위험이 있는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거기는 인간이 아닌 마족과 몬스터가 항상 인간을 위협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이 미지의 세계에 침범하지 않으면 이유 없이 마족과 몬스터들이 인간세계 올 이유는 없다. 결국 인간의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다른 세계와 충돌하게 되며, 그것은 결국 전쟁 내지 재해로 이어진다.

 

마족과 몬스터 중에서 특히 몬스터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고, 매우 사납고, 덩치도 큰 맹수와 같은 존재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인간세계와 마족세계가 아닌 곳에 많이 살며, 때로 마족에 의해 조종되기도 하나, 대부분 자연의 상태에 존재한다. 그리고 마왕을 찾으러 가던 린, 스팅은 자신들의 가문이 매우 부유하고 드높은 귀족집안인 점을 이용하여 마족과 몬스터들이 거주하던 곳을 자신들의 새로운 식민지로 개척하려고 한다. 결국 마족과 몬스터들의 제압은 단순히 인간세계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과 같이 연결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와 동료들이 임무에 성공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물품들에 대해 일반 사람들은 많이 구매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스폰서해준 상인들은 이익을 본다는 것이다. 린과 스팅이 그런 식민지 건설에 관련된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티나는 보물을 탐내는 사냥꾼이다. 인간세계에 보물은 존재하기 어렵다. 이미 보물은 누가 소유하여 자신의 재산이 되었기에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직접 돈으로 구매하거나 아니라면 법을 어겨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낯선 곳에 가서 보물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단지 발견한 사람의 것이다. 옛날 유럽에서 황금의 섬을 찾아 모험가들이 떠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보물은 본래 발견해서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왕성에 찾은 보물은 본래 마왕 내지 마족의 것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뺏은 보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것을 그렇게 장식한 것이란 점이다. 마족에게 마족만의 문명이 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새로운 자연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 문명의 도래는 결국 정복이란 이름 아래 실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론이 이미 마왕의 정체가 아무런 악의도 없는 연약한 소녀라는 점이고, 그들은 더 이상 인간과 전쟁할 여유나 의지도 없는 평화로운 자였다. 그런데도 강자의 입장인 인간들에게 마족은 역시 두려움과 제거의 대상이다.

그것은 그들은 정복되어야 할 대상이고, 그 정복에서 마족들은 인간에게 해롭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임을 인간세계에서는 도덕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도 이미 기존에 많이 나온 마왕과 용사이야기와 같이 그런 이분법적인 요소를 해체한 작품이다. 언제나 정복되어야 하는 세계에 있는 마족이 인간의 문명(자연의 파괴, 용사도 인간세계에서 문화의 하나)이란 거대한 파도 앞에 용사가 되어야 하나 용사의 길을 벗어난 용사 론에 의해 좌우되는 점에서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여 더 이상 착취하지 못하면 인간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미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는 그런 모습이 전쟁으로 나온다. 전쟁은 문화의 충돌과 인류문명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6. 작품 내의 캐릭터 및 설정에 대해

작품을 읽다보면 상당히 세계관에 많은 설명을 넣고 있다. 용사대회에서 용사와 동료로 뽑히는 자들의 직업이나, 무기체계와 마법체계까지 말이다. 특히 요정에게 오리진을 제공하고 사용하는 마법의 종류와 레벨에 따라 분류되는 요소는 매우 상세하게 배치했다. 작가의 블로그를 확인한 결과 예전에 게임을 제작한 것으로 보아 던전장르를 바탕으로 하는 게임을 만든 것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라이트노벨을 게임세계관을 적용하고, 캐릭터들도 그에 맞추어 직업과 속성에 따라 장비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개인적으로 캐릭터 설정에서 판단하는 것은 여자주인공인 린과 티나에 대해서다. 이들은 히로인적인 요소와 더불어 용사일행에 속하는 인물로서 상당한 미인에 좋은 몸매를 가진 여성으로 나온다. 의상을 보더라도 다소 노출이 높고, 대부분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작품 내에서 린이 일어날 때 가슴의 크기에 상의의 단추가 견디지 못해 뜯어져 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로서 전형적인 던전 게임에 나올 만한 인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중에서 특히 린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작가가 남자라는 점, 그런데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은 여자라는 점이 독특한 배치를 만들어내었다.

