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리미티드 에디션 - 도서(소설) + 500피스 직소퍼즐
신카이 마코토 지음, 박미정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1) 신카이 마코토 감독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이름을 대면 딱하고 생각나는 작품들은 <초속 5>이다. 어릴 적 서로 좋아하던 사람들이 결국 서로 재회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아련한 작품이다. 작품명처럼 초속 5로 내려오는 것은 벚꽃의 낙화(落花)이다. 높은 나무 위의 벚꽃 하나가 바람에 날려 계속 이동하여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멀어져 버린 것이다. 그의 로맨스적인 감각은 언제나 좋지만은 않다. <별의 목소리>에서 지구와 떨어질수록 소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친구와의 메시지를 늦게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막이 내린다.

 

하지만 그 믿음이란 솔직히 말하여 이룰 수 없는 믿음, 결코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어느 목적에 있다고 해도 그 목적 자체에 도달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착하지 않는 서사이다. 서사의 결론은 뭐든지 마무리가 되어야 하는 점이고, 그 서사의 마무리라는 종점에서 새로운 서사가 탄생한다. 서사 자체가 끝이 나도 이어지지 않는 서사,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은 그래 왔다. 모든 작품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초속 5>에서 엇갈리는 2사람 속에서 계속 더 많은 시간이 스쳐가는 것이다.

 

작품 속에 반영된 인물의 설정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충돌의 재회 대신 미끄럼의 회피로 이어진 것이다. 끝이 나지 않는 고민을 안고 말이다. 작품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서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영상미학은 감독과 작가의 마인드를 반영해줄 수밖에 없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은 항상 빛과 하늘의 영상미를 강조하다. 붉은 노을에 강렬한 햇빛 한줄기가 비추더니 어느 순간 지고 마는 장면, 그렇게 어둡지 않은 검정색을 띠는 파란하늘에 별빛이 흘러간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보여준 하늘의 이미지는 사실 게임에서도 보여준다.

 

2) 애니메이션 영상미학(映像美學)적 관점

샤프트 회사에서 만든 <ef>라는 애니메이션은 원래 게임을 기반으로 만든 작품이고, 그 게임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제작스텝을 맡는다. 애니메이션은 신보 아키유키라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주도로 만들었지만, 그 감독 역시 게임의 원래 감각을 살려 하늘의 색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하늘의 색에서 중요한 점은 영상에서 여백공간의 설정이다. 가령 영화라는 실사영상에서 배우나 소품, 배경 등을 촬영할 때 공간의 설정 중 인물과 소품은 존재성을 가진 유형의 존재이다. 하지만 뒤에 보이는 하늘이나 빈 공간들은 무형의 존재, 즉 죽어버린 세계이다. 살아있는 세계의 존재와 죽어있는 세계의 이중적 결합에서 영화는 삶과 죽음, 유형과 무형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 영상은 다르다. 빈 공간인 하늘, 심지어 땅과 바다마저 그들이 원하는 색으로 입힌다. 하늘이란 공간이 영화처럼 죽어버린 공간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 의해 새롭게 구축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인물들이 나온 애니메이션 세계는 파생실재의 영화와 다른 미학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공간의 설정에서 자연 그 자체로 통해 연출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무대세트장이 있어도 결국 표현의 한계성이 오고, 최근 영화들은 컴퓨터 애니메이션 그래픽 차용으로 영화의 연출을 극복한다.

 

현실부재라는 속성인 애니메이션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존재로 등장하나, 이에 반해 실사영화는 파생실재(Hyper real)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가상으로 만들어가는 세계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반 리얼리티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존재들이 현실에 존재했던 자가 아니다. 그런다고 실사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이 현실에 있다고 해도 그 인물 그 자체는 아니다. 리얼리티를 부여해도 결국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로 흘러갈 뿐이다. 대신 리얼리티를 부여한 점에서 현실의 세계들을 차용하여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키치적 요소나 일상생활 등을 말이다.

 

애니메이션 세계는 이런 키치적 요소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최근 애니메이션에도 현실에서 등장하는 물건이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화면만 애니메이션이지 실사영상에서 보여주는 인간생활하고 큰 차이점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실사영상에서 담을 수 없는 미세한 장면과 디테일한 연출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은 전형적으로 이런 요소를 잘 반영했다. 공간적 설정에서 현실의 배경과 현실의 물건, 심지어 현실 속의 여성들이 즐기는 인증사진 촬영장면도 집어넣었다.

 

