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의 아가리 아침달 시집 49
윤초롬 지음 / 아침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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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시리다가 통증까지 느껴지는 강력함으로 다가온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시들.

- 여기와 저기를 분간하지 못해서 이따금 나는 백치라고 불린다.
그 별명이 좋다. - 이따금 중

- 낡을 수 있다는 건 묵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닫힌 장롱 안에서 넥타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쉬었을 것인데
넥타이에게도 자의식이 있다면
이루지 못한 꿈이 있을 것이고 날마다 누군가의 손아귀에 쥐여진 채
목을 조르던 일상을 반겼을지 반추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부디 반성만은 하지 않기를 - 회복기 중

<다만 눈이 내리는 풍경>
눈이 내린다. 무수한 검은 눈동자들이 내린다.

내린다. 내리고 있다. 눈송이라는 개념이 내린다. 허공의 층이 내린다. 온몸으로 머물렀다가 떠나면서 눈송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끝나지 않는 눈송이들이다. 끝나지 않는 눈이 내린다는 개념이, 풍경이라는 개념이 내린다. 순수의 상징이 내린다. 구체적인 차가움이 내린다. 이 모든 반복이, 반복이라는 단어가 내린다. 창백하게 질린 어둠이

내리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순간을 간직하라, 이것이 삶이다, 눈송이는 말하지 않는다. 내리고 내리고 유일한 목적이고 유일한 의미다. 저 눈송이를 보라. 그대가 무엇을 보든 그것이 진실이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 지금 눈이 내린다고

누구라도 말할 수 있다. 누구라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 거듭해서 나는 말한다. 반복해서 말한다. 지금 눈이 내리고 있다. 온 세상에 내리고 있다. 내 모든 존재로 눈이 내리고 있다.

보라, 눈송이 하나에 압도당하는 여기 보편의 인간을 보라, 이파리 한 장 흔들리지 않는 무정한 풍경을

그러나 삽으로 밀고 가는 남자. 검은 우비를 입고 다만 눈을 미는 남자. 제 몸집보다 큰 삽을 들고 걸어온다. 바닥을 민다. 거듭 반복되는 몸짓이 저 눈송이들의 산을 키우고 있다. 남자보다 훨씬 덩치 큰 눈송이들의 산이 저기서 숨 쉬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반복한다. 잠시 멈춘 배경 안에서 남자는 유일하게 풀어지고 있다. 이 순간에 속하지 못한 저 남자 앞에서 다만

응축된 빛의 결정이 내린다. 무수한 사건들의 교차점이 내린다. 폭력과 불신과 타협으로 점철된 뻔한 깨달음이 내린다. 인류의 역사가 내린다. 신이 내린다.
(전문)

- 실수도 경험이라면서요. 미래는 무한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면서요. 삶이란
증명할 필요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 지우지 않겠습니다 중

- 몇 번이고 추락한 공이 다시 날아올라 추락을 새롭게 도모할 때
힘껏 웃어라
너의 단단한 이를 보여라 - 문제아 중

- 시간은 흐른다 각자의 자장 안에서
사물은 낡아간다 떨어지고 뒹굴고 부서지면서
세계의 총량은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의 내면이 끝장나면
또 한 사람의 내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 스테인드글라스 중

- 당신은 모른다. 절망이 얼마나 다정한지를, - 살균 중

- 더 많이 무너지기 위해 부서지겠단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뻔하기조차 하지요.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잘 해내겠습니다. - 서빈백사 중

- 환하고 눈부시다는 단어가 없는
세계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다 나는 사라지고 내 몸만 남아 있는 것 같다 - 앙상한 가지 중

- 세상은 자주 눈부시구나. 저녁이 찾아올 때조차
죄가 늘어나
땅에 얼굴 처박고 맞던 시절엔 차라리 마음 편했지.
하지만 그 백사장에서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 다른 방식 중

2025. jun.

#햇빛의아가리 #윤초롬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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