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농장 SE
존 할라스, 조이 벳첼러 / 블루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1930년부터 1940년대의 유럽은 파시스트의 태동기였다. 당시의 나치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이 모든 분쟁과 억압에는 독재자란 이름이 항상 끼여 있었다. 이에 대한 비극인가? 1936년 프랑코는 스페인 자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특히 피카소의 명작 중에 하나인 <게로니카>가 바로 프랑크의 독재정치로 말미암아 발생한 잔혹한 살인극을 초현실주의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런 프랑코에 대항하여 세계 각지의 지식인들이나 혁명가들이 스페인이 모였다. 거기에는 영국 문학가인 조지 오웰이 있었고,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자전적 소설을 만들었다. 전쟁에 대한 심각한 공포와 실재적 상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쟁의 참혹함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새겨주었다.

 

그런 조지 오웰이 전쟁 중 부상을 입은 후에 다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서적들이 있으나 특히 <1984>와 <동물농장>은 20세기 문학에서 권장도서로 여길 만큼 좋은 작품이다. <1984>는 미래의 감시국가에 대한 암울함, <동물농장>은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를 다룬 풍자극이다. 전자는 매우 리얼리티한 공포를 내세운다면 후자는 우화로 통해 만든 이야기다. <동물농장>은 1942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1984>는 1948년에 완성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는 어느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것은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인 스탈린이다.

 

스탈린의 폭정은 1930년대부터 신경제개발정책으로 쿨라크의 재산과 식량을 빼앗고, 당시 동아시아의 독립운동가나 이민족들을 강제이주 및 살해한다. 이때 암울한 이야기 중에 하나가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과 동시에 <동물농장>이었다. 어느 쪽이든 암울한 이야기를 다룬 것은 분명하나 <동물농장>은 다른 작품에 비해 재미와 위트를 많이 넣었다. 이것은 곧 히트하여 미국과 한국 등에 퍼지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 이른다. 그 이유는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을 강도높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 진정 비판하는데 있어서 어느 인물에 대한 동정심을 조지 오웰은 보여준다. <1984>에서 골드슈타인으로 안경 낀 마른 남자로 하얀 염소수염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인물은 <동물농장>에서 작은 돼지인 스노볼로 나온다. 그는 러시아혁명에서 레닌 옆에서 직접 지휘하던 레온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에 새롭게 러시아혁명사에서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레닌 사후 소비에트연방의 권력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비극적 혁명사는 1917년 러시아혁명만 아니라 1789년 프랑스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당통이 죽고, 로베스피에르마저 죽자 프랑스혁명은 모조리 끝이 났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에서 혁명이 끝이 났다라고 선언하듯이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일어난 구체제 봉건사회에 대한 반발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압제정치의 새로운 형태로 발생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나, 그것은 그 혁명에 대한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혁명 이후 개혁적인 부분이 문제였다. 두 혁명은 왕정의 압정과 국민들의 가난과 굶주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상부적인 압력이 하부적인 구조를 망쳤고, 다시 하부적인 구조가 상부의 결정방향에 큰 위기를 만든 것처럼 실패한 혁명이야기에서 <동물농장>은 여러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다.

 

존 할라스는 바로 자기 고국인 영국 문학가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다. 제작에서 셀 애니메이션 기법에 런닝타임 70분 정도로서 실사영상으로 만든 영화 <동물농장>보다 시간적 제약이 큰 것이 아쉬웠다. 대신 애니메이션은 표현주의 미학에 따라 보여주므로, 소설의 문자에서 읽히던 부분들을 영상과 소리로 표현하여 다양한 재미와 묘미를 맛볼 수 있었다. 간단한 스토리는 어느 목장에서 주인이 계속하여 제대로 가축들에게 밥을 주지 않고 술만 마셔서 결국 이에 항거하여 농장이 동물에 의해 소유되나 스노볼이 쫓겨나고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살인적인 압제가 되는 것이 주요 메인이다.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관점들을 보면 소설은 화자인 작가가 3인칭으로 관찰하고, 영화는 캐쉬라는 개를 통해 그 개의 눈을 보는 것처럼 3인칭 구조로 했으며, 애니메이션은 당나귀의 시선에서 작품을 정리한다. 물론 카메라 앵글에 따라 비추어지는 대상물은 차이가 나겠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것은 농장의 주인이던 러시아황제 차르를 몰아내는 것과 그 결과 내전과 다른 국가의 내정간섭 등이 같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부분은 작은 돼지 스노볼이 민주주의적 공산국가를 만들려고 하다 나폴레옹이 공권력을 휘둘려 그를 제거한 것이었다.

