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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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작년 11월에 읽은 시집이다.
그렇다.

- 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

깨진 얼음 조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밟으며 지나가리라

얼음 조각과 얼음 조각이 부딪칠 때마다
얼음 조각이 태어나고
부드러운 눈은 먼지와 뒤엉켜 눈멀어가리라 - 눈과 얼음 중

<산책은 길어지고>
그의 왼손이 그녀의 오른손과 스치고
그녀의 그림자가 그의 그림자와 겹쳐질 때

그들은 서로에게
낯선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산책은 길어지고
둘 사이에 끼어든 두려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란히 걷는 것은
아주 섬세한 행위랍니다
너무 앞서지도 너무 뒤서지도 않게
거리와 보폭을 조절해야 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걸음은 어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뚝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흰 실과 검은 실을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이 오면
그때야 서로를 알아보게 될까

산책은 길어지고
흩어진 발자국들은 말을 아끼고
어둠은 남은 발자국들을 다 지우지는 못하고
(전문)

- 어둠의 광맥은 점점 깊어져
그후로 슬픔의 시를 내다 파는 것이 내 일이 되었다. - 향인 중

-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
시인이 된 지 삼십년 만에야 이 고백을 하게 된다. - 시인의 말 중

2024. nov.

#파일명서정시 #나희덕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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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름이 있었다 아침달 시집 3
오은 지음 / 아침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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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되는 시집을 보다가, 아니 내가 읽지 않은 오은 시인의 시집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얼른 사보았다.

오은 시인의 보이스 재생이 되는 시들.

-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오해했습니다.
사람이라 이해하고 사람이라 오해했습니다.
사람을, 마침내 사람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시인의 말 중

- 이야기가 필요해
사람이 있고 집이 있고
집에는 책이 있고
식탁 위에는
꽃병도 있는 이야기 - 궁리하는 사람 중

- 노안이 오고 황달이 들어도 그는 읽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취미는 이제 삶이 되었다 무난한 사람이 되고자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 그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상황에 뛰어들기 위해 읽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읽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읽었을 뿐이었다 그는 돈이나 권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취미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읽는 사람 중

- 빛은 늘 있다. 그리움처럼, 미련처럼. 빛은 꺼지기를, 사라지기를 거부한다. - 않는다 중

2025. sep.

#나는이름이있었다 #오은 #아침달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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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의 아가리 아침달 시집 49
윤초롬 지음 / 아침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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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시리다가 통증까지 느껴지는 강력함으로 다가온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시들.

- 여기와 저기를 분간하지 못해서 이따금 나는 백치라고 불린다.
그 별명이 좋다. - 이따금 중

- 낡을 수 있다는 건 묵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닫힌 장롱 안에서 넥타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쉬었을 것인데
넥타이에게도 자의식이 있다면
이루지 못한 꿈이 있을 것이고 날마다 누군가의 손아귀에 쥐여진 채
목을 조르던 일상을 반겼을지 반추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부디 반성만은 하지 않기를 - 회복기 중

<다만 눈이 내리는 풍경>
눈이 내린다. 무수한 검은 눈동자들이 내린다.

내린다. 내리고 있다. 눈송이라는 개념이 내린다. 허공의 층이 내린다. 온몸으로 머물렀다가 떠나면서 눈송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끝나지 않는 눈송이들이다. 끝나지 않는 눈이 내린다는 개념이, 풍경이라는 개념이 내린다. 순수의 상징이 내린다. 구체적인 차가움이 내린다. 이 모든 반복이, 반복이라는 단어가 내린다. 창백하게 질린 어둠이

내리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순간을 간직하라, 이것이 삶이다, 눈송이는 말하지 않는다. 내리고 내리고 유일한 목적이고 유일한 의미다. 저 눈송이를 보라. 그대가 무엇을 보든 그것이 진실이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 지금 눈이 내린다고

누구라도 말할 수 있다. 누구라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 거듭해서 나는 말한다. 반복해서 말한다. 지금 눈이 내리고 있다. 온 세상에 내리고 있다. 내 모든 존재로 눈이 내리고 있다.

보라, 눈송이 하나에 압도당하는 여기 보편의 인간을 보라, 이파리 한 장 흔들리지 않는 무정한 풍경을

그러나 삽으로 밀고 가는 남자. 검은 우비를 입고 다만 눈을 미는 남자. 제 몸집보다 큰 삽을 들고 걸어온다. 바닥을 민다. 거듭 반복되는 몸짓이 저 눈송이들의 산을 키우고 있다. 남자보다 훨씬 덩치 큰 눈송이들의 산이 저기서 숨 쉬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반복한다. 잠시 멈춘 배경 안에서 남자는 유일하게 풀어지고 있다. 이 순간에 속하지 못한 저 남자 앞에서 다만

응축된 빛의 결정이 내린다. 무수한 사건들의 교차점이 내린다. 폭력과 불신과 타협으로 점철된 뻔한 깨달음이 내린다. 인류의 역사가 내린다. 신이 내린다.
(전문)

- 실수도 경험이라면서요. 미래는 무한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면서요. 삶이란
증명할 필요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 지우지 않겠습니다 중