3) 현실적 감각과 비현실적 감각 속의 <너의 이름은>

<너의 이름을>을 보면 상당히 현실적 요소가 강하다. 도시나 시골의 배경이나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 심지어 코토하의 아버지가 본래 신관일족의 데릴사위였으나, 코토하의 어머니 별세 후 정치계에 뛰어들었고, 토목건설업자와 결탁하여 선거에서 이기려고 하는 장면에서 상당히 현실적인 세계관을 반영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최근 인구가 감소하고, 토목건설사업은 도시 쪽에 실시했으나, 도시의 개발은 결국 포화로 이어지고 나머지 공간은 시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츠하의 아버지가 보여준 선거 전략도 그러하나, 농촌경제구조에서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은 미츠하의 가정생활에서 갈등이 되고, 마을사람들과 학교급우들 사이에서 갈등으로 이어진다. 도쿄에 살아가는 타키는 전형적인 고교생이다. 하지만 집안에 어머니가 없다. 미츠하는 어머니는 안계시고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에 반해 타키는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살아가지만, 나름 잘 지내는 부자관계를 보여준다. 타키는 자신의 집에 여자가 없기에 그리고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미인 상사가 있기에 그녀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인물의 설정도 그렇고, 배경의 설정 역시 현실적 감각을 잘 살렸다. 하지만 이에 반해 비현실적 요소도 강했다. 신카이 마토코 감독이 주술적인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은 나도 이번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존재성은 비가역적 존재이다. 비가역적이란 다시 되돌릴 수가 없으며, 한 번 지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어 그것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역사라는 시간적 축척은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로 이어진다. 서사의 흐름에서 비가역적 시간을 뒤트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하고자 하는 제작자의 의도는 단순히 바라볼 게 아닌 점이다. 시간을 비트는 것은 비현실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을 다시 오타쿠 앞에 내놓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서구의 이성중심 가치관을 부정 혹은 보완, 추가 등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진 사상이다. 모더니즘 사상은 어떤 하나의 큰 서사 내지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인 가치로 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로 판단할 수 없다. 대신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성은 가치관과 시야는 다르다면 최소한의 윤리성을 배제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윤리성을 배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본처럼 군국주의 망령이나 독일의 네오나치 사상이 대두하게 만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누구나 자신을 대변을 할 수 있지만, 그 대변의 논조에 이성과 윤리성이 부재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망각한 점이다. 다행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런 점을 버리지 않았다.

 

4) 후쿠시마 발전소 비극

일본의 많은 작품을 보면 극우적인 요소가 많으며, 과거로 돌아가 2차 세계대전을 바꾸어 세계 권력을 바꾸거나, 미래공상 세계에서 우주를 누비는 모험가로 등장해 식민지 건설에 대한 무의식적인 욕망을 표출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런 극우성향보단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서 맞선다. 이토모리라는 마을은 지구를 지나간 혜성 파편 하나로 완전히 파괴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일본 후쿠시마 발전소 폭발로 상처 받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후쿠시마 발전소의 비극은 일본정부의 무능, 기업들의 이기심, 그리고 국민들의 무관심에 의해 만들어진 학살극이다. 발전소 폭발 후 제대로 처리하기보단 오히려 보도통제하려는 정경유착의 일본, 국민들은 그런 피해를 두고 무관심하게 반응한다. 정말 몰라서 혹은 관심이 없기보단 일본인들의 특유의 반응성이다. 일본에서 분위기라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이른바 공기(空氣)를 읽으라는 말이 종종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분위기를 읽는 것은 뭔가 좋지 않은 상황이 놓일 때 거기에 동조하거나 경망히 행동하지 않고, 조용히 눈치를 보며 스쳐가듯이 피해가라는 의미이다.

 

문제가 있어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관여하지 않아 자신들만 피해보지 않으면 된다는 집단이기주의적 발상이 숨겨있다. 일본에서 이른바 이지메 문화가 있다. 학교에서 학생 1명이 왕따가 되면 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지만, 주변에선 그것을 보지 않은 것처럼 무시하거나 방관한다. 거기에 엮이는 순간, 추가로 엮이는 사람에게도 큰 곤혹을 치르게 한다. 학교라는 것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일본사회는 기성세대의 세상이다. 기성세대는 학교 안보다 더 심하게 모순되어 있다. 공기를 읽어야 하는 일본에서 이 영화는 후쿠시마 발전소 사건 이후, 재난이란 사태에서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운석이 떨어지자 마치 거대한 폭탄이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처를 드러내서 치유해야 한다. 정신적 상처는 담고만 있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드러나서 감정으로 표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작품에서 운석에 의한 재해를 영상으로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한국인과 달리 일본인에게 그 장면은 매우 거슬린 장면이었을 것이다. 운명에 의해 파괴된 마을과 증발된 사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그 상처를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는 없다.

 

5) 부분적 세카이계

20세기 전후로 일본은 세카이계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작품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고, <최종병기 그녀> 등이 있다. 세카이계의 특징은 세계를 멸망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세카이계 특성은 모든 세상이 망하는 것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기에 인간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며, 감정적이게 되며, 각자의 마음에 이끌리게 된다. 윤리성보단 개인성에 치중하게 되는 마련이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 세카이계 요소를 담고 있지만, 모든 것의 멸망이 아니라 단지 미츠하가 살아가는 마을의 멸망이다. 부분적으로 세카이계 요소를 집어넣은 것이다.

 

작품은 연애와 드라마적 요소, 세카이계 요소를 다중적으로 집어넣는다. 세카이계가 되어 여기서 망하는 것보다 망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서사의 방향을 다르게 제시한다. 지구의 멸망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미국이란 나라가 세계를 구한다는 속성이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지구의 위기가 터지고 도쿄에서 출동한 특공대원들의 활약으로 지구는 위기에서 모면하는 이야기가 많다. 위기의 순간 누가 가장 강한 나라이냐를 두고 미국은 할리우드 실사영화로 일본은 애니메이션으로 종종 보여주곤 한다.