 

덕분에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시작되고, 한국에서 <동물농장>이 번역되어 널리 퍼진 이유도 바로 스탈린이 집권이고, 그 스탈린은 공산국가를 위장한 관료주의적 전체주의국가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산국가라는 것은 곧 독재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정치철학적 사전용어와 달리 일반론적 사전용어로 되어버려 한국에서 적대적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째든 작품에서 나폴레옹이 사냥개를 이용해 스노볼을 제거할 때 영화와 소설은 그가 죽지 않은 것으로 나오고, 대신 그가 차르왕족과 독일 나치와 손을 잡아 농장을 위협하는 치명적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게 도망치기 북유럽과 프랑스, 그리고 남미로 망명하여 결국 스탈린 보낸 자객인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살해된다. 그런 실화를 다룬 영화로 <트로츠키 암살사건>이란 작품에서 멕시코 어느 마을에서 트로츠키가 피켈에 잔인하게 살해되는 모습을 연출한다. 이때 트로츠키를 살해한 라몬을 맡은 배우는 프랑스 영화배우 알랭 드롱이었다. 알랭 드롱의 젊은 시절의 모습에서 그의 매력과 동시에 스탈린에게 사주 받아 트로츠키를 살해하는 과정을 아주 심적으로 고뇌하는 자객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라몬에게 살해당하는 트로츠키를 맡은 배우는 영국의 명배우 리처트 버튼이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살해된 시점은 추방된 이후 10년 이상 지난 것이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바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냥개들이 스노볼을 무참하게 잡아먹는 것으로 살해된다. 애니메이션이 영화 최초 작품이란 점과 어린이 이상이란 점에서 매우 잔혹한 사건을 이렇게 우화적으로 만든 존 할라스 감독의 실력에 놀라울 뿐이다. 스노볼 추방 이후 뒤 이야기는 거의 비슷하다. 나폴레옹과 그의 일당들이 농장주인의 착취에 반기를 든 동물에게 더 심한 폭정을 기울인 점이다. 달걀을 외부 상인에게 팔고, 닭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많은 동물들을 상해한다. 게다가 든든한 일꾼인 큰 말 복서가 다치자 말고기로 만드는 사람에게 팔아버린다.

 

<동물농장>의 처음 이상적 가치는 이미 실종된 지 옛날이고, 모든 동물들에게 가혹한 노동과 폭력, 가난과 추위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동물농장>을 보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한 점은 분명하다. 본래 레닌과 트로츠키가 목표한 것은 연속적인 혁명이고, 비슷한 개념으로 본다면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가 공화국의 연설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가치에 따라 자유란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주어져야 자유가 비로소 도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을 생각할 때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로 주창하여 결국 관료주의적 전체주의의 결정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그것도 어린이들도 본다는 점에서 상당히 연출력에서 심혈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돋보인 점은 대사가 영국어로 해도 중간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나온 점과 작품 내에서 소리가 없는 것보다 항상 소리가 존재한다. 동물들이 움직이거나 혹은 율동에 맞추어 일을 하거나 농장에서 동물과 인간들의 결투 역시 그렇다. 적절한 박자와 음악적 흐름은 작품 r속의 캐릭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미키마우싱을 충실히 실현한 것이다.

 

당시 제작년도 1954년이란 점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한 연출력이 아닐 수가 없다. 기술의 발전, 컴퓨터그래픽의 도입은 애니메이션 자체에 큰 발전을 준다고 하지만, 그 기법적인 연출력과 상상력은 지금 다시 봐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작품의 비평적인 관찰에서는 본래 소설에서 나폴레옹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나치와 맺는다. 그러면서 돼지와 인간이 서로 누가 돼지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나폴레옹과 그 주변 카르텔들이 원래 농장 주인이던 술주정뱅이 같이 보인다.

 

그리고 복서의 친구인 당나귀가 그들의 행동에 참지 못해 다시 동물농장은 분노의 혁명이 일어나고 작품은 마감한다. 1954년은 한국전쟁이 1953년 휴전 뒤이기 때문에 냉전의 공포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다. 아마 존 할라스의 작품에서는 소비에트연방의 주인인 스탈린 정권에 대해 러시아 사람들이 다시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다시 일어나서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기를 바란 것이 보인 듯했다. 이에 반해 실사영화에서는 동물농장이 다른 동물의 저항보단 스스로 망했다는 점이 다르나, 조지 오웰의 가진 스탈린에 대한 증오심은 어떻게든 과정을 떠나 결론적으로 완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게 무참하게 살해된 트로츠키는 제이슨 바커라는 철학자가 만든 영화 <marx reload>에서 포스트 중앙에 나온다.

 

그 뒤로는 아주 낯익은 인물인 슬라보예 지젝이 보이고 말이다. <동물농장>에서 실제적인 모티브는 스탈린이 펼친 독재와 폭력이었으나, 그것을 알게 해주고 비판해주게 한 것은 바로 트로츠키였다. 소설 <1984>에서 오세아니아에 큰 적이고, 빅 브라더와 본래 면식이 있던 자는 스탈린의 정적인 트로츠키다. 그의 서적인 <배반당한 혁명>은 스탈린이 반드시 독재정치로 통해 폭력과 압제를 누리는 것과 동시에 권력욕을 위해 나치와 손잡는 것을 1936년에 예언하고, 그것은 적중했다. 역사란 참으로 오묘하다. 단순히 소설 같은 것이 결국 역사적 사실이고, 혹은 역사적 현실로 변해가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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