 

유명한 게임을 애니메이션과 만화로 만든 <Fate Stay Night>란 작품에서 주인공 세이버는 아름답고 매우 강력한 여성으로 나온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리스신화에 등장한 아테나와 같다. 물론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린도 아테나와 같이 매우 강하고 아름다운 인물로 나온다. 그리스신화에서 아테네는 아버지 그리스의 머리에서 나온 여신이며, 신화학에서 아테네는 아버지인 제우스, 즉 남성의 머릿속에 나온 여신이기에 그녀는 남성의 무의식적인 욕망에서 완벽한 여자로 등장한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의 린의 모습을 남성의 이상형적인 요건들을 잘 가지고 있다.

 

물론 작품 내에 등장인물에 대한 모에요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일러스트가 중요하냐면, 작가의 글에서는 여자의 가슴을 상당히 많이 신경 쓴 것이 보인다. 기록지를 가지던 황녀나 용사나 모두 가슴에 대해 본문에서 강조하는 느낌이 강했다. 일러스트로 확인해 보면 작가의 의도대로 린과 티나의 가슴은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가 여자라는 점에서 역시 골반이 넓게 그려져 있었고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면 매우 세심한 디자인이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골반의 넓이를 생각하면 마왕인 루리는 줄이는 게 조금 맞는 것 같았다. 9세이면 아직까지 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생식기에서 생식기 즉 제2차 성징이 도래하지 않았기에 비율이 조금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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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06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성실한 리뷰에 공감하나 없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만화애니비평 2014-03-06 19:25   좋아요 0 | URL
작가가 자신의 라이트노벨을 보고 리뷰쓴 사람에 대해 선정하여 2번째 것을 준다고 하여 응모 겸 리뷰 적었지요. 뭐 안 되고 상관 없지만, 오덕이란 무릇 진지해야 하는것이죠..ㅎㅎ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마법소녀라는 관념을 생각하자면, 1999년에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발간된 <일본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 중 박인하(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 교수)의 ‘일본애니메이션 장르 연구 -마법소녀 물을 중심으로-’를 참고하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소녀들은 소구대상으로 한 마법소녀물은 현실세계에서 소녀들을 괴롭히는 수많은 제약과 한계들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소년들이 로봇만화를 통해 권력과 힘에 대한 대리만족을 경험하는 것처럼 소녀들은 마법소녀들을 통해 변신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켰다. 학교나 가정에서 성적차별에 시달리는 소녀들은 꿈을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되고 싶어 했다. 꿈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평범한 현실의 소녀에게 ‘힘’을 소유하는 소녀가 되고 방식으로 마법소녀물은 ‘마법’과 ‘변신’을 제안했다. 소녀들은 그 유혹을 받아들였고, 마법소녀물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마법소녀라는 것을 정의하자면 현실에 있는 소녀들이 자신의 힘으로 현실을 타파할 수 없으므로 마법소녀라는 힘을 얻어 결국 변신과 마력으로서 해결한다. 마법소녀들은 일반 소년만화처럼 “공적인 영역”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문제를 해결하므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착한 일”에 대해서만 가능했다. 결국 이런 부분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여성의 능력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환상은 아직 어린 소녀이기에 어른이 되면 해결이 가능할 것이란 착각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마법소녀물은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예를 들어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이나 <마법의 프린세스 밍키모모>의 경우 단순히 변신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전자는 실루엣 뒤편으로 보이는 누드가 남성에게 성적인 호기심과 환상을 제공하고, 밍키모모의 경우 어린소녀가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 성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마법이란 여성의 신체의 변화를 의미하고, 그 변화는 아직 어린 소녀가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인 능력을 스스로 가지기를 바란 게 아니라 우연의 행운을 바라는 점이다.

 

이번에 읽어본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기존에 등장한 상식을 깨고 나온 작품이었다. 이때까지 마법소녀물들이 제시한 담론과 규칙에 대해 완전히 해체하고, 대신 새로운 모습으로 나왔다. 물론 마법소녀에 대한 공식에 대해 해체적인 요소를 지닌 것은 사프트사의 신보 아키유키 감독이 제작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이었다. 마법소녀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거나 혹은 선이 아닌 악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진정한 악과 선의 차이는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작가인 온점의 글을 보고 난 후, 나는 작가가 그렇게 많은 철학적 지식이나 사유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직 1993년이란 점과 책을 2014년에 구매한 점에서 그의 나이가 이제 스물이 될 정도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이란 라이트노벨을 저술했을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그의 서적에 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저술한 내용에서 나는 분명 그가 깊은 철학이나 사유가 없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던 것이다.

 

철학자와 철학자가 저술한 철학적 사상을 이해해야 철학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존의 철학자란 세계의 단지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므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 대해 철학적인 요소로 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미 여기서 철학적 요소는 등장했다. 왜 마법소녀가 그렇게 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하춘식은 왜 변신을 꺼리는지, 악이란 정말 무엇인지 등등을 말이다. 작가 분에게 그렇게 깊은 인문학적 배경이 없다는 것은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히로인이 분명 하춘식이어야 하나, 막상 표지의 일러스트에서는 주인공이란 인물이 히로인처럼 나온다.