 

자신들이 주도가 되려면 어느 누군가가 강력한 영웅이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위기를 넘어 지구의 평화는 지켰다는 전형적인 영웅서사는 안 봐도 비디오란 말을 듣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왜 일본 특수촬영 장르가 몇 십 년동 안 인기를 잃고 있지 않은가? 왜 할리우드 교과서적 작품이 계속 나오고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가?). 그러나 <너의 이름은>에서 그런 점을 다르게 표현한다. 영웅이 아닌 일개 학생들이 서로 상대방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을 살리는 것도 목적이 있다.

 

6)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비신카이 마코토적인 요소

하지만 이토모리 마을주민들이 몰살되면 미츠하와 타키는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지구의 특공대원이 되는 게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된 자들을 죽음에서 도망치게 해주는 것이다. 자연적 재앙이나 인위적인 재난은 어떻게든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런 남은 수단은 대피시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전 세계는 망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망할 수 있다. 대신 이 위기를 벗어나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세카이계적 요소에 비세카이계적인 요소를 반영한 것이다. 누군가 이 작품을 두고 신카이 마토코의 감독의 비신카이 마토코적 요소를 반영했다고 한다.

 

작품을 보여주듯이 거대한 운명 앞에 행동하는 인물들은 세상의 운명을 바꾸지 못해도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 자체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으로 위기를 모면해준 것은 미츠하가 만든 술이다. 미츠하가 만든 술을 신의 재단이 있는 곳에 바치고, 그 술을 마신 타키는 시간의 결계를 뛰어넘는다. 황혼이 오는 저녁, 낮도 밤도 아닌 시간, 그 시간의 틈에 저승과 이승이 순간적으로 경계성이 무너지고, 그것을 이용하여 두 사람은 이때까지 서로 인지하지 못한 자신들의 존재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방법은 과학성이 아니라 주술성에 의지했다는 점이고, 일본 무녀가 보여주는 주술적 요소는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때까지 신카이 마코는 실사는 아니라 실사적 요소, 과학적 근거 등을 잘 반영했다. <별의 목소리>에서 조종사로 된 소녀가 멀리 지구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메일을 보낼 때 우주의 거리와 시간개념이 나오고, 우주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봇 그 자체는 현재 없는 기술력이라고 해도 우주라는 공간에선 하나의 법칙을 제시한 점이다.

 

또한 신카이 마코토는 연인적 관계를 충돌적으로 부딪히는 게 아니라 엇갈리는 길을 택하는 쪽이 많았다. 엇갈리게 되면 계속 시간에 지남에 따라 만날 수 없고, 만나는 것으로 서사가 끝이 되어야 하나, 또 다른 서사조차 이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서사를 선택한 것이다. 스포일러성이 있으나 <너의 이름은> 마지막에서 미츠하와 타키는 서로의 이름을 모른 채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아련함에 의해 마주하게 되고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마지막은 너의 이름은? 하는 대사가 나온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도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름을 서로 찾아다니며 방황하던 이들이 다시 재회하여 서로의 이름을 알아가고, 이름을 알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는 점이다. 남녀의 존재성을 알아가는 것은 연애를 의미하며, 그들의 연예관계를 맺으며 다시 러브스토리로 이어질 것이란 또 다른 서사성을 관객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작품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7) 재회의 상징과 한국관객

그들이 처음 각인할 때는 미츠하가 중학생이고, 타키가 고교생이었을 때이다. 시간적으로 이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지 않았다. 무려 3년의 틈이 있었으며, 3년 후 타키의 몸에 미츠하가 살았고, 3년 전의 미츠하의 몸에 타키가 살았다. 이들은 아직 어린 학생, 즉 어른이 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만난 것은 타키가 이토모리에 간지 7년 정도 흐른 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여 일을 해야 하는 어른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있었던 아픈 기억과 상처를 해결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를 찾아 헤매는 것은 분명하나, 그들 마음속에 가려진 지난날의 상처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찾아낸 것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지난 과거 아픈 기억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같이 공유한 그 누군가와의 동질화하는 것이다. 관객들이 그것도 한국의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나름 재미있었다는 것은 연애적 발상이나 사실은 연애 이상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너의 이름은>을 관람한 관객을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른바 오타쿠 계열만 아니라 영화나 영상물을 좋아하는 평론가 및 애호가, 그리고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인들도 <너의 이름은>을 보고 좋은 반응이 나왔다. 연애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을 보면서 한국영화 중 2편이 생각났다. 하나는 <체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감>이다. <체인지>는 우연히 번개를 맞은 두 남녀 학생이 서로 몸이 바뀌었고, 서로 알아가는 도중 마지막에 다시 번개를 맞아 원래 몸으로 돌아가려 한다. <동감>2000년의 20세 남대생과 1979년의 20세 여대생의 교감으로 시작한다. 서로는 같은 학교에 다니나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다. 만나기로 한 날에 남자는 비만 맞고, 여자는 시위현장을 진압하던 경찰에 의해 봉변을 당한다.

