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 Leafi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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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먼저 본인이 금회 영화관에서 상영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란 작품을 알게 된 동기는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으나 사실은 다른 이유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김용석 교수님의 “서사철학”이란 도서에서 7가지 서사텍스트를 두고 설명하는 가운데, 이른바 “신화(神話)-대화(對話)-진화(進化)-동화(童話)-혼화(魂畵, Animations)-만화(漫畵)-영화(映畵)” 7가지 서사에서 동화 부분에서 알았다.
 

4번째 서사에서 동화라는 것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로서 겉으로 들리는 내용들은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가령 월트 디즈니의 세계명작 애니메이션에서 담론된 내용을 본다면 “백인남성우월주의” 내지 “여성종속화”적인 면이 많이 숨어 있다.

게다가 원작은 아주 잔혹하고 추잡스러운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엄청나게 미화되어 마치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토리로서 정해져 있다. 사실 위 작품의 기초는 사실 신화이다. 신화란 인간의 표피적인 부분보다는 내면적인 욕망과 이상의 괴리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런 점으로 서사라는 부분에서 신화와 동화 기본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많이 깔려 있으며, 문학의 시초가 신화라는 점에서 후에 새롭게 영상서사로 이어질 만화, 영화, 혼화는 문학적인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사실 서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대화로 시작한 구술서사에서 글자를 기록물에 남기는 문자서사로 발전했다.

그런 부분들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서사체로 다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말로 오는 구술서사인가? 글로 오는 문자서사인가? 녹음되어 귀로 들리는 음성서사인가? 이미지로 되어 있는 영상서사인가?” 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다르게 받아들일 뿐이다. 모든 이야기 구조나 내용은 변동이 없으나 단지 보고 듣는 방법의 차이가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본인이 감상한 <마당을 나온 암탉>의 경우는 원작이 동화라는 정지된 이미지를 가진 영상서사에서 애니메이션이란 움직임의 미학을 가진 영상서사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서사구조를 분석해보고 또한 여기서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라고 나는 생각하며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한 비평을 적어 보려고 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계관의 경계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기존 세계와 다른 세계의 분기점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나온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인 잎싹은 자신이 살던 양계장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잎싹이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자신의 삶이 거기에 머무른 채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시간은 멈추어 있던 것이다.

양계장에서 식사시간에 맞추어 먹이를 먹고 그저 수정되지 않은 달걀을 낳는 잎싹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양계장 문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 기존 자신이 살아온 삶과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잎싹은 죽은 사체처럼 연기하여 양계장을 벗어났으며, 결국 마당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그녀가 머물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었다. 모두들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저기 양계장이야!”라고 말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굳이 잎싹만이 아닌 우리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자신의 틀과 공간 속에서 멈추어 나오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정체성을 잃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사회를 만들며 타인과의 소통으로 통해 정치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잎싹은 갇혀있는 양계장의 사회를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자신의 안락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관을 위해서였다.

잎싹은 암탉이었으나 병아리를 가질 수 없었다. 오로지 병아리는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뚱뚱한 수탉만의 권위였다. 양계장의 의미는 그런 가부장적인 모습을 표현해낸 곳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줌은 추후 잎싹의 아들인 “초록이”가 양계장에서 탈출하자 수탉의 아이인 “도미솔”이 반란을 일으켜서 수탉의 벼슬이란 감투를 쓰게 된다.

이른바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하고 아버지를 하나의 속박당하는 존재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래도 역시 한국인이 만든 작품이라 아들은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인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임으로 하여 자신의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근친상간과 친부살해라는 패륜적인 죄악으로 결국 자신의 눈을 찔러 죽을 때까지 맹인으로 살았으나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든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잎싹은 그런 일부다처제의 가부장적인 세계에 갇혀 자신의 삶을 표출하지 못한 심리적인 억압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런 부분은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청둥오리인 “나그네”의 알을 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가부장적인 권위에서 뚱뚱한 수탉의 알을 품은 다른 암탉이 부러워하던 잎싹은 이른바 모성애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마당을 나온 암탉>의 두 번째 극적 플롯인 “나그네의 배필의 죽음”에서(첫 번째 극적플롯은 잎싹이 양계장을 탈출하여 족제비에게 습격 받은 후에 나그네의 도움으로 구출된 것) 잎싹은 자신의 자식이 아닌 초록이의 알을 처음 품을 때 자신의 얼굴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모성애를 가지고 싶었던 것과 자신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녀로 통해서이다.