- 몇 번이고 추락한 공이 다시 날아올라 추락을 새롭게 도모할 때
힘껏 웃어라
너의 단단한 이를 보여라 - 문제아 중

- 시간은 흐른다 각자의 자장 안에서
사물은 낡아간다 떨어지고 뒹굴고 부서지면서
세계의 총량은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의 내면이 끝장나면
또 한 사람의 내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 스테인드글라스 중

- 당신은 모른다. 절망이 얼마나 다정한지를, - 살균 중

- 더 많이 무너지기 위해 부서지겠단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뻔하기조차 하지요.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잘 해내겠습니다. - 서빈백사 중

- 환하고 눈부시다는 단어가 없는
세계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다 나는 사라지고 내 몸만 남아 있는 것 같다 - 앙상한 가지 중

- 세상은 자주 눈부시구나. 저녁이 찾아올 때조차
죄가 늘어나
땅에 얼굴 처박고 맞던 시절엔 차라리 마음 편했지.
하지만 그 백사장에서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 다른 방식 중

2025. jun.

#햇빛의아가리 #윤초롬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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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탄생하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01
이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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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탄생해야 하는데
죽음이 연거푸 탄생하는 시들.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읽었다.

- 본적 없는 아름다움은 끝내 모를 것인가
끝내 모를 것을 사랑하면 아름다움이 될 것인가 - 시인의 말

- 제일 시시한 것은 인간이다
구름 허밍 사라지다 만 너의 꼬리
이쪽의 어둠을 떠메고 저쪽의 어둠에게 가는
길들은 너머까지 밀려 있다 - 애플 스토어 중

- 창을 열었다 슬픔이 가까이다 거짓말이다
슬픔이 한 칸 뒤로 밀려난다 - 죽은 사람 좀 불러줄래요? 중

- 지루하고 멋있다. 그게 필요해
적막. 고립. 그리고 투쟁 - 빛을 펼쳐라 중

<어쩌면 버렸다>
얼굴을 잃어버렸다 어느 순간 버렸을지 모른다 뜨거움으로 위장한 불빛들이 어둠을 빠져나가는 새벽에 어쩌면 어둠 속 어둠이 얼굴들을 먹어치우는 새벽 직전에 어쩌면 어느 순간 구겨서 너의 얼굴에 넣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죽은 사람이 너라는 걸 모른다 너는 돌아오지 않는 다는 걸 모른다 잡으면 바로 잡히는 만지면 바로 만져지는 얼굴이 너라는 걸 모른다 얼굴이 없는데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하는 기시감을 아니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눈을 맞추는 이상한 반복을 어긋나며 겹쳐지는 목소리를 못 알아듣는 말을 계속 자르는 무례를 저지르는 고통을 아니 지루함을 아니 무례는 내가 내 얼굴에게 벌인 일 나는 나도 모르는 인물 나는 내가 모르는 인물 갑자기 울음이 터질 때 세상이 밝았다 어쩌면 이때 버렸다
(전문)

<4월의 기도>
나의 두 손을 맞대는데
어떻게 네가 와서 우는가
(전문)

<이것은 희망의 노래>
검은색으로부터 그것은 떠오른다. 그것은 오로지 검은색이다. 그것은 오로지 검은색이었다가 검은색이고 검은색이 될 것이다. 검은색 속에서 검은색이 떠오른다. 검은색 속에서 검은 바람이 일어난다.

그것은 검은색.

불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휩싸이는 것이다. 검정의 바람이 되는 것이다.

구겨 넣은. 긴 손처럼. 긴 혀처럼.

그리고 침묵.

그 속에 우리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묻히는 것이다.
숨 막히는 것이다. 다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문)

2024. dec.

#사랑은탄생하라 #이원 #문학과지성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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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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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모든 작품을 즐겁게 읽었었는데,
이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읽었다.
삶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쓰여지는 그의 글.

- 그녀의 눈에는 볼 때마다 죽은 애나를 떠올리게 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녀의 눈에서 사라진 적이 없지만, 정확히 그게 무엇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빠릿빠릿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그보다 훨씬 큰 것이지만. 어쩌면 늘 깨어 빛나는 상태라고 묘사할 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아주 간단하게 환하게 빛나는 자아의 힘, 감정과 사고가 서로 얽혀 복잡하게 춤을 추는 가운데도 안에서 밖으로 한껏 뿜어져 나오는 인간의 살아 있는 상태- 아마도 그 비슷한 것일 듯하다, 말이 되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애나가 가졌던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몰리도 그걸 갖고 있다. - 8

- 바움가트너는 지금도 느끼고 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 지금도 살고 싶어 하지만 그의 가장 깊은 부분은 죽었다. 그는 지난 10년간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지난 10년간 그것을 알지 않으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 66

- 9년하고 여덟 달 동안 서로 파괴하는 두 개의 모순된 정신 상태 사이에서 살아 보려고 애쓴 뒤에야, 자신이 이 모든 일을 얼마나 철저하게 엉망으로 만들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고통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 68

- 그런 식으로 책은 태어나기 시작했다. 바움가트너의 생각으로는. 그러니까, 인간 삶이란 외로움과 잠재적 죽음이라는 고속 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가는 통제 불가능한 차라는 독한 비전으로부터. - 228

2025. may.

#바움가트너 #폴오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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