 

1979년은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하던 시절이고, 2000년은 군사정권과 거의 멀어진 시기였다. 구식 무전기로 통해 서로의 목소리를 들은 남녀는 이룰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체인지><동감>을 직접 관람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의 모티브나 소재를 본다면 유사한 교착점이 보인다. 그래도 다른 점은 <체인지>는 같은 공간과 시간에 존재했었고, <동감>은 공간은 같으나 시간이 달랐다. 그래서 아마추어 무전기로 연락하던 2남여는 서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강의실 옆에서 청년을 지나치는 여교수의 모습으로 끝날 뿐이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연애만인지 연애 이외에도 다른 것인지에 따라 관람자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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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7-01-14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 공부에 열중하느라 서재에 잘 들어오지 못하네요(이건 변명 ㅋ 사실 공부도 제대로 안 하면서 서재에 못 들어오고 있어요 ㅋ 이쿠)

아!!! 역시나 이 아름다운 글...읽으며 막히지 않는 물 흐르는 것 같으 문장의 흐름과 내용의 풍성함에....침을 흘리며 읽게 되네요.

정말 이 영화 보고 싶어지네요 훗. 만화애니비평님이 글 쓴 것 중에는 안 읽고 안 보고 싶은 것이 없어요. 리뷰만 읽고 느꼈을 때 약간의 느낌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향도 나는 것 같아요.

일본의 원전사고나, 우리의 세월호나 참으로 어딜가나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은 그 모양과 매커니즘은 매우 흡사하구나 생각이 들어요. 리뷰를 읽다가 아! 일본도 원전사고가 있었지 하며 느꼈네요.

전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란 책을 사 볼려구요. 두꺼우니 틈틈히 읽으면 좋을 것 같고, 공부하다 보면 자꾸 책을 사고 싶어지는 병이 도지는데 이 책을 사면 볼 때마다 그 욕구가 사라질 것 같아요 ㅋㅋㅋ

새해도 더 좋은 글 부탁드려요. 읽으니 스트레스 사라짐. 감사해요 좋은 글 ㅎ

만화애니비평 2017-01-15 10:20   좋아요 0 | URL
루쉰님 새해 복마니~~~
열공도 좋지만 감기도 조심해야 합니다 후후후

그런데 제 글에서 침이라니..아이고..ㅎㅎㅎ 모니터 망가집니다....무라카미 하루키 느낌이 드는 이유는 하루키가 일본의 전공투시대의 향수를 비틀어버린 글귀라 그런 가봅니다. 이 작품도 은근히 비틀어서 보여주는 스타일이다보니 그렇죠...

다카시 서재라 ....님 책만 읽는 것 아닌가요...ㅎㅎ
조금은 환기를 해서 마음을 즐겁게 우후후

stella.K 2017-01-15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거의 한편의 논문 같군요.
저도 지금까지 세 편 정도 본 것 같은데
신카이 마코토는 영상은 좋은데 스토리가 영 시원치 않아
굳이 봐 지지는 않더군요.
소설도 그닥 좋으려나 싶어요.
영화는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는 느낌인데
애니는 아직 그런 인식이 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1-15 10:18   좋아요 1 | URL
신카이 감독 서사는 조금 시원치 않게 흘러가는 게 특징입니다. 목소리도 뭔가 모르게 잠겨 있다는 느낌이 강하죠..
영화는 시나리오 즉 서사성이 좋으면 작품이 되는 것이죠. 애니는 영화보단 서사성이 더 좋을 수도 아니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영상미적 감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죠.

리뷰가 논문 같은 것은..아마 제가 애니메이션 논문을 3편을 투고하여 학회지에 실렸기에 그런 조류가 들지 않았나 싶습니다..ㅎㅎ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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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보고 천재가 있냐고 혹은 상당히 재능이 있는 인간이 있는 게 당연한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할 것이다인간의 불평등에서 현재 사회구조는 사회적도덕적 혹은 더 넘어 경제적문화적교육적인 불평등이 심각하지만,그래도 인간의 선천적인 신체적자연적 불평등은 존재한다물론 천재들이 태어나 이제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세계 명문대학을 입학하는 것에서 우리하고 별천지 세상처럼 보인다하지만 나에게 천재는 반드시 그런 자만 있는 게 아니다그들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지만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다.

 

인간이 어느 상황을 보고 판단하여 선택하는 기준은 이성과 지성이어야 한다그러나 실제 현실을 살아가면 인간이 선택하는 기준은 이지적인 요소가 아니다오히려 감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욕구와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자신이 아주 현명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자신의 이기적인 사고가 마치 아주 뛰어난 경제관념이라 생각하는 자들을 보면 누가 과연 멍청한지 혼돈되는 경우도 많다내가 왜 천재의 기준은 단순히 두뇌의 능력도 중요하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천재 수학자와 과학자가 있어서 그가 우주선을 설계하거나 과학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풀어내더라도 일반인에게 미지의 세계일뿐이다왜냐하면 그것이 인간들의 실제생활에 막연한 관계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감정적으로 혹은 감동으로 오는 것들은 다르다영역의 깊이와 넓이에서 다소 부족해 보일지라도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오히려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에서 그런 감정적인 요소를 자극하거나 혹은 감동을 주는 작가 중에 나는 최규석 만화가를 추천해주고 싶다막상 최규석 작가를 어떤 강연회에서 보거나연회 내지 회식자리에서 본다면 무척 특이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실제 최규석 작가를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주변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봤다상당히 조용한 성격이면서도 뭔가 하나에 집착할 것 같은 성향이었다.