생물이 살아가면서 모두 유한한 수명이 있으나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물이 자기와 똑같은 분신을 재생산으로 통해 가능했다. 그러나 암탉인 잎싹이 청둥오리인 초록이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생물적인 가치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를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이질적인 방법이다. 그런 이질적인 잎싹의 가치를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공간의 경계에서 극히 들어낸다. 처음에 양계장을 탈출할 때와 수달과 만나 거처를 만들 때, 나그네가 죽고 나자 늪으로 갈 때도 공간적인 이동이 계속 일어난다. 잎싹은 자신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분명히 양계장이나 오히려 양계장에서 멀어져서 더 새로운 세계로 간다.

그런 공간으로 옮기면서 잎싹은 모두의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대우만 받을 뿐이다. 인간은 무리를 이루고 사회를 가지게 되면 자신만의 공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른바 문화세계는 비슷한 부류나 동일한 접점을 가진 존재들이 만나서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잎싹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갈퀴가 있어도 수영할 수 없으며, 게다가 다른 동물처럼 강력한 힘이 없다.

오로지 잎싹은 자신의 의지로만 나그네의 아들인 초록이를 키울 뿐이다. 닫힌 세계에서 항상 자신에게 따뜻하지 못한 열린 세계로 가는 잎싹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초록이의 성장이다. 초록이의 성장은 아주 의미신장하다. 왜냐하면 초록이는 분명 청둥오리이나 잎싹이를 엄마로 본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질수록 엄마와 다른 자신의 모습에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잠수가 가능하고, 수영도 잘하며 나중에 하늘을 날아 청둥오리 파수꾼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찾을수록 초록이는 엄마와의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엄마의 열린 공간인 하늘이 이제는 초록이가 살아야 하나의 커뮤니티로 된다. 물론 처음에 청둥오리 사회에서 초록이는 외면을 받지만, 파수꾼 경연대회 성과로 통해 그 무리의 리더로 급상한다.

그것으로 통해 더 이상 초록이는 암탉의 아이가 아니라 청둥오리 무리의 일원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 세계의 구분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청둥오리와 날지 못하는 암탉 사이에는 분명 이원화적인 공간적 대립이 성사된 것이다. 물론 잎싹은 청둥오리가 아니라 날지 못한다. 거기에 반해 초록이는 날 수 있기 때문에 잎싹이가 가고 싶은 세상을 대신 날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초록이의 성장을 위해 잎싹이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초록이에게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그리고 잎싹이는 천천히 야위어가고 결국 겨울이 다가오자 병에 걸린다. 청둥오리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잠시 늪에 머물다가 겨울을 보내고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런 사계절이란 자연의 순환 아래 초록이는 청둥오리의 일원으로써 떠나게 된다.