 

주인공이 하춘식이 다니는 학교에 잠입하기 위해 의상을 구하는데, 이때 교복이 제일 좋았다. 교복을 입을 때 그는 남자이나 남학생 교복이 아니라 여학생의 교복을 입었다. 여학생의 교복을 입을 때 그의 ‘가느다란 허벅지와 종아리가 하이라이트’란 부분이다. 인체해부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키와 몸무게 조건이 같다면 누구의 다리가 날씬하고 각선미가 좋은가에서 남성의 다리가 훨씬 좋다. 여성의 골격구조는 골반이 기본적으로 넓기에 가느다란 허벅지와 종아리가 나오기가 어렵다.

 

여성의 다리가 일자형이 되는 것은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란 무의식적 조건 즉 아니마라는 심리적인 요소에 의해서다. 그런 성적인 담론에서 이 라이트노벨의 재미요소를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처음 표지를 본다면 그것도 아무런 정보를 모른 채 단순히 출판사의 소개만 본다면, 하춘식이란 인물은 몽둥이리를 들고 드레스 복장으로 웃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그 뒤에 부끄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이가 악의 조직에서 활동하는 중간보스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이것은 단지 반전을 노린 것을 알게 된다.

 

마법소녀라는 여성이 오히려 남자 같고, 악의 조직의 중간보스인 남성이 오히려 여성 같이 보인다. 실제 말하는 투나 행동 역시 서로 간의 정체성에서 이탈했다. 생물학적인 성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나, 외부로 보이는 이미지는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특히 주인공이 일하는 가게에서 많은 남자 손님들이 주인공의 외모를 보고 오고, 같이 일하는 선배도 주인공이 여자가 아닌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외적인 외모로도 남성성의 면모가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의상까지도 그렇다. 주인공의 의상은 체육복, 그러나 진짜 평상시의 의상은 여학생 교복이었다. 일하고, 살림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은 사회적인 여성적 모습까지 보인다.

 

이미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이란 제목부터 이 작품은 기존의 마법소녀물을 해체했다는 의미를 잘 알게 해준다. 마법소녀가 언매지컬이란 사실은 피지컬이란 의미다. 현실의 소녀가 환상으로 통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운에 의해 해결한다는 게 아니라 오로지 현실적 조건이란 점에서 새로운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면 마음속의 봉인을 스스로 푸는 장면에서 마법소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모습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마법소녀보단 차라리 사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마법소녀란 무엇인가? 마법소녀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 하지만 정의라는 것은 안타까운 것이 있다. 정의는 결국 어느 쪽의 관점과 입장, 그리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흔히 언론이란 사실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공정성이다. 사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정의라는 것은 결국 언론의 모습에서 보이는 조건이 따라 붙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악의 조직이면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조직은 악이라도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미 그런 담론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그런다고 니체를 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니체의 사상이 지금에 와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해 결국 세상의 법칙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악의 갈림에서 하춘식이 본 잔혹한 마법소녀의 정의라는 것은 과연 정의라는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정의는 무엇의 조건에 따라 실행되어야 하는가? 마법소녀라는 이름은 거대한 힘과 권력을 가진 하나의 상징이다. 그 상징성에 의해 실행되는 모든 것은 옳고 합당한 것인가?

 

정의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정의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큰 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만약 그것이 진짜 정의라면 그 정의에 대한 의구심과 합당한지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가? 즉, 정의라는 것은 거대한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는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에 악이라고 부를 그 무엇에는 정말 순수하게 악으로 되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비밀이 숨어있는 하춘식의 과거와 주인공이 겪은 10년 전의 큰 소동은 분명 이 작품에서 하나의 모티프를 제공한다.

 

자세한 내막은 없어도 거대한 힘을 가진 자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밀어붙여 이룩한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고, 또한 딥 블루라는 은퇴한 마법소녀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인공이 속한 에프 킬러의 우두머리인 총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이다. 아직 1권만 보았기에 그와의 지난 일은 모르나, 총장에 대한 딥 블루의 표정은 살기나 적의 대신 오 히려 잘 지내고 있었냐는 눈빛이다. 10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마법소녀와 악의 조직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큰 파장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악의 조직인 에프 킬러는 과연 나쁜 악의 조직으로 볼 수 있는가? 상당한 미모와 몸매를 자랑하는 점장은 게임만 하는 은둔형 폐인이고, 게다가 낯선 사람만 보면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한다. 조나단은 머리에 양동이를 쓰는 단순한 변태에 길거리 포장마차 장사꾼이며, 중간보스인 주인공은 일만 열심히 하는 소년가장이다. 그런 자들이 악의 조직이라 하여 과연 악인인가? 처음부터 악의 조직이라고 불리는 에프 킬러에 들어온 주인공의 동기가 이상했다. 그가 본 사진에서 무엇을 위해 강화인간이 되어 고생을 하는가?