 

그가 느낀 세상이란 무엇일까최규석 작가를 보면 뭔가 일반인들과 달리 모호하게 존재하는 것 같이 보여도 그의 그림을 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잔혹하다최규석 작가의 작품이 왜 감정을 자극하고 감동적인가억지로 꾸겨 넣은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매우 우화적으로 혹은 아이러니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생각하지 못했던 우리가 알고 있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의 상상력이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 읽은 <지금은 없는 이야기>, 마치 동화책을 보듯이 책과 안의 그림들은 무척이나 아기자기하다최규석 작품들은 나름 리얼리티가 살아있기에 한국의 리얼리즘(사실주의만화작가로도 평가되기도 한다그의 리얼리즘 요소는 단순히 사실주의적인 그림체와 배경만이 아니라 동화적인 그림체로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교훈을 알려주기에 너무 교훈적이지 못한 이야기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란 곧 하나의 서사 Narrative라고 볼 수 있다내러티브가 성립되는 이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즉 사회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은 규칙과 패턴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란 바로 그 규칙과 패턴에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낸다우화적인 요소로 인간보단 동물들이 등장한다마지막에 보여주는 동화의 잔혹한 이야기 말로들은 그 가해자들이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닌 불특정 다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눈은 언제나 뜨고 있고그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다그러나 그 눈으로 현실의 문제나 모순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다어찌 보면 전체주의적인 방식은 인간의 기만성에서 비록된 것이 아닌가 싶다기만성으로 얼룩진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입장을 저울질할 때 전혀 공정한 태도로 임할 수 없다인간은 공정하지 못한 존재이므로 자신의 입장에만 고수할 뿐이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보면 참으로 씁쓸하고 마음이 시리다.

 

동물들의 형태로 보여준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참으로 기가 막힌다물론 인간의 형상을 한 등장인물이 나온다늘 천사가 와서 참아야 해요라고 하나막상 마지막에 그에게 온 임종의 순간은 허무함으로 가득한 분노이다천사의 외침은 나에게만 강조하고외부에서 닥치는 폭력과 강요를 왜 참아야만 하는 것일까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참아야 할지 아니면 참지 말아야 할지를 잘 찾지 못하는 것 같다물론 <지금은 없는 이야기>이니 앞으로 없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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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 만화가 10인의 마침표 없는 인권 여행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정훈이 외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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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권리,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적정범위, 아니라면 인간이 태어나면 이 이상으로 보장받지 못한 비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적인 가치기준 등 인권에 대해 생각하면 정의내리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 지난 인류의 역사란 되돌아보면 인간의 투쟁에 대한 기록이다. 투쟁이란 자연적 조건 혹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에 식량이 부족하거나 또는 날씨가 춥거나, 집에 너무 좁거나 월급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어찌 보면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자연적 혹은 신체적 불평등보단 사회적 혹은 도덕적 불평등이 심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른바 대한민국 헌법 아래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은 참으로 애매하다. 헌법은 어찌 보면 국민과 그 국민이 선출한 국가기관의 정부요직 또는 공무원들이 제일 먼저 지켜야 하나, 오히려 헌법이 더 뒤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헌법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맨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정의를 말하는 인간들을 보고 난 뒤에 헌법 조항을 비교대조를 해보면 바로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대한민국이 인권의 나라, 자유와 평등의 나라가 되려면 헌법의 정신적 가치를 새겨보는 것이 옳으나, 헌법이 사라지고, 대신 입맛에 맞는 각종 법들이 좌지우지한다. 법만이 아니라 법 아래에 있는 지침과 규정들도 임의로 관료사회집단의 입장에 따라 계속 바뀌어간다. 인권을 말하는 것은 마침표 끝내는 대신 물음표로 항상 질문해야 한다. 여기가 지금 제대로 사람들을 위한 장소인지 제도인지, 그리고 얼마나 제대로 혜택과 보장이 돌아가는지 말이다. 10월 8일 최호철 유승하 부부 만화작가의 강연을 들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에 인상 남는 일화가 지하철역에 있는 엘리베이터였다. 다리가 심하게 불편하지 않은 이상, 나이가 제법 있으신 어르신들도 충분히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다. 그런데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나 산모, 병을 앓은 사람들에게 너무 힘든 영역이다. 레드 제플린의 유명한 곡 Stairway to Heaven, 천국으로 가는 계단만큼이나 멀고 험한 길이다. 장애우 한 분이 오랫동안 계단을 오르기가 불편하여 사회에 호소하였고, 나중에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가 생겼다.

 

남들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탑승한다. 그러나 그 장치가 생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너무 길고도 힘들었다. 말이야 쉽지? 이런 말은 바로 여기서 부터인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속이거나 외면하지만, 세상에 너무 힘든 사람이 많다. 그들을 돕는 일이란 그저 길가나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전 하나를 주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옳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우리 국민에게 세금을 수금한다. 하지만 그 용도가 제대로 된 것보단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자주 쓰이는 경우가 많다.

