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 Leafi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먼저 본인이 금회 영화관에서 상영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란 작품을 알게 된 동기는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으나 사실은 다른 이유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김용석 교수님의 “서사철학”이란 도서에서 7가지 서사텍스트를 두고 설명하는 가운데, 이른바 “신화(神話)-대화(對話)-진화(進化)-동화(童話)-혼화(魂畵, Animations)-만화(漫畵)-영화(映畵)” 7가지 서사에서 동화 부분에서 알았다.
 

4번째 서사에서 동화라는 것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로서 겉으로 들리는 내용들은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가령 월트 디즈니의 세계명작 애니메이션에서 담론된 내용을 본다면 “백인남성우월주의” 내지 “여성종속화”적인 면이 많이 숨어 있다.

게다가 원작은 아주 잔혹하고 추잡스러운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엄청나게 미화되어 마치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토리로서 정해져 있다. 사실 위 작품의 기초는 사실 신화이다. 신화란 인간의 표피적인 부분보다는 내면적인 욕망과 이상의 괴리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런 점으로 서사라는 부분에서 신화와 동화 기본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많이 깔려 있으며, 문학의 시초가 신화라는 점에서 후에 새롭게 영상서사로 이어질 만화, 영화, 혼화는 문학적인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사실 서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대화로 시작한 구술서사에서 글자를 기록물에 남기는 문자서사로 발전했다.

그런 부분들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서사체로 다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말로 오는 구술서사인가? 글로 오는 문자서사인가? 녹음되어 귀로 들리는 음성서사인가? 이미지로 되어 있는 영상서사인가?” 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다르게 받아들일 뿐이다. 모든 이야기 구조나 내용은 변동이 없으나 단지 보고 듣는 방법의 차이가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본인이 감상한 <마당을 나온 암탉>의 경우는 원작이 동화라는 정지된 이미지를 가진 영상서사에서 애니메이션이란 움직임의 미학을 가진 영상서사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서사구조를 분석해보고 또한 여기서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라고 나는 생각하며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한 비평을 적어 보려고 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계관의 경계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기존 세계와 다른 세계의 분기점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나온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인 잎싹은 자신이 살던 양계장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잎싹이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자신의 삶이 거기에 머무른 채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시간은 멈추어 있던 것이다.

양계장에서 식사시간에 맞추어 먹이를 먹고 그저 수정되지 않은 달걀을 낳는 잎싹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양계장 문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 기존 자신이 살아온 삶과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잎싹은 죽은 사체처럼 연기하여 양계장을 벗어났으며, 결국 마당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그녀가 머물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었다. 모두들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저기 양계장이야!”라고 말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굳이 잎싹만이 아닌 우리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자신의 틀과 공간 속에서 멈추어 나오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정체성을 잃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사회를 만들며 타인과의 소통으로 통해 정치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잎싹은 갇혀있는 양계장의 사회를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자신의 안락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관을 위해서였다.

잎싹은 암탉이었으나 병아리를 가질 수 없었다. 오로지 병아리는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뚱뚱한 수탉만의 권위였다. 양계장의 의미는 그런 가부장적인 모습을 표현해낸 곳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줌은 추후 잎싹의 아들인 “초록이”가 양계장에서 탈출하자 수탉의 아이인 “도미솔”이 반란을 일으켜서 수탉의 벼슬이란 감투를 쓰게 된다.

이른바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하고 아버지를 하나의 속박당하는 존재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래도 역시 한국인이 만든 작품이라 아들은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인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임으로 하여 자신의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근친상간과 친부살해라는 패륜적인 죄악으로 결국 자신의 눈을 찔러 죽을 때까지 맹인으로 살았으나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든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잎싹은 그런 일부다처제의 가부장적인 세계에 갇혀 자신의 삶을 표출하지 못한 심리적인 억압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런 부분은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청둥오리인 “나그네”의 알을 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가부장적인 권위에서 뚱뚱한 수탉의 알을 품은 다른 암탉이 부러워하던 잎싹은 이른바 모성애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마당을 나온 암탉>의 두 번째 극적 플롯인 “나그네의 배필의 죽음”에서(첫 번째 극적플롯은 잎싹이 양계장을 탈출하여 족제비에게 습격 받은 후에 나그네의 도움으로 구출된 것) 잎싹은 자신의 자식이 아닌 초록이의 알을 처음 품을 때 자신의 얼굴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모성애를 가지고 싶었던 것과 자신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녀로 통해서이다.

생물이 살아가면서 모두 유한한 수명이 있으나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물이 자기와 똑같은 분신을 재생산으로 통해 가능했다. 그러나 암탉인 잎싹이 청둥오리인 초록이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생물적인 가치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를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이질적인 방법이다. 그런 이질적인 잎싹의 가치를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공간의 경계에서 극히 들어낸다. 처음에 양계장을 탈출할 때와 수달과 만나 거처를 만들 때, 나그네가 죽고 나자 늪으로 갈 때도 공간적인 이동이 계속 일어난다. 잎싹은 자신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분명히 양계장이나 오히려 양계장에서 멀어져서 더 새로운 세계로 간다.