슬픈 사실은 초록이가 청둥오리의 무리로 가게 되어 엄마인 잎싹이와 모든 것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그동안 청둥오리 무리 속에서만 살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초록이는 자신의 발에 묶인 붉은 끈을 계속 묶인 채로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잎싹이와 보내던 유일한 추억이며 흔적이었다. 또한 그것은 잎싹이가 닫힌 양계장과 마당을 나와 넓은 세상에 나와 타인의 아이를 자신의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작품 마지막으로 오면서 <마당을 나온 암탉>은 기존에 보이던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갈등의 존재와의 화해이다. 물론 그 화해는 잎싹이의 희생이라는 극적플롯이 존재한다. 잎싹이가 사랑하던 나그네와 나그네가 사랑했던 어느 암컷 청둥오리의 목숨을 앗아간 족제비가 사실은 잎싹이 못지 않은 모성애를 가진 것이다. 잎싹이가 어느 작은 동굴에 가니 어린 족제비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우연히 족제비와 굴앞에서 마주친 잎싹이는 초록이가 족제비 발에 잡힌 것을 보았다. 잎싹이는 족제비의 발톱에 초록이가 죽지 않기 위해 족제비의 어린 새끼를 발톱으로 잡아 초록이를 위기에서 구한다. 그러나 잎싹이는 그런 위기에서 모면한 것을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족제비는 자신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사냥을 한 것이었다. 만약 사냥감을 놓쳐 자신이 굶게 되면 어미 족제비의 몸에서 젖이 나오지 않아 새끼 족제비 모두 굶어죽게 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잎싹이는 초록이를 청둥오리 세계로 돌려보내어 멀리 떠내 보내고, 자신은 족제비의 사냥감으로 자진한다. 족제비가 하얀 눈을 밟고 잎싹이의 뒤를 바라볼 때 잎싹이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런 잎싹이의 모습을 본 족제비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간의 마음을 확인한다. 결국 자신보다 소중한 어린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잎싹이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병아리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나그네의 만남과 나그네의 죽음으로 초록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잎싹이는 그런 희생으로 통해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이루었다. 다시 돌아와 우리 인간 세계에서 본다면 잎싹이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성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닌 타자의 아이를 돌보며 모든 사랑을 주었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잎싹이처럼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솔직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잎싹이의 고귀한 사랑과 자신이 가진 모성애로 통해 진실한 자기 이상실현을 이루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다른 구도에서 이 작품을 보면 초록이의 탄생과 나그네의 죽음이 절묘한 듯하다. 한국신화와 그리스신화의 차이점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게 아버지의 존재다. 그리스신화에서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제거당하는 존재인 반면 한국은 제거당하기 보다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로 나온다. 일단 내가 이것을 조금 의미를 두는 이유는 나그네가 청둥오리의 무리에서 최고의 파수꾼이란 사실과 초록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시 최고의 파수꾼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후레자식인 초록이는 그야말로 한국신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웅의 탄생과 일치한다. 아버지 나그네의 죽음이 있었기에 초록이는 청둥오리 세계의 영웅으로 등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초록이는 그 무리의 리더로써 엄마 잎싹과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듯이 초록이는 한쪽 발에 묶인 붉은 줄로 통해 엄마인 잎싹과의 과거를 공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기존 한국 무속신화에서 자주 보이는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극적플롯과 의례가 존재하는 점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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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만화사 : 1945~2009
박인하.김낙호 지음 / 두보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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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이란 도서에서  한국 문학비평가의 대가인 故 김현 선생님이 남긴 명언이 있다. 그것은 “만화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대중들의 의한 문화이다”는 것이다. 과연 만화라는 것은 김현 선생님의 말씀대로 진실로 대중들과 가까이 있으며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하나의 살아있는 문화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중들과 함께 살아온 이 만화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에게 멀게 혹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제대로 재조명 받지 못한 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 처해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사실 그 누구도 접하기도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지만 한편으로 그런 접근의 용이성으로 대중들로부터 소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우리 대중문화자산 중의 하나인 만화가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러 이런 대접을 받았는지 그동안 만화라는 것은 어떻게 숨쉬어 있었는지 소개하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한국현대만화사 1945~2009>이다. 1945년이란 뜻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의 의미하는 바이고 2009는 2009년까지 한국만화계를 다시 재조명하는 기간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결국 이 책은 한국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만화의 역사를 다시 찾아가는 하나의 만화계보학적인 책이다.

우리가 혹은 부모님이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에게 이 만화라는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진 흐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과연 우리는 만화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받아들이는가? 
 

한편의 역사연구도서처럼 시대와 그리고 상황에 따라 정리된 이 책을 본다면 우리도 차마 알지 못했던 만화에 관한 이야기와 그리고 그 만화 속에 담겨진 우리나라 민족의 역사, 수난, 아픔, 그리고 희망 등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얼룩진 이 피난촌에서 많은 고아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나이가 어린 고아들에게 그들의 마음에 위안될 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만화가 우리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던 하나의 문화적 재산이었다. 추후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다시 재건되어도 아이들에게 여전히 여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만화로 통해 꿈도 키우고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만화란 당시 어린 아이들, 지금의 아버지 내지 할아버지들에게는 인생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만화는 무엇인가? 그저 공부를 방해하고 아이들에게 나쁜 것만 보여주는 불온서적으로 취급당하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 만화계는 이미 지칠 만큼 지치고, 그 자리에 일본 만화책이 대신한다. 이런 역사적인 흐름에 만화는 왜 이리 소외를 받아야 했는가?