 

정작 사용할 곳은 어디인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또한 그것을 제대로 관리감독 및 시행을 누가 잘 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 개인 하나는 어떻게든 타인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돕기도 힘들다. 아침부터 나가 저녁까지 일을 하는 직장인에게 월급봉투는 너무 잔혹한 숫자이며, 학생에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시간과 공간조차도 없다. 마치 억지로 시작도 끝도 없이 저 황무지를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처럼 우리는 항상 불안한 운명에 허덕인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약하고 힘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싼 죽음의 모래언덕에서 발을 움직이려도 해도 다리조차 들어 올릴 힘도 없다. <어깨동무>에서 그런 사람이 나온다. 핵가족화로 인해 가족이 해체된다. 노인 혼자 집에 살고 있고, 옆에 강아지 하나만 있다. 아들 내외는 언제부터인지 소식이 닿지 않고, 옆에 늙은 강아지만 열심히 그 상황에서 주변에 알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소리에 시끄럽게 여기고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지막에 개가 짖는 소리마저 없어지자, 그 할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주변 친척 중에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틴 조금 먼 친척의 이야기를 들었다. 촌수로 대략 6~8촌 사이 정도랄까? 나이가 60 넘은 여자 친척이 혼자 사는 이야기를 했다. 한 분은 자신의 집이 37평, 상당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그 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옆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옆에 오빠나 동생이 있더라도 언제까지 챙겨줄 수 없었다. 그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는 외톨이가 된 것이다. 최근 노인들의 고독하게 죽는 일들은 종종 뉴스에서 본다.

 

사람이 죽는 것은 축복일 때도 있다고 하나, 대부분 고통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일은 죽을 때 자신의 죽음조차 기억해주지 않은 세상이다. 내가 이 세상에 정말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물론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슬픈 현실에 처해져있다. 최규석 작가가 그린 편에서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최규석 작가가 매우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그리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극화 같은 그림체는 등장인물에 대해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보다는 현실의 인물을 보여주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아파트 재건축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지가 나에게 큰 충격적이었다. 건물 철거 중 건물 안에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작업하다 죽은 사건이나, 철거민들이 철거용역업체에게 저항하다 소화기를 뒤통수를 맞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억울함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재산권 침해이란 이름 아래 오히려 외면당한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우리의 인권주소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았으며, 그런 것과 무관하므로 모두 외면한다. 말해도 그런 신경 쓸 필요 없다거나 혹은 너나 잘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좋은 사람인양 착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인 것처럼 보여주는 행동에서 과연 그들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긴다. 차라리 이런 세상을 알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뭔가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당하면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진다. 개인이 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 휘발유를 몸에 뿌릴 때 권력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태일의 죽음 아래 많은 것을 느꼈다.

 

사회가 힘들게 되면 개인에게 어렵게 되니, 결국 개인 모두가 문제의식을 느끼어 연대의식을 나누거나 혹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작은 이익에 눈이 먼다. 그것에 시선을 고정할 때 이미 자신은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어깨동무>에 등장하는 우리의 이웃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기보단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경우가 많다. 열심히 살아도 도저히 바뀌지 않는 불안한 오늘, 내일이란 이름은 과연 자신에게 빛으로써 비추어줄까?

 

인권은 참으로 오래 전부터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있었다. 노예가 엄연히 존재하고, 여자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권리가 박탈당하고, 인종차별과 종교전쟁이 늘 테러와 전쟁으로 이어져갔다. 결국 인간이 말하는 정의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왜 나는 되는데 남은 되지 말아야 하는가? 인권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타인이란 존재를 위한 것도 되지만, 결국 나에게 큰 이익이 된다. 약자를 위한 시설이 있다면, 언젠가 나나 주변사람이 이용할 수 있고, 보장이 잘 된 복지라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지금에 눈앞에 있는 당근을 먹으러가지만, 그 당근을 땅에 심으면 수확물이 열린다. 우리는 땅에 심어야 할 최소한의 당근마저 뿌리를 뽑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 과연 어떤 것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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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는 사람들 - 또 다른 용산,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평화 발자국 8
김성희 외 5인 글.그림 / 보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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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본 영화 2편이 생각났다. 하나는 <두 개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의견>이었다. 영화는 실제 사건인 용산참사사건을 토대로 제작했다. 영화에 대한 비교에서 전자는 사실과 영화의 편집을 했다면, 후자는 순전히 가상의 인물과 이야기로 만들었다. 전자는 그래도 르포르타주 형식을 어느 정도 차용했다면, 후자는 영화라는 특성인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반영했다. 후자의 편이 카메라 앵글의 이동과 shot by shot의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재미를 위한 요소에서 추리와 대립이란 플롯구조 장치도 잘 배치하였다.

 

약간의 재미를 주었는지 혹은 재현성에 대한 부분을 중시했는지 위의 영화들은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보이는 현실에 대한 부당함을 제3자의 관점을 바라보았다. 카메라의 시선이 결국 어느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주인공 위주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나, 위 영화는 주인공의 성공보다는 오히려 실패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의 영웅 신화 서사를 반영한 게 아니라 영웅은 현실에서 나올 수 없거나 혹은 영웅은 나약한 존재로 그린다. 이길 수 없기에 패배적 상황은 오히려 이야기의 비극성을 드러내고, 여기에 대한 관객의 반성의식을 촉구한다.