 

그의 나름대로 정의라는 이름이 있지 않은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면 단순히 힘의 논리나 또는 소수를 배제한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란 공리주의적인 요건을 볼 수 없다. 정의라는 것은 자신의 입장이 아닌 타인의 입장을 위해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당한 것으로서 사회적 규율인 법과 제도를 지키는 것을 떠나 그 이상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즉, 남에게 베풀지 않아도 되는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하나의 정의가 성립되는 것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정의의 기준은 아주 모호하게 만들었다.

 

악의 조직에서 매일 근면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을 무자비하게 패는 하춘식이 정의의 사도인 마법소녀라기에는 애매하고, 그런다고 악의 조직인 ‘늪’을 보면 악의 조직이 에프 킬러만큼 약해 빠진 존재가 아닌 것을 안다. 정의라는 것은 위에서 내가 언급한 것처럼 사실성보다는 공정성이고, 공정성에 대해 그 상황에 대한 조건과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라면 이 작품에서 진정한 악을 하춘식이 말하고 있다. “진정한 악의 조직은 은행이라니까. 은행.”

 

또한 다르게 생각하면 악의 조직이라고 하지만 동호회 수준에 불과한 에프 킬러 역시 제일 큰 적은 하춘식이란 마법소녀보다 생계조건이 더 큰 적이었다. 주인공은 하춘식에게 심하게 맞아도 살아갈 수 있지만, 일을 한 후에 나오는 급여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보이는 세견의 적이란 돈이 없이 그저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은 지나가다 누군가에게 언제 사기당해도 이상하지 않으며, 점장은 게임만 하여 세상물정을 모르며, 양동이를 쓰고 있는 조나단은 이미 자신의 얼굴을 가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은 존재와 드러낼 수 없는 존재, 드러내어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악의 조직인 에프 킬러의 현실이다. 악이라 불리는 자들은 과연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악인지 아니면 악으로서 규정될 수 없는 현실적 조건에 의해서 규정되는지가 바로 이 작품에서 보인 세계관에 대한 내 판단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가장 동의하는 부분은 마법소녀가 언제 마법소녀로 되지 않는가이다. 그것은 바로 소녀가 소녀로서 있을 수 없을 때, 결국 마법소녀이란 작품의 최종적인 목적은 소녀가 어른으로 되는 것이다.

 

딥 블루의 모습이 바로 마법소녀가 최종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이고, 그것은 성인여성이 누리는 행위에서였다. 마법소녀가 마법소녀로서 있는 이유가 최종적으로 사랑이란 것은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요소다. 자기가 품은 환상이 결국 환상이 아닌 현실일 때, 그들의 환상은 이미 깨져버린다. 대리만족으로 느끼는 것들이 결국 현실화로 되었다는 자체로 마법소녀의 임무는 완수다. 그때까지 마법소녀는 그 자신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딥 블루는 완벽한 마법소녀였고(현역시절 변신할 때의 실루엣으로 보이는 볼륨이 넘치는 몸매를 생각하면), 하춘식은 딥 블루와 다른 사신의 모습에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간적인 모습이다. 불안정한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작가가 어떻게 기존의 마법소녀의 이미지를 어떻게 해체하여 재미를 유도하는지가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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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마 이리야 1.2권 박스세트 (합본판) - 전2권 - Novel Engine
히로야마 히로시 지음, 정홍식 옮김, TYPE-MOON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fate stay night>라는 라이트노벨,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이 있다. 최근에 <fate zero>라는 후속편까지도 나온 인기 있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을 패러디 내지 혹은 새롭게 각색한 작품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원작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등장인물이나 능력이나 또는 기타 여러 가지 유사점은 있어도 기본이 되는 이야기 전제가 다르게 진행되는 것이다. 흔히 이런 이야기는 스핀물이라고 하나, 기본적으로 원작을 두고 그 바탕을 재미를 추구한 것이라면 이야기의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원작이었던 <fate stay night>의 주인공은 세이버와 시로였다면, 이것을 새로이 각색한 <프리즈마 이리야>에서는 이리야와 미유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작품 형태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이 중에서 <프리즈마 이리야> 만화는 시리즈가 총 2권, 애니메이션은 10화로 구분되어 있다. 내용을 보는 순간, 전형적인 마법소녀물로 등장한 점이고, 원작과 다르게 인물설정을 조금 다르게 했고, 적대적 관계 내지 혹은 우호적 관계도 조금씩 다르게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모든 이야기를 지닌 서사구조에서도 무엇이 동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중요하다. <프리즈마 이리야>에서는 처음 장면은 일본으로 건너온 토오사카 린과 루비아젤리타 에델팰트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서로 다투는 것부터 시작이다. 캐릭터 설정에서 토오사카 린은 검은 트윈 테일의 소녀이고, 에델팰트는 노란 꽈배기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이다. 흔히 전형적으로 츤데레 내지 약간 융통성이 없고, 고집쟁이 캐릭터라는 점이다.