그런 공간으로 옮기면서 잎싹은 모두의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대우만 받을 뿐이다. 인간은 무리를 이루고 사회를 가지게 되면 자신만의 공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른바 문화세계는 비슷한 부류나 동일한 접점을 가진 존재들이 만나서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잎싹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갈퀴가 있어도 수영할 수 없으며, 게다가 다른 동물처럼 강력한 힘이 없다.

오로지 잎싹은 자신의 의지로만 나그네의 아들인 초록이를 키울 뿐이다. 닫힌 세계에서 항상 자신에게 따뜻하지 못한 열린 세계로 가는 잎싹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초록이의 성장이다. 초록이의 성장은 아주 의미신장하다. 왜냐하면 초록이는 분명 청둥오리이나 잎싹이를 엄마로 본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질수록 엄마와 다른 자신의 모습에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잠수가 가능하고, 수영도 잘하며 나중에 하늘을 날아 청둥오리 파수꾼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찾을수록 초록이는 엄마와의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엄마의 열린 공간인 하늘이 이제는 초록이가 살아야 하나의 커뮤니티로 된다. 물론 처음에 청둥오리 사회에서 초록이는 외면을 받지만, 파수꾼 경연대회 성과로 통해 그 무리의 리더로 급상한다.

그것으로 통해 더 이상 초록이는 암탉의 아이가 아니라 청둥오리 무리의 일원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 세계의 구분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청둥오리와 날지 못하는 암탉 사이에는 분명 이원화적인 공간적 대립이 성사된 것이다. 물론 잎싹은 청둥오리가 아니라 날지 못한다. 거기에 반해 초록이는 날 수 있기 때문에 잎싹이가 가고 싶은 세상을 대신 날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초록이의 성장을 위해 잎싹이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초록이에게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그리고 잎싹이는 천천히 야위어가고 결국 겨울이 다가오자 병에 걸린다. 청둥오리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잠시 늪에 머물다가 겨울을 보내고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런 사계절이란 자연의 순환 아래 초록이는 청둥오리의 일원으로써 떠나게 된다.

슬픈 사실은 초록이가 청둥오리의 무리로 가게 되어 엄마인 잎싹이와 모든 것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그동안 청둥오리 무리 속에서만 살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초록이는 자신의 발에 묶인 붉은 끈을 계속 묶인 채로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잎싹이와 보내던 유일한 추억이며 흔적이었다. 또한 그것은 잎싹이가 닫힌 양계장과 마당을 나와 넓은 세상에 나와 타인의 아이를 자신의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작품 마지막으로 오면서 <마당을 나온 암탉>은 기존에 보이던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갈등의 존재와의 화해이다. 물론 그 화해는 잎싹이의 희생이라는 극적플롯이 존재한다. 잎싹이가 사랑하던 나그네와 나그네가 사랑했던 어느 암컷 청둥오리의 목숨을 앗아간 족제비가 사실은 잎싹이 못지 않은 모성애를 가진 것이다. 잎싹이가 어느 작은 동굴에 가니 어린 족제비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우연히 족제비와 굴앞에서 마주친 잎싹이는 초록이가 족제비 발에 잡힌 것을 보았다. 잎싹이는 족제비의 발톱에 초록이가 죽지 않기 위해 족제비의 어린 새끼를 발톱으로 잡아 초록이를 위기에서 구한다. 그러나 잎싹이는 그런 위기에서 모면한 것을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족제비는 자신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사냥을 한 것이었다. 만약 사냥감을 놓쳐 자신이 굶게 되면 어미 족제비의 몸에서 젖이 나오지 않아 새끼 족제비 모두 굶어죽게 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잎싹이는 초록이를 청둥오리 세계로 돌려보내어 멀리 떠내 보내고, 자신은 족제비의 사냥감으로 자진한다. 족제비가 하얀 눈을 밟고 잎싹이의 뒤를 바라볼 때 잎싹이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런 잎싹이의 모습을 본 족제비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간의 마음을 확인한다. 결국 자신보다 소중한 어린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잎싹이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병아리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나그네의 만남과 나그네의 죽음으로 초록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잎싹이는 그런 희생으로 통해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이루었다. 다시 돌아와 우리 인간 세계에서 본다면 잎싹이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성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닌 타자의 아이를 돌보며 모든 사랑을 주었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잎싹이처럼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솔직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잎싹이의 고귀한 사랑과 자신이 가진 모성애로 통해 진실한 자기 이상실현을 이루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다른 구도에서 이 작품을 보면 초록이의 탄생과 나그네의 죽음이 절묘한 듯하다. 한국신화와 그리스신화의 차이점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게 아버지의 존재다. 그리스신화에서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제거당하는 존재인 반면 한국은 제거당하기 보다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로 나온다. 일단 내가 이것을 조금 의미를 두는 이유는 나그네가 청둥오리의 무리에서 최고의 파수꾼이란 사실과 초록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시 최고의 파수꾼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후레자식인 초록이는 그야말로 한국신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웅의 탄생과 일치한다. 아버지 나그네의 죽음이 있었기에 초록이는 청둥오리 세계의 영웅으로 등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초록이는 그 무리의 리더로써 엄마 잎싹과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듯이 초록이는 한쪽 발에 묶인 붉은 줄로 통해 엄마인 잎싹과의 과거를 공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기존 한국 무속신화에서 자주 보이는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극적플롯과 의례가 존재하는 점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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