 

문제는 관객은 영화를 영화로 볼 뿐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는 부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상하게도 드라마의 가상으로 조형된 세계에 빠져들어도 불편한 이야기는 뒤로 담아두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의 입맛에 어울리는 반찬만 찾는 현실이다. 불편한 현실에서 인간들은 불편함에 대한 배타의식이 잠재적으로 숨어있다. 배타적 반발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에게 편리한 것만 추구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이타적인 정신은 이런 모순적 관계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상의 부조리, 자신이 느끼는 인식의 부조리, 이것들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의무인 것 같다. 현대미술과 현대만화는 이미지로서 수용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미술의 예술성에서 한계는 표현과 사유의 확장이지만 서사의 확장은 없다. 미술이 대중들에게 외면 받은 이유는 바로 서사가 없고, 서사는 없는 것은 공감대를 형성이 어렵다는 점이다. 공감대의 형성에서 만화는 그 힘이 강력한 정도가 아니라 전환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전환점을 불러도 다 바꾸는 행운까지 이어지지 않지만, 적어도 뭔가를 말하여 소통의 세계로 인도하는 노크까지 발전한다.

 

<두 개의 문>과 <소수의견>의 시나리오는 바로 기존 철거민들이 농성하는 상태에서 들이닥친 경찰병력과 대치하다 큰 변을 당한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철거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대치하던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각종 협박과 폭행을 시행하던 철거용역 깡패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업무상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 돌면서 철거업체 관계자와 만난 적은 있어도 그렇게 난폭하거나 위험한 사람들은 없었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서 등장한 철거업체는 조금 달랐다.

 

조직폭력배는 아니지만,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신속하게 주민들을 내쫓는 모습은 참으로 끔찍했다. 이 원인은 무엇인가? 예전에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물가가 상승하는 이유가 부동산 지대의 상승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여 임대받은 상가가 자신의 기존의 이윤과 임대료를 해결하기 위해 상품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자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거나, 혹은 다른 친구와 전화통화하면서 물가의 상승이 그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가 아니냐고 들었다. 물론 물가의 상승은 복합적이지만, 갑자기 임금이 상승하지 않고, 자재도 갑자기 올라가는 일도 드물다.

 

원자재조차도 처음에 가격이 상당히 오르다가 갑자기 등락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르는 추세에 신도시단지 계획이나 주택재건축사업이 발표되면 갑자기 그 지역의 부동산이 폭등한다. 1년 사이에 그 부동산의 가치가 30% 이상 증가한다는 점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부유한 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자산가치가 늘어나고 투자의 기회가 증대되지만, 중산층에게 부동산 시세 따라 자신의 집을 팔고 이사하는 부류가 아닌 이상 독이 된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부동산의 가격이 오른다고 이사를 늘 갈 수 있는 상황조차도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계는 부동산업으로 통해 주택매매가 아닌 임금을 받거나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역으로 손해다. 재산세의 증가와 취득세의 증가는 역으로 세금납부가 부담된다. 그러나 제일 걱정인 부류는 세를 들어오거나 집을 구해야 하는 입주자들이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부담은 주택매매를 통해 이익을 보려는 자들의 호주머니 속에 돈이 오르면 오를수록 심각해진다. 갑자기 증폭된 부동산가격 이전투구처럼 달려드는 투기바람, 한국의 헌법은 인간의 재산권과 생존권에서 안타깝게도 재산권에 손을 들어준다. 예전에 생존권을 찾아 떠난 사람이 어느 순간 재산을 가지게 되면 생존권이 위협받는 이들을 차갑게 외면한다.

 

세입 들어간 사람이나 혹은 그 집을 소유해도 반강제로 철거당할 입장에 놓인 주민에게 이런 사업들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입장에 놓인 사람에 대해 만화작가가 현장에 가서 취재하고 지켜본 작품이다. 르포르타주의 장르인 이 만화책, 한국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이상하게도 나쁜 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운 좋게도 르포르타주의 장르의 만화책들은 도서관에 배치되거나 시민단체의 애용품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아니라면 웹툰으로 제작된 콘텐츠이다.

 

코믹스와 같은 재미가 아니라 사실성을 보여준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화폭에 담겨진 철거민들의 아픔은 매우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었다. 그림체는 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일지 몰라도 이야기의 흐름과 상황적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겪고 있는 아픔, 현실 앞에서 무력한 약자,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로 변신해 고소장을 날리는 현실, 용역깡패에게 폭행당해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당하는 부조리,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만화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우리 생활 주변에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은 TV, 라디오, 인터넷 매체 같은 매체로 전달된다. 그러나 그 매체가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외면한다. 오히려 자그마한 소식지로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주민으로 몰고 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를 임신한 임산부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저항할 힘도 없는 70대 노인에게 다수의 용역직원이 폭행하는 모습에서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라는 생각으로 세상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다.

 

