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날려면 빨리 자야한다는 생각에서 오랜만에 탈출한 나는 일단 목욕통에 물을 틀어 놓았다. 보통 집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가 아닌 우리집 아이들이 김치통이라고 부르는 그 목욕통에 말이다. 그것을 처음 살 때에는 김장김치를 절이는 용으로 샀지만 일년에 한 번 쓰는지라 본래의 용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히려 아이들의 목욕 놀이통이 되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한 번씩 내 물놀이터도 되는 김치통. 아이는 두 명이 들어 가고 어른 한 사람도 거뜬히 들어 가도 되는 김치통. 가끔 난 그 뻘건 김치통에서 TV광고에 거품 목욕하는 여인네를 흉내 낸다. 오늘도 아이들이 곤히 잠들자 거품 목욕을 생각했다. 업드려서 보던 책의 진도가 잘 나가서 물속에서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목욕탕 문을 여니 뿌연 수증기가 앞을 가린다. 뜨끈 뜨끈한 물속으로 책 한 권 들고 뛰어드는 여편네. 귀신이 나온다는 밤 12시에 물속으로 쫙 가라앉았다. 책을 들은 두 손만 빼꼼히 내어 놓고 말이다. 무게에 눌린 물들이 한바탕 소동을 벌리다 멈추었다. 난 . 무릎을 세워서 읽다가 , 발가락을 통위에 얹었다가 물이 조금 식었다싶으면 다시 뜨거운 물을 틀고........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글들. 그 내용이 지겨웠으면 졸았을 수도 있고 느긋하게 즐기지는 못했을 것인데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기에 책을 읽는 동안 뜨거운 물은 내 피로는 다 풀어 주었다. 아니 물이 피로를 풀어 주었다기 보다는 글이 나에게 활기를 불어주었는지도 모른다. 머리에는 수건을 턱하니 얹어 놓고 이마에는 땀이 줄줄하고 숨이 턱턱 막히면서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면서 이것만 더 이것만 더 하다가 보니 어느새 맨 뒤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사치는 새벽까지 계속 되었다. 생각하면 우스운 꼴이라니....... 뻘건 고무다라이에 거푼 목욕이라고 흉내낸 그 모습이......
책을 읽는 도중 간혹 새벽에 길을 나서는 트럭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참으로 신선하게 들렸다. 예전에 "백귀야행"을 들고 물속에 앉은 적이 있었는데 그 두려움과 소름 끼침과는 비교되는 편안한 책 읽기였다. 남편의 출장으로 인하여 푹 늦잠을 잘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물속에서 책과 함께 날을 꼬박 세운 기쁜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밤을 꼬박세운 기념으로 책 속의 주인공처럼 이대로 옷만 걸치고 나도 차를 몰고 그냥 떠나고 싶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집을 탈출했지만 나는 탈출이라기 보다는 그냥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나에게 방랑벽이 있는가 보다. 혼자일 때는 겁이 많아서 떠나지 못했고 지금은 가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가슴으론 늘 떠남을 꿈꾸니까 말이다.
이 책은 공교롭게도 부정수능시험으로 인하여 나라 전체가 떠들썩 할 즈음에 인연이 되어서인지 자꾸만 주인공과 지금의 아이들이 비교가 되었다. 주인공이