그런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는 아주 자세하게 소생히 다루고 있다. 만화탄압으로 대중들의 자유로운 문화향유를 방해한 군사독재정권, 그런 정권 속에 맞추어야 했던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 그런 암흑의 시대에 일부 독점권을 소유한 협회와 회사, 작가의 창의력 부족으로 일본 만화책 표절과 영입, 그리고 각종 국내 단체들의 억압 등등이 말이다.

그야말로 한국의 대중만화 역사는 어둠과 슬픔, 그리고 억압된 환경 아래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대사회에 와서는 이른바 문화콘텐츠라는 문화산업이 각광을 받고 있다. 문화의 기본에서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여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공간에서 만화라는 매체는 다양한 장르와 창의적인 이야기로 통해 대중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만화산업이나 문화는 여전히 열악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다시 재건되기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런 만화문화의 저조함은 우리나라의 문화경쟁력에서 크나큰 손실이 아닌가? 최근 예전에 소년챔프에서 연재하였던 “프리스트”가 미국 영화로 다시 재각본되어 상영된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좋은 소재가 있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및 애니메이션화되어 대중들에게 선보이지 못했다. 이 얼마나 아깝고 슬픈 일인가? 얼마 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방영한 임당열씨의 흑신(黑神)과 프리징 역시 한국에서 제작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게다가 이 만화는 애초부터 배경과 인물을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설정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만화계의 슬픈 초상인 것이다. 작가들마저 국내 만화시장으로 생존할 수 없음에 따라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시장을 겨냥할 수밖에 없던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우리 만화산업은 병이 들어 시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름하는 역사적인 흐름을 이 책에서 보이고,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나가야 비전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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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시드 - [초특가판]
카타야마 카즈요시 감독 / 플래닛 엔터테인먼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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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남자 니체가 만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국가에 대해서 나온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독을 마시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의 완만한 자살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이건 마치 Apple Seed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시로 마시무네가 원작으로 한 이 애플시드는 그 말 그대로 사과씨앗이다. 사과는 기독교 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서 이브가 사과를 따먹음으로서 인간은 지혜와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것처럼 애플시드라는 작품에서 보이는 인간들이란 그런 자신들의 지혜에 자신들을 죽이고 그 죽음으로 태어난 새로운 인간종족에게 자신의 인생가치마저 넘긴다.




작품 초반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 했던 프레이어는 그림을 그리는 도중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빌딩 숲속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녀는 이 완벽하게 보이는 도시가 모든 것이 풍족한 도시가 싫었다. 그녀는 새장에 갇힌 새보다 그 새장을 만들어 놓은 인간들이 더욱 더 괴롭게 여겼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오만으로 가득차서 인간이 만든 문명이 결국 인간을 속박하였다. 그 속박은 완벽한 세상은 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개체로서 존재감은 특출 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저 이미 조작되어 하나의 부속품으로 되어 버린 인간세상인 것이다.




프레이어의 사랑하는 연인인 카론은 이런 세상에 대한 회의감과 의문감 그리고 좌절감으로 남은 여생을 괴롭게 살아간다. 그가 보고자 했던 아름다운 세상은 그저 하나의 신기루에 가까운 것일까? 프레이어의 죽음은 바로 이런 완벽함을 추구하려던 인간의 오만일까?




애플시드에서는 그리스신화를 인용한다. 이 애플시드 작품에서 완벽한 도시의 총감은 이 도시 이름 올림푸스의 파스테논에서 마치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에 의해 탄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으로 군림하려고 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신전 같은 곳에 놓여있는 아테나 여신상은 기계과학으로 무장하여 모든 것을 제압하는 힘의 논리들을 말이다.