우리 사회는 최근 몇 년 사이 상당히 인심이 흉흉하게 변했다. 계속 인명사고가 끊이지 않은데 그 근본적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계속 빨리 흘러간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의문을 제기하면 다른 호기심거리와 분쟁거리를 내세워 문제의 안건을 물 타기 식으로 흘러 보낸다. 오늘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계속 그 자리에서 현실의 벽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당장 도울 수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잘못된 현실에서 미끄러지는 미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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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세트 - 전5권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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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그대로 적는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나 혹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적어보는 것도 문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소설을 읽어보면 문학이 대가들은 언제나 현실에 대해 다른 관점을 보게 해주었다. 18세기 낭만주의를 이끈 루소의 <신(新) 엘로이즈>는 생 프뢰와 줠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보이나, 그 안에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역시 담겨 있었다. 어떤 주제와 인물에 대해서는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는 거기에 관련된 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문학의 세계는 반드시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없으나,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서 우리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번 주 주중과 주말, 나는 도서관 문학 장서판에 꽂혀있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았다. 조영래 변호사란 이름을 잘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에서 성폭행당한 권인숙이란 여성을 위해 활동한 변호사다. 그녀가 성고문을 당한 이유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고, 불법으로 자행된 고문과 구금이 그녀를 악몽의 시간을 주었다. 성폭행이 지금이야 죄를 저지른 자에게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 당연하겠지만(그러나 막상 재판 결과를 보면 어이가 없다), 그 당시에는 성폭행당하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피해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성들이 많이 몰려있던 피복 공장에서 그녀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살 전후였다. 거기에 중고등학교에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가난이란 이름에 의해 어린 시절 꿈도 희망도 없이 공장에 나가 고된 노동과 가혹한 환경에 시달리는 비극적 운명에 울부짖었다. <전태일 평전>에서도 외국에 어느 유명배우가 다른 배우에게 구혼을 받거나 혹은 다치는 일만 발생해도 신문에 나는데, 공장에서 힘겹게 일하다 병으로 쓰러지는 소녀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 영화 <국제시장>이 나와 흥행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전혀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유가 바로 당시 사회에 대해 감독과 제작진이 너무 기만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생해서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은 단지 어느 소수의 입장이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는 말이 안 된다. 영화 자체는 대중문화이고, 대중문화는 문화콘텐츠사업으로서 불특정 대다수 군중에게 문화적으로 소비된다. 소비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한다. 좋은 모습만 보려하지 불편한 것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문학적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그 불편한 것을 찾아봐야 한다.

 

불편한 그 이야기가 사실적 관계로 이어지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진실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정말 재미가 없다. 남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이야기를 주구절절 듣는 것도 일이다. 웃기게도 남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왠지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전태일 평전>과 전태일 수기나 일기를 토대로 만든 최호철 작가의 <태일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태일이란 인물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아주 무거운 이름이다. 책 제목을 전태일이란 이름에 다른 호칭을 집어넣지 않고, 단순히 <태일이>라고 했다.

 

<태일이>, 왠지 듣기에 이름이 뭔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시장 앞 도로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한 그가 40년 정도 지난 오늘 날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현재와 지난 과거와 계속 대화하는 것이라 한다. 전태일의 역사가 현대에 와서도 역사라는 매개체 아래 계속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태일이>는 그런 무거운 전태일의 일대기를 만화라는 매체로 통해 쉽게 접근하려 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 총 5편으로 구분되어 있고, 만화책 역시 총 5권으로 이루어졌다.

 

각 책마다 전태일의 모습이 담겨있다. 글로 보는 전태일의 모습과 다르게 만화책으로 읽는 전태일의 모습은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글로 읽는 것을 이미지로 연상하더라도, 시각적으로 만화로 보는 이미지의 흡수는 충격적인 부분이 많다. 게다가 마지막에 와서는 만화가 아닌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운동에 소극적인 이소선 여사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아들이 죽자, 노동당국과 공장업주들이 와서 큰돈을 내밀면서 보상금을 줄 테니 그만 하자라고 하는 모습에서 현실의 도덕성에 한숨이 나온다. 자신의 아들이 여공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분신하여 몸을 날리는데,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고 오히려 묵살하려고 한다.

 

만약 거기서 돈만 받고 없던 일로 하면 평생 그 짐은 이어 후회만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줄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삶을 산다. 단지 아들에게 들은 한 마디가 가슴에 화살을 날리는 기분이다. 전태일의 동생은 오빠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학비가 밀렸다고 돈을 달라고 했다. 그때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매우 슬픈 후회를 했다고 한다. 전태일은 공장에 가면 막내 동생보다 어린 소녀들이 손에 물집이 잡혀 피가 나올 정도고, 공장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폐암으로 죽고, 게다가 죽어 가는데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로 때리고 욕설을 하는 모습을 참으로 괴롭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내가 살던 지역에 규모가 큰 공단이 몇 군데가 있었기에 그 공장에 일하던 여공들의 비참한 삶을 말이다. 재봉기계에서 바느질하다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을 말이다. 잠이 오지 않게 하려고 커피나 박카스 정도 먹이는 것은 그야말로 신사적인 행동이다. 강제로 혈관주사를 놓아 밤과 새벽에도 인간을 기계와 같이 돌렸다. 그 어린 소녀들에게 말이다. 배고프다는 것은 엄청 슬픈 일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다고 배고픔과 가난 그 자체가 죄가 아닌데, 왜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전태일이 날린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고통 받는 자들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내가 고생하여 형제와 자식이 성공할 수 있다면 희생하는 것은 우리는 줄곧 보아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되어도 자신의 몸이 병들고 정신적으로 죽어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성공한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족쇄로 안겨준다. 성공도 아주 일부분이 나머지는 자신의 운명을 되풀이 되는 비극에 처해진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늘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운명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죽는다. 오직 자신을 괴롭히는 쇠사슬은 죽음의 순간에 올 때 비로소 풀린다. 죽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도 그 자신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의 죽음이 있다고 해도 남은 후예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면 그들은 살아갔다고 해도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채 그저 사라진다면 너무 슬픈 것이 아닌가? 그래서 <태일이>를 보면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태일이가 몸을 던진 것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계속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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