 

출발지점인 영국부터 서로 아웅다웅 싸우던 사이라서 비행기가 일본에 도착하여도 마찬가지다. 그러는 사이에 2사람이 마법소녀의 임무로서 받은 마술봉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싸우는 용도로 사용하다, 마술봉이 그것을 참지 못하여 각자가 원하는 주인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아직 어리고 어린 초등학교 소녀들에게 간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내용은 영국에서 온 츤데레 소녀들이 임무를 도와주면서 발생하는 점이나, 작품에서 중요한 인자는 이리야가 애니메이션 중에서 마법소녀 장르를 매우 좋아한다는 점이다. 마법소녀를 동경하고, 그렇게 되고 싶은 이리야였으나, 막상 마법소녀가 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며, 게다가 토요사카 린이 옆에서 계속 참견하는 바람에 엉망진창인 상황이 된다. 그러나 이리야에게는 마법소녀의 자격이 있다고, 마술봉인 매지컬 루비가 말한다. 그것은 소녀의 깊은 마음에 숨어 있는 연심이라는 점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소녀가 진정한 마법소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보면 이리야는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시로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리야는 초등학생, 시로는 고등학생, 나이가 차이가 나고, 아직 어린아이인 이리야의 입장에서는 쉽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짝사랑의 마음이 마력의 근원인가? 어째든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들의 관점을 새로운 부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상황과 정보를 눈으로 통해 받아들이고, 사고하여 받아들이고 행동하지만 아이들의 경우 조금 다를 수가 있다. 아이들은 지금 분명 의식이 깨어있어서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동공으로 확인될 수 있으나, 아주 미미한 시간에서는 의식이 순간적으로 잃는 경우가 있다. 그런다고 병이 있는 것도 아니나, 그런 짧은 순간에 실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의 모습을 본다. 그때 그 환상의 잔영이 보통 어른이라면 믿지 않을 꿈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어린 아이의 경우 그것이 환상이어도 현실과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

 

사라지는 것이 곧 잔영이나 그것이 하나의 기억으로 남게 되어 착각이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잔영의 요소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비록 어린아이지만 어른과 대등한 힘을 가지고 싶어 하며, 그런 존재로 되기를 바란다. 특히 소녀의 경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이 착각이 될 수 있어도 뭔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마법소녀라는 환상은 몸과 마음이 아이지만, 몸과 마음이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녀의 보상심리다.

 

<프리즈마 이리야>에서 이리야는 특별히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초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소녀이다. 그런 소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로 오빠에게 특별히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없다. 마법소녀라는 환상의 변신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한 상징이다. 그래서 이리야는 토오사카 린처럼 마술을 배우지 않아도 초반부터 매우 강력한 마법을 구사한다. 마법을 구사하는 이리야는 모두 의아한 표정에서 그저 마법소녀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자신이 특별하지 못하니 뭔가 특별히 무엇을 하고 싶다. 착각의 망상, 즉 이매진이 하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현실이고 싶다는 점에서 마법소녀 이리야는 능력을 발휘한다. 마법소녀 장르는 과거에도 그러나 앞으로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장르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어린 소녀들도 자신이 가진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대리적으로 만족시킬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같은 마법소녀인 미유는 제대로 임무를 수행해도 한계점이 오는 것이다. 마법소녀라는 현실의 한계는 인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망상으로 한계를 뒤집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프리즈마 이리야>는 마법소녀 장르에 매우 충실히 진행하는 작품이다. 우선 코믹적인 요소와 처음 라이벌이던 미유와 이리야가 서로 친구가 되는 점, 시작과 끝이 다시 되풀이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망상과 환상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이 바탕이다. 장르로서 존재하는 마법소녀는 적어도 꿈과 사랑을 전해주기 위한 매개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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