외형적으로 아름답게만 만들어진 도시 완벽하게만 보이려고 하는 세상 모든 것이 정말 정의로운가? 아니면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라 볼 수 있을까? 인간은 새장을 만든 주인이었던 동시에 새장에 갇힌 한 마리의 새로 그 새장이 너무 간과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물리적인 새장을 만들어 새를 넣고 키움으로 자신은 새장 안에 갇힌 것을 망각했을까?




애플시드에서 보이는 인간은 문명이란 하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그저 정해진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그게 언제가 인간을 소외해도 혹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도 인간 그 자체를 하나의 도구로 만들어 버려도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방관할 뿐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그런 틀에서 벗어남을 두려워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인간은 정치적이기에 사회적이다. 그 사회는 인간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개체요 단체다. 하지만 인간을 위한 사회인지 아니면 사회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는 우리 스스로 생각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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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助交際って未だにあるの? 2011-05-3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로 생각할 것은 아닐까
 
신세기 에반게리온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극장판
안노 히데아키 감독 / 엔터라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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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of eva를 감상하다보면 양산형 에바가 아스카의 2호기를 제압하고 난 뒤에 초호기를 다시 제압하려고 한다. 이때 2호기를 제압하던 장면에서 아스가는 자신이 가진 AT필드의 의미를 깨닫고 저항하지만 무참하게 제례의 에바들에게 먹히고 만다.  자신이 신지에게 졌다는 사실과 자신이 어두운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없어 어둠에 갇힌 아스카가 비로소 자신의 모순을 이겨내어 세상을 향해 나가려고 했으나, 그런 간절한 마음은 어디에 가고 없는지 무참히 밟혀 버린다.
신지가 초호기를 타고 무기력하게 있는데, 양산형 에바가 신지의 초호기를 이용하여 인류보완계획을 실시하게 된다. 이때 제례의 노인들은 에바 초호기의 자아를 파괴하여 세상을 모두 무로 돌아가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에바와 사도가 사투를 펼칠 때 언제나 사도는 AT필드를 전개한다. 그리고 에바는 사도의 AT필드를 무효화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AT필드를 전개하여 사도를 파괴시킨다. AT필드 절대로 타인이 간섭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자신만의 마음영역,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인류보완계획으로 통해 안티AT필드를 전개시킨다.
그러나 이 안티AT필드라는 것이 정말 나는 무섭기 시작했다. 어린 청소년의 자아를 부서가면서 모두 하나로 되어야 한다는 의식구조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언제나 인형이란 단어가 나온다. 인형같은 얼굴과 몸짓, 마음을 가진 레이나 자신은 인형이 되기 싫으나 어머니의 인형이 되버린 아스카를 보면서 우리 어린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은 항상 인형이 되어달라는 현실을 보게된다. 인형이 되어 공부만 잘해라 인형이 되어 이것만 해라. 예초에 에반게리온 TV판 1화에서 이카리 겐도는 자신의 아들에게 에바에 그냥 타라고 한다. 
아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들의 입장과 수단에 의해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다. 그 사지는 겉으로 신체적인 죽음이지만, 현실은 정신적, 심리적, 인격적인 죽음으로 연결된다. 비양심적인 청소년들, 의식 결핍적인  청소년들, 이기적인 청소년들을 보면 그런 청소년들을 보고 현대사회에서는 청소년범죄와 교육문제를 가지고 떠들어 댄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만들어 놓은 것은 누구인가? 겉으로는 아이고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면서 뒤에서나 혹은 다시 그렇게 청소년들을 사지로 몰고가는 배후의 그림자들은 누구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나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과 가슴 한편에서 내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어른들은 겉으로는 아이를 위해서입니다. 내 아이가 최고입니다. 내 아이만큼은 아닙니다라고 하지만 그 말 뒤를 생각해보면 자신의 체면이나 과시욕으로 가득찬 위선덩어리다. 위선을 정의의 가면처럼 둘러싼 그들에게 아이들에게 좋은 미래를 바라는가? end of eva에서 신지라는 아이의 자아를 파괴해서 얻고자 하는 어른들은 과연 무엇인가? 자신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뒤에는 그 미래를 만들어가는 청소년을 억압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은가?
눈만 뜨면 바뀌는 교육정책, 하루가 멀다하고 그런 어른들의 장난같지도 않은 놀이에 놀아나는 청소년과 그들의 부모들, 그러면서 인성과 개성을 존중한다고 이야기를 내뱉는 그들의 검은 혓바닥에서 우리의 청소년들은 희생되어가기 시작한다. 언제가 그런 교육과 사회적에 길들어버린 아이들은 또 어른이 되겠지? 다시 그들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교육이 아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일그러진 가치를 또 다시 밑에 청소년들에게 마치 자기가 위대한 교육철학가인양 외치면서 선물을 할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end of eva 같은 세상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인류보완계획은 과연 누가 하고 있는가? 애니메이션에서 하고있는 제례? 아니면 그것을 이용하려는 이카리겐도? 이것만 생각하면 에반게리온은 그냥 애니메이션 봤다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보완계획은 애니메이션 세계만 아닌 현실에서도 계속 일어난다. 그건 이 일그러지고 이기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현실속의 가상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면 안되는 것들이 어느 개인, 단체, 집단, 대다수 사회 구성원 등의 암묵적인 관념 아래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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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 데스 & 리버스 극장판
안노 히데아키 감독 / 기타 (DVD)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은 사실 그렇게 재미를 위해 만든 작품이라기보다는 작품 내의 캐릭터로 통해 자신의 입장을 대입하여 거기에 동감을 얻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깐 애초부터 학원물이나 로맨스에 자주 등장하는 코믹물이 아닌 말 그대로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제작된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적인 사도, 그들은 애초부터 등장하는 장소나 무엇에서 발생하여 왜 그렇게까지 싸우는지 정확하게 이유가 밝혀진 것이 없다. 단지 NERV 기지에 가서 아담과 접촉하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목적의식이 뚜렷하지도 않고 뭔가 투쟁함에 있어서 정의라는 큰 흐름을 짊어지기 어려운 적이 사도다.

 

그렇다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적은 누구일까? 그것은 사도와 싸우고 있는 인간 그 자신일 것이다. 애초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사도로 인해 갈등보다는 인간 사이 내부의 갈등이 더욱 심하다. 가족문제, 연인문제, 친구문제 등등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을 사도의 경쟁에서 하나의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은 그저 눈이 가는대로 감상한다면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인류의 최고의 적인 사도의 근원지나 최종대장이 사도라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라는 모순을 낳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사도인 카오루를 기억하는가? 그는 분명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으나 사실 아담과 같은 속성으로 만들어진 유전자조작 인간이면서도 사도였다.

 

인간은 신의 모습을 흉내 낸 동물이라면 그 동물이 어느 순간 신을 다시 흉내 낸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다가 모자라 인간들은 자신들과 가장 닮은 인형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 버린다. 인형은 인간이 아니나 오히려 인간보다 더 완벽한 모습을 가진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 그 자체의 인간이란 존재들은 다른 인간에게 완벽한 존재로 다가오기 보다는 불편한 존재로 온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100% 만족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의 본을 떠서 만든 인형만이 100% 만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를 거슬리지 않고, 게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갈아 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런 인형으로 만들어진 존재도 반항한다.

 

그 반항의 주체는 아야나미 레이, 즉 이카리 사령관이 만들어낸 복제인간이다. 레이는 이카리 사령관의 인형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겉모습은 인간이나 감정과 이성은 인형 즉 이카리 사령관에게 완벽한 존재로 나올 뿐이다. 그런데 그 완벽함이 이카리 사령관에게 만족을 줄 지 모르나 다른 사람들에겐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 점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데스 & 리버스 극장판는 TVA 작품을 하나의 축약으로 이런 이야기를 단락단락 끊으면서 진행한다. 작품 내의 주인공은 이카리 신지, 아야나미 레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지만, 사실 그 뒤에 모든 것은 이카리 사령관이 숨어 있다. 그 숨은 고독한 남자를 뒤로 하여 이 데스 & 리버스는 인류가 과연 싸우는 것이 사도인지 인간인지를 짧은 줄거리로 스쳐가듯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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